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67)
겨울꽃 피고 봄꽃 찬란히 피어라 /곽재구
나는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외로울 때가 좋은 것이다
물론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충분히 견뎌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아파하고 방황한다
이점 사랑이 찾아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사랑이 찾아올 때
그 순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사랑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호젓이 기뻐하며
자신에게 찾아온 삶의 시간들을
충분히 의미 깊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겨울 계곡 /홍금자
고독으로 일어서는
겨울 계곡
안개속에서
그대 그리움의 몫까지
뒤척이고 있다.
추운 잠속에서
그날의 아픔을 삭이며
날마다 허물을 벗듯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검은 회색빛
바위 틈새로
아직은 이른 기지개 펴며
빛살 너머
여린 풀들은
흔들리고 있는데.
겨울 폐가 /서영택
보름달이
시린 발을 눈 속에 푹, 푸욱 담은 채 오들오들
해안 경계선에서 보초를 선다
한파를 못 견딘 늙은 별들은
저체온에 동사하였고 눈치 빠른 별들은 몸을 녹이려
주인 없는 폐가를 찾는다
구안와사에 걸린 마루가 삐걱거리며 구멍 뚫린 천정을
올려다본다
차가운 구들 위 넘어진 양말 한 켤레가 따뜻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끼어들고
여독 풀리지 않은 바람이 끄덕끄덕 안방을 넘나든다
힘겹게 매달려 있던 녹슨 경첩이 풀썩, 문짝을 내려놓는다
몸을 녹이려고 바람을 따라 손님이 들어온다
별이 깨진 술잔에 잠들어 있다
겨울 폐가는 취해야 잠든다
겨울 산행 /홍경애
저 멀리
산중턱을 괴고
수평으로 누워있는
거대한 산등성이는
지독한 몸살을 앓아
겨울 산행을 가로막고
속살을 허옇게
드러내고 있는 나목은
설산 속에서
사시나무 떨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벌써 석양은
계곡 한 켠 수면에서
살얼음 딛고
깊은 산행이 한창이다.
겨울의 노래 /서정윤
겨울입니다.
내 의식의 차가운 겨울
언제라도 따스한 바람은 비켜 지나가고
얼음은 자꾸만 두터운 옷을 껴입고.
한번 지나간 별빛은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지는 곳은
너무 깊은 계곡입니다.
바람이 긴 머리를 날리며 손을 흔듭니다.
다시는 시작할 수 없는
남루한 의식의 겨울입니다.
이제 웅크린 기침만
나의 주위에 남았습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이
아직도 계속입니다.
겨울소묘 /강재남
채마로 일구던 남새밭
감나무 한 그루 앙상한 팔다리로 항변하듯 선 자리
바람이 손톱 세워 마른땅 할퀴고
돌멩이들 하얗게 버짐처럼 널려있다
함부로 버려진 계절 앞에
옷 한 벌 푸르게 지어줄 양 겨울배추 씨 뿌린다
찬바람에 맛들이며 저 배추 자양분 키울 테고
지나가는 겨울비 안부쯤 물어주시려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도 보리라
성급한 생각이 입꼬리 적시는데
호미 끝으로 피어오르는 흙냄새 포슬하다
이런 날 더듬지 않아도 지난날이 따라오고
어느 굽잇길 철없이 버린 그립고 소중한 것들
덩달아 일어선다
생각하면 신산하고 쓸쓸한 생
내 삶은 늘 울음 아니면 울고 싶은 날
어쩌면 나는 이런 길로만 잘도 다녔을까
흙 다독이는 손길아래 머잖아 싹이 트고
튼실한 포기 물오르면
내게도 어딘가 깊고 먼 곳 다녀온 낯익은 봄 찾아오겠다
겨울 詩 /홍해리(洪海里)
죽을 줄 모르고 살던
꿈 같은 시절도
이제 낙엽이 쓸고 간 산하
눈이 내리고 …
서산으로 날아가는
이름없는 새 한 마리
해 지고 달 오르면
다시 접는 마음자락
어둠만 겹겹이 차
이름 하나 지우다.
지난 겨울 이야기 /藝香 도지현
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고
계절을 건너간 뒤
모든 것은 암울했다
그것으로
영원한 이별이라 생각했고
나만 나신으로 남아
세상 끝이라 낙심했었지
계절은 언제나 환희롭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간절히 염원한 것은
누군가가 그랬다, 이루어진다고
잉태한 탯줄을 끊고
새로운 모습으로 앙증스럽게
환한 웃음 머금고 다시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했지
그 겨울의 찻집에서 /배월선
풋풋한 허브 향기가 나는
따뜻한 벽난로 옆에
낡고 오래 된 첼로와
커피 한 잔이 있는
그 겨울의 찻집에서
그 겨울의 찻집에 가면
먼저 와서 기다리며 서성대는
어떤 사람 만날 수 있으려나,
꿈에도 그립던 사람
아주 부드러운 소설처럼
한 권의 표지가 되는
내 기억 속의 사람
그 겨울의 찻집에 가서
날이 흐릿한 오늘은
꺼내어 읽어보고 싶다.
겨울 1악장 /강남주
첫 얼음이 얼던 날 감기앓이로 누웠다.
비발디의 4계절 겨울 1악장
이무지치가 들판을 가로지른다,
바람이 갈기를 가르는 날
무엇인가 바깥에선 부서지고 있다,
이런 때는
이런 때는
身熱이 오히려 친근해진다.
겨울 생각 /송정숙
돌아서는 나는 늘 쓸쓸하니
두고가는 그대 서운해 말아라
빈 가지 봄물 오르면 기억이나할까
별을 그리다 모서리 마다
맺히는 그리움, 그리움은
털어내면 더 많이 쌓이는 것
물 흐르듯 오가는 순리
거칠지만 부드러운 햇살있었듯
권리는 사랑으로 보호 받는 것
겨울 잠행 /조재영
그 산을 넘고 넘어
그 봄 가을을 또 몇 번 넘어
네게로 간다 노새를 타고
싸락눈 내리는 길을
너를 찾아 헤맨다
대답할 수 없었던 네 물음들
긴 세월 바람 속을 떠돌다가
다시 또 내 늑골을 물어뜯는데
답이 될 수 있을까 조그맣게
허밍으로 하는 내 노래는
노새의 걸음처럼 자꾸 헛디딘다
싸락눈에 흐려지는
낯선 길의 풍경들
지친 노새의 잔등을 쓸어줄
둥근 시간들은 어디에 묶여 있는지
네 언어는 어느 숲을 서성였기에
말이 되지 못하고
저렇게 싸락싸락 눈발로 흩날리는지
어디쯤일까 은빛 깃털 같은
네 옷자락 펄럭이는 곳은
싸락눈에 내 노래를 띄우며
너를 찾아 길을 간다
늦은 겨울 오후를 견디며 견디며
발 시린 날들을 간다
집 속의 겨울 /박정은
그 숲속에는 집이 있었다
겨울은 하얀 블라인드로 끊임없이 기억을 재생하는 집
깨끗한 눈송이가 사선을 그으며 내릴 때
집주인의 손에서 영사기는 돌아가고
이후 끝없이 되풀이될 에필로그가 된다
쏟아지는 눈발
기억은
발을 뒤덮고
하루가 지나
무릎까지 덮은 후
한 달이 흘러
어느덧 가슴까지 차고 오른다
한치 앞을 걷지 못하게 붙들어두는 차가운 감정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온다
무언가 떠오를 때에는
발끝에서부터 양말이 젖곤 하였다
깨끗한 창문 밖 깨끗한 눈발이 만드는 프로젝트에서
흘러내리듯 상영되는 영화는 누구의 잠 속에 있던 꿈일까
몸에 닿으면 녹아내리는 이불을 덮고
방의 스위치를 내리면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반사되며 흩어지는 기억들
고산지대에도 집을 지을 수 있습니까?
평원은 매일 떨어지는 꿈을 꾸며 고산지대를 닮아 가고
웃자라며 흰색을 버리는 눈들
쌓인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면 발목이 점점 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하체부터 사라져 가는 사람
끝없이 자라는 눈발과 녹지 않고 쌓이는 눈
창밖으로 내려온 만년설
마음속에서 끝없이 재생되는 장면은
시간을 모른다
눈발이 흩날리는 날씨처럼,
어머니의 새 가방에서 소지품이 와락 쏟아지던 장면처럼.
기억은 저만의 달력을 따로 가지고 있다
하얀 내면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시간을,
겨울은 사랑을 품고 /임영준
기약 없는 님과의 교신인가
처연한 폭설의 그림자
결백에 멍든 겨울을 디뎌야
화사한 꽃이 피는가
얼어붙은 벌판에
달빛 교교하고
움츠리고 파묻어도
꿈은 자란다
겨울, 문틈 /이한명
저 벌어진
문틈을 닫지 않고는 밤새
잠을 못이뤄
기어이 일어나 비닐장막을 두른다
아무도 찾지 않는
겨울 뜰에
소리없이 다가드는 눈발
그 작은 소리마저 차단당하다
입마개를 하고
코에 산소 호흡기를 매달고
이 겨울을
버텨 보려고 애쓰지만
사실은 벌써
봄이 내려 앉아 있는
그 무거운 세월을
버텨내고 있었는지도
바람이 불면
그들은 바람잡이가 되어
더 거센 바람을
문틈으로 비집고 들여
보낸다
비닐 장막을 두르지 않고선
너와 나
서로를 지킬 수 없어
대화조차도 거부당하고
인공관 안에서 숨을 쉰
그해 겨울의
마네킹 연습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