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명지대 조내연 교목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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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이사야로부터 모순 읽어내기
"Internal Conflict, Incomplete Frame?: Reconsidering Trito-Isaiah’s Message”(내적 갈등, 불완전한 프레임?: 제3이사야 메시지에 대한 재고찰)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2022
자본주의, 민주주의, 복지사회, 개인주의, 정보혁명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급속히 다원화되고 있다. 반면 종교 및 신앙공동체로서의 기독교회는 급속히 쇠퇴하고 있는데, 이는 지난 3년여의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뿐 아니라, 초고령화와 저출생 문제로 인한 세대교체의 실패로부터 기인한다. 무종교적 다원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종교는 가족 중심 형태로 재편되고 있다. 쇠퇴의 시기 속 교회는 ‘열림’보다 ‘닫힘’에, ‘타자’보다 ‘주체’에, ‘우리를 넘어’서기보다는 ‘우리끼리’의 공동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내집단과 외집단 사이의 틈을 더욱 벌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틈은 각 세대나 집단이 중요시하는 가치와 경험의 이질감 속에서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혈통이나 세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과 경건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본령은 선교, 즉 복음 전파에 있다. 문제는 이에 근거하여 ‘타자’에 대한 환대와 수용이라는 선교적 전략과 가치를 추구할 때 딜레마를 경험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 지극히 방어적인 공동체가 타자를 환대할 수 있는가? 목회자는 이러한 양가적 상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목회자는 이런 양가적 상황에서 겪는 내적 갈등에서 과연 자유로운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필자는 최종 형태로서의 이사야 56-66장(편의상 ‘제3이사야’로 통칭)을 텍스트 삼아, 텍스트 안의 화자와 청중 간의 관계와 그에 따른 전달자의 심리 내적 역동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읽기는 한 인간이 내적, 외적으로 경험하는 인지적 비일관성에 근거한 읽기이다. 이러한 경험주의적 읽기를 시도할 때, 한 텍스트 안에 서로 상반되는 주제가 공존하는 현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룰 수 있다.
모순을 재평가하기
19세기 말 독일의 구약학자 베른하르트 둠(B. Duhm)이 이사야 56-66장을 “제3이사야”로 칭한 이래 이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전개되었다. 제3이사야는 어떠한 가설적 문서 단위로서 제시된 것이었으므로, 이 문서 단위가 어떤 형성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가 되었는지가 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특별히 제3이사야라는 문서 단위 안에서 발견되는 주제적 불일치로 인하여, 어떤 내용이 앞서고 어떤 내용이 뒤따르는지에 대한 편집적 가설을 제시하는 것도 연구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제3이사야에서 발견되는 주된 불일치는 바로 이사야 61-62장에 나타나는 전통주의적 관점과 56장과 65-66장에 나타나는 포용주의적 관점 사이의 긴장이다. 전자가 유대인 중심으로 회복된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야웨를 경외하는 이방인들까지도 공동체로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포로후기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의 문제와도 깊게 연결된다.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제3이사야라는 문서 단위는 단지 이사야적 예언전통을 따르는 포로후기 예언의 모음집에 불과한가? 이사야적 예언전통을 따르는 이 익명의 화자(들)는 왜 서로 다른 발화를 하고 있는가? 왜 서로 모순되는 주장이 제3이사야라는 하나의 문서 단위 안에, 그리고 크게는 이사야서라는 한 권의 책 안에 포함되었는가?
기본적으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기술적이고 편의적인 방식은, 익명의 화자와 그 시대 배경을 계속 늘리는 방식으로 가설을 다양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배후에는 우리가 화자 또는 저자라고 부르는 그 대상이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할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어떤 확신, 어떤 믿음이 존재한다. 이는 인간 이성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관념론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그 자체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성관 말이다. 이러한 인간관은 분명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뿐 아니라, 과거에 살았던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문 각각의 모순에 대한 비일관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일관성을 가진 합리적 개인들의 목소리로 처리해야만 한다.
만약 인간의 이성이 우리가 생각해온 것과 달리 완전무결하거나 무흠하지 않다면 어떠할까? 레이코프(G. Lakoff)와 존슨(M. Johnson)에 따르면, 계몽주의자들이 기획하던 독립적이고 순수한 초월적 이성은 현실의 물질세계에 존재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몸과 주변 환경에 기반한 인지적, 은유적 경험을 통하여 의미와 개념 체계를 서서히 발전시켜 나간다. 이를 현실의 이성이라 부를 수 있다. 또한 현실 이성의 인간이 어떤 목표를 좇고 따르는 데 모순되고 양가적인 가치를 동시에 수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하다면 지금까지의 제3이사야 읽기도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는 하나의 문서 단위 안에서 발견된 모순을 각기 다른 개인이나 공동체의 목소리로 간주하고, 그 개인과 공동체의 일관된 이념이나 신학을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을 모순되고 양가적인 가치를 동시에 수용하고 있는 한 개인의 목소리로 본다면 어떠할까?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논문을 구성하였고 이를 통해 제3이사야라는 가설적 문서 단위와 그 배후에 있는 개인 혹은 공동체를 재평가하였다.
모순을 재구성하기
제3이사야는 포로후기 상황과 관련이 있다. 문제는 이 문서 단위의 성격을 규정하고 배후의 상황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예언서의 언어는 보통 시적이고 은유적인 단어들로 가득한데, 제3이사야의 경우 역사적 정황을 유추할 만한 분명한 단서도 적은 편이다. 그러므로 시대 배경을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어떤 학자는 제2성전 건축 시기를, 어떤 이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기를, 어떤 이는 그보다 더 후대 시기까지 제시한다. 이러한 시대 설정은 연구자의 주제의식과 깊이 관련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특별히 제3이사야에서 부각되는 공동체의 갈등은 시대를 재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중심부인 이사야 61:1-62:12는 유대 혈통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사회구조 안에서 그렇지 않은 자들을 배제하는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강조한다. 하지만 날개 부분의 56:1-8, 66:1-24는 이와 다르게 배제된 자들을 야웨 신앙공동체로 포용하는 관점을 암시한다. 만약 이러한 차이가 각기 다른 시공간의 다른 화자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만약 어떤 한 화자가 경험하고 있는 시공간의 복잡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떠할까? 그리고 이러한 모순과 불일치가 그러한 복잡성으로부터 한 화자가 경험하는 양가성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떠할까?
바빌론에서 돌아온 자들이 경험한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이었다. 이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왕실 및 귀족 엘리트들의 후손이었으므로 자신들의 뿌리와 유산, 특권과 정통성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나라와 성전을 잃고 약속된 땅을 떠나와 이방 땅에서 말씀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했지만, 이들은 바빌론이라고 하는 제국의 수도에서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고향 유다와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어 당분간 그 누구도 살지 않는 텅 빈 땅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실제로 바빌론은 그 땅을 속주로 편입하여 남아 있는 민간 유대인을 통치했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 땅은 민간 유대인과 다양한 배경의 비유대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 되었다.
즉 포로후기 시대에 등장하는 사회적 갈등은 바빌론에서 포로 신분으로 살던 상류층의 후손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뿌리와 유산, 특권과 정통성에 기반하여 사회적 질서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신흥 세력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빌론을 접수한 뒤 선포한 칙령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 칙령은 바빌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옛 신분과 권리를 회복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 사회 재건을 정책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러한 재건 프로그램에는 유다 속주를 종교, 행정, 조세 등 다방면에서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성전 재건 프로젝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는 해당 지역 총독 및 행정관들의 감시와 견제하에 이뤄졌다. 다시 말해 귀환자들은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대부분 인정받은 상황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재건 사업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반제국주의자가 되어 급진적인 왕실 재건 혁명을 추진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당시의 상황과 모순되는 지점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지점에서 제3이사야에 암시된 사회적 갈등을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배경 안에서 제3이사야의 화자의 성격을 재규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 제3이사야의 화자가 당시의 복잡다단한 사회정치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면, 특히 귀환공동체와 비귀환공동체 사이에 놓인 사람이었다면, 본문에 드러나는 모순의 문제를 ‘어떤 화자 자신의 내적 갈등의 문제로 다룰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해보았다.
이러한 질문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필자는 기원전 6세기 후반 제2성전이 재건되던 시기의 시대적 상황이 제3이사야의 내적 갈등을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기원전 6세기 후반 제국 치하에 놓인 유대의 사회상은 다층적이었다. 이는 단지 혈통이나 계급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주 현상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좀 더 구체화할 수 있다. 이주 과정에서 이주민이 겪는 거주 환경의 변화와 문화적 정체성 혼란, 그리고 토착민과의 갈등 등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또한 이러한 이주 과정 전반이 국가적 지원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주민이 지역의 통치권을 접수하는 그림과 연관된다면, 이주 현상의 관점으로 현상을 바라볼 필요성이 더욱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원전 5세기 중반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역에서 발견되듯이, 집단정체성을 지키려는 그들의 배타주의적 성향과 대비하여, 제3이사야의 포용주의적 입장을 강조하여 관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현상을 단편적으로 이분화한 것으로, 이주 현상에서 드러나는 내적 복잡성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제3이사야라는 문서 단위를 비일관적인 한 화자의 발화로 간주하고 이를 기원전 6세기 후반의 다층적 사회 안에서 읽어낸다면, 배제와 포용 사이에 놓여 있는 화자의 과도기적 성격이 여실히 드러날 것이다. 따라서 귀환 초기 상황인 기원전 6세기 후반 제2성전 재건 전후 상황은 제3이사야가 지니고 있는 모순, 양가성의 문제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배경이 된다.
스미스(P. A. Smith)는 제3이사야가 형성되는 시기가 한 세대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데, 필자는 그 견해에 따라 박사학위 논문에서 최종 형태 이사야 56-66장에 나타나는 이 익명의 화자를 특정한 해석공동체, 즉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주제적 불일치의 문제를 편집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당시 정치사회적 정황 속 내집단과 외집단 사이에서 겪는 화자의 내적 심리의 문제로 가정했다.
모순 다시 읽어내기
여기서 우리는 레이코프의 경험주의적 현실 이성 담론을 다시 되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정치적 관점을 형성할 때 관념적으로 순수한 형태의 보수나 진보의 모델을 따르지 않으며, 또한 절대적 형태의 중도를 갖추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보수적이고, 부분적으로 진보적이다. 다시 말해 레이코프는 대부분의 사람이 서로 대립하는 가족 모델에 근거한(엄격한 아버지 대 자상한 부모), 양극의 정치적 관념 사이에서 이중 개념(biconceptuals)을 소유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립하는 논리의 공존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수단과 목적에 따라 다양한 변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레이코프의 이중 개념에 대한 논의의 목적은 사실상 공론장에서 대중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에 있다. 그는 반대 진영의 은유언어를 활용하여 대중을 설득하는 방법은 되려 반대편의 논리를 강화할 뿐이라고 보았다. 특정 목표를 갖고 설득하려 한다면, 오히려 반대편의 은유언어나 프레임을 전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즉 본연의 목적에 맞게 새롭게 ‘리프레임’(reframe)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레이코프가 제시하는 전략이다. 유대 내부의 정치 상황에서 내집단과 외집단 각각을 대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제3이사야의 은유언어는 이러한 레이코프적 관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사야 61:1-62:12, 56:1-8, 66:1-24를 중심으로, 제3이사야의 최종 형태 안에서 발견되는 양가성의 문제와 그로 인한 효과를 논문에서 다루었다. 이사야 61:1-62:12에서 익명의 화자는 자신을 그가 속한 공동체의 어떤 정치-종교적 리더로 인식한다. 물론 이전 세대로부터 학습한 집단기억에 의존하여 은유언어를 전개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리더십은 제2이사야적 고난받는 종의 이미지와도 구별되며, 당시 현실 사회의 지도층으로 활동하던 스룹바벨이나 여호수아의 것과도 구별된다. 여기서 화자는 청중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전통적인 예언 선포 양식을 사용하지 않고, (야웨가 1인칭으로 전달되는 선포를 포함하여) 주로 1인칭으로 자신의 발화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일방향적인 소통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자신의 리더십을 어필하며 귀환자 중심의 제사공동체 회복과 재건, 그리고 이방인에 대한 배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이 메시지는 귀환공동체 내집단 청중에게 공명하지 못하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여기 중심부에 언급된 화자의 독백적 발화는 내집단을 향한 화자의 내적 심리와 욕망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이사야 56:1-8 및 66:1-24는 예언 선포 양식을 이용하여 청중의 주의를 끌고 있다. 이 점에서 이 메시지는 청중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다. 특이점은 이 본문들의 청중이 이사야 61:1-62:12의 청중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사야 56:1-8은 야웨 신앙으로 개종한 이방인과 내시들을 대상으로, 66:1-24는 야웨에 대한 경외심으로 신앙을 지키는 경건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다시 말해 이 본문들은 61:1-62:12와 다른 청중을 대상으로 야웨 하나님의 선포를 상호적으로 전달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사야 61-62장이 민족적 경계를 강조했다면, 여기서는 영적 경계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의 공동체에는 단순히 유대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사야 61:1-62:12에서 배제되었던 이방인이 56:1-8에서는 야웨공동체로 편입되고, 심지어 66:1-24에서는 제사장 임직의 대상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날개 부분에 묘사된 화자의 발화는 외집단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화자가 처한 현실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최종 형태 제3이사야 내에서 이 상반되는 메시지가 공존할 때 발생한다. 중심부에서 날개 부분으로 주제와 관점이 전환되는 것을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른 발전으로 보기에는 중심부와 날개 부분의 형식과 내용, 청중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심부는 귀환자 중심의 특수주의를, 날개 부분은 비귀환자를 포함한 경건한 자 중심의 포용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특수주의와 보편주의의 이분법으로 단순 비교할 수도 없다. 이사야 66:22와 24에서 화자가 오히려 경건과 불경건 사이에 또 다른 경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물론 어떤 급진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결국 62:8에서처럼 화자의 배타적인 심리가 여전히 남아 있고, 크게 변화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의 내집단과 외집단 사이에 놓여 있는 제3이사야의 양면성, 이중 개념을 발견한다. 베르게스(U. Berges)의 표현을 빌려 이를 “포용적 배타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가는 말
필자는 논문에서 제3이사야 분석을 통해 오늘의 목회자들이 직면하는 현상을 분석하고 현실을 진단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제3이사야의 페르시아 유다 사회의 다층성과 양극화에 따른 이중 메시지 및 프레임 실패는 오늘의 한국 사회와 교회에 유비 가능하다. 페르시아 통치하에 있던 유대 지역의 다층적 사회상은 오늘날 급변하는 한국 사회 속에서 쇠퇴하는 한국교회의 상황에 유비할 수 있다. 내집단과 외집단, 동질집단과 이질집단 간의 사회적 갈등은 한국교회가 마주하는 집단정체성 강화와 소거, 이탈 현상과 관련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쇠퇴의 시기에 처한 교회는 ‘열림’과 ‘타자’의 공동체, ‘우리를 넘어서’는 공동체가 아니라, ‘닫힘’과 ‘주체’의 공동체, ‘우리끼리’의 공동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럴 경우 교회는 누적된 집단기억에 따른 세대 간 전승과 집단정체성을 강조하게 된다. 특히 교회가 기존의 대상과 문법 속에서 ‘주체’성만을 강조하면 ‘타자’에 대한 관심은 소거되거나 각하될 것이다. 이는 과거의 찬란한 유산을 보전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식이다. 이로써 내집단(교회)과 외집단(비교회)의 틈은 더욱 강화된다. 더욱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다양화되는 사회문화 속에서 교회는 한계와 적응 지연을 경험하고 있다.
‘타자’에 대한 환대와 수용이라는 선교적 가치는 공동체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에서 여전히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내집단(집토끼)의 현상 유지와 외집단(산토끼)으로의 확장이라는 전략 사이에서 화자가 경험하는 모종의 ‘모순’이 발생한다. 앞서 텍스트에서 살펴본 대로 메시지의 기본 정신에 따라 ‘열린 형태’의 공동체를 추구하지만, 메시지의 전달 대상에 따라 그 방식과 우선 가치가 ‘닫혀’ 있는 현상이 존재한다. 여기서 화자의 고민이 대두된다. 어떻게 메시지의 기본 정신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내집단(집토끼)과 외집단(산토끼) 중 어떤 집단의 목표와 필요(needs)에 맞출(targeting) 것인가? 아니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전략을 택할 것인가? 이렇듯 약 2,500년 전의 화자로부터 읽어낸 ‘모순’에서 오늘의 현실 독자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다시 숙고하고 질문하게 된다. 부디 이 논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모순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조내연|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 목사이다.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M.A.)을 마치고,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논문으로 “지평 융합을 통한 인식론적 전환-구약성서 읽기에 대한 방법론적 고찰”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교목으로 사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