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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 가 : 이치고 이치에(rlaqhtjd-119@hanmail.net)
* 창작실 : 주목 ※ 시즌 8
* 제 목 : Basic Instinct[원초적 본능]
* 편 수 : 총 4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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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갈등,탈피, 잔혹.
그리고,
원초적 본능
21편
"저,회장님?"
"아, 뭐! 왜!"
"일단 상황이 상황인 만큼 먼저 사과를 ……"
귀에대고 넌지시 속삭이는 형우의 말에, 승화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몸을 돌려 남직원 쪽으로 다가섰다.
"어이, 뭐……미안하게 됐수."
그 딴엔 직접적으로 '미안하다'는 말까지 거론했으니 최대한 예의를 갖춘 거라 당연한 듯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위의 세 사람은 전혀 느끼는 바가 없었다. 결국 보다못한 정연은 직접 해결을 봐야겠다 싶어 남직원이 아닌, 승화 앞으로 다가가 그와 마주 섰다.
"넌 또 왜."
"살면서……누구한테 머리 숙여본 적 없죠?"
"그딴 걸 뭐하러 일일이 다 챙겨."
"전에 말한 적 있죠. 서로 소통만 가능하면 그 사람 눈만 보고도 어느 정도는 생각을 읽을 수가 있다고."
"글쎄, 언제 그런 말. 한 적이 있던가?"
"처음 그쪽 봤을땐……정말 깜깜하다 싶을 만큼 아무것도 읽히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신기하기도 했고……또 그만큼 맘을 꽉 닫고 있어……참 외로운 사람이겠구나 싶어서 안쓰러웠어요."
"결론이 뭐야, 또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건데."
"근데 지금은. 읽혀요."
또 시답지 않은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겠거니 생각하며 건성건성 귀로 흘러 듣다가, 다음 이어진 정연의 말에. 순간 집중하듯 정연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있지만……그쪽, 아직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다는거."
"……."
"그러니까, 그쪽 진심……내가 제대로 전해주고 싶어요."
'무슨 소리' 냐는듯 승화는 미심쩍은듯한 표정을 지었고, 정연은 곧 몸을 돌려 여전히 승화의 멱살잡이에 대한 공포감에 반패닉 상태로 있는 남 직원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 해보였다.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
파앗!
그제야 정연이 무엇을 하려는지 감을 잡은 승화는 급한 마음에 일단 정연의 후드 티 모자를 잡아 고개를 들어 세웠다. 그리고는 성큼-하니 그녀 앞으로 다가가 말없이 90도 각도로 꾸벅-몸을 숙이고는…….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라고, 난생처음 서툴고 어수룩하지만, 제대로 된 사과를 해보였다.
그제서야 남직원 역시 잔뜩 경계를 띈체 빳빳해진 몸을 풀고는 그 앞으로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며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악수를 청했다. 비록 사과는 했을지라도, 고개를 숙였다는 자존심에 대한 앙금으로 승화는 씨익. 미소 띤 체, 잡아 쥔 직원의 손을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꽉! 쥐었다.
"하하,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는거 같습니다. 전 그럼 이만."
마무리는 유쾌한 웃음과 함께 남직원은 대문을 나섰고, 그 소리는 꽤 들어줄 법하다는 듯, 인사하는 정연 옆에서 승화는 웃을 듯 말 듯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어?,근데 정말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어떻게 오긴, 차 타고 오지."
"풋, 그쪽도 그런 농담 할 줄 알아요?"
"누가 농담이래."
"쿡, 알았어요. 추우니까 일단 얼른 들어가요."
이 녀석 미소를 볼 때마다, 내 머릿속에 저장해둔 지식들이 줄줄 새어 나가는듯한 기분이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자리에……. 이 녀석에 대한 것들이 하나,둘씩 쌓여가는것만 같다. 설령, 내가 알고 있는 그 수많은 지식들이 사라져 없어진다고 해도. 지금 맘 같아서는…….
"뭐해요, 얼른 와요."
지금 맘 같아서는……. 저 미소 하나만 남아있어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검토하던 시은의 눈이 안경 밖 딸아이 앞으로 고정됐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엄만, 오랜만에 딸이 회사에 찾아왔으면 일은 좀 제쳐놓고라도, 제대로 말 정도는 들어줘야 한다고 보지 않아?"
"그러니까 묻잖아. 방금 뭐라 그런 거냐고."
"희한하네? 난 엄마가 좀 더 기뻐하는 반응을 보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정말……정말! 승화랑 약혼하겠다는게……."
"응, 그러려고."
"어머,어머. 성은아~~~"
재차 확인을 받자 그제서야 표정이 환해지며 시은은 자리에서 일어서 한달음에 달려가 성은을 꽈악 안고는 그녀가 예상했던 반응을 보였다.
모과차가 담긴 찻잔을 양쪽에 내려놓고는 목례와 함께 여비서가 나간 후, 시은은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자 딸아이에게 재촉하듯 눈치를 보냈다.
"쿡, 뭐가 궁금한 건데요."
"너 정말, 어쩜 엄마 모르게 감쪽같이. 대체 언제부터니?"
"언제부터?"
"어머 얘 좀 봐라. 그걸 몰라서 물어? 당연히 승화랑 네 사이 말이야. 그렇게 처음부터 잘 좀 해보라고, 등 떠밀 때는 들은 체도 않고……그 별볼일없는 고아출신 녀석한테 목이나 메서,엄마 속을 썩이더니."
"그러지 말랬잖아요.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한유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하면 나 정말 기분 상하니까."
"어이쿠, 알았다. 알았어. 대번에 표정 변하는 것 좀 봐. 뭐 어쨌든...이젠 너도 맘 잡았다고 하니, 아니 얘가. 승화 얘기 좀 해보라니까."
여승화, 네 영향력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야. 한유, 그 아이 이름만 내뱉어도 정색하며 화부터 내는 우리 엄마가……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는 걸 보면 말이지.
어쩜 지금 내 선택이, 여러모로 올바른 선택이 될지도 모르겠어. 행여 한유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고 할지라도, 우리 엄마. 우리 두 사람 절대 허락은 고사하고 용납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마 지금. 나 혼자 떠안은 그 아픔, 그 상처보다 훨씬 더……아프고, 슬프고, 절망적인 것들이 그 아이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졌을테니.
"그렇게 좋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안 그래도 요새 승화 나이도 그렇고, 괜찮은 집안에서 미리 손써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물밑작업이 한창이라고 하던데. 호호, 그야말로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지 뭐니. 호호호."
-
척!
"뭐야, 너흰."
아침 전이라는 승화의 말을 들은 정연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겠다며 주방으로 향했고. 승화는 놀이방 한구석 용케도 유아용 의자에 앉아 퉁-한 얼굴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레고 블록 쌓기 놀이해요."
"변신 로봇 만들어 주세요."
"인형놀이 해주세요."
"의사 선생님 놀이해요."
밤톨 같은 꼬맹이들이 어디선가 하나,둘 씩 쏙쏙! 튀어 나와서 대뜸 승화 앞으로 다가가 장난감을 내밀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려댔다. 순식간에 둘러싼 아이들 틈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고, 사람 목숨을 한낮 파리처럼 여기던 거만한 황태자는, 경직된 자세로 얼굴을 뒤로 물리며 바로 경계를 해보였다.
"야, 너! 내 옷에서 손 못떼!!"
"큭큭, 이 아저씨 되게 웃기다. 막막 소리치니까 코가 벌름거려."
"누가 코를 벌름거렸다는 거야!"
"저봐 저봐, 또 코가 벌름거려. 코뿔소 아저씨야. 코뿔소."
"아즈찌. 아! 해봐요."
밤이면 벌떼처럼 몰려드는 중국 북경 야시장도 아니고, 바글바글 거리며 점점 자기를 위협해오는 꼬맹이들의 엄청난 포스. 거기다 아직은 경고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결코 순순히 그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어느새 무릎까지 타고 올라와서는, 조그마한 손으로 억지로 입을 벌리고는 안으로 청진기를 넣으려 했다.
"야,인마. 누가 입에다 청진기를……아아아!"
십분 후.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방금까지는 일심동체가 된 듯 자신을 죽기 살기로 괴롭히며, 못살게 굴던 악동들. 정연이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우르르- 와! 소리를 내며 달려가서는, 얌전히도 차례대로 줄을 서 접시를 받아가며 얌전히도 먹는다.
"어?"
"저것들은 아이의 탈을 쓴 악마야."
"표정이 왜 그래요. 꼭 뭐에 홀린 것처럼."
"입에 청진기를 넣더군."
"네?"
"어? 아……아니야, 아무것도."
그렇다고 어떻게, 아이들한테 휘둘려 진이 다 빠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명색이 완벽하다 자부하는 어른이.
"참치 샌드위치예요. 애들이라서, 햄보다는 참치가 더 영향 가 가 있는 거 같아서. 괜찮아요?"
"뭐, 별로……."
먹기좋게 나뉜 샌드위치 한 조각을 들어 승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
"어……때요?"
"큼, 뭐. 먹고 죽지 않을 정도는 되는거 같군."
"그거, 맛있다는 거죠?"
"맛있……에이씨, 어째서 내가 그런 말에 일일이 대꾸를 해야 하는 거야!"
"네네, 알았어요. 배고플 테니까 얼른 먹기나 해요."
-
아이들이 잠든 틈을 타, 안에서 빠져나와 평상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었다.
오늘 여러모로 황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일들을 많이 겪은 승화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먼저 고개 숙여 사과를 해본 적도 없고, 청진기를 입에 넣는 비상식적인 수모를 당했음에도, 어이는 없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뽀로로인지 뭔지 하는 펭귄이 나온 만화를 보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일일이 하나하나 다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주는 대로, 외워보지를 않나. 심지어는 한명 한명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이불을 살피며, 확인점검까지 맡지를 않나.
"힘들었죠?"
"뭐가."
"아이들 보는 거."
바로 '당연하지!'라고 나올 줄 알았던 답이 우습게도 목에서 걸리고 만다. 솔직히 힘든 건 모르겠더라. 워낙 정신없게 쫓아다니고, 잡아다 앉히고, 또 도망가면 또 뛰어가서 잡고…….
"알려지진 않았지만 형이 하나 있었어."
"네?"
"반만 피가 섞인, 우리 아빠가 밖에서 낳아온 이복형."
"……."
"그새끼 태생이 약골이라, 만날 침대에만 틀여박혀서는……. 근데 난 그 새끼 아픈 건 안중에도 없고, 그 약한 녀석한테 쏠리는 우리 엄마 관심에만 약이 올라서, 미치겠더군."
"……."
"어느 날, 그 새끼가 사경을 헤매면서, 결국 안 하던 산소호흡기까지 달게 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는데……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걸 내 손으로 떼어 버렸어."
"……."
"숨이 그렇게 빨리 멈추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지……. 그냥, 그냥 홧김에 딱 열까지만 세어야겠다. 난 날마다 너 때문에 신경질나 죽겠으니까. 어디 너도. 딱 열까지만 참아보라고."
"……."
"소리내 다섯이나 셌을까? 갑자기 이 새끼가 몸을 파닥거리면서 발작을 일으키더군. 그리곤 아니나 다를까. 그대로 숨을……."
차마 더는 말을 잇지 못해 승화는 목 울음을 삼키듯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누굴 잃는다는 슬픔, 특히나 그 사람이 자기에겐 없어선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의 슬픔이 제 슬픔 같아, 정연은 또르르-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승화의 손을 잡아 보였다.
"엄마,아버지는 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하더군. 어차피 그냥 놔뒀다고 해도 오늘 하루를 넘기기 힘들었을거라며……네탓이 아니라고. 오히려 너 때문에 형은 조금 더 일찍 편해지지 않았을까 싶다며……."
"그래서 그랬구나. 자기로 인해……누군가가 다칠까 봐. 그 사람에게 준 상처만큼, 백배 천배 되돌려받을 그 상처를 감당할 수 없어서."
"형이 그렇게 죽고, 한결같이 꾸는 꿈속엔……항상 나만 혼자 남겨 있어. 불러도 불러도, 아무도 오질 않는……그 깜깜한 어둠 속에."
"거창하게 뭔가를 해줄 능력은 되지 못해요, 난."
쓰윽, 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정연을 향해 틀며, 그녀의 까맣고, 동그랗고, 티없이 맑은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냥……지금 그대로 충분해."
정연 역시 고개를 돌려 촉촉이 젖은 승화의 눈가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읽혀요 이젠, 그쪽 마음이……."
"좋아해."
"……."
"좋아한다, 널."
"좋아해요."
젖은 눈가에서 떨어지는 그의 눈물에서, 정연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 깨끗하고 숭고한 진심을 보았다. 부드럽게 다가와 자신의 입술에 닿는 그의 입술을 통해, 그녀는 그를 조금 더 깊이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툭……
투둑……
데구르르르…….
22편
"어?"
"왜."
"아니,방금 문밖에서 소리가."
"소리?"
"네, 잠깐만요."
"있어, 내가 가볼 테니까."
일어서려던 정연의 팔을 잡아 세우며, 승화가 앞서 대문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장이나, 웬만큼 세게 닫지 않으면 잘 닫히지 않는 대문. 빈틈이 벌어진 문을 열고 살피자.
"뭐야, 이건."
봉지가 터져 흘린 것도 몰랐는지, 여기저기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귤들을 볼 수 있었다.
-
평생 멈추지 않을 작정으로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아니. 절대 일어나면 안 됐을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선, 마치 나사 하나가 풀린 것처럼 눈앞에 하얗게 변질하더니 그때부터 죽을 것처럼 무작정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그 모든 게 사실인 것처럼 여겨질까 봐. 이미 사실임에도, 결코 믿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동네를 빠져나와, 하마터면 차에 치일뻔한 큰길 도로 정 중앙에 섰을 때야. 비로소 뛰던 걸음을 멈춘 체 눈앞으로 쏟아지는 헤드라잇 불빛을 응시할 수 있었다.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선 고래고래 쌍 욕지기를 날리는 운전자를 잠시 멍-한 눈길로 바라보다 한유는 그제야 꾸벅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선 몸을 돌려 횡단보도로 향했다.
자신을 향해 힐긋-거리는 사람들의 눈길. 그러나 지금 그런걸 의식할만한 여유가 한유에겐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한단 말인가. 마냥 드는 의문은, 어째서. 왜. 묻고, 또 묻는 질문들……
-
"외로워 보이시는군요."
"쿡,그래 보여요?"
"Margarita...의 의미를 알고 계신가요?"
"네, 저번에 마스터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한 유래 때문에, 대게 사람들은 Margarita를 흘려보내는 추억의 잔으로 삼고는 한답니다."
"그렇군요."
묘한 미소와 함께 고블릿을 닦아 뒤쪽 진열장에 올려놓곤 바텐더는 조용히 사라졌다. 사라질듯한 연둣빛 액체를 띤 마가리타를 슬며시 내려다본다.
"언젠간 너도……이 마가리타처럼……내게 추억으로 남을 날이 오게 될까?"
이 고요한 잔 속에서, 미동 없이 잠잠하게……살아도 죽은 것처럼. 그렇게.
아무런 향도, 특유의 맛도 느껴지지 않는 술을 한 모금 넘기며, 곧 사라질 듯 잔에 담긴 연둣빛 마가리타처럼, 슬픈 눈의 미소를 짓는다.
-
"무슨 여자애 손이 이렇게 차."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손이 차면, 그만큼 마음이 두 배 더 따뜻하다는 말."
"그래서 지금 네 마음이 따뜻하다?"
"쿡, 뭐 약간?"
엄지와 검지로 양을 표시하며 웃는 정연의 모습에, 승화는 겉으론 어이없어하듯 헛웃음을 띄었지만, 물론 속으로는 당연 백번,천번 옳음 직하다 싶다. 추운 거라면 질색하는 그가, 지금까지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신경 쓸 겨를조차 없어한다는 게 바로 명백한 그 증거 중 하나이니 말이다.
"춥죠?"
"별로."
"코가 빨간데."
"내 코는 원래 빨게."
"풋, 추우면 그냥 춥다고 해도 되는데……."
"안 춥다니까!"
추워도 참아낼 수밖에. 행여 방에 들어갔다가, 그 악마 같은 무지막지한 녀석들이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분명 지금처럼 정연과의 단둘이서 갖는 오붓함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을 게 분명하므로.
"그럼 이거라도 같이 덮어요."
무릎담요를 나란히 승화의 무릎까지 끌어 덮으며 정연은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녀의 행동에, 언제 발끈했느냐는 듯 승화는 입술을 피죽이며 간질거리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
무향의 마가리타와 함께 잊고자 했던 맹세를 어디로 가버렸는지, 술에 취해 기절한 듯 테이블 위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한유의 모습에, 성은은 또다시 무너지듯 약해져 버리고 만다.
"한유야. 나한유."
어깨를 흔들며 깨워보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차로 돌아가 대리 운전기사를 데려와 그를 간신히 뒷좌석에 싣고는,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로 향했다. 데스크에서 키를 받아, 한유를 업은 기사와 동행해 객실로 올라갔다.
"수고했어요."
"그럼 차는……."
"전 그냥 택시 타고 갈 테니까, 차는 아까 말한 그 주소지로 옮겨두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네."
곧 대리기사가 객실을 나가고, 미동 없이 잠들어 있는 한유 곁으로 다가간 성은은 조심스레 그의 점퍼와, 신발을 벗겨 내고선 옆쪽에 걸터앉았다.
"나도 나지만, 너도 참 융통성 없네. 어떻게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번호가 정연이랑, 나뿐이니. 이제 나도……너 멀리하려고 할 텐데……그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근데……근데 나마저 널 멀리하면 그땐……."
이 사람이 더욱더 가엾어 질 거라는 생각에, 핑-하니 눈물이 돈다.
"하아……정연아……한정연."
괴로운 듯 신음하며 한유가 정연을 애달프게 찾기 시작했다. 흐르던 눈물이 멈추며 성은이 놀라 그를 응시했다. 곧 애달픈 그 음성은 눈으로 번져, 눈물이 주르륵-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울고 있다.
그저 동생을 찾고 있을 뿐인데,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것뿐인데……이상하게 그의 입은, 눈은……그저 동생이 아닌.
"정연아……한정연……"
"한유야……너……너 설마……."
확률은 제로. 아니 불가능할 수밖에. 그럼에도, 성은은 마음에 또 다른 불안함이 번지기 시작한다.
불가능이란, 때때론 가능하게끔 하는데 그 영향력이 있으므로.
-
오작교 위의 견우,직녀처럼 대문을 사이에 둔체 승화와,정연은 각자 아쉬움을 느끼며 선뜻 발을 떼지 못한다.
"아무 데나 상관없다잖아."
"그래도 푹 자려면 집이 낫잖아요."
"너 혹시 내가 뭐 어떻게 할까 봐, 그래서 일부러 먼저 이렇게 선수치는 건 아니고?"
"하라고 해도, 안 할 거 아는데 뭐."
"쳇, 이건 뭐 반응을 보여야 놀려먹는 재미라도 있지. 정말이지 시시하군."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승화는 그제서야 잡고 있던 대문을 놔 보이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차 어디에 뒀어요?"
"저쪽."
"그럼 어서 가봐요. 아참, 이거. 아까 따로 챙겨둔 건데 운전기사 아저씨 좀 갖다주세요."
은박지로 포장된 내용물을 슬쩍 내려다보며, '샌드위치'인 모양이다는 생각에 이번엔 군말 없이 받아들었다.
"뭐 그럼, 갈게."
"네."
"그 꼬맹이들 들어와서 또 잠도 못자게 귀찮게 할수도 있으니까, 문 꼭 걸어잠그고 자도록 해."
"네, 그럴게요."
에, 또……. 무슨말을 해 시간을 끄나 싶어, 생각을 해보지만, 추위에 머리가 얼어붙었는지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추우니까 얼른 가요."
"아……가기 싫은……"
"네?"
"아, 아니야. 가,지금."
얼버무리듯 소심하게 중얼거려보지만, 별수 없다는 듯 크게 맘을 먹고선 또 망설일까 봐 일단 걷고부터 본다.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사람처럼,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멀어져가는 승화의 뒷모습을 보며, 정연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좋은사람이예요……당신."
-
눈 딱 감고 소주잔을 연거푸 넘긴 것까진 생생했다. 헌데 그다음부터는 일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일부러 잘라낸 것처럼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경솔했어. 난 단지 그냥 네가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에 그만……."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일단 옷부터 입자."
자책하듯 울상짓는 성은의 모습에, 한유는 되려 멋쩍은 기색을 띠며 옷을 입고자 덮고 있던 이불 시트를 걷어내다 아차!싶었다. 성은과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연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벗은 자신의 몸이 눈에 그래도 노출되었다. 아차! 싶어하며 다시 이불을 끌어당기고는 난감함을 표했고, 성은 역시 선뜻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
23편
어색함에서인지, 객실을 나서면서부터 성은의 말수는 부쩍 적어졌다. 덩달아 한유역시 딱히 건넬 말이 없어 묵묵형으로 뒤따라 입구를 빠져나왔다.
"그럼……"
제대로 한유와 눈도 맞추지 못하고 성은은 도로에 시선을 두며 속삭이듯 말을 늘였다.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대하려고 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한유역시 고개를 슬쩍 돌리며 '어……'하며 작게 대답을 끌었다. 그런 그의 대답에 그럴줄 알았다는 듯 성은은 약간의 쓴웃음을 지으며 택시를 잡고자 팔을 뻗었다.
"아,잠깐."
그녀가 보낸 신호를 확인한 택시가 유턴을 해 멀리서 다가오고 있을 때였다. 한유의 말에 팔 동작을 멈칫!하며 성은은 그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응?"
"출출한데, 아침 먹고 가지 않을래?"
술 때문에 필름이 끊겨 아무것도 기억엔 없지만, 분명한 건 성은이 자신과 밤을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 좋다,싫다 말할 처지는 못된다 해도. 일단 최우선은 자기 자신이 아닌, 성은일거라 생각됐다.
"네가 사는 거야?"
"응, 내가 살게."
"그래 그럼."
-
마치 오랫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숙면을 취한 승화는 눈을 뜨자마자 이유 모를 상쾌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평소처럼 깜깜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있던 꿈. 처음 시작 패턴은 같았지만.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삐걱-하며 문이 열리고 눈부신 빛 속에서 손을 내민 사람은. 다름 아닌 죽은 형 진화였다.
결박되어 있던 저주의 주문이 풀린 것처럼 몸 역시 새털처럼 가벼워진 듯 허리를 살짝 튕기니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습관처럼 승화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탄탄한 나체로 침대에서 내려서 벽면에 걸린 배스가운을 걸치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내 것인 듯 몸에 착 감기는 진회색 슈트와, 그와 한 벌인 코트를 그 위에 걸치며 차에선 내려서자, 양옆으로 길게 늘어 대기 되어 있는 부서별 간부들이 짜맞춘 듯 일제히 고개 숙여 반듯이 인사를 건넸다. 물론 그중에는 좀 늦거나, 자세가 비뚤어진 사람도 있었지만. 웬일인지 못 본 척하며 조용히 스쳐 곧장 문이 열린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별일이라며 그가 지나가자 직원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형우역시 이번엔 큰소리 좀 내겠지 싶어 슬쩍 승화를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도실장."
"앗! 지금 당장 저 사람들……"
"요즘에도 애들 길들이는 데는 장난감이 특효약 이려나?"
"예?"
당연히 지금 당장 잡소리 하는 것들 모조리 잘라! 라고 불호령을 낼 줄로만 알았던 형우는, 그 상태로 고드름처럼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
자재가 제때 도착하지 않은 것부터 살짝 어긋나 건설회사 측과의 마찰로 인부들이 일에서 손을 놓아버렸고, 어려운 경기탓에 낮아진 임금 때문에 다른 업체 측 인부들 역시 선뜻 나서질 않아 어쩔 수 없이 공사는 잠정 중단되어 버렸다. 성은이 나서 중재를 하며 합의점을 찾으려 애는 쓰고 있는 상태지만, 양측 다 입장이 완고해 쉽게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무슨 걱정이야. 부잣집 딸내미가."
"네 일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좀 마. 이번엔 진짜 제대로 좀 해보려고 그일 말고는 다른 일은 전부 cancel까지 시켜뒀단 말이야."
"오히려 잘된 거 아니야? 요 며칠 전에 볼일 마치고 시간 좀 남아서 고모 찾아뵈었더니, 내가 그 말 듣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어휴, 우리 엄마. 혼자 또 멀찍이 앞서 나가셨겠구먼."
"쿡, 사실이긴 한 거야? '한성'그룹 도련님. 아니 이미 벌써 회장자리에 앉으셨던가?"
"글쎄……."
"글쎄라니?"
사람마음 이라는 게 참 변덕스럽다고 해야 하나? 진짜 억지로라도 맘먹고 하면 되지 않겠어?라는 생각에 그냥 밀어붙이기식으로 하면 된다 싶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내가 변해가는 거 같아서 겁이 나려 해. 눈에 보이는 분명한 진실마저 점점 왜곡해 비틀어대면서, 점점 난……
"넌 곧 날짜 잡는다며."
"응? 아, 응. 그렇게 됐어."
-
"야, 너 좀 가만히 못 있지."
"하지만 목 뒤에 붙은 것 때문에 간지럽단 말이야."
"간지럽단 말이에요! 라고 하랬지. 너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아저씨!라고 깍듯이 붙여 말해."
"치,깐깐하기는."
"깐깐하기는 무슨."
삐죽 입을 내밀며 새침하게 투덜대는 아이를 못마땅하게 내려보며 승화는 마저 원피스 단추를 채운 후 툭-하니 등을 밀어 반대편으로 보냈다.
"자, 다음."
"다음은 저예요."
"어?"
분명 뒤에 몇 명 더 남아있던 거 같은데 싶어하던 승화는 정연의 목소리에 의외라는 듯 그녀에게 시선을 건넸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자주 오시던 후원자분들도 발길이 뜸해지셔서……여러모로 여건이 여의치 않았었는데……"
"원래 인간이라는 게 그런 거야. 이유 없는 친절이란 결코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말인데, 나 염치없이 이 선물들 다 받으려구요."
"거절했으면, 나 여기서 한발자국도 안 움직일 작정이었어."
"쿡, 근데 아직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니에요? 다섯 시밖에 안됐는데."
"권력이 됐든, 특권이 됐든 난 내 손에 들어온 건 무조건 아낌없이 쓰자는 주의라서 말이지. 거기다 우리 영감님께서 기반을 하도 착실히 다져둔 덕분에, 내가 좀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아 그리고 이건 니꺼."
잘했건, 못했건 뭐든지 자기 우월주의로 살아오던 승화는, 난생처음 백화점에 가 선물을 고르면서 어떻게 줘야 자연스러울까?라는 생각에 수없이 고민을 거듭했었다. 무조건 최고급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승화의 취향에 맞게, 직원 측에서는 만일을 대비해 따로 보관함에 넣어둔 10캐럿 다이아몬드까지 선보였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주절주절 광물이 어쩌고, 천연이 어쩌고 지루하게 떠들어대는 직원의 설명이 짜증이 나서라도 그냥 대충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를 못했다. 정연이 맘에 들어는 할까? 너무 비싸다고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까? 손가락 사이즈도 모르는데 안 맞으면 쪽팔려서 어쩌지? 연거푸 사소한 고민으로 망설임을 거듭하며. 결국 승화가 고른 선물은.
"나비 핀이네요?"
"큼,어제보니까 바닥 닦을 때 머리가 자꾸 흘려내리더라고."
"너무 예뻐요. 무지개 큐빅."
"별로 아니라니, 그럼 됐어. 뭐."
"고마워요."
쪽!
"읏……"
고맙다는 답례로 까치발을 들어 정연은 승화의 볼에 뽀뽀하고는 수줍은지 쪼르르-아이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멍-한 표정을 짓고는 승화는 그녀의 입술이 닿은 볼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녀에게 선물한 알록달록 예쁜 나비 핀을 쫓아, 자신의 맘속에도 어느새 곳곳 색색의 꽃들이 활짝 펴 가득 차는 듯하다.
기쁨. 자기로 인해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또 다른 감동.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듯하다.
-
퇴근길도 모자라, 이젠 아침 출근 전에도 승화는 은혜원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고, 그쯤 정연은 방학이 끝나가 기숙사로 들어갈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개강 시기에 맞춰 현복뒤를 이은 후임 원장이 정해져 오늘쯤 올 거라는 말을 접해 들어 그녀의 맘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아이들과 한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연속으로 져 무동을 태우다가 진이 빠진 채로 서둘러 출근길에 오른 뿔난 승화를 배웅하고 들어와 정연은 청소 빨래를 차례대로 끝냈다.
"난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가 젤루 좋다 뭐."
"안돼 성희야. 새로 오시는 할아버지 앞에서 그런 말 하면."
"그치만, 우리 할아버지는 성희 과자도 많이 사주구……"
월월!! 월월!!
성희라는 여자아이의 긴 머리를 빗어 묶어주며 타이르듯 주의 시키는 정연의 귀로 멍군이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앗. 오셨나보네."
"피이, 난 싫은데……"
"쓰읍, 그럼 안된다고 했어요."
"피이……"
다시한번 아이를 주의시키며 정연은 서둘러 문을 열고 나왔다. 이미 짐까지 챙겨 가져온 듯 현복보다는 연배가 한참 아래인듯 보이는 아저씨가 닫힌 문 바로 앞쪽에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응, 그래요. 반가워요~"
"아……네에."
평범하게 생긴 인상과는 다르게 느끼한 투로 말을 높이며 얍실맞게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정연은 살짝 의외다 싶었지만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 주었다.
-
일주일만이었다. 두 사람이 호텔 객실에서 아침을 맞이한 그날 이후로.
"연락이 뜸했지."
"으응……."
"미안, 포장마차 오픈 준비 때문에 정신이 좀 없었어."
"그랬구나……."
"우선 차부터 시키자."
"응."
둘러대는 말은 아닌 듯, 면도할 시간도 아낀 듯 한유의 모습은 까칠해 있었다. 함께 밀크티로 주문을 넣고서, 성은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빤히 한유를 응시했다. 전 같으면 무안해하며 그녀의 신경을 돌릴 법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하지 않았다.
"신기하네, 내가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어."
"응?"
"그러지 않는 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한유야……."
"성은아."
"……어……?"
"난 너한테 비하면 정말 한없이 부족한 놈인데...빈말이라도 남들처럼 거창하게 허풍떨어 널 행복하게 해줄 만한 염치도 없는 그런 입장인데……그런 나라도 괜찮을까?"
"하아……한유야."
"그런 나라도 괜찮다면, 지금처럼 나 널 내 곁에 계속 두고 싶은데."
24편
"오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응? 응, 그럼."
"치, 그럼 방금 내가 뭐라고 했는지 그대로 다시 말해봐 봐."
"어? 어 그게……새로오신 원장님이……"
"원장님이?"
정연의 기세를 보니 그냥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듯하다. 또롱또롱한 눈망울로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잔뜩 벼른듯한 그녀의 모습에, 한유는 그나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내려 앉는듯했다.
"정연아."
"이봐 이봐, 또 이렇게 얼렁뚱땅 그냥 넘기려고."
그러나 어림없다는 듯 팔짱까지 끼며 정연은 야무진 표정을 굳혔다.
후배 차를 얻어타고 수원으로 향하는 내내,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말은 오직 딱 하나. 아니, 설사 그게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자기 앞에서만이라도 발뺌 해주기를.
"흐응, 오늘 오빠 좀 이상해 보여."
"어?"
"이봐, 계속 딴생각만 하느라 멍-해있고."
"내가 그랬어? 미안……아,참. 그래서 후임 원장님은 언제부터."
"피이, 정말 내가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들었던 모양이네."
"아……."
"짐은 벌써 다 옮겨놓으셨고, 서울에 따로 있는 가족들 만나고 온다면서 아까 낮에 올라가셨어."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해 조근조근 정연은 설명을 해보였다. 하지만 정작 묻고 싶은 말을 선뜻 꺼낼 수도, 답을 들을수도 없는 한유는 여전히 가슴이 꽉 눌린 듯 답답함을 떨칠 수가 없다.
-
툭툭,
누군가 자신의 다리를 건드리는 느낌에 승화는 반쯤 비몽사몽 인체 잠에서 깨 게슴츠레한 눈으로 상체를 들어 올렸다. 또렷하게 보이진 않지만 사람인 것만은 분명한 형상.
"흐하함, 뭐냐."
"조깅 안 할래?"
받아치는 목소리가 꽤 낮이 익는 게, 아!하며 그제서야 승화는 눈앞의 그 형상이 성은이란 걸 알아차렸다.
샤워실에 들어가 이제 겨우 몇번 물 묻힌 얼굴로 엉겁결에 끌려나와, 승화는 성은이 건네는 트레이닝복을 정신없이 갈아입고는 또 엉겁결에 끌려 현관을 나섰다. 한동안 용인,서울을 왕복으로 오가며 육체적으로 쌓인 피로 때문에, 마침 주말이라 오늘 하루는 실컷 자려는 요령으로 핸드폰 배터리까지 분리시켜 뒀더니만.
"뭐해, 안 뛰어 오고."
"에이씨, 지금 가고 있잖아!"
저 멀찍이 앞서 뛰어가며 뒤돌아 그를 채근하는 성은의 목소리가 승화는 영 귀찮기만 하다.
"저게 아침부터 뭐 못 먹을 걸 먹었나."
또다시 뒤돌아 빠르게도 앞서 달려나가는 쌩쌩한 성은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한소리 하며 승화는 또다시 어기적거리듯 성의없는 걸음을 떼 보였다.
-
향이 좋은 머쉬룸 수프를 한 수저 떠 입에 넣어 넘기며 성은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에 비해 승화는 부족한 잠을 채우지 못한 탓인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애꿎은 슈크림 빵만 포크로 찍으며 보기 좋게 뭉개놓고 있었다.
"애도 아닌데, 꼭 그렇게 먹는 걸로 장난쳐야겠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짓까지 하고 있는 거더라?"
"차라리 내 탓을 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 애먼 데다 화풀이하지 말고."
"시끄럽고, 그래. 이유나 물어보자.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직 해도 안 떨어진 이 시간에 들이닥쳐서는 남 자는데 훼방까지 놓는 건데."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슈크림을 보자 입맛이 더 떨어지는지, 챙-하며 포크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승화가 대놓고 물었다. 수프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스푼으로 젓던 손길을 멈추며 성은은 새삼스레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말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눈치다.
"글쎄...굳이 이유라 하면, 절망의 끝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 그걸 혼자서는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게 맞군."
"쿡쿡, 넌 그런 느낌 받아본 적 없어? 어젠 꼭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싶을 만큼 모든 게 무기력하고, 절망적이었는데……하루지나 눈을 떠보니까. 꼭 그게 다가 아니라는걸 깨닫는 느낌."
"알게 뭐야."
"언젠가 너에게도 알게 될 날이 올 테지. 흠, 근데 이 수프 느끼하지도 않고 고소한 게 딱 내 입에 안성맞춤인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성은의 미소에서 승화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가식 없는 진솔함이 느껴졌다.
"이게 그렇게 맛있냐?"
덩달아 스푼까지 들어 수프를 한 수저 떠 입으로 가져갔다.
-
씻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겨우 잡아다 수돗가 앞에 붙들어 앉히며 정연은 한쪽에서 다 씻긴 아이들의 얼굴을 닦아주는 한유의 모습을 보며 흐뭇함이 번졌다.
"이봐, 이렇게 말끔히 씻고 보니까 왕자님이 따로 없잖아."
"그치만 씻으려면 물이 차가워서, 얼굴이 꼭 얼어붙을 거 같단 말이야."
"정연누나가 물 데워서 섞어 주는데 뭐가 얼어붙는다는 거야."
"그야 당연히 지금은 누나가 여기 있으니까 그런거구. 하지만 이제 곧 누나도 방학 끝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 버릴 텐데 뭐."
수건에 쓱쓱 코를 문지르며 사내아이는 투덜대듯 말을 남기고는 문안으로 쏙 뛰어들어가 버렸다. 물론 아이는 별 뜻 없이 그냥 내뱉은 말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정연과, 한유의 맘은 불편해질 수 밖에 없다.
여의치 않은 입장이더라도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 전부와 함께 살고 싶은 게 두사람의 희망이자, 꿈. 그리고 그들이 지켜내야 할 목표. 과연 그 꿈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이룰수 있게 될까.
"언니, 비누칠 안 해?"
"응? 아, 응. 해야지."
보석보다 빛나는 까맣고 투명한 유리알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 정연은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
어느덧 고약하다 싶을 정도로 기세등등한 추위가 한풀 꺾이고, 녹지 않으듯 수북이 쌓여가던 하얀 눈밭도 점점 사그러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봄은 멀리 있는듯했다.
모레가 개강인 터라, 적어도 내일까진 기숙사에 들어가 이것,저것 정리도 하고. 미뤄뒀던 수강신청도 해야 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똥강아지들과 잠시 떨어지는 건 늘 슬프고 마음 아프지만. 아직은 너무도 멀기만 한 먼 훗날 언젠가를 생각하며 맘을 다잡고선 아이들 이부자리를 분주히 살핀다.
"어? 민지는?"
"민지 아까 원장 할아버지가 불러서 갔는데."
"이 늦은 시간에?"
"응, 근데 왜 할아버지는 민지를 아프게 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할아버지가 민지를 아프게 하다니."
"할아버지 때문에 민지가 막 아프대. 꼬추가 아프다고 민지 막 울었어."
"우……울다니. 성희야 이리 와서 언니한테 좀 더 자세히 말해줄래?"
-
투다다닥!!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려 간 정연은 망설임 없이 드르륵 쾅!하며 닫힌 원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아앙, 아포요. 민지 아포요."
차라리 꿈이라고 해줬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듯한 여린 몸뚱어리를 육중한 몸으로 누르고선, 아이의 치마를 반쯤 걷어올린체 원장이란 작자는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당장 그 아이한테서 떨어져 주세요!"
악에 받친 듯 서슬 퍼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정연은 뛰어가 있는 힘껏 후임 원장의 몸을 밀쳐내며 그 밑에 깔린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으아앙, 언니."
정연의 품에 안기자마자 자지러질 듯 울어대는 아이. 아이의 울음에서 정연은 그동안의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이 죄를 어찌 다 갚아야 하나. 말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으면서 견뎌냈을 이 갈가리 찢긴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줘야 하나.
"흐흑, 언니가 미안해 민지야. 조금이라도 더 너한테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흐아아앙……"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의 움직임에서, 느끼고 있을 공포가 자신의 것처럼 전부 와 닿았다.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판단하에 정연은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뒤돌아 문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홱!
두피를 뜯을 듯 뒤에서 매섭게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채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휘청하며, 아이, 정연은 동시에 중심을 잃은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이거 왜 이러실까, 여기서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봤자 득 될 게 뭐가 있다고. 안 그래요 정연양?"
"이……이거 놔주세요!"
"흐흐흐, 아무리 그래도 저런 젖내 풀풀 내는 어린 계집보다는 적당히 영글어진 아가씨 쪽이 더 얻을 게 많긴 하겠지요."
음흉한 미소와 함께 원장은 그대로 힘주어 질질- 정연을 원장실 안쪽으로 끌어당겨 밀어 넣고는 쾅!하니 문을 닫아걸어 잠가버렸다.
25편
두 번이라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다는 심정으로, 정연은 힘조차 들어가지 않는 풀린 다리를 겨우 땅을 짚고 일으켜 세웠다.
뚜벅뚜벅, 걸어와 마룻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아무렇지 않게 쓱-휴지로 훔치는 파렴치한 원장의 모습에, 한기와 함께 전신엔 소름이 돋았다.
"명심해요, 만에 하나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날에는, 정연양 하나로 인해 여기 있는 모든 아이들은 마지막 삶의 터전을 잃게 될 거라는 사실을. 훗. 그만 나가봐도 좋아요."
거칠게 저항하며 반항한 정연때문에 원장 역시 진이 빠진 터라, 곧 털썩하니 소파에 주저앉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으로 힘없이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덤벼들듯 와락-하며 작은 아이가 그녀의 한쪽 다리에 매미처럼 달라 붙는다.
"괜찮아 민지야, 다……괜찮아질거야."
또다시 큰소리 내 엉엉 울어대는 아이. 그런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정연은 풀린 눈으로 뭔가에 홀린 듯 같은 말을 주절거릴 뿐이다.
-
'쿡쿡, 넌 그런 느낌 받아본 적 없어? 어젠 꼭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싶을 만큼 모든 게 무기력하고, 절망적이었는데……하루 지나 눈을 떠보니까. 꼭 그게 다가 아니라는걸 깨닫는 느낌.'
성은이 하는 말은 늘 언제나 외계어처럼 전혀 이해할 수도 없고, 설령 이해한다고 해도 납득 안가는 말들 투성이였다. 하지만 왠지 그 말은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도 했다. 늘 똑같이 봐오던 세상이, 하루 새에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이는 기분. 한정연이라는 아이를 만나, 그 아이의 세계를 알게 되고, 조금씩 그녀를 진심으로 대해 오면서…….
그녀가 돌아가고 다시 청하려던 잠은 쉽게 오질 않았다. 높디높은 천장을 가만히 응시하며 마음과,머리가 똑같이 느끼는 생각이라곤, 연결된 회로처럼 뭐든 정연과 연관성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지금 당장 자신 있게 ' 나 역시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라고 떠벌리고 다녀도 무방할 듯싶다. 굳이 욕심내 무언갈 억지로 뺏어 기를 쓰며 갖고자 하지 않아도 진심이라는놈은 어느샌가 쉽게 맘을 내어주었다. 떼를 쓰지도, 무력으로 제압하지 않고도. 너무 쉽게 그놈은 자신을 또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주었다.
에잇!하며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승화는 옆 선반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들었다.
-
민지를 씻겨 먼저 방으로 올려 보낸 후, 정연은 일부러 쓰지 않은 새 때 타올을 물에 적셔 자신의 여린 살을 힘주어 벅벅 문질렀다. 어느새 빨개져 쓰라림이 느껴지는 살갗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피가 날 정도로 문지르며, 또다시 주문을 걸듯 괜찮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차마 그녀가 흘리지 못하는 눈물처럼, 덜 마른 그녀의 머리카락의 끝 자락을 타고 눈물 같은 물방울이 뚝뚝-나무바닥을 적시며 자국을 남겼다.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오자. 마치 모든 게 정전된 것처럼 한치 앞이 보이질 않았다.
'원래 인간이라는 게 그런 거야. 이유 없는 친절이란 결코 없는 법이니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했던 승화의 그 무덤덤한 목소리가 새삼 귀에 맴돌았다. 비록 넉넉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늘 주위엔 언제라도 의지가 되는 든든한 묘목 같은 현복이 있었고, 그런 그를 본보기로 대가 없이 아낌없는 선행과, 정을 베풀며 제 자식처럼 은혜원 아이들을 살피던 자원봉사자들과, 후원인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현복의 장례절차가 마무리되자마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후원인들의 발걸음은 하나,둘 뜸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재단 측에 후원을 중단하는 통보를 걸어오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는 소식을 복지재단 쪽에서 알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정연은 분명 뭔가 여의치 않은 사정이 있을 거라, 먼저 그들 편에서 생각하며 서운함 없이 받아들였다.
"할아버지 어쩌지……?나 사람이 무서워요……."
미끄러지듯 주저앉는 정연의 귓가에 익숙한 진동음이 들려온다. 하지만 손을 뻗어도 쉽게 닿아지질 않는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까만 어둠 속에 핸드폰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
계열사 중 무역업으로 해외에 수출하는 영국의 자동차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한성'역시 작지만 타격을 입어 수습하는 동안 회사 내부가 잠시 술렁였었다. 그나마 소량의 물품으로 납품하던 업체인 터라, 비교적 순탄하게 정리가 되었지만. 몇 주가 지난 지금도 회사내에서는 그에 관한 소문들이 크고,작게 떠돌고 있었다.
"으하, 대체 이놈의 서류는 언제쯤 그만 올라오려는지."
"오늘은 그게 마지막 서류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역시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며, 형우는 급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다른 비서들과는 다르게 승화의 직무실 안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형우의 자리. 하지만 그는, 승화가 어렸을 때부터 늘 그의 주위에 한결같이 대기자세로 서 있던 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터라, 지금도 의자에 앉는 대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좀 앉지그래, 다리 안 아파?"
"아,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쪽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내 신경에 거슬려서 그래. 가서 좀 앉아."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하며 승화가 책상 쪽을 가리켰다. 이번에도 거절하며 또 언제 저 까칠한 녀석이 돌변할지 몰라 잠자코 형우는 시키는 대로 자리에 가 착석했다. 그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승화는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지겨운 서류에 눈을 두었다. 영어와, 한글이 적절이 섞인 빽빽한 종이를 그래도 제법 꼼꼼히 읽어 내린 후 적합하다 싶어 익숙하게 승인 사인을 했다.
-
"이게 뭐죠?"
"성은 아가씨……"
"누가 그걸 몰라서 묻고 있나요? 그러니까 왜 지금 얘가 대체 이런꼴로……"
기가 차 말이 안 나온다는 듯 시은은 손에 들고 있던 캠코더를 쾅!하니 데스크 위에 내려놓으며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아직 정지버튼이 누르지 않은 캠코더의 작은 화면 속에선, 이제 막 한유가 국자로 떠 가져다주는 어묵 국물을 덥석 맛있게도 받아먹는 성은의 해맑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
"이리 줘, 옷에 그러다 기름 냄새 다 배겠다."
"피이, 배면 좀 어때서. 나 어제 서툴다고 관장님한테 한소리 들은 거 몰라서 그래?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살림 하나는 빠삭하게 잡고 있어야 큰소리치기도 편하대잖아."
"그건 그냥 웃자고 하신 소리고. 너 어제도 기름 튀어서 손 데었잖아."
"이거? 에이, 이거 굽기 바빠서 아픈 것도 못 느꼈는데 뭐. 난 알아서 내가 잘 할 테니까 넌 얼른 가서 손님이나 받아. 꼼장어 양념은 다 된 거야?"
이번에도 말려봤자 소용이 없을듯해 한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은의 머리를 슬며시 한번 쓰다듬어주고는 옆쪽으로 이동했다.
콜록콜록, 불판 위 얼굴을 뒤덮는 연기를 손으로 날리며 아랑곳하지 않고 제법 익숙하게 성은은 집게로 꼬치를 뒤집었다.
"아저씨 여기 소주 일병이랑, 닭발 한 접시요."
"아, 네. 지금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이제 막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은 손님의 주문에 다시 한 번 기합을 넣은 한유는 우렁차게 대답하며 분주히 몸을 옮겼다. 그런 그를 힐긋거리며 성은은 작게 웃어다.
-
"그러니까 저 양반이 파는 붕어빵이 이 근방에서는 알아준다는 소리지?"
"네, 하루 만에 팔리는 붕어빵 양으로만 따져봐도, 평균 하루 매출이 백 단위는 넘는다는데요."
"체, 그래봤자 붕어빵이 다 똑같지 뭐. 흠, 뭐 어쨌든."
회사일에 매여 한동안 정연을 보지 못한 것도 있고, 또 그녀에게 뭔가 특별한 걸 선물하고 싶어 생각해낸 게 바로 저 붕어빵 기계였다. 계속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타이밍을 잡지 못한 체 벽 뒤에 숨어 염탐 노릇을 하던 승화와,형우는. 이제 막 교복을 입은 두 소녀가 자리를 뜨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다닥-재빠르게 돌진하듯 붕어빵 천막으로 향했다.
"붕어빵 드시게요?"
"아, 뭐."
"얼마치나 드릴까요?"
"……"
"손님?"
"이 기계 나한테 팔 테요?"
"아이참, 회장님! 정중하게, 정중하게요!"
"아……아참, 그렇지."
누누이 주의를 줬건만, 늘 하던 대로 버릇없이 대뜸 하고 싶은 말만 두서없이 던지는 승화의 건방짐에 형우는 낭패!다 싶어하며 재빨리 승화에게 입김을 넣었다.
"흠흠, 그러니까 내 말은. 붕어빵이라면 환장한……아니, 붕어빵을 엄청 좋아하는 여자가 하나 있는데."
"있는데?"
조금 전과는 다르게 차렷!자세로 반듯이 서서 차분히 말을 떼는 승화의 모습이 조금은 관심을 끌었는지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붕어빵 장수가 되묻는다.
"그래도 사서 주는 것보단, 내가 직접 만들어주는 게 더 정성이 들어 있을 듯싶어서."
"싶어서?"
"아……그러니까!, 그 여자가 행복해하는 모습을...에이씨, 얼른 이거나 팔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이나 하쇼!"
-
"헤헥……헤헥……죄송하지만 회장님, 뒤에서 밀고 계시는 거 맞으신가요?"
"그럼, 당연하지."
일리가 있나. 그냥 반쯤 등만 기대고서 뒷걸음 옮기듯 승화는 전혀 힘을 주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앞에서 수레를 끌며 온전히 힘을 쓰고 있는 건 형우였다. 그나마 저 멀찍이 눈으로 '은혜원'문패가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채로 이어지는 대문 앞까지 다가선 형우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담벼락에 주저앉았고, 승화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태연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 코뿔소 아저씨다! 아저씨이~"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 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반갑게 달려갔고, 이젠 웬만큼 단련됐다는 듯, 한 팔로 번쩍 아이를 안아 들며 승화는 반기는 기색을 표했다.
"언니는?"
"코뿔소 아저씨 왜 안경 썼어요?"
"아, 눈이 좀 아파서."
"눈 아파요? 그럼 동이가 호오-해줄까요?"
"피식, 기특하네 이녀석. 넌 특별히 내가 열 개 만들어 주지."
"응? 열개?"
"아아, 그런 게 있어. 근데 언니는."
"음……언니는……."
갑자기 목소리를 작게 줄이며 아이는 뭔가 꺼려하듯 말끝을 흐렸다.
-
자의가 아닌 움직임으로 정연의 몸이 요동치듯 심하게 흔들렸다. 질퍽한 소리가 귀를 감아올 때마다 바닥을 긁듯 움켜쥔 손엔 절로 힘이 들어갔다. 두 번 다시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고. 몇 주 전부터 어김없이 정연은 스스로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와 먹이던지 듯 자신의 육신을 원장에게 던져왔다.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그의 추악한 입술과, 몸이 자신을 더럽히고, 욕보일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다음날이면 또다시. 스스로가 꺼져가는 육신을 이끌었다.
"좋아요,좋아. 옛날 같았으면 분명 여러 남자 홀렸을 명기의 몸을 가졌군요."
-
'민지가 그러는데, 원장아저씨가 자꾸 정연 언니를 괴롭힌댔어.'
'맞아맞아. 저번에 준수도 봤는데, 막 원장님이 누나 옷……'
우득,하며 이성이 끊기는 소리와 함께 승화는 손이 아닌 발로 쾅!하며 문짝을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뜨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야말로 개 같은 광경. 아니 개보다도 못한 광경. 화들짝!놀라하며 원장은 후다닥 정연의 몸 위에서 내려서 일단 바지를 추켜 입었다. 의외로 차분하게 승화는 몇 초 정도, 죽은 듯 깔린 정연의 모습과, 얼떨떨해하며 상황파악에 나선 변태원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헉! 혹시 '한성그룹' 회장님 아니십……"
빠악!
말을 잇기도 전에, 순식간에 승화가 던진 의자 다리에 머리를 맞아 원장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제서야 미동 없던 정연의 고개가 슬그머니 틀어져 눈앞으로 다가선 승화와 마주쳤다.
"이 지옥에서……널 꺼내 줄게."
26편
평생 놓지 않을 것처럼 정연을 안아 든 승화의 양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저 보이는 문만 넘어서면, 두 번 다시 절대 그녀가 이런 끔찍한 고통을 겪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하지만 승화의 바람과는 다르게, 막 문을 넘어서려던 그의 발을 뜻밖에도 정연의 작은 움직임이 막아섰다. 슬며시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힘이 실리는 정연의 손길에 이내 승화가 동작을 멈췄다. 입을 여는 대신 슬며시 눈을 내리깔아 그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더는 흘릴 눈물조차 말라버린 듯 휑한 벌판처럼 허망한 그녀의 눈동자.
"미안하지만 나……갈 수 없어요."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 겨우 쥐어짜 말을 꺼낸듯한 미세한 목소리.
그딴 거 무시하면 그만이야! 되려 목소리 키우며 무시하면 그뿐인데도, 정연의 그 절박한 목소리는 왜 이다지도 걸리는건지. 결국 승화는 안고 있던 정연을 슬며시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현관 안쪽에서 몸을 숨긴 체 눈치를 보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용기 내 뛰어나와 정연에게로 덥석! 들러붙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을 참 아무렇지 않게 밝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연은 하나,둘 빠짐없이 챙기며 꼬옥-끌어안아 준다.
"누나, 벌써 학교로 돌아가는 거 아니지?"
"언니 지금 가는 거야?"
불안한 듯, 묻고.또 물으면서 정연을 놓아주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 그제서야 승화는 왜 정연이 그 끔찍한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곳에 남아있으려 한 건지에 대한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듯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남는 결론은 딱 한 가지.
불안해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며 함께 현관 안으로 들어서 2층으로 향하는 정연. 그런 그녀를 잠시 부드럽게 바라보던 승화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특유의 무표정한 싸늘한 페이스를 드러내며 작정한 듯 뚜벅뚜벅 낮은 걸음을 원장실로 옮겼다.
드르륵-탁!
최대한 소리에 주위가 분산되지 않게 가만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각 곧 닥칠 거라 예상을 했던지 약삭빠른 원장은 되는대로 일단 짐가방을 꾸려 피하고 보자는 심상이었다.
뚜벅뚜벅.
"헉!"
"붙어 있는 손모가지로 제대로 젓가락질이라도 하면서 살고 싶다면, 그거 놓고 일어나."
온몸에 살기를 실은 듯한 공포의 전율마저 느껴지는 소름끼치게 나지막한 승화의 음성이 후임원장의 머리 위에 스산하게 닿았다. 거역했다가는 무슨 봉변은 더 크게 당할까 싶은 마음에 그가 시키는 대로 원장은 알아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뻣뻣하게 경직돼 굳은 몸.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나마 비유를 들어 추측하자면 승화의 삼촌뻘쯤 될 듯싶다.
뚜벅.
다시 한걸음 바짝 후임 원장 앞으로 다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수리에 승화는 눈을 꽂았다. 그가 지키는 몇 초간의 침묵은, 원장을 지옥 불구덩이에 몇 번 담갔다 빼는 것처럼 곤욕이었다.
듣는 귀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 법한 소문. 바로 한성그룹 젊은 회장에 대한 말들. 그중에서도 당연 첫 번째는 성격이 참 뭣같다는 말.
"아, 참."
얼마 안 가 다시 승화의 입이 열렸다.
"예?"
"씨익,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말이야."
오한이 저릴 만큼 서늘한 냉소를 슬쩍 입가에 머물고는 쓱-하며 그의 상체가 숙여지는 동시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후임 원장의 귓가에 날카롭게 박혔다. 그리고 뒤이어 빠득!하는 소리와 함께 반쯤 꺾여 뼈가 튀어나온 뒤틀린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쥐며 괴로움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체 후임 원장은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보시다시피 변덕이 좀 심해서, 뱉었던 말도 금방 주워담는 능력을 타고 났다는말을……미처 깜빡하고 하질 않았군."
-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아이들을 겨우 달래 침대 위에 하나,둘 데려다 눕힌 후 잠든 걸 확인하고서야 정연은 방을 나왔다.
"어?"
그런 그녀가 나올 때까지 승화는 소리없이 방문 밖 벽면에 기대 선체 기다려 주고 있었다.
"애들은?"
"이제 막 다 잠들었어요."
"그럼 가자."
"어딜……."
"어디긴, 네 방이지."
"아……."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이끌듯 승화는 끌며 정연의 방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밝히려 스위치 쪽으로 정연이 손을 옮겼다. 스읏. 그런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덮어 승화가 저지했다. 아직 후임 원장의 더러운 냄새와, 흉물스러운 손길이 맴돌아 흠칫! 하며 경계하듯 정연은 벽 쪽으로 바짝 붙어섰다.하지만 승화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나머지 빛조차 감추듯 문을 밀어 닫았다.
"난 이제 떨쳐냈어. 이깟 어둠따윈."
"……."
"맹세컨데 나 혼자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겠지."
"……."
"너야, 한정연."
"……."
"너로 인해 난 이젠 더이상 어둠이 무섭거나, 겁나지 않아."
"……."
"널 생각하면, 그 어떤 어둠일지라도 어느샌가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니까."
일부러 새어나가지 않게 꽉! 틀어쥐고 있던 정연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하다. 너무 겁을 먹어, 그냥 겁먹은 체로 움켜쥐고 있던 그 마음이. 서툴지만 따뜻한 이 남자의 말에 봄날 눈 녹듯 서서히 풀린다.
와락!
산송장처럼 반쯤 놓고 있던 정신이 어느샌가 반짝!하며 전구 들어오듯 밝혀졌다. 그리곤 주저 없이 정연은 몸을 던져 승화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얼마나……기다렸는데……."
"너무 많이 늦어서……미안."
"흐흡……."
-
"와~오늘 수입 장난 아닌데? 형 이거 보여?"
금고 대신 돈통으로 만든 작은 냄비 속에서 제법 수북이 담긴 지폐들을 꺼내 들며 신우는 환호성을 부르 짖었다.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하나,둘 비워지는 테이블을 정리하던 한유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이제 막 돌아가려 코트를 입고 있는 성은 쪽을 잠시 바라봤다. 티를 내지는 않지만 요 며칠 새 부쩍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말로는 어차피 일거리도 없어 시간이 남아돌아 괜찮다고는 하고 있지만.
"자,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신우씨 내일 봐요."
"아, 형수님! 오늘 진짜진짜 수고 많으셨어요. 제가 이번 달에 알바비는 확실히 책임지고 두둑이 준비하겠습니다."
"쿡, 그 말 꼭 책임져요. 한유야 잠깐만."
신우의 너스레를 받아치며 나가기 전 성은은 손짓하며 한유를 불렀다. 테이블을 닦고 있던 행주를 내려놓으며 한유 역시 옆쪽에 놓인 점퍼를 집어 들었다.
"성은이 좀 데려다 주고 올게."
"어 그래 형, 아니. 그러지 말고 그냥 형도 형수님이랑 같이 바로 들어가."
"그럼 뒷정리는."
"안 그래도 시합준비 때문에 요새 형이랑, 형수님만 고생시켜서 맘에 걸리던 참이었는데, 오늘은 그냥 내가 알아서 뒷정리하고 갈게."
"그럼 오늘 하루만 부탁좀 할게."
"우리 사이에 부탁은 무슨. 빨리 가. 형수님 기다리시잖아."
워이워이 까닥이며 오버 서럽게 손동작을 취하는 후배의 행동에 한유는 다시 미소를 짓고는, 간다는 인사와 함께 포차를 나왔다.
이제 막 운전석에 오르려던 성은의 손을 한유가 붙들었다.
"어?"
"피곤하잖아. 내가 할게 운전."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뭐. 그리고 너 왔다 갔다 하려면 힘들어서 안 돼. 키 이리줘."
"안 그래도 이미 벌써 신우 녀석이 오늘은 뒷정리 혼자서 책임지겠다고 말 했습니다."
"아, 정말?"
"그래. 그러니까 너 데려다 주고 집에가서 자도 충분해."
"아~그럼 오랜만에 우리 한유랑 나란히 드라이브~하는 기분 내겠네?"
"드라이브 하고 싶어?"
"아니아니, 그냥 기분만……."
혹여나 자기 때문에 한유가 피곤해질까 봐 손사래를 치며 성은은 신난듯한 걸음으로 몸을 움직여 보조석 쪽 문을 열고 올라탔다.
-
다른때 보다 장사가 잘돼, 휘휘-휘파람을 불며 기분 좋게 신우는 뒷정리를 시작했다. 접이식 테이블을 접어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후, 상할 음식들은 냉장고에 하나씩 넣어가며 손님이 먹다 말은 소주병에 든 술을 탈탈 입속으로 털어 넣으며.
그때 뒤쪽에서 탁탁!하며 뭉툭한 기척이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오늘 장사 끝……"
퍼억!
말을 끝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뭉뚝한 나무막대가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27편
참 아이러니하게도.
여자라면 특별한 관심 없이 자연스레 지나치는 스쳐감 속에서도 한,두 번씩 겹쳐지던 화장품 냄새가 정연에게선 맡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틈 하나 없이 양팔로 꼭 끌어 품속에 안아,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숨소리를 선명하게 듣고 있음에도.
'얼마나……기다렸는데…….'
쓰러질 듯 기대 서럽게 흐느끼던 그녀의 모습이 또다시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피가 끓는다. 정말 지금 맘 같아서는 충동적으로 살인도 가능할 것 같은 분노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은 그녀 곁을 떠나선 안 된다는 책임이 간신히 승화의 한계를 막아 세우고 있었다.
"으흣……."
잠이 들었음에도 그것마저도 편치 않게 이번에는 악몽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정연의 작은 신음에 승화는 어찌할 바를 몰라 일단 꽈악-!하니 더욱 세게 그녀를 자신의 품에 품듯 끌어안았다. 매일같이 보이지 않게 그의 숨통을 조여오던 그 질긴 악몽만 벗어나게 해달라며 주문처럼 신음해왔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간신히 그 질긴 어둠 속에서 벗어 나왔다. 그랬던 그가. 지금 다시 소리없는 메아리처럼 마음으로 되뇌며 주저리는 바람은. 우습게도. 평생 그런 악몽에 시달려도 좋으니. 지금 자신의 품에 잠든 그녀가 제발 편히 잠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동이 틀 때쯤에서야 깊은 잠에 빠진듯한 정연의 모습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며, 승화는 조용히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를 대할 때의 온화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페이스를 고정하며 1층으로 내려선 승화는 전화 너머로 짧은 지시를 던지곤 핸드폰을 닫았다. 현관 밖으로 뿌옇게 흐려진 안개에 덮인 뒷산을 고요히 바라보며 5분이 지났을 쯤. 삐걱-하는 쇳소리의 대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의 여러 남자들이 마치 짠 것처럼 신속히 각을 잡아 승화 앞에 일렬로 서 보였다.
"뒤탈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
"예!"
승화의 지시에 정중히 고개를 숙여 받들며 곧 남자들은 현관 안쪽이 아닌 후문으로 이어지는 동선으로 재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
어젯밤 성은을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유는 그대로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제대로 이부자리도 펴지 않은 체 얇은 이불 하나를 대충 몸에 덮은 체 그렇게 곤히 잠이 들었을쯤, 몇 시간 자지 않은듯한 노곤함과 함께 이내 한유는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핸드폰 진동음. 체 떠지지도 않아 희미한 시야로 더듬더듬 바닥의 핸드폰을 들어 일단 귀로 가져갔다.
[형!]
"어,그래. 진수구나."
[큰일 났어요! ]
"큰일이라니……"
[새벽에 신우가 당한 모양이더라고요. 지금 **병원 병실 잡고 올라가 있다던데요!]
"병원이라니……그게 무슨 소리야."
[저도 자세한 내막은 아직 듣지 못해서 일단 병원부터 가보려고요.]
"어 그래. 아, 아니 그러지 말고 나도 함께 가. 너 지금 어디야?"
-
그래도 명색이 애인 사이인데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성은은 과감히 옷장에서 미니스커트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좀처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체 또 망설일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유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99,9%이나, 만약 치마를 입게 되는 경우 그에 맞춰 구두를 신어야 함은 당연하고……그렇게 되면 서빙할때 움직이기 불편함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따른 애로사항이 뒤를 이었다. 또 그렇다고 패션 대신 얼굴에 신경을 쓰자니. 그건 또 뻔히 드러내놓고 한유에게 잘 보이고 싶어함을 뜻해 속 보이는 짓인듯했다.
결국 망설임끝에 오늘도, 활동하기 편한 청바지와 체크 남방을 골라 시무룩하게 거울 앞으로 향했다.
나갈 준비를 마친 후, 아침을 먹기 위해 막 위층에서 내려오던 중.
"그게 무슨 소리죠? 아니에요. 다른 업체와 따로 접촉한 적은 없었어요.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번 일로 인해 행여라도 내가 관련……"
조급하듯 목소리를 높이던 시은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흠칫! 하며 재빨리 아무렇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네, 그럼 모쪼록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라죠."
뭔가 싶어 시은 곁으로 다가오는 딸의 움직임에 그녀는 일단 짧게 말을 끝맺고선 통화를 끝냈다.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응? 아, 아니야. 넌 신경 안 써도 돼. 아참! 아침 먹어야지. 얼른 들어가자."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듯 말을 바꾸며 서둘러 주방으로 향하는 엄마의 모습이 조금은 이상하다 싶어하며 곧 성은 역시 뒤따라 dining room으로 향했다.
-
끼이익-하며 급하게 멈춰선 검은색 벤츠. 기사가 서둘러 연 문밖으로 튕기듯 수원 시장이 내려섰다.
"이거 이거 큰일일세. 그런 대단한 분을 벌써 십 분이나 넘게 기다리게 하였으니……"
삐질삐질 흘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땅딸보 수원 시장은 분주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시장실 안의 고요함과는 다르게 문밖에서는 1:100과 가까운 피튀기는(?)경쟁이 여직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극도로 예민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말에, 입은 꾹 닫은 체 죽기 살기로 가위바위보 혈전에 열을 올리는 그녀들. 드디어 최후의 일인이 정해지고, 나머지 여자애들은 절규에 가까운 비통함을 금치 못한 가운데 그녀는 싱글벙글한 얼굴을 하고선, 옆에 쟁반을 들고 대기 중인 여직원에게서 쟁반을 건네 받고는 당당하게 시장실 문앞으로 향했다.
-
손목시계가 아닌 핸드폰 액정 시계를 응시하며 다시 한 번 탈칵-하니 승화의 손이 슬라이드를 내렸다 올렸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초침이 흘러갈수록 문 옆에서 대기 중인 형우의 얼굴에선 또다시 비질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부의 기관이나 다름없어 당장에 '시청'전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에 속한 인원. 즉, 실질적인 웃대가리 하나 정도는 눈감고도 갈아치울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니. 이러다 또 애꿎은 사람 하나 졸지에 실직가장이 되는 게 아닌지 싶어 공감 이백프로 한집안의 가장인 형우는 남의 일 같지 않아 속이 타들어갔다.
달칵!
'아, 오셨구나!'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형우의 눈이 반짝이는 것도 잠시. 난데없이 홍시를 발라놓은 듯한 발그레한 볼의 여직원 등장에 또다시 찬물을 끼얹듯 그는 또다시 절망을 금치 못했고, 달그락-하며 자기 앞에 놓여진 찻잔에 승화는 무심한 눈길을 던진다.
"저……가끔 뉴스에 나오는 거 봤어요. 근데……화면에서보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기신 거 있죠."
"……."
"정말 웬만한 연예인보다 멋있으세요."
"……."
단순히 아부성 발언이 아닌 맘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말이었음에도, 승화는 야속하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체 여전히 시선을 하얀 찻잔에 두고 있을 뿐이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무시를 당해 무안할 만도 하건만, 여직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좀 더 과감하게 이번엔 소파 끝에 걸터앉아 관심을 끌려 했다. 일부러 유니폼 치마까지 올려 하얀 허벅지까지 드러내면서.
쓰윽.
역시나 그도 남자인지라 당연히 눈이 갈 수밖에 없지 싶은 것도 잠시. 슬쩍 눈을 둔다 싶던 승화는 곧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 가까이로 가져간 후 곧 입술을 움직였다.
"그나마 내가 즐겨 마시는 차를 가져와서 이번 한 번만 봐주는 줄 알라고."
"……."
"못볼걸 봐서, 이 차라도 마시면서 눈 좀 정화해야 하겠으니, 그만 나가봐."
-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자기들도 어차피 위에서 내린 지시받고 움직이는 것 뿐이라고……그러니……"
"그거말고, 바로 전에 한 말."
"아무래도 형수네 집 사람들이……"
"……"
"그사람들은 날 형으로 착각해서……"
난처하다는 듯 신우는 뒷말을 흐리며 붕대로 감긴 머리를 긁적였다. 다시 한 번 확인사살을 한듯한 한유의 얼굴은 급속도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젠 너무 희미해졌지만, 어린 시절 승화의 계략으로 도둑으로 몰린 소동이 일어났던 때. 딱 한 번 성은의 부모님을 뵈었던 적이 어렴풋이 기억엔 남아 있었다.
지이잉-또다시 울리는 전화. 핸드폰을 내려다보자 선명한 성은의 이름이 액정에 빽빽이 박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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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 넘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이번에도 역시 신호음 끝에 들려오는 건 안내멘트. 거기다 눈앞에 보이는 건 제대로 정리는커녕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포차의 내부. 걱정 반, 불안함 반으로 성은은 다시 한 번 발을 구르며 한유에게 전화를 건다.
-
거만한,자신감, 우격다짐 빼면 시체인 여승화. 그런 그가 지금 90도에 가깝게 허리를 숙인 것도 모자라 공손한 어투로 부탁(?)이라는걸 하고 있다 하면 과연 누가 믿으려나.
당연히 형우역시 이건 뭔가 잘못됐다 싶어하는 경악한 얼굴을 하고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아니, 일단 이러지 마시고 자리에 앉으신 다음에."
난감한 건 땅딸보 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듣기에는 오만방자 제멋 대로에 자기 말이면 무조건 법인 양 우기는 건 물론이거니와, 수틀렸다 싶으면 가차없이 개망나니로 돌변하기 일쑤인 악마 같은 녀석이라고 들었다. 웬걸. 영락없이 실직가장(?)이 되겠지 싶은 마음에 '나 죽었소'하며 일단 무조건 깨갱 하며 굽히는 게 상책이다시피 몸을 낮추려 했건만, 되려 역으로 먼저 자세를 낮추며 뜬금없이 부탁할 게 있다며 순한 양처럼 나올 줄이야.
"자자, 알았으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자리에 앉아서 좀 더 차분하니 얘기를 나눕시다."
5분 후.
"씨익,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하하하, 예! 저야말로."
"그럼, 전 이만."
-
"언니~물 넘치잖아!"
"응? 아……미안."
소꿉놀이를 한다며 아이가 바가지에 퍼담은 흙 위에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주고 있던 정연은 아차!싶어하며 또다시 놓고 있던 정신을 차려 보였다. 삐죽하며 잔뜩 고인 물을 손으로 퍼내며 울상을 짓는 아이에게 미안함을 보이며, 들고 있던 뿌리개를 한쪽에 놓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슬쩍 올려다본 하늘이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Rrrrrr-
"언니, 전화!"
"응?으응……."
이번에도 한템포 느리게 대답을 하며 정연은 서둘러 몸을 돌려 현관 쪽으로 향했다.
"네 '은혜원'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재단 아동보육기관 소속 ***주임이라고 합니다."
"아,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오라. 며칠 뒤에 등기로도 발송을 할 예정이지만, 워낙 갑작스레 통보를 받게 된터라."
"무슨……"
"이번에 은혜원 후임직으로 정해졌던 원장 ***씨가 개인 사정으로 인해 시설 임용직을 수임할 수 없는 관계로."
"……."
"차기 후임 원장님이 급히 선출되었음을 알려 드리고자 이렇게 전화로 먼저 연락을 드리게 됐습니다."
"차기 후임이라니……"
"제가 지금 처리할 사안들이 많은 관계로 간단히 성명과, 연락처만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이번엔 이례적으로 아동전문기관과는 별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이 직접 요청을 하신터라."
"……."
"아마 한 번쯤 들어는 보셨을 겁니다. 한성그룹 여승화 회장님이라고."
28편
1시간가량의 비율 사투 끝에 겨우 그럴싸한 반죽을 완성해낸 승화와, 형우였다.
각 잡고, 무게 잡는것 따윈 잊어버렸다는 듯 고가의 재킷은 나 몰라라 한쪽 구석에 팽개친 지 오래였다. 하필 입은 와이셔츠가 검은색이라 보기 좋게 군데군데 튀어 묻은 흰 반죽 자국.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또다시 뽁!하니 반죽을 검지로 찍어 간 보기 바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반죽을 태워 버리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열심히 쏘아보던 그였던 터라, 마지막에 계량컵으로 우유 한 컵을 더 쏟아부은 형우는 이젠 아예 총 버리고 전쟁터에 나간 군인의 심정으로 조용히 체념의 묵념 자세를 취했다.
"오~!"
그나마 그의 성격에 이 정도 참을성을 보였으면 기적이다 싶어하며 형우가 막 마음의 준비를 끝내던 찰나, 의외로 승화의 입에선 감탄사에 가까운 놀라움이 터져 나온 것이다. 덩달아 놀란 형우의 고개 역시 번쩍!하며 들어 올려졌고.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연이어 반죽을 찍어 먹으며 승화는 경이롭다는 눈빛을 반짝이며 너무 기쁜 나머지 쓱!하니 손에 찍은 반죽을 형우의 입 쪽으로 갖다댔다. 전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정말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까탈쟁이에, 덤으로 결벽증에 가까운 깔끔쟁이가 아니었던가.
"뭐해, 맛보라니까."
"예……아……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웬만큼 친한 상대 아니면 접근조차 기피하다시피했던 그가, 천연덕스럽게 재촉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쭉! 내밀어 보였다. 꿈인가,생시인가. 엉겁결에 할짝,하니 소심하게 혀를 내밀어 반죽을 핥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 뒤가 구려 계속해 형우는 승화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렇게 또 십 분 정도가 흐르고,
애초부터 정연과, 아이들에게는 빈틈을 보이기 싫어 건장한 두 명의 블랙맨을 붙여 봉쇄해둔 현관문 앞으로 승화는 그제서야 으스대듯 당당하게 무게를 잡으며 다가섰다. 까닥,하니 고갯짓으로 블랙맨들에게 비키라는 신호를 보낸 후, 드르륵-열리는 문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에게 순식간에 빙-둘러싸였다.
"형, 그거 손에 든 거 뭐예요?"
"봐봐,봐봐~,응? 얼른 보여줘 아저씨~"
귀엽게 칭얼대며 승화의 손에 든 반죽 통을 보려고 기를 써는 아이들의 반응이 즐겁다는 듯 뜸을 들이다가, 결국엔 아이들의 파워에 밀려 주저앉아 반죽 통을 뺏기고 만다. 부산스러운 아이들의 움직임에 밀려 쿵-하니 바닥에 주저앉았음에도 뭐가 좋은지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아까 승화가 그랬던 것처럼, 호기심에 한 아이가 손으로 폭!하니 반죽을 찍어 맛을 보고 '맛있다!'를 외치자, 너도 나도 하며 삽시간에 아이들 전체가 반죽 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 천진난만한 모습들이 예뻐 좀 더 두고 지켜보고 싶기는 했지만, 그러다간. 애써 만든 반죽이 '붕어빵'이 되기도 전에 바닥이 날듯했다. 별수 없다는 듯 옆쪽에 서 있는 블랙맨들에게 신호를 보내 한 아이가 들고 있는 반죽 통을 사수해, 대문밖에 대기되어 있는 붕어빵 기계로 유인해 데리고 가게끔 만들었다. 시끌벅적한 아이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니, 마당엔 횅-하니 때아닌 정적이 흘렀다.
그제서야 승화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기회다 싶어 안쪽에서 빨래를 개는 정연 앞쪽에 몸을 앉혔다.
"아이들 정말 좋아하겠다. 고마워요."
"뭘, 이 정도 가지고"
"피싯, 이것만 다 정리하고, 오늘은 최고로 맛있는 저녁 해줄게요. 기대해요?"
아직 하루도 채 되지 않은 그 아픔이, 분명 아직도 뼛속 깊이 남아있을텐데…….
애써 밝은 척하며 장난스레 말해 보이는 정연의 모습이, 승화의 눈엔 마냥 안쓰럽고, 찡하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과, 원망보다는, 한 치 앞을 더 내려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지금부터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로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에 자신을 던지겠다는 각오로, 마음을 굳게 다져본다.
-
4일 후.
통화시도만으로 베터리가 달아 끼울 정도로 성은은 수십 번, 수 백번 해도 받지 않는 한유의 전화에 또다시 미련하게 전화를 걸고 또 걸고 있었다. 신우가 포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라는 걸 짐작게 했지만, 그럼에도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똑똑.
"성은양, 나와서 식사해요."
"죄송하지만, 제 자리는 치워주세요. 입맛이 별로 없어서……."
"너 지금 어제,그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식탁에 얼굴 비춘 횟수가 몇 번인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야?"
문앞에 서 있는 주방 도우미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시은이 속상해 죽겠다는 듯 그녀 앞으로 다가서 급기야 야단을 치기에 이르렀다. 보나 마나 더 버텨봤자 눈감아줄 시은의 성격이 아닌 터라, 안 그래도 없는 기운에 엄마와 다퉈봤자 득 될게 없다 싶어 성은은 마지못해 알았다며 힘없이 침대에서 내려섰다.
돌을 씹는다는 기분이 이런 건가? 밥 한 톨마저 쉽게 넘겨지지 않아 연거푸 물잔만 비워내며, 끝내 성은은 고스란히 밥이 남은 밥그릇 옆으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너 정말 엄마 속상하게 계속 이럴 거야?"
"미안해 엄마, 나 근데 지금 속이 너무 안좋아서……도저히 밥이 안 넘어가."
다그쳐서라도 억지로 먹여보려 시도했던 시은은, 눈 밑이 붉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채로 차마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
"다행히 MRI상으로는 별 문제 없다니까, 며칠만 더 입원치료 받으면 괜찮아 질 거래."
"미안해요 형."
"피싯, 네가 왜. 오히려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나야. 정말 미안하다, 나때문에……."
"아, 그런 말 마. 형이 왜. 그나저나 형수님은……."
"아,너 아까 갈아입을 속옷 필요하다고 했지. 가서 몇 장 사와야겠다."
신우의 물음을 피하듯, 바로 말을 돌리며 한유는 서두르듯 급한 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행여라도 정연에게서 걸려온 연락을 받지 못해, 그녀가 걱정할까봐 맘 편히 핸드폰조차 꺼놓지 못한 체, 그는 또다시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음의 핸드폰을 꽈악!하니 주먹으로 쥐고선 애써 무시한다.
-
아예 '은혜원'에 살 작정을 하고서 커다란 트렁크에 있는 대로 옷과,잡화를 담아 딸칵! 채우고선 이제 막 현관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소음을 싫어해 늘 진동으로 고정되어 있는 승화의 핸드폰이 울렸고, 꽤 기분이 괜찮아 승화는 무난한 톤으로 전화를 받았다.
"돈 떨어지셨수?"
[녀석, 모처럼만에 엄마가 전화하는 건데 꼭 그렇게 불퉁대야 하겠어?]
"그렇게 자식 귀하게 생각하는 분들께서, 바쁘다는 핑계로 매번 아들 생일에는 얼굴조차 안 내민다는 건 부모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생일이라니?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번에 새로운 아이템 준비한답시고 또 깜빡한 모양이네, 아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이봐이봐, 아들 생일이 지났는지, 안 지났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으니……말 다했지 뭐."
[쿳. 너, 요 녀석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열달 배 아파 낳은 귀한 자식의 생일날짜조차 모르는 무심한 엄마일까 봐? 걱정 마. 우리 아드님 생일 돌아오려면 아직도 삼 개월 하고도 17일이나 남았다는 거, 머릿속에 꼭꼭 저장해 두고 있으니까.]
"픽, 또 그래놓고 당일날 가서 무슨 핑계를 대실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 근데 왜요."
[어 그게, 오늘 말이야. 아버지 돌아오신다고. 글쎄 나도 이맘때쯤이라는 것만 알고 정확한 날짜는 까먹고 있었는데……낮에 'JC'유회장님이 전화하셨더라구.]
"'JC'유회장이라면……강성은네 엄마?"
-
**호텔 연회장.
"아, 어떻게 매번 패턴이나,스타일이 똑같아, 지루해 죽겠네. 어이, 안 그래?"
"응?……아……뭐."
"뭐야 너, 이런 클래식한 분위기라면 질색하는 네가 순순히 파티장에 참석한 것도 그렇고. 아까부터 계속 혼자 만든 세상 속 사람처럼."
승화의 퉁한 음성에, 성은은 잠시 그와 눈을 마주치나 싶더니 또다시 고개를 돌리며 창밖 너머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나마 승화와 잘해보겠다는 말을 던져놔, 시은의 참견과 닦달이 덜 한 터였다. 그러니 혹시라도 한유와 사귀고 있다는 걸 그녀에게 발각이라도 될 시엔, 그건 정말 감당하기 벅찬 벽과 같은 시련임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해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눈을 피하고자, 승화의 아버지, 전 한성그룹 회장인 운진의 귀국파티에 군말 없이 참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 소문 들었어."
"소문이라니?"
"관심 있어하는 상대, 생겼다던데……보나마나 외모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예쁠 테고. 학력이나, 집안은……네 기준으로 봤을 때는 결코 너한테 밀리지 않는 충분한 조건을 갖췄을 테고."
"픽, 속물 맞네. 나."
"별일이네. 알아서 인정을 다하고. 근데 있지. 가끔은 그런 네가. 마치 자로 잰듯한 정해진 틀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잘살고 있는 네 기계 같은 능력이 부러울 때도 있어."
"욕이냐, 칭찬이냐?"
"마네킹처럼 가만히 서서, 그냥 정해진 절차의 하나처럼. 부모님의 기준에 맞는 적당한 상대 만나서, 조건맞으면 바로 결혼하고. 또다시 그 삶에 맞는 틀을 짜 맞추고……."
그러면 적어도, 한쪽이 너무 많이 가져서, 또는 한쪽이 너무 없어서……좋아하는 맘에 있어서도, 사랑하는 감정에 있어서도, 눈치 따윌 보며 미안해하지는 않아도 될 테니까.
-
승화가 못 올 거 같다는 연락을 해온 터라 정연은 문단속을 하기 위해 현관을 빠져나왔다.
쾅쾅쾅!! 쾅쾅쾅!!
난데없이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약간 놀라 하며 조심스레 대문 곁으로 다가섰다. 절대 자기 이외에 외간 남자는 들이지 말라는 승화의 귀여운 충고에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순간 또다시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올라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만다.
쾅쾅쾅!!
경직된 몸으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듯 서 있기를 5초쯤.
"정연아, 얘들아……오빠야……문 좀 열어줘……."
부정확한 발음으로 느릿하게 말을 흘리는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오, 오빠야? 한유 오빠야?"
언제 경직됐느냐는 듯 그녀의 손은 이미 빠르게 잠금장치를 해제하며 끼익-하니 대문을 열고 있었다.
풀썩...
던지듯 그대로 한유는 정연의 어깨 위에 고개를 묻어버렸다. 알싸함도 아닌, 코가 찌릿!할정도로 독하게 풍기는 술 냄새.
진땀을 빼며 겨우겨우 정연은 자신의 방으로 한유를 부축해 데려다 눕혔다.
"술도 못 마시면서, 어디서 이렇게……잠깐만 꿀물 좀 타올게."
걱정스러운 투로 이마를 덮은 한유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정연은 몸을 일으켰다.
타압!
착오였다고 하기엔 너무도 강력한 힘. 마치 옥죄듯 한유가 힘 실어 붙든 정연의 손목이 욱신거려왔다.
"오……빠."
"안되니까……엄마,아빠한테 약속했으니까……평생……널 지켜주겠다고……오빠로써……널……."
"……."
깜빡깜빡.
암시였을까. 안 그래도 오래돼 자꾸만 깜빡거리는 형광등인 터라 내일 중으로 새 걸로 사 갈아 끼워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깜빡깜빡.
"할수 있을거라고……생각했어……노력하면……안되는게 없는것처럼……."
깜빡깜빡.
깜빡거리는 불빛처럼, 정연의 마음에도 위태로움을 직감하는 신호가 깜빡인다.
"다른 쪽으로 돌려보려고 나……쿡, 나쁜 놈이라고 비웃어도 상관없어……근데 그렇게 해서라도……너에 대한 내 맘을……"
불빛의 깜빡이는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정연의 맘 역시 호흡이 가빠오듯 다급해진다. 그만. 처음으로 오빠의 말을 도중에 끊어야만 할듯 하다.
"하아……근데 있지. 도저히 널 사랑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파앗.
위태로운 불빛은 끝내 시력을 잃어버렸고, 순식간에 뒤덮인 어둠 속에서 정연은 질끈-하니 두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29편
그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이 덮어지진 없을 거란 생각에…….
질끈감은 두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며, 정연은 한유에게 붙잡힌 손목을 조심스레 빼냈다.
"피식."
오빠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초라한 미소가 귀에 박혀왔지만, 뒤돌아 옮기는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그냥 이대로 자연스레 지나치면 괜찮아 지지 않을까……라는 미련한 바람으로.
하지만 한유는 달랐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동안 가슴깊이 꾹꾹 눌러 담아두었던 그 모든 감정을 지금이라면 전부 꺼낼 수 있다는 헛된 자신감, 용기가 주체할 수 없이 끓어 올랐다. 늘 그래왔듯 또다시 참고 또 참으며, 숨기고서 묻으면 될 테지만, 처음으로 그의 의지가 이성의 명령을 거부하고자 했다.
와락!
문고리를 잡아 쥔 정연의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울리고, 바람 한 줄기가 들어올 만한 작은 틈새가 벌어지고 있을 때. 기습하듯 한유는 달려와 그녀의 허리를 옭아매듯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처럼, 정연의 심장은 쿵-하니 바닥으로 곤두박칠 치듯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그녀가 느낀 불안함은 곧……
훽.
한유의 이성을 지배한 본능이라는 놈에 의해, 악몽보다 더한 현실로서 증명되려 하고 있었다.
반강제적 한유의 힘 때문에 느슨하게 잡아 쥐고 있던 문고리에서 손이 떨어져 간 정연은, 그의 손길에 의해 곧 힘없이 돌려 세워졌다. 감정을 깨닫기엔 서툴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를 마주하며 선 적이 없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도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지라 응시하는 올곧은 오빠의 눈 속에서, 점점 더 정연의 가슴은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였다.
"미안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빛나는 눈빛을 지닌 거치고는, 너무도 소박한 말이 그의 입을 타고 흘렀다. 약간의 경계를 띄며 두려움을 느끼던 정연의 겁먹은 눈동자 역시 조금씩 흐려졌다.
"오빠……."
되려 미안해져 왔다. 정작 지금 누구보다 가장 힘들고, 아플 사람은 한유일거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하지만 그 행동 탓에 결국 한유는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마저 놓아버렸다.
"우웁!!"
움직이지 못하게 정연의 한쪽 어깨를 손으로 강하게 쥐어 누르며 들이닥치듯 그의 입술은 과감히 그녀의 고유영역을 침범해 들어갔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여자 입술의 감촉. 놓아선 안 된다는 지배적인 본능으로 나머지 한쪽 팔로 그녀의 등허리까지 꽈악 움켜쥐어 고정한 체, 결국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
기분 좋게 취해 승화와 성은은 친구처럼 편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 술 떨어졌다. 기다려봐, 내가 가서 얼른 가져올게~"
보기 좋게 양볼이 불그스레하게 번진 성은이 테라스에 기대 세운 몸을 펴고선 실내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알았다는 듯 고갯짓을 하며 승화는 다시 실내를 등진 체 테라스 기둥에 양팔을 걸고는 까맣게 빛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어라?"
서울 하늘에선 별 보기가 쉽지 않다던데, 그럼 저건 뭐지? 움직임이 없는걸 봐서는 별이 맞는듯했다. 호기심에 일단 증거로 남겨두자 싶어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작정 '찰칵'하니 카메라로 담았다.
와인대신 빛깔이 예쁜 칵테일 두 잔을 들고서 입가를 '실실'대며 곧장 테라스로 향하던 성은. 그런 성은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다시 몸을 돌려, 핸드폰을 흔들어대는 승화.
쨍그랑.
부딪침도, 압력도 없이 그대로 쑤욱 왼쪽 손에 들린 칵테일 잔이 그녀의 손길에서 미끄러져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만다.
-
두부처럼 하얀 그녀의 속살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짐승 같은 자신의 움직임에 붉게,아프게 잔흔을 새긴다. 물에서 갓 건져 올린 고기처럼 파닥-대며 죽기 살기로 몸부림치던 움직임은, 지친 듯 죽은 것처럼 고요해져 있었다. 그제서야 한유는 틀어막고 있던 정연의 입에서 손을 떼어냈다. 또르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절망을 담은 그녀의 눈물.
하지만 한유는 이미 자신을 제어할만한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가끔 머릿속에서 울리는 웅웅-대는 기계음에 공백이 생기지만, 정연을 안고 갖고 싶다는 욕망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
못으로 두피를 찌르는듯한 통증과 함께 벌떡!하며 한유는 상체를 급히 들어 올렸다.
맙……소……사.
차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군데군데 뜯긴 흔적이 역력한 옷 속으로 비치는 그녀의 고운 살결. 더군다나 아랫도리는 감출 것도 없다는 듯 전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대체 내……내가……무슨짓을 한 거지?"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반패닉 상태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옆에 놓인 이불을 끌어다 벗겨진 정연의 아랫도리를 덮어 보였다. 그리곤 도망치듯 문을 열고 뛰어나가, 뒤뜰 수돗가에 고개를 처박듯 숙이고는 웩웩!대며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한유……삼촌?"
역하게 풍기는 입안의 잔재들을 호스 밑으로 흐르는 물로 정신없이 헹구고 있을 때? 긴가 민가 자신을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옆쪽에서 들려온다. 눈물과, 물 범벅으로 뒤덮인 고개를 느릿하게 옆으로 돌리자 보이는 아이의 얼굴. 동시에 겹쳐오는 정연의 얼굴.
"아아 아아악!!!!!!!!"
자신의 저지른 짓을 비롯한 모든 것이 엉퀴처럼 머릿속을 파고들어 한유는 괴로움의 절규를 부르짖으며 미친 듯 닫힌 대문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쾅! 이마 어디쯤이 터진 듯 뜨뜻한 피가 콧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으아아앙! 피 나! 한유 삼촌 피나!"
피를 보고 겁을 먹은 아이는 그대로 자지러질 듯 울어대며 발을 동동 구른다.
-
약간의 두통이 느껴졌지만, 그런대로 참을만해 승화는 여유롭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명색이 회사대표가, 이렇게 늦장 부려도 괜찮은 거야?"
기다렸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밀며 성은은 반대편 일인용 소파에 몸을 앉혔다.
"너, 너 뭐야!"
그에 비해 승화는 깜짝!놀라하며 황급히 이불로 꽁꽁 벗은 상체를 감추고는 잔뜩 경계하는 눈빛을 지고는 날카롭게 쏘아 물었다. 행여라도 또 술김에 실수나 해서, 책잡힐 짓을 한 건 아닌가 싶어서.
"뭐야, 그 정색하는 반응은? 아……이제 나 하고는 가벼운 원나잇도 예외 없다?"
"물었어.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안심해. 나 역시도 너랑 아무렇지 않게 하룻밤을 보낼 만큼 맘이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니까. 모처럼만에 긴장 풀고 마신 술이라 그런지, 쉽게 취했었나 봐. 잘은 기억 안 나는데, 너도 같이 취해서 서로 데려다 준다 어쩐다 하다가……결국 너희집으로 먼저 왔던 모양이야. 그러다 결국 둘 다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구. 근데 밖에 저 짐가방들은 뭐야? 어디 여행이라도 가려는 거야?"
"알 필요 없어. 젠장, 아침부터 놀랬더니 목이 타는군."
"쿡쿡, 그정도라니……많이 변했다. 여승화."
-
손으로 흐르는 축축한 느낌과 함께 주위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연은 컵에 물이 넘치고 있음을 인지했다.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고는 무의식적으로 상위를 훑어보다가, 까맣게 타버린 계란 부침을 보며 또다시 멍-해지고 만다.
"민지야, 12시쯤에 자원봉사 아줌마 오신다고 했으니까……그때까지 애들이랑 놀이방 들어가서 동화책 좀 읽고 있을래?"
"응."
예쁘장한 얼굴에, 아이들이 제일 잘 따르는 민지를 시켜 아이들을 놀이방으로 움직이고, 빈 그릇들을 담아 싱크대로 옮기고선, 기계처럼 설거지를 시작했다. 덜그럭,덜그럭. 아직 거품이 덜 닦인 그릇들을 선반 위에 하나,둘 대충 쌓아 올린 후, 고무장갑 한 짝마저 낀 상태 그대로 위층 방으로 향했다.
달칵-하니 문을 걸어 잠가놓고는, 반쯤 접힌 이불 위로 힘없이 몸을 웅크린체 쓰러진다.
"흐흡……흐흐흡."
맘껏 소리 내 울지도 못한 체, 정연은 양손으로 입을 겹쳐 막고는 몸까지 부르르-떨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막힘없이 쏟아지는 눈물들. 한번 베이고, 두 번 베이고. 너덜너덜해져 더 이상은 벨 자리조차 남지 않은 찢기고 다친 가슴. 아무리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노력하려 해보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버틸만한 기력이 없다.
"왜 와주질 않았어요……내가 그렇게……애타게 불렀는데……어째서 날……날……."
-
수백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신우와 통화 연결이 돼, 성은은 부랴부랴 자취하고 있는 그의 하숙집으로 향했다.
"변변히 내올 만한 게 없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근데……몸은 이제 정말 괜찮은 거에요?"
"네, 뭐.하하"
"저기……오자마자 바로 이런 얘기 꺼내서 미안한데……나 정말 너무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어서요."
"한유형 말하는 거죠?"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신우의 짐작에, 성은은 또다시 울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잠시 곤란하듯 복합적인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던 신우는, 맘을 굳히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성은의 눈엔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정말……정말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했어요?"
"네..."
"엄마가 시킨 거라고, 내가 영영 그 사람을 볼 수 없게끔……하아……하하……마……말도 안돼. 아닐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가……그렇게……그렇게 끔찍한……"
"저도 이런 말까지 하게 돼서...정말 유감이에요. 근데 형수, 아니 성은씨."
"……."
"제 3자의 입장으로써 볼 때...아무래도 한유형이랑은……."
"미, 미안해요. 그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그가 염려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 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눈앞에 닥친 현실에 어쩌면 순응해야 할지 싶어져, 두려움에 성은은 회피하듯 자리를 일어섰다.
-
"대표님은 지금 중요한……"
벌컥!
"왜 그러셨어요!! 대체 왜!"
다짜고짜 울먹이며 소리치는 딸의 등장에, 협약문을 보고 있던 시은은 깜짝 놀라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얘가.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 앞에 client 계신 거 안 보여, 경우 없이 이게 무슨 행동이야."
"내가 좋아서 그런 거 뿐이야. 그 사람은 안된다고 싫다고 그랬는데, 내가 우겨서. 좋아서, 내가 그 사람이 아니면 안돼서……그래서……그래서 억지로 매달린 거라구!!"
"어휴, 얘가 정말. 신사장님 정말 면목이 없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자리 좀 비우도록 할게요."
"네, 그러세요."
앉아있는 손님을 의식해 정중히 양해를 구하며 시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성은의 손을 잡아 문밖으로 끌고나갔다.
인적이 드문 비상구 안쪽 계단 앞에 멈춰서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풀며 다그치듯 꾸짖듯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설사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멋대로 회사까지 찾아와 엄마 망신주면서까지 목소리를 높여야만 했었던 거야?"
"엄마 하나면 충분하잖아. 남들 눈 의식해서 그 흔한 눈짓, 손짓 하나에도 수백 가지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하면 제일 그럴싸해 보일까, 거짓으로 꾸미는 피곤한 삶 같은 건!"
"얼른 소리 낮추지 못해? 정말 엄마 망신주려고 작정한 거니?"
"난 엄마랑은 달라. 엄마는 애초부터 가난이 싫어서, 사랑이 아닌 돈을 먼저 선택했다지만……난……난 그냥 가난하면 가난한데로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야?"
쫘악!!
진정시킨다는 걸 그만, 시은 역시 흥분해 성은의 뺨을 갈기고 말았다.
"아……."
"흐흡……이젠 싫어. 그동안은 그게 그 사람을 위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참고, 또 참았는데……이젠 싫어……안 할래 나……."
"성은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놓고 싶지 않아. 그 사람이랑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게 설령 지옥 불구덩이 속이라고 해도……행복하게 뛰어들 수 있으니까."
30편
강남 S동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 안.
넉넉히 오후 타임을 비워 승화는 모처럼 부모님과 필드에 나가 골프를 즐긴 후 느지막한 점심을 하기 위해 단골 레스토랑을 찾았다. 특별히 눈에 띄게 화기애애하거나, 단란한 모습은 돋보이지 않았지만, 결코 그렇다고 해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격식을 차리는 딱딱하고 삭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번에 친구 사위가 성형외과를 오픈했다고 50%할인 공짜쿠폰을 줬는데, 보톡스로 날리기는 좀 아깝고, 여보 나 이참에 가슴확대수술이나 받아 볼까 봐."
"푸웁!"
딱히 입맛이 없어 전체요리 대신 개인메뉴로 크림소스 파스타를 따로 시켜 먹고 있던 승화는 주저 없이 입에 담고 있던 면을 기함하듯 분출해 뱉어냈다. 다행히 얼마 안되는 거리에 대기 되어 있던 종업원이 순발력 있게 대처 후 다시 새로운 파스타를 그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엄마의 끔찍한 발언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입맛까지 싹-가셔버린 터라 그는 끝내 포크 잡는 걸 포기한 체 디저트로 나온 오렌지 주스만 홀짝였다.
단지 농담삼아 재미로 던진 말이었을 뿐인데 아들이 너무 정색하며 반응을 보이자 그 모습이 귀여워 좀 더 놀려보자는 심산으로 현주는 아예 전신성형을 거론하며 승화의 길길이 날뛰는 반응에 흥을 붙였다. 당연히 이번에도 아들인 승화는 질색,팔색을 하며 불같이 반대!를 외쳤고, 엄마인 현주는 물 흐르듯 느긋하니 받아치며 간만에 아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것에 실감할 수 있었다.
결국 1년치 보톡스 비용을 승화가 지불한다는 조건에서, 현주의 전신성형 얘기는 없던 걸로 일단락 지어졌다.
"그나저나 우리 아드님. 이제 서서히 나이도 먹어가는데 언제까지 엄마,아빠한테 기대 살면서 늦장을 부릴 셈이야?"
"말은 바로 하셔야죠. 제가 아니라, 두 분께서 저한테 기대 살고 계신 거 모르는 사람 빼고는 다 아는 사.실이라는 거."
"어머,얘! 네 아버지는. 그래, 이제 퇴직하시고 물러나셨으니 뭐 백수라고 해도 할 말 없다지만……엄마는 아직도 사장 소리 들으면서 쌩쌩하거든?"
"그렇게 잘나가시는 분께서 어째서 전문모델이 아닌, 아들 사진을 몰래 갖다 커버에 떡 하니 붙여놓고 발매를 하셨을까? 사전에 따로 저한테 의뢰는 하셨던가요?"
"흠흠, 그야 뭐……네가 워낙 귀하신 몸이라, 직접 스튜디오에 나와 촬영할 시간도 딱히 부족하고 하니까……아니 근데 지금 이 녀석이, 너 지금 엄마 괄시하는 거야? 여보! 얘가 이렇다니까요. 머리 좀 컸다고 이제 막 나를……흑흑."
틀린 말 하나 없는 아들의 말인 터라 현주가 딱히 내세울만한 건 남편 빽밖에 없어, 그녀는 운진을 끌어들여 지원사격을 부탁했다. 예나,지금이나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내이긴 하지만, 이럴 때 보면 꼭 아들인 승화보다 더 철이 없어 보이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큼, 말이 나와서 말인데……이젠 집안을 생각해서라도 결혼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할 나이는 됐다고 보는데, 네 생각은 어떠하니."
안 그래도 기회를 틈타, 한번 물어나 봐야겠다 맘먹고 있던 주제였던 터라 운진은 이참에 그냥 툭 터놓고 꺼내는 게 낫다 싶었다.
결혼이라...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순서대로 옷 입듯, 언젠간 정해진 순번처럼 딱딱 맞춰 진행되겠지.라고만 생각했었다.재벌가에 이어지는 순례처럼. 최상위권부터, 최하위권까지의 레벨단계를 붙여. 그 속에서도 또 5단계의 위,아래라는 커트라인을 정해놓고선, 레벨 5부터는 무조건 그 위로 정해진 레벨 속에서만 맞는 짝을 정해야만 하는. 어떻게 보면 참 고리타분한 세습과도 같은 재벌체계. 대부분 그들은 그 정해진 틀 속에서의 삶을 마다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제 것으로 소화하며 순응해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그건 승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라마나 영화. 그 속에서의 재벌 남들은 자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성에게 끌려 그들의 세계에 차차 동화되어 간다지만, 과연 현실에서도 그런 동화 같은 달콤한 일상들이 그려질 수 있을까? 정답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피곤하고 어렵게 갈 것 없이 그냥 맞는 수준끼리 어울리면 그만이라는식.허나,승화의 성격상 누가 정해준 대로 고분 고분 따르는 타입은 절대 아니 인터라, 그는 아예 처음부터 자기 짝은 스스로 고르겠다는 식으로 성은을 점찍었었다. 결국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감정이라는 놈을 만나게 돼 여러 번 된통 당하고 말았지만.
"모든 걸 져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하게 아끼는 사람……있어요, 저."
-
시은에게 맞아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쥐고선 성은은 정신없이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가 파앙!하며 문을 열고 1층 로비를 가로질러 정문을 뛰쳐나왔다. 쿵쿵쿵. 너무도 아프고 세차게 뛰어오는 심장.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처럼 그녀의 몸 역시 벽을 등진 체 주르륵-흘러내렸다. 감히 어떤 말로 그에게 사과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행여라도, 그가 두 번 다시 자신을 보지 않겠다 하면...그땐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득하고 까만 벽이 쾅!하니 눈앞을 가로막는 절망을 느끼며, 성은은 또다시 허겁지겁 핸드백을 열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젠 아예 전원을 꺼버렸는지 그 길게 느껴지던 연결 음마저 들려오질 않는다.
"제발 한유야……이렇게는 절대 끝낼 수 없다는 거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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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길을 향해 무작정 달리고 달리다 멈춰선 곳은, 내려 쌓인 눈이 아직 다 녹지 않고 쌓여 있는 작은 교회의 한적한 앞마당이었다.또렷히 박히는 거대한 십자가가 그의 죄를 벌하듯, 얼굴로 달려드는 듯한 착시 감을 느끼며 죄책감에 사로잡힌 한유는 또다시 숨어들듯 열려 있는 예배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더듬거리며 겨우 의자를 짚어 풀썩-하니 힘없이 주저앉아 웅크린체 괴로움에 끅끅-하며 신음하듯 낮은 울음을 토해낸다. 그럼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서럽게 울부짖는 정연의 흐느낌이 자꾸만 환청처럼 끊임없이 귓가에 맴돈다.
"으……크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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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또다시 흐르는 눈물.
"엄마……아빠……이제 난……어떡하면 좋을까?"
묻고 또 묻지만, 야속한 부모님에게선 그 어떤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설령 지구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아니. 일어날 수 없는 일.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빠에게 있어 자신은 동생이 아닌 안고 싶은 여자였던 사실. 그러면 안되는 거지만, 자신을 덮쳐온 그 숨 막힐 듯 강한 향기를 떠올리면, 또다시 온몸엔 소름이 돋았다. 세상 끝에서라도 양팔을 뻗어 자신을 지켜줄 거라 생각했던 든든한 울타리가……이렇게 속절없이 너무도 쉽게 무너질거라고는…….
비집고 흐르는 눈물을 막으려 정연은 다시 눈을 감았다. 추호라도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되겠지만……그래도 자꾸만 머리에서 입으로 부르라 부추긴다.
"죽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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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끝내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오는 승화는 쉽게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미리 차를 꺼내와 대기 중이던 형우 역시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어라?하며 절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엔 드문,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는 보기 좋게 열린 뒷문으로 올라탔다.
"회사로 들어갈까요?"
"어,그래. 아참! 정 실장 식사는?"
"예? 아, 근처 국밥집에서 해결했습니다."
"음, 그러지 말고 다음부터는 그냥 우리 자리에서 함께 먹는 걸로 해."
"예? 하하……아니 그래도……."
"오늘 날씨 한 번 끝내주는군. 출발하지?"
"아……예."
표정이랑 행동을 봐서는 분명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긴 건 분명한데 말이지……과연 그게 뭘지?에 궁금증을 품으며 형우는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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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화를 먼저 보낸 후 현주와 운진 내외는 남아 가벼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허허,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왜요, 당신이 보기에도 믿기지 않을 만큼 우리 승화가 많이 성장한 거 같아서요?"
"건강 때문에 할 수 없이 회장직에서 서둘러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사실 녀석에게 모든 걸 무작정 맡긴다는 점에선……여간 못 미더웠던 게 사실이니까."
"실은 저 그 아이 본 적 있어요."
"그 아이라면……."
"승화가 맘에 두고 있다는 그 아이요."
"흠, 일단 성은양 다음으로 관심을 둔 아가씨라는 점에서는 달가워할 일이지만."
"당신 해외에서 요양하는 동안에, 잠깐씩 짬 내서 그곳에 봉사활동을 몇 번 다녀왔었거든요. 주 원장님 돌아가시고 빈소에서도 마주친 적 있구요."
승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연에 대해 설명하는 현주 역시 정연에 대해 설명하며 시종일관 밝은 표정을 자아냈다.
"그러니까 당신 생각은……."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 아들 짝으로 만들기엔 너무 아까운 아가씨라 미안해진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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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부터 서울을 비롯한 경기권 일부 지역에 강한 폭설이 예상되는 가운데……'
회의가 끝난 후 DMB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던 승화는 지루함에 하품을 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했다. 젠장. 아직도 퇴근시간이 되려면 2시간이나 더 남았다니. 얼른 가서 이 뿌듯한 소식을 정연에게 전해야겠다는 의욕 때문에 단단히 안달이 나있는 터라, 승화는 더디게만 흘러가는 시간이 마냥 야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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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그냥 여기서 우리랑 같이 자면 안돼?"
"언니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 꼭 할 일이 있어서……나중에 아주 나……아, 이제 민지도 얼른 자. 다른 애들은 벌써 다 잠들었잖아."
"응. 언니두 굿나잇."
"그래……민지도 잘자구……좋은 꿈 꿔……."
귀엽게 굿나잇을 말하는 아이를 잠시 안쓰럽게 내려다보며, 정연은 무거운 대답을 남기며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더디고 무거운 걸음을 다시 자신의 방으로 옮겼다. 또다시 문을 잠가 걸고선, 살아생전 현복이 잠이 오지 않을 때 한 알,두 알 챙겨 먹던 수면제 통을 주머니에서 꺼내 한참 내려다봤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 하지만 이내 결심하듯 다시 한 번 눈을 질끔 감았다 뜨며, 미리 준비해둔 편지지와 펜이 있는 책상 앞에 몸을 앉힌다. 눈빛만큼이나 잘게 떨려오는 손에 쥔 펜. 잠시 서글픈 듯 흐려진 그녀의 눈동자를 대신해, 쥐고 있던 펜이 스삭스삭 글을 옮겨 적는다.
사랑하는 오빠……로 시작되는 정연의 마지막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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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 내린다는 기상예보를 들었음에도, 승화는 하루를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녀 앞에서 맹세를 했다. 앞으론 무조건 평생 지켜주겠다고. 그런 자신의 진심이 단순한 말뿐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오늘 꼭 전해야만 했다. 그녀에게.
앞유리 창을 쉴 새 없이 와이퍼가 반복해 닦아내지만, 금세 또다시 쏟아진 눈 때문에 시야는 막혀버리고 만다. 거기다가, 교통체증 탓에 아까부터 도로는 정체되어 차들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십여 분째 멈춰 있었다.
"회장님, 아무래도 오늘은……."
"안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꼭 해줘야 할 말이 있어. 아 근데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낮부터 통화가 되지 않는 정연의 전화에 또다시 전화를 걸며, 승화는 다그치듯 대꾸를 하며 끝내 고집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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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잠결에 악몽을 꿔 이불에 오줌을 지려, 민지네 방은 다시 불이 켜졌다. 일단 아이의 내복과, 속옷을 따로 챙겨 놔두고선 침착하게 민지는 정연을 깨우고자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똑.
"언니, 새희가 이불에 쉬야했어. 얼른 나와봐."
똑똑똑.
"언니 자? 정연언니~"
똑똑똑.
"으으, 추워. 언니~ 정연언니!"
작은 손으로 계속해 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깨워보지만, 어쩐 일인지 안쪽에서는 전혀 정연의 움직임이 들려오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