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우리. 아버지(마지막 회)
순야 이선자
그 기적 같은 일은 그다음 날,
그동안 침묵 만을 지켜온 동네 사람들이 너도 나도 벼가마니를 지고,
우리 집 정미소를 찾아온 것이었다.
도전아재는 젊었을 때부터 한량이었다.
주먹깨나 쓰는 사람이라 그 어느 누구도 맞서지 않았다.
그런데, 그 힘센 사람이 바른말, 옳은 말을 하자, 동네사람들의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일까?
한 사람(처 당숙)의 사리사욕이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우리 아버지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박탈당하게 하고, 대신 자기가 외갓집의 토지를 맡으려 했다는 것
부터가 시기와 탐욕이었다.
원래 선한 양심의 시골사람들인지라, 예전처럼 왕래하며 정미소를 넘길 때까지
타협하는 걸로 일단락 짖고, 필자는 파독간호사로 지원하여 그해 70년 9월에
고국을 떠나 ‘서 베를린’으로 왔다.
3년 동안 돈벌어서 오 씨들에게 받은 오늘의 이 치욕을 꼭 갚겠다는 일념으로..
그 당시의 초등학교 3학년이든 막내 남동생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누나, 우리는 누나가 떠난 후, 당분간 또기아재 집에서 살고 있어.
비가 오는 날이면 아궁에 물이 차서 엄마가 아침밥을 지을 수가 없어.
그래서 비 오는 날이 두려워…(하략)“
정미소와 집이 마당 하나를 두고 같이 붙어있어서 어쩔 수 없이 비워 주어야
했지만, 이사할 때의 식구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 가를 생각하며
나는 동생의 편지를 받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내 결코 이 날을 잊지 않고, 우릴 망하게 한 그들(당숙과 모의한 오판 x 씨)의 소행을
꼭 지켜볼 것이다. “ 라며..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래도 동네사람들이 당숙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을 위해 이사 간 외갓집 빈터에 새집을 지을 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도와줬다고, 73년 4월에 임시 귀국했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3년간을 하능 새집에서 사시다가 부산 사는 사촌언니의 연고로
동래구 구서동에서 ‚만물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체질에도 맞지 않은
상업(구멍 가계나 다름없음)을 하시면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것 같아서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사람들은 저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열등감과 우월감이 공존하면서 자신의 삶의 잣대를 남에게 맞추다 보니,
불행의 도가니에 빠져, 옳고 그름의 사리분별도 안 되는, 양심이 둔한 사람으로
변해 가면서도 아마 본인 자신은 옳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옛날에 부면장을 역임했던 ‘오판 X'씨에게도 우리 오빠와 동년배의 큰아들과
두 살 아래인 둘째 아들이 있었는데, 둘 다 진주 명문고를 나와 장남은 교편생활을 했는데,
무슨 연유로 그 후 상봉서동에서 조그만 가계의 쌀장수 한다는 올케의 말에
“다른 곳에 가서 쌀 사지 말고 그 집에 가서 팔아줘요. 그의 아버지는 미워도
그 아들에게는 죄가 없잖아요. “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우리 아버지가 제보리의 이장직과 산림계장을 맡으면서
관공서의 사람들이 친구처럼 늘 우리 집을 들락거리니 시샘도 났을 것이다.
완전한 남이면 상관없는 일지만, 친인척 관계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비교가 되어,
미움만 더 커져 갔을 테니까.
당숙의 시기와 미움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자손이 귀한 외가댁에 우리 엄마가 태어났을 때, 모두가 아들이기를 바라고
이름까지 지어놓았는데, 딸이었다.
그러나 아들처럼 키운다고 남복을 입혀 8살 때 서당을 보냈다.
두 살 아래인 이모도, 같은 나이 또래의 서고모들 셋도 서당에 안 보냈는데,
엄마만 서당에 보낸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과 영특함이 뛰어나,
조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그 당시 엄마가 서너 살 위의 칠촌당숙과 같은 서당에 다닐 때부터 당숙은 아마
심보가 꼬였을 것이다.
서당의 훈장은 늘 말하기를 “너는 네 조카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아직 천자문도
못 떼냐? 조카 본을 좀 봐라! 벌써 천자문 뗀 지가 언제인데..“ 하며 회초리로
다그쳤다고 한다.
그뿐인가, 우리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 후 해방되던 해, 세 살짜리 아들(우리 오빠)을 안고
귀국했을 때, 당숙은 결혼한 지가 7-8년이 지나도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진양군에서 젊은 과부를 데려다 둘째 부인으로 삼았다.
둘째 부인이 첫딸(필자 보다 한 살 위)을 낳자, 본처은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잃어버렸다고 친정인 단계로 가 버렸다.
그때만 해도 아들을 딸보다 더 귀중히 여기든 시절, 당숙의 둘째 부인이 내리 딸
셋을 낳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군대에 갔다가 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상사에 맞아서 죽은 것을 사고로 위장했다고 한다.
어떻게 낳은 아들인데, 그때의 당숙은 부모로서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을 겪었을지,
아무리 원수라 해도 그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맏딸 ‚정’은 나보다 한 살 위인데도 초등학교 후배다.
6년 동안 학교를 다녔는데도 한글을 깨치지 못해 결혼 후 남편에게 소박맞고,
머리가 살짝 돌아 친정에 와 있었다.
이유는 그녀의 남편이 첩과 함께 두 집 살림을 차렸기 때문이다.
셋째 딸은 그 집에서 마음씨가 최고로 착한 사람이라 나보다 7-8세가
어린데도 내가 제일 예뻐했다.
결혼 후 신랑이 진주서 금방을 한다기에, 외할머니와 엄마의 금반지를 맞출 때,
일부러 그곳을 찾아서 주문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30대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3년간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다가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은 날 슬프게 했다.
이제는 어머니의 당숙도 오판 X씨도 다 이 세상에 없다.
우리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까닭에 원흉인 그들을
미워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만 든다.
정직(貞直)을 가훈(家訓)으로 삼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고
늘 말씀하시던 아버지셨기에, 우리 형제들 모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저 나름대로
정직을 신념으로 삼고, 성실과 공의로 살아온 나의 형제들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오빠가 공직기간 3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받은 상만 해도 장관상, 도지사상,
시장상은 수두룩하고 마지막 서기관으로 퇴직하면서 받은 녹조근정훈장은
가문의 영광이다. 그뿐이 아니다. 1996년 10월, 내무부 주관 우수회계공무원으로 선정되어
유럽의 선진도시 회계업무를 견학하는 공무원으로 유럽을 시찰했다.
전국의 수 천명이 넘는 공무원 중에서 모범 공무원 50명을 선정 중,
경상남도에서 딱 2명이 뽑혔는데, 경상남도도청에서 일하든 과장 한 사람과
그 당시 진주시청 사회계장으로 일하든 우리 오빠였다.
녹조근조훈장은 2002년 3월 30일 날 받았다는 소식에,
“아,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장남이 녹조근조훈장을 받았대요.
저도 이렇게 기쁜데 아버지는 더 기뻐시지요?“ 라고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경찰공무원이었던 둘째 남동생이 경감으로 퇴직할 때, 대통령상을 받았다는
말에도 나는 눈물이 찔끔 났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를 생각하며..
막내 남동생이 대기업의 회계 감사실장이 되고, 이사가 되었을 때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
아무 인맥도 지연도 혈연도 없는 서울에서 정직과 근면으로 성실히 살아온
동생이 자랑스러웠다.
그 외의 다른 동생들도 하나도 낙오됨이 없이 각자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며
살아왔으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방앗간집의 칠 남매인가!
어쩌면 우리 아버지도 하늘에서 지켜보며, 모두들 잘 살아왔다고
칭찬해 주실 것 같다.
순야의 뜨락입니다.
이곳 날씨가 너무 가물어 잔디가 다 타들어 누런 빛이다가, 또 며칠 비가 온 후 거짓말처럼 파랗고,
꽃들도 피어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모두들 평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독일에서 순야 이선자 문안드립니다.)
첫댓글 글을 읽는 동안 눈물도 핑돌고 가슴이 먹먹해 지네요.
그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자녀들이 올바르게 다 잘 되었으니
순야님도 이제는 힘들었던 마음의 짐은 다 내려 놓고
남은 여생은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가족을 위해 살아내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동안 장녀로서 장남몫까지 다하면서 고생한 사연들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꺼워집니다.
포항의 아우 얘기도 넣었으면 더좋았을텐데..전편에서 언급한 것같기도하고.
,아버지 우리아버지, 책을낸다면 몇군데 수정했으면해요 사회계장을 그냥회계과근무당시로 .고첬으면합니다.현강의 자랑이많아서.ㅎㅎ
그동안 고생많았 습니다.
선정된 우수공무원 50명 중 모두가 과장급이었는데,
그중 오빠만 계장이었다고, 그때 쾰른에서 만났을 때 분명히 얘기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ㅎㅎ
@순야 이선자 사회계장일때는93년도 경남도에서주관 일본 대만을 다녀왔고, 유럽은 회계과 용도계장을 할때 유럽과 스페인 네델란드를 다녀왔죠,
아버지 를 마무리 하면서 하나빠진게 있습니다.
자식들이 잘자라서 큰딸은 의사가로서 아들은 카나다에서 사업가로서 성공하여 손주생일기념으로 유럽 여행시 매니저(개인비서) 데리고 오는 등 ..
^^한국에서 독일로간 간호사의 성공 이야기 ^^로 한번 글을써도 좋을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