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안에 있는 나 -
☆ 2014년 가해 5월24일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수원] 세상을 거스르는 사람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사도 16,1-10
† 복음 : 요한 15,18-21
★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헤어져 실라스와 함께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난다.
리스트라에서 티모테오를 만난 바오로는 그를 선교 여행의 동반자로
받아들인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에 관한 환시를 본 뒤 그곳에서 선교할
방도를 찾는다(제1독서).
★ 예수님을 미워한 세상은 이제 제자들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옛사람들도 오늘의 우리처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든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며 거기에 '행복'이라는 말을 붙인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현대인들은 행복에 대한 권리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시대보다도 분명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의 상실감이 더욱 큽니다.
행복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행복에 대한 관심과 바람이 크므로
행복을 누리는 방법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길에
대한 책이 서점에 넘쳐 나고, 행복의 비법을 말하는 달변가들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토크 쇼나 강연장을 뜨겁게 달굽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
생기는 허탈함과 공허함도 감출 수 없습니다. 누리면 누릴수록,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행복이 멀어져 가는 행복의 역설이라는 함정에 빠져든 것을
발견합니다. 행복을 자기 자신의 안녕과 성취로 여길 때, 고통 대신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삶으로만 여길 때 이러한 역설은 필연적입니다. 인간은
자연적 한계를 지닌 존재이고 또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행복의 이러한 역설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 역시
역설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역설은 우리를 참행복으로
이끄는 역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에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쁨을 앗아 갈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용기를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감수하게
되는 고통,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포기해야 하는 세상의 즐거움은
우리가 참행복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합니다.
'죽으면 살리라!'라는 신앙의 역설을 몸소 살아가고 체험하는 신앙인들은
세상에 대해 진심으로 해 줄 말이 있습니다. 행복에 목말라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갈증을
달래려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불편과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은 우리 시대에 참행복의
길을 보여 줄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지금은 사랑할 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24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요한15,18-21)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요한 15,18-21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 맞는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크게 이루었다고 해도 선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6,4지방 선거를 앞두고 각기 자기홍보를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기관에는 많은 후보자들이 봉사를 하겠다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생색내기에 급급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스컴에 얼굴을 알리기
위한 쇼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평상시에 그렇게 하지 못한 탓입니다.
사심 없이 꾸준히 봉사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염려합니다. 세상은 약삭빠르게 움직이지만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은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으로
처신하고 하늘사람은 하늘의 방법으로 감당하고 기뻐합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선생과 학생만 있고,
스승과 제자는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줄을 세우며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자기 입맛에 따라 좋고 싫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너만 고고하냐? 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이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
갚아주시길 다짐하며……사랑에 사랑을 더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머뭇거려서는 안됩니다.
2014년 가해 5월24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요한 15,18-21
제가 고등학생 때, 친구의 영어문법책을 보고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제가 보던 영어문법책과 똑같은 책이었는데, 이 친구는 이 책의
단락 마칠 때마다 날짜를 적어 둔 것입니다. 즉, 날짜를 적어두고 여기에
맞춰서 공부를 하는 것이지요. 아무런 계획 없이 공부했던 저와는 다르게
날짜대로 책을 공부하는 그 친구의 계획성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리고 이렇게 공부를 해야 정말로 능률도 쑥쑥 오를 것만 같았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저도 책을 단락마다 나누어 날짜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이대로만 하면 1등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등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획대로 하지
못했거든요. 충분히 가능할 것만 같았는데, 하루치의 양을 너무 많이
잡았는지 저의 예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의 양이
밀려서 결국 날짜를 지울 수밖에 없었지요.
계획이 아무리 좋으면 무엇 할까요?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이어트에 관한 책을 아무리 산다고 한들 스스로 음식조절을
하는 등의 노력이 없다면 절대로 체중을 줄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외국어
책을 아무리 많이 샀다고 해서 외국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지요. 자신이
직접 공부하지 않으면 책만을 통해서는 어학이 향상되지 않는 것입니다.
행동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이밖에도 많은 예를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고 어떻게든 행동해야 합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실패하지는 않겠지만 성공률은 0%에 머물겠지요. 결국
실패한 삶보다 더 못한 삶은 행동하지 않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합니다. 안전하다고 해서 배가 항구에만 정착되어
있으면 어떨까요? 배의 존재 이유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누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편하고 쉬운 생활만 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의 속한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대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주님의 뜻인 사랑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만을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항구에만
정착하는 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이라는 거센 파도와
폭풍우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주님께서 진심으로 원하는 튼튼한 배가
되어야 나의 존재이유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가 편하고 쉽다고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명령하신 사랑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임해서
진심으로 주님께 속한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사랑한다는 내용은 같아도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하나도 같지 않다. 백
명의 사람은 백 가지 방식으로 사랑한다. 그러니까 특별하지 않은 사랑은
하나도 없다(이승우).
초콜릿 한 조각(‘좋은생각’ 중에서)
구호 단체 월드 비전의 캐나다 회장 데이브 토이센은 30년 넘게 분쟁 지역과
재난 현장을 누비며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도왔다.
그가 내전으로 폐허가 된 코소보 지역에서 구호 활동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난민들의 수용소로 쓰이는 체육관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열한 살이던
소년은 군인들에게 폭행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소년은 은박지로 포장된 무언가를 손에 쥐었는데, 어느 자원봉사자가 준
초콜릿이었다. 토이센 회장이 무심코 그 초콜릿을 쳐다보자, 소년은 선뜻
포장을 뜯더니 한 조각을 떼어 그에게 내밀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가진 것이라곤 초콜릿 하나가 전부인 소년의 행동에 큰 감동을 받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아무것도 받지 않을 만큼
부자인 사람도 없다.”
나눌 것이 없다는 말, 이 말처럼 큰 거짓말이 어디에 있을까요? 나의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오늘을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삼용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세상을 거스르는 사람들
2014년 가해 5월24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복음 : 요한 15,18-21
< 세상을 거스르는 사람들 >
‘데모 저지에 임하는 경찰의 방침’
1, 절대 희생자가 발생 않도록(경찰의 희생자 있더라도); 일반 시민 피해
없도록
2, 주동자 외는 연행치 말 것(교내서 연행금지)
3, 경찰봉 사용 유의(반말, 욕설엄금)
4, 주동자 연행 시 지휘보고(식사 등 유의)
광주 항쟁 시 전남 도경국장 안병하 국장 지휘서신 내용이라고 합니다.
요즘과 비교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약자를 위한 지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세를 따르지 않았던 이런 지시를 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신군부에 협조하여 상당수 인사들이 5-6공을 거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고 그들은 지금도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혼자의 힘으로 나라의 힘을 거스르는 결단을 한
안병하 국장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감동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광주민주화운동의 대치선을 ‘경찰-계엄군’ 대 ‘광주시민’에서,
‘계엄군’ 대 ‘경찰-광주시민’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경찰간부들이
광주시민의 편을 든다고 계엄군에게 심하게 구타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반면 당시 광주시민들은 경찰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항쟁기간 동안
철저하게 보초까지 섰다고 합니다. 80년 5월 24일 경찰지휘본부를 설치했던
안 국장이 임무수행을 위해 직접 도경에 들어가 보니 경찰국장실의 명패,
모자, 정복, 서류 등은 물론 관사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안 국장은 당시 육사 8기생으로 김종필 민자당대표위원, 윤흥정 5,18
호남지역 계엄사령관 등과 육사 동기였습니다. 전남도경국장은 탄탄한
그의 인생에 한 번 거쳐 가는 평범한 근무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80년
5월 19일 계엄사가 경찰병력을 무장하도록 지시했지만 안 전 국장은
“광주시민이 모인 곳을 향해 총을 쏠 수 없다. 경찰이 무장하는 경우 시위가
악화될 우려가 있으며 4·19때를 보아도 경찰을 무장시킬 수 없다. 무장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며 항명하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돼서는 안 된다. 내 한 몸 희생해서 무고한
광주시민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나아가 경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겠다.”
결국 안 국장은 신군부의 강경 진압 명령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5월 26일
직위해제 당했고 보안사 동빙고 분실로 끌려가 10여일의 온갖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고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 10일 광주의 한을
품은 채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출처; ‘위민정신의 표상’ 고 안병하 경무관을 추모하며, 오마이 뉴스,
2007,10,12 외]
“지시를 거부하겠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이들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지시는 무엇일까요? 경쟁하여 이겨야 하고, 좋은 대학과
직장에 취직해야 하며, 넓은 아파트에 살고 높은 권력을 위해 노력하는 등
정신없이 사는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뒤돌아볼 시간을
가지라는 것은 곧 세상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당신을 미워하였듯이 당신의 제자들 또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박해했던 그 세상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거스르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만히
있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은 그 반대입니다. 움직이고 새로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힘을 따르다보면 이렇듯 세상에게
박해를 당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다면 한번쯤은 자신을 뒤돌아 볼 일입니다.
세상의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칼을 주러 오셨습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반드시
저항세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저항에서 오는 고통을 받기 싫어서 그냥
주저앉아서 그 물살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서 물살을
거슬러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숨이 남아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열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정만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열정을 보시고 올바로 잡아주셨습니다.
물이 흐르는 곳의 끝은 항상 되돌아 올 수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기다린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폭포를 지나면 바다로 나아가 미아가 되어버려 더 이상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없음도 생각합시다. 이 세상이 종국에 가게 될 곳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시다.
삼용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기타] 우리는 빛의 자녀여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악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그래서 힘들어 한다면,
당신은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선의 편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 가해 5월24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요한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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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마음은 반드시 악한 마음으로부터 미움과 공격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왜 그럴까?”에 골몰하지 마십시오.
선과 악이 정반대 길을 걷는 것은 당연합니다.
악이 선을 따라 간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겠지요.
선이 악을 따라 간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겠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선을 지향하고 선의 길을 따르고자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과 악을 식별하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은 우리를 교묘히 속입니다. 눈으로, 귀로, 가슴으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악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악입니다.
역사는 어떤 잔인했던 악도 선을 이겨낼 수 없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역사라는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악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미래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고, 식별에 의한 실천으로 이어갈 수 있느냐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항상 몰두해야 할 싸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세상을 바라보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가슴을 흔들어
식별에 혼돈을 주는 악이 더욱 교활하게 기승을 부리는 듯 합니다.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흐려진 판단은 악에 협조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복 속에서 무디어집니다.
결국 잔인한 폭력적 범죄가 별 의식 없이 진행되고 맙니다.
인류가 발전하면, 악마의 속임수도 수가 높아집니다. 우리가 별 의식 없이
행하는 것들과, 심지어는 선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조차 악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식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젠가 무엇이 복음적이고, 무엇이
비복음적인가에 대해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분명 악의 세력은 악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말은 악이 아무리
교묘하게 흉내를 잘 낸다 해도, 진정한 선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악은 결정적으로 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화려하고 근사하고
안락한 환경과 온갖 쾌락을 통해 우리를 유혹한다고 해도,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을 선사하지는 못합니다. 반면, 우리의 처해진 상황이 힘에 겹고
고통과 슬픔을 부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옳은 것이라면 선은
아름다움을 반드시 만들어냅니다.
옳음 때문에 받는 아픔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보이고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아름다움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손길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여야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부활 제5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5월24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요한 15,18-21
교구 성직자 주소록이 나왔습니다. 24번째 받아보는 주소록입니다. 교구의
사제는 830명입니다. 저는 순서가 280번입니다. 제 위로 279명의 신부님이
계시고, 저의 후배 신부님들이 550명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은퇴하셔서
원로사목자가 되셨고, 어떤 분은 유학을 가셨고, 어떤 분은 휴양 중에
계시고, 어떤 분은 안식년 중에 계시고, 어떤 분은 연수를 하시고, 어떤
분은 교포사목을 하시고, 어떤 분은 학교 법인에 계시고, 어떤 분은 청소년
법인에 계시고, 어떤 분은 교구청에 계시고, 어떤 분은 본당 사목을
하십니다. 하시는 직무는 많이 다르지만 모든 신부님들이 공통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미사 봉헌과 강론’입니다. 사제는 죽기까지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제의 소중한
사명이면서 때로는 큰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한 자매가 이런 문자를 보냈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이 그리워요. 신부님들의
강론은 대게는 졸음이 옵니다.’ 19년 전에 제가 있던 본당의 청년
성가대원이 보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 친구는 아직도 저의
강론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하면서 책임감을
더 느끼고 있습니다. 어제 만난 자매님도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한 1년 정도 강론을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가르치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진실한 삶이 드러나는 강론,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강론, 성서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는 강론, 죽비처럼 나태해진
정신을 깨우치는 강론, 위로와 희망 그리고 용기와 힘을 주는 강론,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전해지는 그런 강론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23년 동안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을 하였습니다. 교구에서는
선배보다는 후배가 훨씬 많은 위치가 되었습니다. 과연 저의 강론이
교우들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강론이었는지, 그만큼 치열하게 준비를
했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들 보다는 하느님께서 주는
것들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세상 사람들은 박해할지도 모른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바로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 것이 돈을 버는 것보다, 명예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자유로운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5월24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사도16,1-10 요한15,18-21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요한 15,18-21
자유로운 삶
세상에 살 되 세상에 속하지 않을 때, 늘 주님 사랑 안에 머물 때 허무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 자유로운 삶입니다.
이런 자유로운 삶, 역시 값싼 자유가 아니라 부단한 노력에 따른 은총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세상 안에서 자유롭게 살고자 애쓰는 이들의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어제 저를 방문했던 어느 신심 깊은 부부와의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23년 걸렸습니다. 작년 쯤, 아들이 결혼하고부터 서서히 밝아졌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무려 23년 만에 어둠의 터널을 통과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제가
형제자매들을 만나면 우선 묻는 것 역시 어둠의 터널에 대한 물음입니다.
수도생활이나 가정부부생활이나 원리는 같습니다.
"저희 부부는 주님의 전우자 학우요 형제였습니다.
오직 둘뿐 이었습니다. 아이들도 우리와 달랐습니다.“
'혼자뿐'이 아니라 '둘뿐'이라는 고백이 얼마나 일치의 삶을 살았는지,
그 어둠의 터널을 통과한 비결도 여기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부부가 일치되어 한 마음으로 살면 어떤 어려움도 다 통과합니다.
수도원 초창기부터 25년 동안 알고 지내온 분인데 예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치열했던 삶에, 자유로워진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이게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예나 이제나 제자들의 삶은 이러했습니다.
주님과 공동운명체인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어둠의 터널의 고난 중에 우리 삶의 주인이자 스승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이런 부단한 자기 비움을 통해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어 비로소 자유로운 삶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뿐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 믿는 이들의 신원이 있습니다. 주님과 세상의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속할 때 '참 나'를 잃을 것이요 주님께 속할 때 '참 나'를 찾을
것입니다. 세상이 아닌 내 삶의 중심이신 주님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자유로운 '참 나'의 삶입니다. 이 또한 부단한 자기와의 싸움, 끊임없는
기도에 깨어있는 삶을 전제로 합니다. 이런 자유인의 모델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입니다. 성령의 바람따라 살아가는 주님의 자유로운 종,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가 아시아에서 유럽 선교로 방향을 돌린 것도 순전히 성령에 따른
것임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주님의 사람인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어디에 있든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주님께 속한 성령의 사람, 대 자유인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매일미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세상이 아닌 주님께 속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알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시편100,3).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우리를 위해서라면
2014년 가해 5월24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요한 15,18-21
우리를 위해서라면
한 몇 년 저희 어머니의 병세가 꽤나 심각했습니다. 여기저기 시름시름
아팠습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통증은 하늘을 찌르는데, 검사
결과는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해봤지만 호전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갔습니다. 큰 일
났다, 저러다 돌아가시겠다,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보다 못한 동생이 나섰습니다. 한 아담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의 병원으로
옮겨 입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병원 옮기자마자 정말이지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의 병세가 급격히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드셨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어버이날 부모님께 점심식사 한끼 사드리면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어머니께 물었더니 당신 체험을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자상하고 따뜻한 새 의사 양반 만나는 순간, 벌써부터 병이 낫기
시작했다고...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고개 끄덕여주시고, 뭐 대단한 말씀, 특별한 말씀도 없이 과묵한
분인데도, 뵙는 것 자체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셨다고... 얼마나
고마운 의사 선생님이신지, 백번이라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올봄 저희 수도회 세계 총회 참석차 두 달 가까이 로마 본부에 머물러있을
때였습니다. 주말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강도 높은
회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총회에 참석한 250여명의 신부님 수사님들이 받는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피로에 유행성 독감에 다들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새로운 총장 신부님이 선출되었고, 총장님과 함께 저희
모두는 바티칸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알현하러 갔습니다. 저희 모두는
바티칸 내 큰 대기실에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교황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 성큼 성큼
걸어서 저희 앞에 서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순간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꽤나 부담스럽고 무거웠던 총회로 인해 지치고 힘든 기색이었던 모든
신부님 수사님들의 얼굴이 교황님을 뵙는 순간 순식간에 환한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교황님의 따뜻하고 인자한 얼굴을 뵙는 순간 그간의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존재 자체로 치료제이자 치유제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이란 존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위에
소개해드린 따뜻한 의사 선생님, 한없이 자상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합해놓으면 딱 성모님일 것입니다.
성모님은 존재 자체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위로요 도움, 희망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호칭 자체도 ‘도움이신’ 성모님이십니다.
가나에서의 첫 번째 기적 사건은 성모님께서 왜 ‘도움이신’ 성모님이신가를
명백히 잘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순간, 결정적인
공생활 시작의 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조용히 침묵 가운데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을 총 정리할 순간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여인이시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는 무리함을 무릅쓰고 아들 예수님께
졸라댑니다. 잔치의 전부 다 라고 할 수 있는 포도주가 떨어져 난감해하고
있는 혼주들의 딱한 처지를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맛있는 홍어무침은 산더미처럼 준비되어 있는데,
시원한 막걸리가 떨어졌다면 얼마나 잔치가 밋밋하겠습니까? 더구나 유다
관습 안에서 혼례식을 일주일 내내 계속되는데, 혼주 입장에서는 대단한
결례를 넘어 무례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성모님이셨기에 무리한 요구인지 알면서도
예수님께 거듭 청을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딱한 처지,
난감한 상황을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선익과
구원을 위해서라면 체면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시는 분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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