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한국의 고서(古書)/춘향전
물매 정인량
판소리 춘향가(春香歌)가 원본으로, 한국의 고전 작자미상 연애 소설이다. 양반의 아들 이몽룡과 은퇴한 기생 월매의 딸성춘향의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차에 굴하지 않는 연애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춘향가는 판소리 5바탕(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 중에서 가장 문학적,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며, 처음부터 끝까지 곡을 다 부르는 완창 시간 또한 평균 7~8시간 정도로 판소리 5바탕 중 가장 길다.
줄거리
남원의 이름난 미녀 춘향이 몸종 향단이와 함께 단오날 그네를 뛰고 있던 차에 마침 구경 나온 양반가의 후계자 몽룡이 그녀를 보게 되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몽룡의 하인 방자의 도움으로 연애 플래그가 성립된 그들은 곧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되지만, 남원 부사였던 몽룡의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임명되면서 몽룡도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남겨진 춘향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남원 부사로 새로 부임한 변학도에게 억지로 수청을 들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국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괘씸죄로 그녀는 옥에 갇히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몽룡은 거지가 다 되어서그녀를 다시 찾아오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정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생일 잔치 날, 변학도는 운봉, 곡성, 정읍 등의 주변 고을 사또들을 데리고 잔치를 벌인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자 이들은양반답게 한시 놀이를 하게 되는데, 변학도가 '고'를 운으로 띄워서 변 사또의 부하들과 변 사또의 동료 사또들 및 생일 잔치에 초청된 양반들이 한시를 짓도록 했다.
이에 잔치에서 음식만 받아먹고 있던 이몽룡은 자신이 비록 거지꼴이지만 그래도 양반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자신도 한시를 지었다.
물론 이몽룡은 소설 속의 인물이므로 이 한시의 원작자도 춘향전의 작가일 수밖에 없다. 이몽룡의 모델로 거론되는 실존인물 성이성의 스승인 조경남이 쓴 <속잡록>에 명나라 장수 조도사(趙都司)가 지은 光海亂政譏詩(광해난정기시)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 시가 금준미주가와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실제로 읽어보면 시를 이루는 한자의 반 정도가 아예 똑같다.
金樽美酒 千人血
금준미주 천인혈
(금빛의 아름다운 잔에 담긴 가주(佳酒)는 천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 萬姓膏
옥반가효 만성고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고기는 만 백성의 기름을 짠 것이니,)
燭淚落時 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 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
(풍악 소리 높은 곳에 원성 소리 높더라.)
이 시를 쓴 직후 이몽룡은 관아를 빠져나갔고 이 시를 받아본 운봉 영장은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무식한 변학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잔치를 즐기는데...
그 직후 암행어사가 출두하면서 변 사또는 완전 망했어요 상태가 된다.사실 암행어사의 정체는 새 장원에 급제한 이몽룡이었다.
출두를 숨기기 위해 부득이하게 거지 꼴로 연인인 춘향이까지 속인 셈.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절을 지킨 결과 춘향은 마침내 기생의 딸에서 신분을 뛰어넘어 양반의 정실 부인[9]이 되고 이몽룡은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라서 삼남 삼녀 잘 낳아서잘 산다는 해피 엔딩을 맞게 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판소리의 특성상 퍼져나가면서 내용이 변형되어 기록한 판본에 따라 '춘향이 모진 고문을 버티지못하고 숨진 이야기', '구해졌지만 신분의 격차에 좌절한 춘향이 결국 자살', '구해놓고 이몽룡이 바람피워서 자살'했다는이야기도 있다
남원 지역의 전설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춘향전과는 달리 이몽룡을 기다리다 못해 자살하거나 추녀여서 이몽룡의 외면을 받아 자살해버리는 엔딩도 있으며(일명 <박색춘향전>으로, 1970년대에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 가장 널리 퍼진 것은 위 해피 엔딩
의외로 중국에서도 나름대로 인기가 있는 작품이다. 주로 월극 작품으로 만들어졌는데, 어디서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서그 형태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버전은 그래도 보면서 '조선을 배경으로 한 스토리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게 배우들이 조선풍 분장을 하고 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버전은 그냥 중국 배경에 스토리만 춘향전 큰 줄기를 따라간다 할 정도로 중국식으로 현지화하기도 한다.
일본어로도 자주 번역되었다. 이 중 1882년 6월에 나카라이 도스이가 계림정화 춘향전을 오사카아사히 신문에 20회 번역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번역본이 일본에서 발표된 한글 고전문학 번역본의 시초 중 하나가 되었다.
1892년에는 프랑스에서 "향기로운 봄"[11]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서도 몽룡이 춘향을 만나기 위해 여장을 한다(...) 프랑스 작가에게 춘향전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김옥균을 죽이고 독립협회에 대항한 황국협회를 이끌었다고 악명높은 홍종우이다. 다만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정치깡패 같은 식으로 욕먹을 인물은 아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베트남까지 전해져 전래되고 있다. 여 주인공의 이름도 春香의 베트남식 발음(난 수엉 후엉)이고, 여기에서도 프랑스어판 영향으로 몽룡이 춘향을 만나기 위해 여장을 한다고(...)
1906년에는 대만에서 신문 연재되었다. 여기서는 춘향이 매를 맞고 죽어서 집으로 실려가는 중에 다시 살아나서 다시 감옥에 갇히나 이맹협이라는 협객이 구출해서 이몽룡(이 작품에서는 이령)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올 때까지 보호한다는무협지스러운 각색이 들어가 있다고.
특징
고구려 안장왕의 이야기가 춘향전의 모티프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교수였던 다카하시 도오루에 의하면 서상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춘향과 이몽룡이 한창 사랑에 빠졌을 때 이에 대한 묘사가 굉장하다. 이때 둘의 나이는 17살, 16살이라 요즘 관점으로 보면 중고등학생이 발랑 까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대에는 보통 그 나이 때 결혼했기 때문에 평범한 성인 남녀의 묘사이다.
어쨌든간에 현대 기준으로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한창 아청법에 대해 논란이 있을 때 아청법이 소설 등 텍스트 매체에는 적용되면 안된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 춘향전과 같이 성적 묘사가 강하게 나오는 고전 문학 작품들을 들었다.
눈결에 얼핏 보니, 삼삼이를 덮고 있는 것이 맹랑하고 야릇하다. (중략)
“생리대를 풀고 과거 시험장에 있는 과녁[13]처럼 잠깐 일어서려무나.”
“그건 곤란합니다. 그만하고 주무시지요.”
“이렇게 부탁하는데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춘향이 어쩔수 없이 반쯤 일어섰다 다시 앉았는데, 몽룡이 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니, 겹겹이 둘러 싸인 푸른 산속, 늙은 중이 송이죽을 자시다가 혀를 데인 형상이요, 홍모란(紅牧丹)이 반개하여 피어오는 형상이라. 영계찜을 즐기시나 닭의볏이 거기 왜 있는가? 먹물이 흐른 줄과 도끼자국이 일치하는 구나.
이도령의 움직임좀 보소. 몸이 점점 달아오르니, 훨훨 벗어 제끼고 모두 벗고 이부자리로 뛰어드는데, 춘향이 하는 말이,
"저 보고는 일어서라더니 당신은 왜 안일어납니까?"
이도령이 눈결에 일어서서 앉아있자 춘향이 묻는 말이
“검은색을 띠면서,송이버섯의 머리 같은 것이 무엇시오?”
“그것도 모르느냐. 동해 바다에서 대합(大蛤) 조개 일쑤 잘 까먹는 소라 고둥이라 하는 것이라.”
에후리쳐 덥썩 안고 두 몸이 한 몸 되었구나. 네 몸이 내 몸이요, 네 살이 내 살이라. 호탕하고 무르녹아 여산폭포(廬山瀑布)에 돌 구르듯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비점가(批點歌)[18]로 화답한다.
“우리 둘이 만났으니 만날 봉 자 비점이요, 백년가약 맺었으니 맺을 결 자 비점이요, 우리 둘이 누웠으니 누울 와 자 비점이요, 우리 둘이 벗었으니 벗을 탈 자 비점이요, 우리 둘이 덮었으니 덮을 복 자 비점이요, 오늘 침상 즐겼으니 즐길 낙 자비점이요, 우리 둘이 입 맞추니 법칙 여 자 비점이요, 우리 둘이 배 닿으니 배 복 자가 비점이요, 네 아래 굽어보니 오목 요자 비점이요, 내 아래 굽어보니 내밀 철 자 비점이요, 두 몸이 한 몸 되니 모을 합 자 비점이요, 나아갈 진, 물러갈 퇴, 잦을빈 자 비점이요, 좋을 호 자, 실 산 자자, 물 수 자 다 비점이라.”
이렇듯이 음탕한 소리와 난잡하게 즐기니 남대문도 개구멍처럼 작게 보이고, 인정도 매방울처럼 작을 뿐이라. 선혜청이오 푼이요, 호조가 서 푼이요, 하늘이 돈짝만하고, 땅이 맴도는구나.
ㅡ 춘향전 도남문고본. 출처
이도령이 춘향의 가는 허리를 후리쳐 담쑥 안고 기지개 아드득 떨며 귓밥도 쪽쪽 빨고 입술도 쪽쪽 빨면서 주홍 같은 혀를물고 오색 단청 순금장 안에 쌍거쌍래 비둘기같이 꾹꿍꿍꿍 으흥거려 뒤로 돌려 담쑥 안고 젖을 쥐고 발발 떨며 저고리 치마 바지 속곳까지 활씬 벗겨놓으니 춘향은 부끄러워 한편으로 잡치고 앉아 얼굴이 볼그레하고 구슬땀이 송실송실 맺힌다. 어디 이뿐인가, 〈춘향가〉에는 ‘정자타령’ ‘궁자타령’ ‘비점가’ 등 춘향과 이도령의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빗대어 부른 사랑가가 즐비하다. 갈 데까지 다 갔지만 전혀 상스럽거나 추하지 않다. 그래서 〈춘향가〉이다. 〈춘향가〉는 이와 같이 은밀한 남녀간의 관능적인 사랑을 열린 공간에 드러내놓고 자연스럽고 떳떳하게 즐길 수 있게 해준다.
ㅡ 김석배 교수. 네이버 지식 백과. 〈춘향가〉의 자력
특히나 이 부분은 유머화 되기도 했다. 업음질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선생님에게 질문했더니 그제야 보이는 부분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했는데 이 번역본의 성적 묘사가 매우 강해서 '일본인들이 열녀 춘향을 모욕하려고 왜곡한 거 아냐?'라며 연구를 했으나, 알고 보니 원전을 충실히 번역한 것일 뿐이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변학도가 춘향을 고문하는 방식은 본래 국청에서 죄인을 심문할 때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는 방식인데 차마 여성의 볼기를 치긴 민망했던 지방 관원들이 여성에게 장형을 집행할 때 대체하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했다. 사실 여성의 볼기를 칠 때는 속옷 한 장만 입히고 집행을 했는데 옷 위에 매를 치게 되면 나중에 피떡이 되었을 때 처리하기도 힘들어 이런 식으로정강이를 치는 방식으로 대체한 것이다. 정강이는 볼기와는 달리 노출시키는 데 대해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몽룡과 춘향은 정식으로 혼인한 게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변학도가 이걸 성 풍속 문란으로 몰아 역으로 당할수도 있기에 변학도가 춘향을 처벌한 게 정당화 될 수 있고 심지어 장형으로 다스릴 수도 있었다. 물론 춘향전에서는 이몽룡과 춘향의 사랑이 아름답게 각색되었기에 변학도가 춘향을 수청 안 든다는 이유로 어거지로 처벌한 걸로 처리한 만큼 춘향이장형을 맞는 굴욕을 면하긴 했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처벌 내용이 간통죄가 되는데, 이러면 춘향이 문제가 아니라 이몽룡, 정확하게는 이몽룡의 집안을 언급하면서 처벌 내역 보고를 중앙에 해야한다. 지방 향반이라면 몰라도 이몽룡 같이 지방 수령 이상을 하다가 중앙으로 올라간 관료 집안을 걸고 넘어진다는 것은 전 지방 수령 처벌 문제와도 엮이는 형태라서절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몽룡의 부친과 변학도는 모두 남원 부사로 나오는데, 사또라고 나오면 만만해 보이지만남원부에는 종3품 도호부사가 임명된다. 그럴 바에는 관기가 되었건 평민이 되었건 여자 하나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것이 뒷수습이 훨씬 간편할 것이다.
간혹 변학도가 자기 생일날에 춘향이를 죽이겠다고 했던 본문의 내용 때문에 춘향이 참형당하기 직전에 구원받는 걸로묘사하는 매체가 있지만 지방 관원에게 죄인을 처형할 권한이 없었고 처형권은 오로지 임금의 고유 권한이었던 만큼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었으면 변 사또는 가렴주구로 처벌받은게 아니라 역모죄로 처벌 받았을 듯. 다만 정작 춘향전 본문에는 춘향을 참형에 처한다는 내용은 없고 변학도가 춘향을 죽이려는 방식은 장살 즉 장형을 집행하면서 죄인을 치사시켜 버리는 방식이다. 실제로도 탐관오리들이 죽이고 싶은 이가 있으면 이런 방식으로 고의로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내리쳐 죽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춘향전 본문 중에 변학도가 물고장을 운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물고장이 다름 아닌 죄인이 장을 맞다가 실수로 죽었을 때 올리는 보고서이다.
아래 변학도 소개에 무능한데 음서 출신으로 낙하산 임명되었다고 나오는데, 남원부는 도호부사가 임명되는 직위이다. 이게 어느 정도 위치냐면, 조선 시대 전라도 지방관은 전라도 관찰사(종2품)이 최고위고, 그 아래에 4목(나주, 광주, 제주, 능주)의 목사(정3품)가 있으며, 그 아래가 7개의 도호부[21]에 임명되는 도호부사(종3품)이다. 현대의 군제로 치자면 낮게 잡아도 장성급이고 관직으로 치면 시장이나 2급 이사관, 국장급이다. 일반적인 낙하산이나 음서로는 이 직위에 임명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변학도는 상당한 능력자이다. 그 능력이 빽이건, 돈이건, 아부건 뭐건간에.
그리고 연고지에 지방관으로 부임해서 토호와 결탁해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거나 부패를 일으킬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조선 시대에는 고향으로 부임하는 것을 제한하는 상피제가 있었기에 이몽룡이 암행어사로 고향인 남원에 와서 춘향을구해주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칼럼이나 기사 역사 속 명저를 찾아서 춘향전 속 역사 이야기 상피제(相避制) 《춘향전》의 혁명성은 어디로 갔는가?등이 존재하는데 애초에 이몽룡의 부친이 남원에 부임했다는 것은 이몽룡 집안은 남원과 연고가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부사의 임기는 최대 5년 인데다 이몽룡의 아버지가 승진되어 한양으로 떠나기 때문에 5년을 안채웠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채웠다 할지언정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이몽룡의 출신지가 남원일리도 없다. 일족이 현직 지방관이라면 몰라도 부친의 전 부임지라서 상피제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몽룡의 모티브로 언급되는 성이성도 아버지 성안의 가 남원부사를 지냈고 성이성도 아버지를 따라가 3년간 남원에서 지냈지만 3차례나 되는 암행어사를 모두호남에 암행어사로 파견된다.
진짜 큰 문제는 암행어사 문서에도 있지만, 암행어사는 이몽룡 같은 초보가 임명받는 보직이 절대로 아니라는 데 있다. 이몽룡이 한양에 올라가고 한 40대, 50대가 되어서 부임했다면 모를까 장원 급제했다고 암행어사 내려보내고 하는 일은 절대 없다. 성이성의 경우는 지방관 경력도 없이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이긴 한데, 문제는 이 때 성이성의 나이가 42세라는 것. 성이성은 1595년 생으로 1610년에 진사가 되었지만, 과거에 급제한 것은 1627년, 관직에 임명된 기록이 나오는 것은 1634년, 암행어사로 파견된 최초 기록은 1637년이다. 병과로 급제했다는 것과 첫 임명된 관직이정6품 정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 사이에 미관 말직을 전전했다가 기록만 이 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관직 생활10년차가 된다. 그리고 종6품 현감 정도는 지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만일 이 경우라면 성이성이 어사로 파견된것은 딱히 예외도 뭐도 아니게 된다.
몇몇 서적에서 조선 시대에 여죄수에게 칼을 씌우지 않아 춘향전에서 춘향에게 칼을 씌운 걸 오류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문헌을 보면 여죄수에게도 칼을 씌워서 옥에 가두는 게 관례였다. 심지어 민간 소설이아닌 이덕무가 실화를 바탕으로 남긴 기록인 은애전에도 은애에게 칼을 씌웠다는 기록이 나오며 천주교 박해에 관한 기록에도 하옥된 여신도에게 칼을 씌웠다는 기록이 전하는 만큼 춘향전에서 춘향에게 칼을 씌워서 옥에 가둔 건 전혀 오류가 아니다.
등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