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총 발행 예술세계 통권제262호
아트컬럼
명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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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재로의 천지창조
바티칸 박물관의 미로와 같은 전시실을 돌고 돌아 미켈란젤로의 방에 들어섰을
때 인류 최고의 걸작 ‘천지창조’는 어슴프레한 조명속에서 신비감을 내 뿜고 있었다. 바티칸에 전시된 모든 예술품들이 감탄의 대상이지만
미켈란젤로의 방은 화룡점정, 경이의 대단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방은 실내가 좁은데 비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매우
어수선하다. 더구나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조명만 하고 있어 옆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다. 모두들 감탄 어린 눈길로 천창을 쳐다보는
모습은 마치 은하수가 펼쳐진 별자리를 헤는 듯한 순수함과 경건함 그 자체였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요청으로
성 시스티나 성당에 작업대를 세우고 4년간에 걸쳐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렸으니 그의 초인적인 열정에 외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누운 채
고개를 바닥에서 들고 있다면 과연 몇분을 버틸 수 있을까. 군대생활의 경험으로 보아선 10분간을 지탱하는 것도 엄청난 고통이다. 그 고통
덕분이던가. 천지창조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인류 최고의 걸작품으로 칭송받게 되고 미켈란젤로는 미술사의 전설이 되었다. 이는 신이 어쩌면
미켈란젤로라는 천재화가를 통해 당신의 업적을 형상화 시켰던 것인지도 모른다.
천지창조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역순으로
그린4부작이다. 첫번째가 노아의 홍수이고, 두번째가 아담과 이브의 낙원추방, 세번째가 아담과 우주의 창조이며, 네 번째가 이를 종합한
그림이다. 엄밀한 의미의 천지창조와는 그 순서가 틀린다. 원래는 빛과 어둠의 구분, 달과 해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그리고 아담의 창조
순이다. 낙원추방과 노아의 홍수는 그 이후의 일이다.
특히 아담의 창조는 이 그림의 압권이자 천지창조의 상징으로 꼽힌다. 아담의
비스듬히 누워 뻗은 왼손에 하느님이 오른손을 뻗어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모습에서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아, 그러나 세상은
그토록 감동적이지 못한 것임을 어이하랴.
신이 아담에게 주는 생명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육신뿐만 아니라 신과 같은 경지의
고귀한 정신과 영혼을 전해 준다는 데 있지 않을까. 생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인간 역시 동물의 한 종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인간의 위대성은
자신을 창조한 신을 역으로 창조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그림에서 신과 인간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하지만 두 손길 사이는 완전히
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 떨어져 있는 게 의미심장하다. 이 좁은 간극이야 말로 인간이 시공을 초월할 수 없는 피조물이라는 상징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그림의 신은 수염을 기른 모습인데 나는 엉뚱하게도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느님의 모습은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에 영락없다. 신은 인간위에
군림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이 부딪혀야 할 이 세상의 고통을 걱정하는 듯 하다.
천지장조에서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은 아담과
이브의 낙원추방이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단순히 금단의 열매를 먹은 죄로 쫓겨나는 것이지만 이는 불가사의한 인간존재를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징성이 있다. 금단의 열매야 말로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라는 이율배반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기실 악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생명체의
자신을 위한 보호본능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체의 육신을 먹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그 자체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끊임없는 고통으로 내모는 요인이다. 아무리 인간이 고귀한 영혼을 가졌다 한들 이를 피해갈 수는 없다. 창세기에서 이를 선악과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변화무쌍한 대자연의 재앙과 알 수 없는 무한공간의 우주,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이지 아니한 전쟁과
질병, 생존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선악의 대결은 그 누구도 해답을 줄 수 없는 것 뿐이다. 태어나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해야 하는 고통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결국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아마도
종교는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을 것이고 창세기는 바로 인간 스스로 찾은 모범 답안이었을 것이다. 기실 그것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신의 피조물로 예속되는 절차이다. 종교는 삶의 고통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하고 영혼이라는 명제를 통해 이를 초월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면 종교의 창시자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엄청난 고뇌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분명 그 실체와 진리가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해답을 줄 수 없어 절망한
끝에 만들어 낸 것이 종교가 아닐까 한다.
금단의 열매와 판도라의 상자는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금단의 열매 역시
그리이스 신화 판도라의 상자에서 모티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인간세상은 끝까지 악으로 고통 받으리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만 금단의 열매가 인간세상을 선악의 대결속으로 내몰아 영원히 고통을 주는 것이라면, 판도라의 상자는 그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고나 할까.
천지창조는 벽화이기 때문에 건물의 수명이 다한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보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건물은
다시 지으면 되지만 그림을 다시 그릴수도 없는 것이니 결국 기술문명이 해결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2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