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지명사(蔚山地名史)는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신 울산 출신 이유수(李有壽) 선생이 1986년에 펴낸 책입니다.
책은 신간서적도 좋지만 조금 묵은 책들 중에도 훌륭한 책이 많습니다.
그리고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자는 자신이 태어난 고장의 지명들을 연구하면서 어원분석(語源分析)을 시도하였습니다.
나름 훌륭한 시도를 하였는데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지명연구에 있어서 정에 끄달리지 말고 냉철한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꽤 두툼한 책으로 지금 보아도 참고할 부분이 많으나 유감스럽게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곳곳에 오류(誤謬)도 보입니다.
오래전 책을 두고 시비하는 것은 비겁한 일 아니냐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비판 달게 받겠습니다.
약간의 토(吐)를 달아 보았습니다.
울산(蔚山)은 충주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로 재미있게도 충주에 달천(達川)과 검단(檢丹)이 있는 것처럼 같은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으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ex) 울산시 북구 달천동,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비교가 되기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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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명사(蔚山地名史)】 / 이유수(李有壽) 편저(編著)
울산문화원 · 울산시 1986년 발행
p283 ~ p286
9. 달천리(達川里)
달천리(達川里)는 이미 조선 세종 때에도 달천리(達川里)라 하여온 퍽 오래된 마을이다. 1)
「달내」라고 하는 본 뜻은 쇠를 달구는 터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이 곳에 달내라는 내가 있으므로 내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이 생긴 것으로 봅니다.
한자는 뜻글자입니다. <달내>를 한자 <달천(達川)>으로 옮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충주시 수안보면 고운리(古云里)를 살펴보면, 구름 운(雲)자를 획수를 줄여 운(云)자로 쓰기도 하므로
정확히 그 뜻은 몰라도 <옛 고(古) + 구름 운(雲 ---雲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지대가 높은 곳이 많습니다)>자를 새기면 <오래되고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울산지방에서는 달(達)자가 붙은 곳은 다 쇠와 관계가 있다고 전해오며 이 달(達)이 달(月)로 변한 곳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달(達)」의 본 뜻은 「山 ·高· 峰」 등에 있는 것이며 일본어 다께(峯)와도 같은 것인데, 중앙아시아를 거쳐 터어키까지의 산명(山名)에 남은 알타이어 계통의 말이라고도 한다 (박시인교수 일본신화(朴時仁敎授 日本神話) --- 『알타이 신화』를 말하는 듯 )
檀君王檢立都阿斯達(단군왕검입도아사달) (遺事古朝鮮(유사고조선))
蘭山縣 本高句麗 石達縣(난산현 본고구려 석달현) (三國史記地理二(삼국사기지리이))
高城郡 本高句麗 達忽 (고성군 본고구려 달홀) (三國史記地理二(삼국사기지리이))
高烽縣 本高句麗 達乙省縣(고봉현 본고구려 달을성현) (三國史記地理二(삼국사기지리이))
高木根縣 一云 達乙斬(고목근현 일운 달을참) (三國史記地理四(삼국사기지리사))
「達」이 「山 · 高」 등에 대응되는 용례를 위에서 보았거니와 이 「達」은 뒤에는 산아래의 평지에도 붙는 경우를 보는 것이니 울산시의 달동(達洞)은 그 한 예이기도 하다.
--- 달(達)자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익숙한 한자입니다.
저자가 <달(達 )>을 <山, 高, 峰> 등으로 한정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사달의 <달>은 도읍을 아사달이란 곳에 세웠다는 것을 감안하면 들판(原), 대지(地)의 뜻으로 새기는 것이 문맥에 맞을 겁입니다.
달(達)자를 하늘의 달(月)을 한자로 음표기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달(達)자는 현대표준일본어로는 <다쯔, 다찌>로 발음하며, 현대표준중국어에서는 간체자(簡體字) 달(达)자로 줄여 쓰고 길게 <다아>로 발음합니다.
천자문에서 땅 지(地)자를 <따 지>로 읽는 것을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텐데 한자 지(地)는 현대표준중국어로 길게 <띠이>로 발음합니다.
우리말에서 끝을 <다>로 맺는데(예, 수많은 말과 문장에서 ~~다) 한자 달(達)은 <통하다, 이루다>의 뜻이 있는 것을 보면 <다>라는 말은 고대중국말에서 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말의 상당수는, 심지어 순우리말이라고 생각하는 말까지도 고대중국어의 한국식 방언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데, 오랜 세월이 흘러 그 근본 뜻(語源)을 잃어버렸다고 생각됩니다.
참고)
진한(辰韓)[또는 진한(秦韓)이라 함]
『후한서』에서 이르기를 “진한의 늙은이가 스스로 말하기를 ‘진의 망명인들이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어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 하며, 진나라의 말과 유사하므로 혹은 그것을 이름하여 진한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12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각각 만 호씩으로 국이라 칭하였다. 또한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의 사람들이 망명한 것이기 때문에 탁수의 이름을 취하고 살고 있는 읍리를 사탁・점탁 등으로 칭한다”고 하였다.[신라인의 방언에 탁을 도로 읽기 때문에 지금은 혹 사량이라 쓰고 양 또한 도라고 읽는다] 신라전성기 서울에는 17만 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개의 급입택(金入宅)[부윤한 큰 집을 말한다]이 있었다. 남택(南宅), 북택(北宅), 우비소택(于比所宅), 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본피부(本彼部)], 재매정택(財買井宅)[김유신공의 조종(祖宗)],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반향사(反香寺)의 하방(下坊)], 대택(隊宅), 빈지택(賓支宅)[반향사(反香寺) 북쪽],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상택(楊上宅)[양부(梁部)의 남쪽], 한기택(漢歧宅)[법류사(法流寺) 남쪽], 비혈택(鼻穴宅)[위와 같다], 판적택(板積宅)[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 별교택(別敎宅)[천(川)의 북쪽], 아남택(衙南宅), 김양종택(金楊宗宅)[양관사(梁官寺)의 남쪽], 곡수택(曲水宅)[천(川)의 북쪽],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이남택(里南宅)[우소택(于所宅)], 사내곡택(思內曲宅), 지택(池宅), 사상택(寺上宅)[대숙택(大宿宅)], 임상택(林上宅)[청룡이라는 절(靑龍之寺)의 동쪽에 연못이 있다], 교남택(橋南宅), 항질택(巷叱宅)[본피부(本彼部)], 누상택(樓上宅), 이상택(里上宅), 명남택(椧南宅), 정하택(井下宅)이 있다.
(『삼국유사』권1 기이1 진한)
辰韓[亦作秦韓]
後漢書云 辰韓耆老自言 秦之亡人 來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十二小國 各萬戶 稱國 又崔致遠云 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云沙涿漸涿等[羅人方言 讀涿音爲道 故今或作沙梁 梁亦讀道]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 一千三百六十坊 五十五里 三十五金入宅[言富潤大宅也] 南宅 北宅 于比所宅 本彼宅 梁宅 池上宅[本彼部] 財買井宅[庾信公祖宗] 北維宅 南維宅[反香寺下坊] 隊宅 賓支宅[反香寺<北>] 長沙宅 上櫻宅 下櫻宅 水望宅 泉宅 楊上宅[梁南] 漢歧宅[法流寺南] 鼻穴宅[上同] 板積宅[芬皇寺上坊] 別敎宅[川北] 衙南宅 金楊宗宅[梁官寺南] 曲水宅[川北] 柳也宅 寺下宅 沙梁宅 井上宅 里南宅[于所宅] 思內曲宅池宅 寺上宅[大宿宅] 林上宅[靑龍之寺東方有池] 橋南宅 巷叱宅[本彼部] 樓上宅 里上宅 椧南宅 井下宅
[네이버 지식백과] 점탁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그러면 우리가 쓰는 <땅>이란 말도 중국표준말로 <띠이>라고 발음하고, 한국에서는 예전에 <따>라고 발음했으므로 중국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오랜 세월 언어분화가 이루어진 결과 <아사달>이라 할 때 <달>자는 <땅>의 뜻이라 하므로, 위에서 일본어와 중국어로 예를 든 것처럼 한번 達자를 <다>로 읽어보면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왜 <달(達)과 달을(達乙)>로도 표기했는지 이해가 갈 것입니다.
달을(達乙)은 <다알, 달>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達」이 「山 · 高」 등에 대응된다고 했는데 <땅(達)이 불룩 높이(高) 솟은 곳이 산(山)이므로 그 의미가 확대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달(達): 오래전 다, 다아, 따, 따아로 발음. ---> 한자 地에서 우리말 땅(따로 발음)음이 나옴.
---> 달(達)자로 우리말 지명 땅(地)자를 표기 ---> 산(山) 과 고(高)의 뜻으로도 의미분화.
이 부분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래전 우리 조상들은 삼한(마한, 진한, 변한) 등에서 살았는데 일본에서 도래인(渡來人)이 그렇듯 한반도는 중국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대륙의 정치적, 사회변동에 따라 수많은 이주민(移住民)이 이 땅으로 옮겨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이들 우리 조상들은 <땅>음을 천자문을 보듯 <따 地 중국발음 띠이 >음을 참고하면 <다, 다아, 된소리 따, 따아>에 가깝게 발음했습니다. 물론 당시 중국현실음의 반영(反映)입니다.
그리고 달(達)은 중국상고음(中國上古音)으로 장음(長音) <다아>에 가깝다고 추정하면 우리 옛조상들은 한자 達을 빌려 우리말 땅(地)을 표기했습니다. 이것이 이두(吏讀)입니다. 달(達)로 쓰고 <다, 따>로 읽습니다. 그러면 아사달(阿斯達)은 <아사다, 아사따>로 읽을 수 있고 <達忽>, <達乙斬>은 <다홀, 따홀>, <다알참, 따알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법이지 음성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실제로 어떻게 발음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현재 충주시 살미면(乷味面)이라 쓰지만 조선 영조때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海東地圖)를 보면 <沙乙未面>으로 쓴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도 노인층에서 길게 <사알미>로 빼어 말하는 것을 감안하면 원말은 <사알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말에서 사람이름이나 사물의 이름은 세 글자가 많은데 음을 세 글자로 맞추기 위한 자연스러운 말버릇에서 연유한 것으로 삼(三)이란 숫자는 안정감을 줍니다.
논점(論點)에서 벗어나는데 선(線)이 세 개가 모여야 면(面)이 만들어져 삼각형(三角形)이 되고 무게중심(center of gravity)이 생기는데 힘(力)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거창하게 경험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삼(三)이란 숫자가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그 해석이 다들 분분하지만 이두(吏讀)라면 지명을 한자로 옮길 때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뜻옮김 + 음옮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충주시 살미면의 살미(乷味)의 원형이 사을미(沙乙未)이므로 모래사(沙)자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위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이 『삼국사기』 지리지 달을성(達乙省), 달을참(達乙斬)을 <다알성, 다알참>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을미(沙乙未)는 사알미(沙乙未)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알미(沙乙未)를 더 쪼개어 사알(沙乙) + 미(未)로 읽는다면 뒷글자를 무시하고 앞글자 사알(沙乙)을 <뜻옮김> + <음옮김>로 한번 더 분석하면 모래를 <모새 혹은 모사, 이 때의 사는 모래 沙>라고 하므로 <모래알>이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사알미(沙乙未)가 살미(乷味)로 표기가 바뀐 것은 과연 어느 때부터인가 입니다.
위에서 살핀 것과 같이 <아버지, 어머니>처럼 음을 세 글자로 맞추기 위해서 면(面)이란 말이 뒤에 붙으면서라고 추측할 수 있고 조선조때 면리제(面里制)의 시행과 밀접하다고 봅니다.
살미면 사는 주민에게 어디 사냐고 물으면 <사알미 산다>고 하고 어느 면에 사느냐고 물으면 <살미면 산다>고 하지 않을까요?
국어학자들은 어떤 한국말을 순우리말 혹은 고유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분들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말이 한자와 중국말에서 왔습니다.
말을 바꿔 봅니다. 인터넷으로 일본어를 들으면 다른 말도 많지만 한국말로 추정되는 말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현대 중국인이 한국말을 들으면 많을 것입니다.
「내」를 물이 흐르는 내(川)로 보는 것 보다는 터전에서 찾음이 옳을 줄 생각된다.
옛날 인간이 산 속에서 채집생활을 하여 오다가 차차 산에서 내(川)를 따라 내려와서 냇가에서 살게되매 사람이 사는 터전은 내(川)라 하였으며 이 내(川)는 내(壤)로도 변해 갔다.
그러므로 울산에서는 천(川)과 관계가 없는 성안(星安)의 「새일내」, 두서(斗西)의 「수중내」, 두동(斗東)의 「하일내」, 삼남(三南)의 「덜내」 등이 있어 이것은 다 사람이 사는 터전 또는 땅, 마을을 뜻하고 있다.
--- 여기서 주의할 것은 흔히 안팎(內外)라고 할 때의 안(內)은 지명에서 안(安)자로 표기합니다. 그러면 위에서 예를 든 「성안의 새일내, 두서의 수중내, 두동의 하일내, 삼남의 덜내」의 <내>는 안(안 내內)의 뜻으로 볼 수 있고 저자의 주장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터넷으로 지도를 살펴보면 울산시 중구 성안동,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 모두 분지(盆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
주1. 世宗實錄地理志 慶尙南道 蔚山郡 : 鐵場在郡北達川里 産白銅鐵 水鐵 生鐵 歲貢生鐵 一萬二千五百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남도 울산군 : 철장재군북달천리 산백동철 수철 생철 세공생철 일만이천오백근). --- 세공(歲貢)은 일년에 나라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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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골(萬石谷)
달내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여기에 만석꾼이 살았다고 전한다.
만(萬)은 골(谷)의 뜻도 가지는 것이니 「돌골」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나 생각되며 이곳은 돌이 많은 곳이다. --- 만(萬)은 많다(多)는 뜻을 가지므로 「돌이 많은 골짜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뒷마을
본마을의 뒷편에 있는 마을이다.
○쇠곡
철광산이 있는 마을을 쇠곡(鐵谷) 또는 쇠굿이라고도 한다. 쇠굿이라고 하는 굿은 구덩이가 줄어 소리 바뀐 말이다. 달내의 철광이 노천광이라 할지라도 골골(谷谷)마다 땅굴처럼 파헤쳐져 있었으므로 이곳은 쇠구덩이라 한 것이 변해서 쇠굿이라 한다. --- 베를 만드려면 삼을 쪄야 하는데 임시로 만든 구덩이를 삼굿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덕골(進德谷)
마을에 있는 산등이 길고 크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진」은 「긴」이며 「진」의 차음(借音)을 한 것이 진(進)이며 덕(德)은 큼을 뜻하는 말이다.
○달천산(達川山)· 망제산(望祭山)
달천산(達川山)이라 하면 망제산(望祭山)을 말하는 것이다. 달천산(達川山)은 그 주령(主嶺)인 천마산(天馬山)이 남으로 뻗어 달내의 주산(主山)을 이루고 있다.
달천산(達川山)의 앉음새가 임자방(壬子方)이라하여 주택의 방위도 임자방을 택한다고 한다. --- 임자방(壬子方)은 풍수(風水)에서 음택(陰宅), 양택(陽宅)을 중심으로 뒤편 머리를 두는 곳을 말합니다. 즉 정북(正北)을 말하는 것으로 정남향(正南向)을 향해 자리(座)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망제(望祭)라 하는 것은 산신제(山神祭)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망(望)이 산신으로된 용례(用例)를 몇 곳에서 볼 수 있다.
有國已來 常爲三祀之一 秩在群望之山 (三國遺事 卷第五 仙桃聖母隨喜佛事)
유국이래 상위삼사지일 질재군망지산 (삼국유사 권제오 선도성모수희불사)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원문)
三國遺事卷第五 感通第七 114 선도성모 수희불사(仙桃聖母 隨喜佛事)
114 선도성모 수희불사(仙桃聖母 隨喜佛事)
眞平王朝(진평왕조) : 진평왕(眞平王) 때
有比丘尼名智惠(유비구니명지혜) :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多賢行(다현행) : 어진 행실이 많았다.
住安興寺(주안흥사) :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擬新修佛殿而力未也(의신수불전이력미야) :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夢一女仙風儀綽約(몽일여선풍의작약) :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珠翠飾鬟(주취식환) :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來慰曰(래위왈) : 그를 위로해 말했다.
我是仙桃山神母也(아시선도산신모야) :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喜汝欲修佛殿(희여욕수불전) :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願施金十斤以助之(원시금십근이조지) :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宜取金於予座下(의취금어여좌하) :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粧點主尊三像(장점주존삼상) :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壁上繪五十三佛(벽상회오십삼불) : 벽 위에는 오십삼불과
六類聖衆(륙류성중) : 육류성중(六類聖衆)
及諸天神(급제천신) : 및 모든 천신(天神)과
五岳神君(오악신군) : 오악(五岳)의 신군을
(羅時五岳(나시오악) : (신라 때의 五岳은
謂東吐含山(위동토함산) : 동의 토함산,
南智異山(남지리산) : 남의 지리산,
西雞龍(서계룡) : 서의 계룡산,
北太伯(배태백) : 북의 태백산,
中父岳(중부악) : 중앙의 부악,
亦云公山也(역운공산야) : 또는 공산이다))
每春秋二季之十日(매춘추이계지십일) :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叢會善男善女(총회선남선녀) :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廣爲一切含靈(광위일절함령) :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設占察法會以爲恒規(설점찰법회이위항규) :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
(本朝屈弗池龍(본조굴불지룡) : (본조 屈弗池의 용이
託夢於帝(탁몽어제) : 황제의 꿈에 나타나
請於靈鷲山長開藥師道場(청어령취산장개약사도장) : 영취산에 낙사도장을 영구히 열어
平海途(평해도) :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其事亦同(기사역동) :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惠乃驚覺(혜내경교) :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率徒往神祠座下(률도왕신사좌하) :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堀得黃金一百六十兩(굴득황금일백륙십량) : 황금 160냥을 파내어
克就乃功(극취내공) :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皆依神母所諭(개의신모소유) :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其事唯存(기사유존) :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而法事廢矣(이법사폐의) :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神母本中國帝室之女(신모본중국제실지녀) :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名娑蘇(명사소) :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早得神仙之術(조득신선지술) : 일찍이 신선의 술법(術法)을 배워
歸止海東(귀지해동) : 해동(海東)에 와서
久而不還(구이부환) :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父皇寄書繫足云(부황기서계족운) : 이에 부황(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隨鳶所止爲家(수연소지위가) :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蘇得書放鳶(소득서방연) :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飛到此山而止(비도차산이지) : 이 선도산(仙桃山)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遂來宅爲地仙(수내댁위지선) :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故名西鳶山(고명서연산) : 때문에 산 이름은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
神母久據玆山(신모구거자산) :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면서
鎭祐邦國(진우방국) : 나라를 진호(鎭護)하니
靈異甚多(령리심다) :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有國已來(유국이내) :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常爲三祀之一(상위삼사지일) :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秩在群望之上(질재군망지상) :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第五十四景明王好使鷹(제오십사경명왕호사응) :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嘗登此放鷹而失之(상등차방응이실지) :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禱於神母曰(도어신모왈) :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若得鷹(야득응) :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當封爵(당봉작) :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俄而鷹飛來止机上(아이응비내지궤상) :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因封爵大王焉(인봉작대왕언) :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其始到辰韓也(기시도신한야) :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生聖子爲東國始君(생성자위동국시군) :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蓋赫居閼英二聖之所自也(개혁거알영이성지소자야) :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故稱雞龍雞林白馬等(고칭계룡계림백마등) :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雞屬西故也(계속서고야) :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嘗使諸天仙織羅(상사제천선직라) : 성모는 일찍이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緋染作朝衣(비염작조의) : 붉은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贈其夫(증기부) : 남편에게 주었으니,
國人因此始知神驗(국인인차시지신험) :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
又國史(우국사) : 또 <국사(國史)>에 보면,
史臣曰(사신왈) :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軾政和中(식정화중) : "김부식(金富軾)이 정화(政和) 연간에
嘗奉使入宋(상봉사입송) :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詣佑神館(예우신관) :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有一堂(유일당) : 한 당(堂)이 있는데
設女仙像(설녀선상) : 여선(女仙)의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
館伴學士王黼曰(관반학사왕보왈) :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보)가 말하기를,
此是貴國之神(차시귀국지신) :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公知之乎(공지지호) :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遂言曰(수언왈) :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古有中國帝室之女(고유중국제실지녀) : “옛날에 어떤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泛海抵辰韓(범해저신한) :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生子爲海東始祖(생자위해동시조) :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女爲地仙(녀위지선) :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長在仙桃山(장재선도산) :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此其像也(차기상야) :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又大宋國使王襄到我朝(우대송국사왕양도아조) :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에 와서
祭東神聖母(제동신성모) :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지낼 때에
文有娠賢肇邦之句(문유신현조방지구) :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今能施金奉佛(금능시금봉불) :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爲含生開香火(위함생개향화) :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香火法會)를 열어
作津梁(작진량) :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豈徒學長生而囿於溟濛者哉(기도학장생이유어명몽자재) :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術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랴.
讚曰(찬왈) : 찬해서 말한다.
來宅西鳶幾十霜(내댁서연기십상) : 서연산에 와서 몇십 년이나 지냈는가.
招呼帝子織霓裳(초호제자직예상) : 천제의 여인 불러 예상을 짰었도다
長生未必無生異(장생미필무생리) : 길이 사는 법도 이상한 일 없지 않았지만
故謁金仙作玉皇(고알금선작옥황) : 그대서 금선 뵙고 옥황이 되었노라네
[출처] <三國遺事卷第五 感通第七 114 선도성모 수희불사(仙桃聖母 隨喜佛事) |
---여러 망제(望祭)의 위에 있었다가 올바른 해석입니다. 한문 특유의 표현으로 망지산(望之山)은 망제지산(望祭之山)의 줄임말입니다.
저자는 망(望)자를 달리 해석하나 한자 망(望)은 <보름 망, 바랄 망>의 뜻이 있는데 망제(望祭)는 예전 임금이 명산대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정상에 오르기는 한계가 있으니 바라보고 지내는 것이므로 망제라 한 것입니다. 벼슬아치가 임금님이 계신 궁궐을 향해서 초하루와 보름날 지내는 제사를 삭망제(朔望祭)라 합니다.
그러므로 망산(望山)은 망제산(望祭山)입니다.
其望山神曰戒邊 以赫靈降嘏 血食 至今以鎭于州(輿覽 蔚山郡 古跡 古邑城)
기망산신왈계변 이혁령강하혈식 (여람 울산군 고적 고읍성)
그곳 망산(望山)의 신을 계변(戒邊)이라 하는데, 혁혁한 신령이 복을 내리므로 혈식(血食)해서 지금까지 이 고을을 진압하고 있다.
-- 울산시에 예전에 계변성(戒邊城)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래 첨부한 글 참조.
이 부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군 <고적> 항목에 나오는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피 묻은 산짐승을 잡아 제사(祭祀)를 지낸데서, '나라의 의식(儀式)으로 제사(祭祀)를 지냄'을 이르는 말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섭세(陳涉世家)가에 나오는 말임.
高祖時爲陳涉置守塚三十家碭,至今血食。<陳涉世家>
「계변고개
위치
울산광역시 > 중구
울산광역시의 중구 복산동에 위치한 고개이다. 계변(戒邊)은 계변성(戒邊城)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울산)에는 "좌도병마절도사영(左道兵馬節度使營)은 계변성(戒邊城) 북쪽에 있으며 곧 옛 고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울산의 고호(古號) 중에는 개지변(皆知邊) 또는 계변성(戒邊城)이 있는데, 이는 '갯가' 또는 '갯가에 있는 성(고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복산동 울산성당 뒤편 조그만 언덕길을 계비고개 혹은 계변고개라고 부르는데, 조선시대까지는 울산과 병영을 잇는 큰 길이었다고 한다. 계변성은 지금의 학성공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계변고개 [戒邊-, Gyebyeongogae]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 12., 국토지리정보원)
달내에서 토철을 채굴해서 쇠불이를 하는 데는 그 성공을 쇠불이의 신에게 빌었을 것이고 그 신의 안주처가 이 망제산이었을 것이다. --- 쇠불이는 쇠를 불린다는 말인데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물에 불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고체가 액상(液狀)이 되었을때 부피도 늘어납니다. 쇠를 불린다는 것은 쇠를 녹인다는 말인데 그 부피도 늘어나게 되고 흐르게 됩니다.(유동성(流動性)을 갖게 됨) 지금은 <쇠부리> 혹은 <쇠부리터>라는 경상도 방언이 학술용어로 자리잡았습니다. 송촌(松村) 지석영(池錫英)이 펴낸 『자전석요(字典釋要)』를 보면 <鎔 용 鑄也, 銷也. 불리다, 부어 만들다, 녹이다>라고 나옵니다.
달천산에서 쇠를 채굴하여 제련하고 이를 나라에 공납한 기록과 철장관을 군수가 겸직하였던 기록을 적어둔다.
鐵場 在郡北 達川里 産白銅鐵 水鐵 生鐵 歲貢 生鐵一萬二千五百斤 (세종실록지리지 울산군)
철장 재군북 달천리 산백동철 수철 생철 세공 생철일만이천오백근 (세종실록지리지 울산군)
주2. 主山이라 함은 風水地理說에서 나온 말로 묘자리나 都邑의 운수가 매었다는 山인데 주로 北쪽에 位置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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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貢 正鐵四伯七十九斤 郡北達川山 産水鐵 品下 (慶尙道續撰 地里誌)
王旨 李從周 爲通政大夫 知蔚州事兼勸農 兵馬團煉使 蔚州鐵場官者
建文元年 正月 二十六日
※蔚山市 福山洞 539-3 李玹泰所藏 建文元年은 定宗1年(1399年)
한편으로 망제산(望祭山)을 망제산(望帝山)으로도 보고 있다.
○새밭등(鳥田嶝)
달천산의 동쪽 봉우리를 새밭등이라 한다.
---새는 모이를 적게 먹으므로 소출이 새모이만큼 적게 나오는 밭떼기가 있는 등성이란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봉우리를 말하고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가 억새라고 하는 풀은 과거에 줄여 <새>라 말했는데 지난시절 농촌에서 지붕을 이는데 쓰임새가 많았고, 어떤 식물이 모여 많이 자라는 곳을 밭이라 표현하므로 <새(풀)가 많이 자라는 산등성이>의 뜻입니다.
예) 참나무밭, 으름밭, 억새밭.
○천마산(天馬山)
말이 하늘로 오르는 모양을 한 산세라하여 천마산(天馬山)이라 한다고도 전해온다. 일명 천전봉(天傳峰)으로도 불러 온 것을 본다면 마(馬)는 뫼(山)로 보아 천정같이 높은산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북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천마(天馬)는 날개달린 말을 말하며 마(馬)를 뫼(山)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 봅니다.
○상아산(尙牙山)
두산리(斗山里)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224m의 산이다.
○퉁뫼산
대한철광이 채광하고 있는 속칭 신광산이다. 「퉁」은 품질이 낮은 놋쇠, 「뫼」는 산이니 동산(銅山)이라는 말이며 지금 사문석과 퉁이 난다.
--- 한자 동(銅)은 현대표준중국어로 <토옹>이라 발음합니다. 퉁은 중국말 동(銅)에서 나온 말입니다.
○절터구미
옛날 신라 고찰이 있었다고 한다.
구미라고 하는 것은 굼턱지다하는 말인데 절터에 절터구미라 하는 말이 많다.
○사창(社倉)들
농서면(農西面) 때의 사창(社倉)이 있었음으로 사창(社倉)들이라 한다. 사창(社倉)은 이조 때의 구휼(救恤)기관의 하나이며 농서국민학교의 남쪽에 있다.
○달천철광(達川鐵鑛)
달천(達川)의 쇠는 그 기원을 멀리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에 비친 변진(弁辰)의 쇠는 북쪽으로는 동예(東濊)와 대방(帶方), 낙랑(樂浪)으로 남으로는 바다 건너 왜(倭)에까지 공급되었다고 한다.
주3. 三南面의 水石寺址, 彦陽面의 連高寺址를 다 절터구미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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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쇠는 마치 화폐와 같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달내의 쇠도 이미 그때부터 개발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달내에 철장(鐵場)이 있어서 백동철(白銅鐵)과 수철(水鐵), 생철(生鐵)이 생산되어 해마다 세공(歲貢)하기를 생철 1만2천5백근을 하였다. 이 철장(鐵場)은 울산군수가 철장관(鐵場官)의 직을 겸하는 관영철광이었다.
그 뒤에 한동안 폐광하였던 것을 두서면(斗西面) 전읍리(錢邑里) 출신 구충당(求忠堂) 이의립(李義立)이 재발견하여 일제초기까지 개발하고 있었다.
인조(仁祖) 21년(1643년)에 구충당(求忠堂)은 나라 일에 병사(兵事)와 농사보다 더함이 없으며 조총(鳥銃)과 화약은 유황(硫黃)이 없으면 안되고 솥과 농기구는 무쇠가 없이는 만들 수가 없음을 통감하였다.
그러나 둘 다 나라 안에서는 생산됨이 없으니 이것을 찾아 나라에 충성하리라 하여 치술령(鵄述嶺)에서 치술신모(鵄述神母)에 백일 기도하고 그 길로 집을 떠나 남으로는 지리산에서 북으로는 백두산(白頭山)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누비듯 밟기 14년의 각고끝에 효종(孝宗) 8년(1657년) 1월 달내의 달천산에서 무쇠를 다시 찾아 내었다. --- 구충당 이의립을 미화하고 있습니다. 울산시 북구청 광장에는 이 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울산쇠부리축제의 구심점이 되는 분입니다.
그 후, 이곳의 토철을 파서 연료를 따라 전전하며 쇠불이를 하여 지금도 멀리는 청도(淸道) 땅까지 가까이는 울산시에 이르도록 90여개소의 쇠불이터를 남겨 놓고 있는데 울산시에는 화봉동(華峰洞)의 서당골과 무거동(無去洞)의 산막골(山幕谷)에 그 터가 있었다.
이러한 수공업방식의 생산에 의존하던 쇠불이업도 일본의 대량생산에 밀려서 다 도산하고 구충당(求忠堂) 의 후손이 가졌던 철광산도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아래 울산시 북구 달천동과 충주시 달천동 일대 예전 지도
아래 충주시 달천동 일대 예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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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와 울산시의 동일성지명등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역사공부 잘했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