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상, 본명 김해경. 교과서에도 실리는 단편 [날개]의 작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이 갖고 있는 불세출의 천재성과 문학인으로서 내지른 엄청난 광기, 부순물처럼 따라 붙는 퇴폐의 흔적들, 그리고 격변의 시대에서 요절로 마무리 된 애잔함은 퍽이나 독자를 매료시키는 힘이 있어서 이상이 갖고 있는 정서적 요소에 한번 빠져들게 되면 정신 못차리게 만드는 이상 열기로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상은 질풍노도를 겪는 사춘기 청소년의 열정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마력이 있다. 나도 그런 이상 열기에 휩쌓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이상의 문학 세계와 그의 삶에 매료되어 흡뻑 젖어들었던 때가 있었다. 2008년, 2009년 무렵에 이상의 문학에 깊게 빠져들었었다. 그 무렵에 성기웅의 구보 박태원 연작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었던 [깃븐 우리 절믄 날]에 매료되어 작품과 관련된 조사에 재미가 들렸었다. 성기웅의 구보 박태원 연작 시리즈는 총 세편으로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깃븐 우리 절믄 날][소설가 구보씨의 1일]이다. 세편 다 박태원과 이상이 등장하는데 이상은 조역급의 위치다.
첫번째 작품이었던 2007년작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을 볼 때는 별 감흥을 못 받았는데 연애물에 힘을 실은 두번째 작품인 [깃븐 우리 절믄 날]이 괜찮았다. 세편의 연작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깃븐 우리 절믄 날]을 특히 좋아한다. 이 작품의 인물에 접근하는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연작 중 구성이나 규모가 가장 단촐하고 다루는 범위도 작고 가벼웠지만 이 작품에서 그려낸 식민지 시절의 우울한 시대상과 그 시절 활동한 젊은 문인들의 청년상이 재치있게 그려졌고 정서적으로도 세련되게 묻어 나와서 인상적이었다. 이상에 대한 해석도 그전까지 흔하게 접할 수 있었던 골초에 술고래, 관음증에 퇴폐적인 성향을 지닌 광기어린 천재의 자기파괴적인 모순이 아닌, 보다 이성적이고 평범한 모습에서 순간순간 빛나는 천재성의 극단을 보여줘서 사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성기웅의 박태원 연작 시리즈를 보면서 박태원 작품과 이상 작품을 찾아봤다. 이상같은 경우는 연극을 경유하여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간것이 색다른 경험이 되었다. 인물에게서 받은 쓸쓸한 정서에 감상적으로 휩쓸려 괜히 세종문화회관 같은데를 갔다가 종로 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당시 이상이 궁금하여 가람 기획에서 발간한 이상 전집 두편을 구입했다. 1권은 소설집이었고 2권은 수필, 서간, 편지를 엮은것이었는데 나는 시보다 소설이 더 난해하게 다가와서 이상 소설집은 지금도 다 못 읽었다.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가서 3분의 1정도 읽다 포기했다. 읽은 3분의 1도 그저 활자를 읽었다고 보는것이 맞다. 유명한 [날개]외에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시도 어려운건 마찬가지였지만 전개에 대한 이해와 분량에서 받는 압박감은 약하다 보니 가독성이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시에선 의도적인 띄어쓰기 무시를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은 소설도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쓴 작품이 많아서 그런 소설을 읽고 있으면 어느 지점 부터는 내가 어느 단락을 읽고 있는지 헷갈리기 일수다. 내용 파악은 둘째치고 행간 파악조차 오락가락하게 되는거다.
소설은 이해도 안 되고 읽기도 힘들어서 지금까지도 소설집으로 나온 이상 작품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수필과 서간은 좋았다. 이상의 수필과 서간을 통해 그전에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이상의 약력상에서 받았던 선입견을 상당 부분 지우게 됐다. 이상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정형화된 이미지, [날개]의 주인공과 같은 퇴폐적인 광기만을 생각했는데 수필과 서간을 보니 이상은 가족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고 부양에 대한 의무로 고민하는 평범한 남자이기도 했다. 결국 차리는 족족 얼마 못가 망하긴 했지만 다방을 계속 차렸던것도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생활고를 이겨내려는 의지에서 애잔함이 느껴졌고 인간적으로 많이 공감할 수 있었다.
2
이번에 창작뮤지컬로 이상을 다룬 또 한편의 작품이 나온다고 해서 눈여겨 봤다. 제목은 [스모크]. 김수로가 김민종과 차린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에서 기획한 소극장 뮤지컬 신작인데 처음엔 제목을 보고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를 무대화시킨 무비컬인 줄 알았다. 웨인 왕의 [스모크]가 오랜 세월 입소문으로 살아 남은 명작이라서 영화 중심의 이력을 다져온 공연 프로듀서인 김수로가 공연 기획물로 욕심 내기에 알맞은 작품으로 봤다. 그러나 제목만 같을 뿐 이번 뮤지컬 [스모크]와 웨인 왕의 [스모크]는 전혀 상관 없는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2016년 12월 16일부터 동월 22일까지 트라이아웃 개념으로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올려진것을 전면 보강하고 수정하여 정식 초연으로 선을 보이는것이다. 이번 초연에 출연하는 김경수, 박은석, 윤소호, 정연, 유주혜는 석달 전 선보인 작년 트라이아웃 공연에서부터 그대로 넘어왔다.
김수로, 김민종의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에서 제작한 창작뮤지컬 [스모크]는 1930년대 시인이자 작가로 유명하고 또 유명한 이상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또 한편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은 이상의 시는 발표 당시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오감도'의 15호이다. 미완성 시인 '오감도'의 마지막 편에 해당된다. 이상은 원래 30회를 목표로 '오감도' 연재를 시작하였으나 신문 연재 당시 너무 난해하고 괴상하단 이유로 평단과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어쩔 수 없이 15회를 끝으로 연재를 중단했다.
이상의 난해한 시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작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것은 장용민의 [건축무한 육면각체]이다. 나중에 신은경, 이민우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엉성한 CG와 조악한 연출로 욕을 엄청 먹은 작품인데 이 작품은 이상의 '건축무한 육면각체'를 가지고 상상한 팩션으로 1997년 출간된 뒤 두번의 개정판이 나왔다. 난 영화도 안 봤고 소설도 안 읽어봐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이상의 '건축무한 육면각체'시를 매개로 미스테리한 사건을 추리하면서 이상의 숨겨진 삶까지 들여다 본 구성인가 보다.
뮤지컬 [스모크]도 같은 방식을 취한다. 이상의 미완성 연재물인 '오감도'시에서 마지막 호의 내용에 착안하여 이상의 문학 세계와 삶의 방식을 탐구하려는것이다. '오감도 15'호는 거울을 중심으로 거울 속에 갇힌 이상의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의문과 불안한 심리가 담겨 있다. 뮤지컬은 '오감도 15호'에 등장한 거울에 대한 은유를 통하여 이상의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자 한다. 시작은 '오감도 15'호에서 시작하지만 거울 속의 또 다른 나라는 소재의 가능성에 힘입어 누구나 아는 [날개]를 비롯하여 이상의 다양한 작품이 곳곳에 배치된다. 이상이 병상에서 뱉은 마지막 말인 "멜론이 먹고 싶소'까지 작품을 위해 연구한 이상 작품들과 이상의 생을 또 하나의 전기물 형식으로 응집시켰다. 이상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민다. 온갖 문화가 중심없이 뒤섞인 무정한 식민지 시절을 견딘 나약한 지식인의 자조적인 농담이 시대적 모순을 타고 허망함을 남긴다.
3
간단하게 말해서 뮤지컬 [스모크]의 구성은 [인사이드 아웃] - 이상의 오감도 15호 확장판 격이라고 보면 된다. 남자 두명이 여자 한명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범죄 추리물 설정은 작품을 선전하기 위해 편의상 요약한 줄거리일 뿐 작품을 이해하는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뮤지컬 [스모크]는 기승전결식의 줄거리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구조이다. 처음에 예매처의 인물 소개를 보고 [날개]를 극 전반에 깔아 둔 [금홍아 금홍아]의 상투적인 변환은 아닐까 싶어 의구심이 들었다. 남자 두명에 여자 한명의 인물 배치인데 남자 한명은 시를 쓴다니 이상일게 분명하고 다른 남자 한명은 그림을 그린다니 이상의 친구였던 구본웅일것이다. 그리고 남은 여자는 누가 봐도 기생 금홍이를 활용한 배역 구성이었다. 이런 설정이라면 [금홍아 금홍아]가 될 위험이 크다.
그런데 작품은 이상의 대표작인 [날개]나 그의 퇴폐적인 연애행각엔 관심이 없다. 당연히 인물설정에서 떠올릴 수 있는 [금홍아 금홍아]같은 졸작을 시대착오적으로 되풀이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에 나오는 남자 두명과 여자 한명은 전부 다 이상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상으로 대변되는 세개의 분열된 인격체가 현실 세계에서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 소설가로서 고뇌에 빠진 이상의 심리를 대변해주고 있다. 이상은 세개의 인격체를 통하여 작가로서 성숙해지고 발전된 삶을 모색하려 한다.
연출과 극본을 맡은 추정화는 '오감도 15'호에 그려진 '거울속의 나'라는것에서 많은 부분 작품의 구성을 전개시키고 있다. 주인공 초와 해와 홍은 모두 현실 세계에서 이상이 부딪히는 혼란이 충돌한 내면의 인격체로 정신분열적인 증세를 앓고 있는 이상을 대변해준다. 초는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극단적이고 파괴적이며 광기어린 이상의 모습이라면 해는 그 이면에 감춰진 유약한 면모이다. 홍은 이 두개의 자아를 오가며 갈등하는 이상을 비춰줌과 동시에 현실적인 타협과 이상향의 추구를 조율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이상의 감각 기관이다. 바다는 실제하는 바다가 아닌 내면의 혼란과 모순을 겪고 있는 이상이 염원하는 이상향의 세계이다.
극의 비밀이 밝혀지는 시점이 초가 전보를 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시점부터인데 이게 극 초반부에 해당된다. 이때까지는 편의상 요약된 줄거리에 맞춰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초가 재등장 하고 난 뒤부터는 이상의 정신분열적인 증세를 대변하는 세개의 인격체라는것이 파악돼서 줄거리를 따라간다는게 의미가 없어지고 인물 관계도에서 오는 긴장감도 약해진다. 거기다 관객의 이해도를 고려하여 이상의 자아를 세개의 인격으로 표현한것이라는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설명을 해서 해석의 재미가 반감될 때도 많다. 트라이아웃 공연 때 구성을 따라가는게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서 정식 공연에선 좀 더 쉽게 극을 풀어낸것이라고 하는데 관객과의 거리감을 좁히려 한 시도는 기특하나 장면마다 이것이 알고보면 이상의 분신이자 또 다른 자아라는것을 부득부득 설명을 해서 사족으로 빠진다. 그래서 극의 몰입을 위해서 제작진은 또 다른 방향의 절충이 필요할듯 싶다.
그러나 홍의 중재를 통해 문학인으로서 도약하는 이상이 순간순간 자각할 때의 변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으며 초와 해를 오가며 이상의 다양한 자아를 표현하는 방식도 입체적이다. 극의 중심이 초에서 해로 기울어지다가 다시 해에서 초로 기울어지고 그러다 다시 해로 넘어가는데 이렇게 인물에 집중하는 시선이 들쑥날쑥함에도 결국엔 한 인물을 대변하는 분신의 역할 분담이기 때문에 산만하지 않다. 한 배역에 치우치는것없이 고른 호흡을 유지하면서 이상의 '오감도'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대사와 가사에 활용하며 효과적으로 심어 놓았다. 작가의 연구 결과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꼼꼼한 대본이 100분의 상연시간을 균형있게 받쳐준다. 이상의 여러 자아를 파고들어 이상의 삶과 이상의 문학 세계를 탐구하려는 발상의 전환이 신선하다.
문학의 이상과 욕망, 도전, 야심의 완성을 위해선 이 작품의 제목과도 같은 태우는 과정이 필요한것이다. 태워서 연기로 흘려 다시 내면에 흡수시키는 여과 과정을 통해 문학의 성숙함을 발견할 수 있다. 뮤지컬 [스모크]는 문학인이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를 정신분열이란 극적 소재를 통해 헤쳐나가는 방식이 영리하게 살아있는 작품이다.
장면에 따라 감정이 너무 끓어 넘치고 직설적인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금홍이 같은 기생과의 연애담으로 싸구려 해석의 전기물 형식을 걷어내고 대상화되기 쉬운 이상을 진지하게 연구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이번 [스모크]의 구성 방식은 가치있는 시도였다. 시의 운율을 살린 독창, 이중창, 삼중창의 호흡도 뮤지컬 음악의 매력을 살렸다. 홍같은 역은 굳이 여자가 안 해도 되는 배역이긴 하지만 극의 균형을 위해서 구색으로 합을 맞춘듯하다. 식민지 시절의 지식인 연기를 자주 맡은 김경수는 이번 작품에서도 굉장히 안정적인 호흡과 호소력있는 음색으로 울림있는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 정도 실력이면 웬만한 대극장 뮤지컬도 소화가 가능할것같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한지는 올해로 10년째인데 나 같은 경우는 최근 들어서야 이 배우의 인상과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도 이렇게 잘 했나 궁금하다. 배역에 대한 이해와 표현력에 있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다.
- 상연시간은 예매처 표기와 달리 100분이다. 쉬는 시간은 없다.
- 유니플렉스를 처음 가봤는데 방석이 깔린 비좁은 철제 붙박이 좌석을 보고 약간 당황했다. 추운 날씨를 고려하고 열악한 좌석에 방석이라도 깔아서 나름 관객을 배려하려고 노력은 한것같다.
- 입장권 발권을 하는데 예매번호 아니면 신분증을 요구하였다. 요즘도 공연장에서 신분증을 요구하는것에 황당했다. 예매번호 문자로 받은것은 실수로 지웠고 예매처 들어가서 예매번호 확인하는게 귀찮아서 운전면허증 보여주고 표를 배부 받긴 했지만 신분증 검사까지 가는 발권 상황이 짜증났다.
첫댓글 인사이드 아웃 오감도 15호 확장판..딱이네요! ㅎㅎ 저도 김경수 배우를 처음 접했는데 꽤 괜찮더라구요.
극은 저도 괜찮게 봤습니다. 유니플렉스 2관 좌석은 너무 불편하네요. 앞열은 방석이 없는건지 4열에 앉았는데 방석은 없었습니다. ㅠ.ㅠ
요새 예매번호나 신분증 요구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근래 3번 정도 다 요구함...
예매번호/신분증은 요즘 와서 더욱 많이 요구하는 것 같아요. 암표가 많아져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어요.
예매 내역을 항상 폰에 넣고 다니니까 크게 문제는 없지만 귀찮긴 하죠.
유니플렉스는 단차가 너무 안 좋아서 작년 마돈크 이후로 방석을 깔았습니다. 그 전엔 1열 외엔 모두 쓰레기라고 할
수준이었다가 그나마 방석 덕분에 저같이 앉은 키 작은 사람도 7열에서 시방없이 관람하게 되었답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