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기고
인도에서 뵈었던 세 분
현진 /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서기 2000년에 접어든 지도 몇 년이 지난 그해, 출가한 절에서 어설픈 늦깎이란 눈칫밥으로 이제 절집안 장판 때가 뭔지나 알아먹었을 무렵에 은사스님의 허락을 얻어 10년을 한정하고 인도 공부길에 나서게 되었다. 어디 가서 뭘 공부 하는지도 그리고 어떻게 공부할 건지도 묻지 않으시고 '잘 다녀와!' 라는 말씀 한 마디로 나를 놓아주셨을 때 돌아서며 갑자기 일었던 생각은, 자유로움이 아니라 막막함 그 자체였다. 그 덕분에 정말 마음껏 놀며 실컷 공부하다 올 수 있었지만...
그 첫 해의 반 년 동안은 아직 그곳엣 공부할 기본 여건인 언어(영어)가 준비되지 않았기에 뭄바이 배후의 교육도시인 뿌네에서 어학연수를 받게 되었다. 시중의 어학원이나 단체가 하는 연수가 아니라 당시 잠시 유행했던, 개인이 알음알이로 주선해주던 어학연수에 참여해서였는데, 그러다 보니 단기나 1년 단위로 모인 학생들 혹은 젊은 일반인들과 간이 기숙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 한 연수생으로부터 들은 테레사 수녀와 관련된 일화는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약 10여 년 전, 그 연수생이 대학생일 때 친구와 함께 처음 도착한 뭄바이 공항에서 겪었다는 일화이다. 당시 공항의 국제선 중앙대합실은 지금처럼 넓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이 쉽게 보일 정도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 대합실 왼편의 VIP 통로에 수행원을 대동한 한 연로한 수녀님의 모습을 드러나자 잠시 그 주위로부터 웅성이던 소리가 물결처럼 전 대합실로 전달되더니 일순간에 서 있던 모든 인도인들이 몸을 숙였고, 심지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분은 당시 많이 연로한 몸으로 뭄바이 행사에 참석하신 테레사 수녀였는데, 우두커니 멀뚱말똥 뭔 일인지 신기해하며 서 있던 사람은 모두 외국인뿐이었다고 한다. 약간은 4차원의 성격이라는 그 연수생의 친구는 수녀님에게 달려가다 수행원에게 황급히 제지당했는데, 수녀님의 배려로 결국 수행원들의 눈총을 받으며 손까지 잡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땐 그저 신기한 하나의 인도 이야기로만 들렸었다. 인도에서 '스승' 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기 전까진.
나름 반년의 어학연수를 ㅁ나치고 원래의 계획에 따라 티베트어를 익히기 위해 다람살라로 옮겨 한 해 남짓 지냈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랐던 티베트어 공부에 이니 흥미를 잃고 그곳에 계시던 스님 한 분의 도움으로 다시 어학연수를 하던 뿌네로 돌아와 본격적인 산스끄리뜨 공부를, 거의 두해를 허비한 다음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뿌네대학의 대학원 어학부 기초과정도 이내 포기한 채 시작했던, 현직 혹은 퇴인 교수의 사사師事를 통한 공부였다. 마치 유럽의 눈 파란 학생이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와 '가나다라' 부터 한국어를 배우듯이,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했던 산스끄리뜨 공부는 인도엣 만 10년을 채우고 완전히 귀국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점차 내 자신의 공부여력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교수님을 찾아서 나중에는 모두 세 분에게 사사를 받게 되었다. 인도 여학자의 기품을 보여주셨던 마더위 교수님, 인도 문학의 깊은 흥취를 알려 주셨던 랄레 교수님, 그리고 산스끄리뜨 문법의 대가로서 많은 한국 제자를 두셨던 죠쉬 교수님.
"학자는 자기 학문을 돈으로 팔지 않습니다. 더욱이, 멀리 이국 땅에서 이곳까지 와서 공부한다고 매일 나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어찌..."
교육도시 뿌네의 한 대학에서 수십 년째 진행 중인 산스끄리뜨 산전편찬 위원으로 계시던 마더위 교수님과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 조그만 봉투를 내밀었을 때 하셨던 말씀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인도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 하기 직전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매일 아침 댁으로 찾아뵙고 산스끄리뜨 철자 읽기부터 시작하여 산스끄리뜨 독본의 기본으로 여긴다는 『빤짜딴뜨라』를 비롯한 몇몇 책들을 읽어내며 가르침을 주시는 내내 여학자로서의 모습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으섰다.
첫 해엔 교수님과 매일 두 시간 정도 읽어낸 내용을 녹음기에 담아와 그것을 복습하고 다음날 읽을 내용을 예습하는 것만으로 온종일이 허비되었다. '산스끄리뜨 공부는 복습을 통해 익혀햐지, 예습으로 준비하려는 건 처음 시작하는 학인에겐 무리' 라는 말씀을 몇 차례 하셨지만, 어학(영어) 실력이 부족해 잘 들리지 않는 녹음기와 찾아도 찾아도 보이지 않는 단어에 대한 분풀이 대상이 된 산스끄리뜨 사전을 집어던지길 하루에도 수십 차례, 던진 사전이야 다시 주워 쓰면 되었지만 박살이 난 녹음기를 새로 사러 수차례 뿌네의 전자상가를 돌아다니던 기억이 한동안 전자상가만 보면 고개가 절로 돌려졌었다.
"산스끄리뜨 문법? 그건 나도 잘 모르는데? 그게 꼭 필요하다면 한달만 기다리세요. 나도 정리해두면 좋을테니, 문법을 전공하는 동료 교수에게 따로 배워서 알려드리리다."
철자 읽는 법만 익히고 바로 독본을 읽어가던 중, 도저히 진전이 없는 듯함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문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마더위 교수님께서 의외로 주신 답변이었다. 당신도 문법을 따로 익힌 기억이 없다고 하시며, 자연스레 많은 책을 읽다보니 문법을 익힐 만한 필요성도 그리 절실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셨는데, 무엇보다 '나?나는 그것 몰라! 필요하면 내가 잘 알아보고, 그리고 정리해서 알려드릴게~' 라는 말씀이 약간은 충격이었다. 대학 사전 편찬위원회 책임자로 십수 년째 계시는데 모르실 리 있겠는가? 특히 나 같은 초등생에겐 대충 아는 것만 둘러 말씀하셔도 충분하셨을 텐데, 결국 한 달 정도 지나서 깨알같이 정리하신 내용을 복사해주시며 약속을 지키셨다.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라는 깨달음이 진정한 지헤智慧라던 어느 큰스님의 말씀이 그 당시엔 몇 차례 반추되기도 했지만, 나중엔 금강경을 산스끄리뜨본으로 정리해보고 난 후에야 내가 짐작하게 된, 인도의 지혜인 반야(般若: 눈앞에 두고 본 듯이 아는 것)는 산냐(相 : 몽뚱그리 알아차림으로 아는 척하는 것)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란 것을, 정작 불교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며 공부내내 불교경전 읽기는 손사래만 치시던 가운데 보여주신 교수님의 그런 가르침의 모습을 통해 오히려 더욱 정확히 배우게 된 셈이다.
시일이 경과하여 조금의 시간이 여우가 생기자 나는 한 분의 교수님을 더 찾아 뵙고 새로운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인도 중부의 유수 대학의 문학대학장을 역임하고 퇴임해서 뿌네에 계신 랄레 교수님이었다. 교수님과는 인도정신의 정수로 간주되는 『바가바드 기타』를 시작으로, 인도 고대철학의 집약서인 『우빠니샤드』 초기본 18책을 수년에 걸쳐 읽어내려갔다. 인도 브라만으로서의 자부심과 그를 뒷받침하는 폭넓은 학식 및 단지 앎에서 그치지 않고 인도철학과 문학에 대해 진한 '흥취' 를 지니섰던 교수님 덕분에 간혹은 내가 한국의 불교승려가 아니라 인도에서 태어난 브라만인 '브리흐마짜르야(Brahmacarya: 브라흐만이 되고자 노력하는 수행자)' 같다고 느낀 적도 있을 정도로, 읽어가는 글 속으로 학인을 몰입시키는 분이섰다. 그래선지 그 이후에도 『우빠니샤드』를 읽을 때면 불교도로서의 날 선 비판의 시각 못지않게 정통 브라만으로서 지닐 수 있는 『우빠니샤드』에 대한 정견正見이라고 할 만한 생각들이 심심치 않게 생겨나곤 하였는데, 이 모두 교수님의 가르침 영향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렇게 브라만교가 이해되면 될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 또렷해지는 듯한 느낌은? 교수님과 했던 공부의 부작용인지, 순작용인지...
예전에 같이 어학연수를 했다가 현지에 생활터전을 잡은 몇몇 지인들과 함께 서해안의 고아 해변으로 나들이도 다닐 정도로 여유 아닌 여유가 생겼을 때 드디어 죠쉬 교수님과 독대獨對하여 책을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갑자기 남방에서 온 스님들이 대거 귀국하였고 한국학생들도 제법 줄어든 일이 있었는데, 그 덕에 무려 3년 남짓 기다렸던 기회가 온 것이었다. 평생을 올곧은 브라만 선비로서 사셨던 선생님은 젊었을 때 시력이 약해지면서부터 더욱 서책 독송에 집중하여 방대한 분량을 암ㄴ기하고 계셨으니, 이미 눈이 거의 보이지 않으셨던 그때 선생님과 재차 읽은 『바가바드 기타』와 18책의 『우빠니샤드』 정도는 첫 단락 한두 단어만 일러드려도 하루 읽을 분량을 미리 암송해내시곤 하셨다. 얼마 전 국내에 계시는 연로한 유가 선비 한분을 한 사형이 찾아뵈었다는데, 그 명성에 비해 서고가 너무 휑하여 그 연유를 여쭙자 "모름지기 선비라면 글을 머릿속에 넣고 다녀야지 하릴없이 책꽃이엔 왜..." 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역시 바른 길에 계신 학자라면 여기나 거기나 다름이 없는 듯하다.
선생님 댁 2층 서실에서 제법 큼지막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매주 거의 토요일까지 오후 2시간 가량을 몇 년 동안 혼자서 찾아뵐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나를 몇몇 지인들은 부러워하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부러움까지 받으며 선생님과 글을 읽어나가던 중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음에도 어눌한 말뚜로 끙끙그리며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있으면 불편하신 눈을 끔뼉이시며 '얘가 뭘 모를까? 왜 모를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어쩌지?' 라고 말씀하시는 듯 한 표정으로 내가 어서 제자리를 찾길 기다리곤 하셨는데, 지금도 선생님이 생각날 때마다 떠오르는 그 모습에서 나는 진정한 '스승의 모습' 을 그것도 바로 지척에서 수도 없이 뵈었었다. 글 배움보다 어쩌면 훨씬 더 값진 그 '모습' 을.
유가에서 스승은 그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하였던가? 인도에서는 그보다 더 나아가 스승의 모습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것조차 어려워할 정도로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믿음이 존재했었고 지금도 그러한 듯하다. 앞서 말한 테레사 수녀님 또한 인도인들에겐 위대한 스승이었기에 공항의 그런 모습이 전개되었던 셈이다. 그 이면엔 어릴 때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스승에 대한 지나친 존경으로 인한 폐단 또한 심심찮게 지적되기도 한다. 심지어 생중계 중 들통이 난 어느 교단 교주의 눈속임에도 정작 처분을 받은 것은 방송국의 담당 PD였을 뿐, 그의 가르침이 지속되는 데는 전혀 변함이 없었던 일도 있었다고 하니... 그럼에도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지 않는 이들의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 은 수천 년 인도문화를 이끌어 온 큰 원동력이었던 또한 사실이다.
우리말에 자신을 일켤으며 높임말을 쓰는 경우가 딱 하나 존재한다. 심지어 일국의 왕이나 나아가 황제라도 '짐' 이라며 자신을 겸칭하지만, '여러분! 선생님이 선창할 테니 모두 따라하세요!' 라는 말, 우리도 많이 들으며 커 오지 않았던가, 그것은 선생님이 자신을 존경해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은연중에 심어줌으로써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임은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불교가 일어난 인도에서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 어느 면으로 조금 지나치기까지 한 존경심, 어쩌면 이들은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는 의미를 중국의 유가 선비들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작, 우리는 어떤지?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세 분을 기억하며.
현진 스님
중앙승가대학 역경학과를 졸업하고 인도 뿌나에서 산스끄리뜨어와 빠알리어를
수학했다. 현재 봉선사 범어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편역서로는
『중국정사조선열국전』, 『빠알리문법』, 『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 『치문경훈』
등이 있다.
이 글은 불기2567년 雲門지 가을호에 있는 글을 퍼왔습니다.
그리고 운문사 홈폐이지 계관운문에서 더 자세히 볼수 있습니다.
요번주 토요일은 정월대보름입니다. 그리고 일요일은 사리암에 산신불공이 있습니다.
요번주 주말에 사리암을 방문하는것을 한번 해보시지 않으십니까?
운문사에도 관심가져주시기를...
운문사 사리암 도반 법우 여러분 나반존자님의 가호 가피 많이 많이 받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님 ()()()
항상 감사합니다
2024년에도 건강하시고 좋은글 좋은사진 부탁드립니다
날짜 가는거를 깜빡 한것마냥 금요일이네요.
우수절기 맞춰 펑펑 내린 눈이 이산 저산 멋진 설경 풍경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고 소식 감사합니다.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