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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상대 신부
오직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떨어지는 낙엽의 계절과 더불어 교회의 전례력도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 주일과 다음 주일인 그리스도의 왕 대축일을 지내고 나면, 교회의 전례력은 올해에 이별을 고하고 대림절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것이다.
이렇게 한 해의 마지막에 다다른 교회의 전례력에 발맞추어 평일 미사와 주일 미사에서 선포되는 독서와 복음 말씀은 종말론적이고 묵시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난 것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epiphany)과 폭로(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와 사자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 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을 잃고(BC 721년 북왕조 멸망,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333년부터 헬레니즘의 지배,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개벽과 역전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카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가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참다운 그리스도이신 인자의 재림으로 오히려 완성될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임재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온갖 미움과 거짓, 박해와 환란, 고문과 죽음 속에서도 믿음과 용기를 잃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이렇게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는 사람은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신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오직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자신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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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마티아 신부
부활을 믿는 사람
임종을 앞두고 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녹음한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들들은 어머니가 주신 테이프를 들었다. 그 테이프 안에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그분은 오랫동안 직접 복음서를 읽어서 녹음했다. 그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남겨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남은 자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녀들은 떠듬거리며 성경 말씀을 읽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왜 그 테이프를 유산으로 남겨 주셨는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오늘 복음(루카 21,5-19)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신다. 세상 종말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론은 한 마디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11월은 위령성월로 죽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보내는 은총의 시기이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우리보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함과 동시에 죽음을 자주 묵상하도록 권고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삶의 가치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빛나고 분명해지는 이치이다.
세상 종말과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를 고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인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셨다. 또한 유다인의 기대처럼 예수님은 결코 세속적인 왕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고 죄인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겸손의 왕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열광했던 유다인들이 실망해서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셨다. 주님의 부활은 정의가 불의를, 생명이 죽음을, 선이 악을 결국 이긴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다.
이처럼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이 바로 부활 신앙이다. 부활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주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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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섭 신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동시에 1968년부터 한국교회에서 지내온 평신도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주일은 바로 여러분들의 주일이며, 동시에 여러분들의 축제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에서는 유일하게 사제에게 유보되고 사제들의 의무이기도 한 주일 강론을 오늘만은 평신도에게 양도할 수 있다고 허락을 주어서 많은 본당에서 본당 회장님이나 일반 평신도가 강론도 할 수 있는 주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평신도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생각해 보야야 하겠습니다.
1988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세계주교대의원 회의를 마친 후 평신도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도적 권고를 하였습니다.
그 문헌에 의하면 평신도들은 마태오 복음 20장에 나오고 있는 “포도원의 일꾼들”과 같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마태 20,1-2).
그러나 교회에서는 평신도를 단순히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포도원의 일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표상은 구약성서에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도 “나는 너 포도나무를 순종으로 골라 심었다”(2,21)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참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이 포도나무의 비유를 다시 취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요한복음사가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구약의 표상을 넘어서 더 깊은 신비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포도나무는 하느님 백성만의 상징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요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는 그 가지인 것입니다. 그분은 참 포도나무이며 가지는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평신도란 과연 어떤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31항에 보면 “평신도는 신품과 교회에서 인정된 수도 신분에 속하는 이들 이외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성세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하느님 백성 중에 들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여,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하는 신도들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교황 비오 12세께서도 1946년에 새 추기경들에게 하신 인사말에서 “신자들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평신도들은 교회 생활의 일선에 서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인간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리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특별히 교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로 교회라는 더욱 분명한 의식을 지녀야 한다.
교회란 모든 사람의 으뜸인 교황의 지도 아래 그리고 교황과 일치하는 주교들의 지도 아래 있는 지상의 신자 공동체이다. 이들이 바로 교회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라는 성서적 표상에 따르면, 평신도들은 교회의 다른 모든 구성원들과 더불어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가지들이며,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또 열매를 맺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한편 오늘 성서의 말씀은 세상 마지막 날 곧 종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마지막 날에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은 돌 하나 남아 있지 아니한 채 무너져 내릴 것이며, 이런 일에 앞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한 일들로 일대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 예고하고 있습니다.
1947년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핵전쟁에 의한 인류의 멸망을 경고하기 위해 만든 ‘지구 종말의 시계(Doomsday Clock)’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시계는 세상 최후의 심판 날에 그 시간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당시에는 자정 7분 전이었고, 지금까지 모두 17번 조정되었습니다.
2007년에도 시계는 다시 등장했는데, 1월 17일자로 핵과학자협회는 23시 53분에서 23시 55분으로 2분 앞당겼습니다. ‘지구 멸망 5분 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협회는 시간조정 이유에 북한과 이란 등 일부 국가의 핵개발 움직임과 함께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와 환경재앙을 추가했습니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우주만물이 시간과 더불어 창조됐고, 마침내 시간과 함께 종말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인간은 우주의 시작이 137억 년 전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아냈지만 우주 종말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주 종말의 시각 역시 분명하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 종말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종말의 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 말라키서에서는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3,19)
고 되어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이들의 멸망을 뜻합니다.
이에 반해 하느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진실하게 산 이들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3,20)는 말씀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최후의 날과 관련하여, 그 날이 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는 이들이 나타나고 전쟁과 반란의 소문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민족과 민족끼리의 분규와 싸움이 일어날 것이고 무서운 지진과 전염병, 기근이 돌고 하늘에 이상한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가 감옥에 갇히고 주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느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증언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언변과 지혜로써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깨우쳐주고 계십니다. 이 같은 박해와 시련 때문에 생명까지도 잃게 될 것이지만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참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21,18)이라는 주님의 약속은 모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시는 절대자이신 하느님 말씀입니다.
세상 안에서 현세 질서의 개선을 위해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수행해야 하는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면서 이 말씀은 더욱 호소력 있게 들립니다.
세상의 모든 제도와 체제, 삶의 방식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경쟁만을 부추기는 극도의 자본주의, 상업주의, 금권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 말씀에 따른 이타주의, 자율적 봉사, 헌신적 사랑으로 바뀌어야 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제2독서 중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3,10)는 말씀은 주어진 여건 안에서 자기가 할 바를 다하고 자기 몫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근면과 성실 안에서 서로 봉사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구원을 얻어야 하며 또 이웃들과 함께 그 나라를 차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라고 꾸짖는 이 말씀은 또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파도가 심한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에 한 나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심한 비바람에 겁이 나서 영영 날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바람이 그치는 날 날겠다고 생각했으나 바람이 그칠 리 없는 섬에서 그는 매일 같이 기어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어 다닌 지도 몇 달, 그의 날개는 영영 쓸 수가 없는 폐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날아다니는 나비가 땅에 기어 다니는 곤충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잘 활용하여 항상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항상 성실히 수행하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에, 아니 바로 우리들의 종말인 죽음을 맞이하여 우리들에게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들이 작은 사욕은 물론, 오만, 독선, 이기심, 명예심을 버리고 서로서로 기쁨과 보람을 주고받는 마음, 흐뭇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서로 봉사하는 사랑의 삶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들이 세례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제직, 왕직, 예언직의 평신도 사도직의 의무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이 세상에서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의 나라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쁘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깨어있는 삶을 살 때만이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평신도 사도직의 날개가 폐물이 되지 않도록 매일 매일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며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내를 주님께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대전교구 민병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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