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글/이칠성
가을이 소리 없이 익어가고 있다. 이맘때쯤의 가을 들녘은 늘 아름답다. 가을 햇살에 기대어 나란히 누워있는 울타리콩, 열정의 여름을 보내면서 숯불이 되어버린 고추들, 서로를 꼭 끌어안고 탱탱하게 영근 먹빛 포도송이들, 일어서면 머리에 닿을 듯이 나지막이 내려앉은 하늘. 보이는 것, 느끼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정감이 간다.
가을! 내 마음을 항상 젖게 하는 이름이다. 방황하는 마음, 가난해진 마음을 늘 다독여주고 풍성하게 해주는 내 마음의 고향 같은 이름이다. 황금들녘에 서면 내 마음도 가을들녘처럼 넉넉해지고 안온해진다. 허기진 마음도, 기다리는 마음도, 서럽던 마음도 모두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된다.
그러나 가을이 짙어갈수록 풍요로운 들녘에서 불어오는 슬픔의 냄새를 맡는다.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이면의 슬픔이랄까! 벼이삭에 농부들의 한숨과 슬픔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팔리지 않는 벼에 쌀값폭락, 외상 비료 값, 농약 값으로 인한 연체된 절망으로 농부들의 주름진 골을 더 깊게 한다. 들녘은 황금물결로 출렁이고 있지만 농심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벼를 수확하고 있지만 포대에 담는 것은 벼가 아니라 빚을 담는다는 우리네 이웃들.따스한 겨울을 기약하지 못하는 현실이 농부들의 가슴을 슬픔에 젖게 한다. 마음이 아려온다. 거대 수입시장에 잠식되어 웅크리고 있는 작고 여린 몸짓들, 누가 그들을 끝없이 그늘지고 그늘지게 하는지...
이런 우리 이웃들을 생각하면서 난 들녘에서 부는 바람을 떠올렸다. 갖가지의 모습으로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드는 바람, 가슴을 파고드는 뜨거운 사랑의 바람도 있고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바람도 있을 것이다. 더위와 땀을 식혀주는 바람도 있을 것이고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바람도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는 바람이 되어 누군가를 흔들리게 하고 내 자신 그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지는 아닌지... 무의식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허나 아무리 흔들리게 하더라도 근본까지 흔들리게 하진 말아야 하리라. 더위와 땀을 식혀주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주는 그런 바람이 되어야 하리라. 또한 몰려오는 바람에 온몸을 맡길지라도 내 人生의 방향까지 흔들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올 한해 유달리 큰일이 많았다. 진실한 노랑이 떨어졌고 인동초忍冬草 같은 삶을 사신 거목巨木도 쓰러졌다. 그러나 이 가을, 또 다시 들판은 황금물결을 이루었고 대풍大豊을 약속했다. 경제가 살아나고 국가신용등급이 올라가는 등 우리나라는 승승장구할 것이다. 이런 갖가지의 일들을 잊고 가을의 숨결을 느끼고자 둑길을 걷는다. 상쾌한 초가을의 밤바람을 만끽하고 싶어서이다. 포근하게 나를 감싸주는 어둠의 질감에 가슴이 맑아지고 고요해진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가을바람이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듯했다.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 전 원래 마음이 여리고 부드러운 바람이어요. 항상 당신에게 좋은 바람이 될게요.”침묵 속에서도 이렇게 마음을 전해주는 가을바람처럼 가을이 되면 항상 내 앞을 환하게 비쳐주는 기쁨의 바람만 불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바람 많은 세상의 무수한 절망 앞에서 어떤 비바람 모진 세월도 견뎠으면 좋겠다.
가난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꽃을 피우고 단단한 열매로 세상을 밝게 장식하는 저 거룩한 밤나무처럼... 이 가을, 우리 모두는 마음을 주고받는 이웃이 되고 우리에게 불어오는 모든 바람이 향긋함으로 넘쳐나는 바람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