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66)
겨울 까치밥 /정유광
한 생을 내주고 또 한 생이 살아가는
꼭지가 검어지도록 새 발톱 닮은 시간
그것은 내 삶의 허물 서릿발의 몸서리다
무릎을 꿇기보다 날을 세운 목숨들이
내 생을 할퀴고 간 슬픈 날이 더 많았을
어쩌다 상처로 남아 하늘 끝 핏빛이다
덧 깨진 남은 생도 내어주며 살고 싶다
된바람 에둘러서 스쳐 가는 그 길목에
지상의 맨 아래에다 내려두는 깨달음을
겨울이었다 /윤예영
증명사진을 찍어야 했다. 겨울이었다. 불만은 늘 적당했다.
그저 생의 언저리에서 찰랑대는 작은 소요. 질겅질겅 씹다 뱉은 단물 빠진 껌.
그러나 사실은 유리 조각. 혓바닥에선 온통 유리 조각이 돋아나고,
증명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서류를 내야 하는데, 겨울이었다.
아무렇게나 화를 내고, 아무렇게나 웃어 버리고, 아무렇게나 손을 잡아 버렸고,
그때마다 세상의 등뒤에서 나는 깜빡거렸다.
깜깜하다.
그의 등이 보인다.
사람들의 등이 보인다.
환하다.
그의 등이 열린다.
나뭇가지 사이 하늘이 얇게 펄럭거리고,
깜깜하다.
사람들의 등은 빨리도 지나간다.
가만히 서서 휘파람을 불어 볼까.
환하다.
함부로 내 중심을 거쳐 가는 수많은 등,
깜깜하다.
내내 깜깜하고만 싶었다.
누군가 나를 훅 불어 주길 바랐다.
겨울이었다. 눈은 오지 않았다. 증명사진을 찍어야 했다.
딱딱한 껍질이었다. 때로는 종이처럼 얇아진 나의 생을 그의 등에 기대고 싶었다.
증명사진을 찍어야 했다.
겨울에 오는 행복 /신성호
추운 겨울이 오기전에
두툼한 오리털 잠바를 준비하고
얼굴까지 쓸수있는 털모자와
따뜻한 털실로 짠 털장갑과
포근한 내복을 장만해 두고
처마밑엔 장작을 수북히 쌓아놓고
방구석엔 고구마 둥지를 만들고
조그만한 화로를 준비하리라
찬바람이 들어오는 문틈에는
두톰한 문풍지도 잘 붙이고
북풍이 치닿는 뒷문은 비닐도 치고
장독의 항아리엔 홍시감을 준비하고
땅을 파고 김치항아리며
동치미항아리도 잘 묻어두어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이 오면
부엌 아궁이에 검불을 지펴주면
세상에 어디엔들 이 행복이 있으리
동지섣달 긴긴 시절이라도
처자식과 오손도손 살아감이
기쁨이요 행복이리라
겨울 단상斷想 /이범철
엄습
올겨울 추위가 ‘절정’에 있다는데
절정은 어떤 것일까 싶어
얼음 위에 발바닥을 살짝 놓았다
아, 발끝으로 차오르는 이것은,
뜨거운 눈물처럼 부드러운데 ,
지난밤의 얼음 위로, 다른 물이 천천히 천천히 올라오다가
빙수가 되고 얼음이 되어 하나가 되어가는 저것들
언젠가 당신이란 사람이 내 가슴에 차오를 때
정신없던 나의 마음도 그랬다
절정
갈대꽃이 바람을 타는 줄 알았지만
마른 갈대가 추위에 온몸을 떨고 있으리라 했지만
여울가 갈대꽃 수풀이 흔들렸던 건
풀섶 빽빽이 숨은 참새 떼가 튀어 오르며
무엇인가 느꼈던 것이었네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겨울의 찬 여울을 몸서리치게 한 것,
참새에게는 그 순간이 모두 이승의 절정이었다는 것인가
생각, 생각
늦가을 심어놓은 마늘밭
촉만 조금씩 내밀고 있다가
겨울이 들자 생각에 생각만 거듭한다
몸도 마음도 썩히지 못하고
무슨 궁리만 슬프도록 하는 줄 알았지만
결국 맹추위처럼 알싸해질 마늘,
한 번은 겨울을 견뎌봐야
그 맛 싸하게 몸에 박히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겨울은 지금 마늘 농사 중이었던가
검은 겨울 /이경임
너는 먼지들과 신발들과 책들,
참새와 아이들과 금붕어들, 그리고
웅덩이 같은 것들과 함께 늙어간다.
때로 잡동사니 추억들이 벌이는 연극에
초대받는, 그런 특별한 저녁이 오면,
한없이 낡고 우울한 내 머리 속 화원에서
너는 며칠 후면 시들어버릴
검은 장미송이들을 고른다.
흘러가 버린 시간들 속에 각인된 악몽 때문에,
그럴 때면 너는,
가까스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시간이 네 몸 속에 파놓은 구덩이들을
들여다본다, 마치 몸만 사람으로 환생한 지렁이가
전생의 기억들 속에서 어둠을 파고들 듯이,
너는 구덩이들 속으로 빨려들 듯하다.
다시는 환한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겠다는 듯, 너는
아늑한 구덩이들 속으로 뛰어내릴 듯하다.
산비탈 음지에 돋아난 화려한 독버섯들처럼
너를 유혹하는 구덩이들,
그 텅 빈 구멍들 속으로 씨앗을 뿌리듯
너는 내 몸 속을 떠돌아 다니는
속삭임들을 흩뿌린다.
오 네 삶의 함정인 구덩이들.
네 마음은 움푹 패인 하루의 묘지들 속을
고독한 독사처럼 기어다닌다
겨울 단상 /김진학
가을 날
미련 없이 보낸 잎들의 아픔보다
혼자 서있는 겨울의 날들이 더 아픈 나무
남아 있는 이들에게
아픔 남기지 않고 떠날
그 이별의 날들을 위해
아름답게 불어오던
따뜻한 봄날의 바람
밤이 와도 별을 헤던 일
소리 없이 내리던
보슬비 오는 거리의 풍경
한 개의 우산으로 나란히 길을 걷던 일들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묻어두는
상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일
그래서
비워진 가슴엔
또 사랑 담아 내는 일
아파야 할
가슴 만들어 내는 일
겨울 /전병철
-아쉬움-
괜시리 허전해지는 것은 왜일까
텅 빈 공허함이 더해만 오는 게
뭔가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모래로 성을 만들고
조그마한 돌멩이로
탑을 쌓듯
높아만 간다.
겨울 기도 2 /마종기
1
이 겨울에도 채워주소서.
며칠째 눈 오는 소리로 마음을 채워
손 내밀면 멀리 있는 약속도 느끼게 하시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소리도 듣게 하소서.
떠난 자들도 당신의 무릎에 기대어
포근하게 긴 잠을 자게 하소서.
왜 깨어 있지 않았느냐고 꾸짖지 마시고
당신에게 교만한 자도 살피소서.
어리석게 실속만 차리는 꿈속에서도
당신의 아픔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겨울의 하느님은 참 편안하구나.
2
내가 눈물을 닦으면
당신은 웃고 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슬픔 속의 노래다.
노래 속의 기쁨이다.
벌판에서 혼자 떨던 나무도
저 멀리 다음해까지
옷 벗어던지고 혼절해버렸구나.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겨울 산책 /주응규
머리맡의 얼어버린 자리끼같이
천지간이 정적에 잠겼다가
쩡쩡 갈라지는 겨울 속을 걷는다
뭇발길에 비켜선 먼 산자락
절벽에 뿌리내린 노송은
잔솔가지에 백화(白花)를
난만히 피운 채
의연한 기백이 푸르르다
고드름같이 하얗게 날이 선
창백한 햇살을 흠빨며
근근이 목숨 줄을 부지하는
무수한 생명이 실살스레
봄을 피우기에 분주하다
자연의 맥박이 쉼 없이 고동쳐
분홍 꿈을 시나브로 투영하는
삶은 한겨울 날의 산책 같다.
겨울지나서 /권영하
- 사춘기 나기 -
생존하기 위한 땅에 태어나
생활하기 위한 땅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 슬퍼했던 우리.
좀 더 성숙하기 위한 고독으로
어제를 고치며 흔들렸고
내일을 깨우기 위해
이유있게 방황했던 우리들
뿌리 위에 잘못 자란 생각 탓으로
나뭇가지가 잘릴 때마다
눈물 위에 떨어진 눈물을 훔치며
우리는 새롭게 고뇌하는 법을 배웠다
어른의 모습으로 가는 길목에서
구석구석 일어나는 아픔도 많았고
터지는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조심스럽게 살얼음 위에 번지는 불안만큼
다가올 땅에 마음 설레며
미숙했던 걸음마로 비틀대기도 했지만
우리는 아파하며 성장해야 했다
겨울 이야기 /박만식
오줌 꿈 부푼 새벽
뒤척뒤척 첫눈이 내렸다
토방마루에 서서
또도또 또르도 또도도도
마당으로 보내던 한 줄기
김나는 무전無電
그러나
톰방 톰방
또도 또 또 또
모스부호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유년의 잠
겨울 소나무 /나태주
십 리 길 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갔다오던 식전의 언덕길에서
몇 그루의 소나무를 만났다.
항상 무심히 지나쳐 보던 그들이지만
배고픈 내가 보아 그런지
그들은 모두 배고파 허기진 사람들 모양이었다.
내가 도회가 싫은 시골 촌놈이라 그런지
그들도 먼 불빛의 도회에서
밀려온 사람들 같았다.
아니면
흉년 든 어느 해 겨울
굶고 얼어 죽은 사람들의 원귀들일까?
부황난 사람들의 머리칼일까?
소나무들은 눈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
천년도 더 묵은 울음을 울며
어쩌면 한 마디 구성진 콧노래라도
골라내어 부르는 성 싶었다.
아침 바람에 내가 허리 시려 그런지
그들도 몹시 허리가 시리운 듯
구부정히 모로 버티어 서 있었다.
겨울에 부르는 사랑노래 /김진학
겨울이 오는 저 만큼에는
그 옛날
산골에서 피어나던
아침 안개처럼
사랑은
사람들 곁에서
낮게낮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겨울이 온다해도
안개에 묻히듯
사람들은 사랑에 묻히고 있습니다.
모진 겨울의 추위에도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사랑은
따사로운 양지의
햇살처럼 봄의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그 옛날
산골에서 피어나던
저녁 연기처럼
행복하고 평화롭게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사람들 가슴에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가슴 따뜻한 사람들
가슴에서
영원히...
눈 안오는 겨울은 가고 /진향 윤춘순
무채색이 숨쉬는 겨울
눈꽃이라도 피우기에
그나마
웃으며 살맛 나게 했는데
나풀 거리며 쌓이는 순백이
빈 가지마다
하얗게 눈이 쌓이기를
그리움으로 눈자위가 짓물렀건만
언감생심
소금 한 꼬집 살짝 뿌리다 만
자세히 보아야 눈인가 싶은 그런 눈이
바람에 스쳐간 게 전부인 밍밍한 겨울
보석처럼 반짝이는 추억속엔
다닥다닥 붙은 버섯 같은 작은동네
조무래기 깔깔대는 하얀 눈밭을
원 없이 거닐다 오면 좋으련만
겨울가는 길목
봄 눈이나 펑펑 내린다면
원 없이 나대고 싶다네
한없이 거닐다 오고 싶다네
정월 스무날
때아닌 이른 봄날
어딘가에서 매화향기 스치우니
봄은 가까이 있나 보네.
겨울 산행 /임영조
눈 오다 그친 일요일
횐 방석 깔고 좌선하는 산
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으니
몸소 찾아갈 수밖에 딴 도리 없다
가까이 오를수록, 산은
그곳에 없다, 다만
소요하는 은자(隱者)의 처소로 남아
오랜 침묵으로 품(品)을 세울 뿐
어깨는 좁고 엉덩이만 큰 보살
도량이 워낙 넓고 깊으니
나무들은 제멋대로 뿌리를 박고
별의별 짐승까지 다 받아주는
이승의 마지막 대자대비여 !
뽀드득
뽀드득 잔설을 밟고
숨가쁘게 비탈길을 오르면
귀가 맑게 트이는 법열(法悅)이여 !
잡목들이 받쳐든 푸른 하늘에
간간 수묵(水墨)을 치는 구름
눈짐 진 노송(老松)이 문득
잘 마른 화두(話頭) 하나 던지듯
옜다! 솔방울을 떨군다
덤불 속 멧새들이 화들짝 놀라
재잘재잘 산경(山徑)을 읽는 소리
은유인지 풍자인지 아니면 해학인지
들어도 모를 난해시 같다
(좌우간 정상에 있을 때 몸조심하고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욱 조심하도록)
귀뺨을 때리는 눈보라여 !
단지 헝클어진 마음이나 벗으러
겨울산을 오르는 나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스트인가?
그것이 알고 싶어 산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