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은 세계사 속 이야기 1.대체연료로서의 미라: 미라 재활용법 기원전 3,000 년부터 기원후 500 년경까지 이집트인들은 글자 그대로 수백만 명의 시신들을 미라로 만들었다. 무덤과 동굴에 미라가 넘쳐 흘러서 많은 시신들이 사막으로 운반되어 모래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건조한 기후 때문에 거의 모든 시신이 방부처리 여부에 관계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집트학자였던 지오반니 벨조니 박사는 1821 년 이집트의 무덤에 들어가 본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무덤 안에 들어서자 먼저 질식할 듯한 공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이따금씩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사방에 널려 있는 미라와 시신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 나도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컴컴한 벽들, 공기 부족으로 희미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횃불, 자기들 끼리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은 주변의 음산한 물체들, 그리고 주변의 미라들과 닮은 벌거벗은 먼지투성이의 아랍 안내인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형용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휴식 장소를 찾던 나는 가까스로 한군데를 발견하고 앉았다. 그러나 하필 앉은 자리가 바로 미라의 몸 위였다. 내 몸무게에 눌린 미라는 판지로 만든 상자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하려 했지만 별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내 몸은 무너진 미라와 함께 나동그라졌으며 이 때문에 주변 미라들의 유골 넝마 같은 옷가지, 나무관 등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15분 동안이나 꼼짝없이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곳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자 여지없이 발 앞의 미라들이 계속 부서졌다.... 이런 식으로 나는 무덤 방 하나하나를 탐사해 나갔다. 모든 방에는 서 있거나, 누워 있거나, 혹은 거꾸로 뒤집힌 다양한 형상의 미라들이 천장까지 가득 쌓여 있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수십만 구의 미라들이 소실되었다. 한때는 미라의 숫자가 너무 많아 톤 단위로 매매되거나 묘지가 통째로 매매되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소, 악어, 전갈, 곤충 등 온갖 종류의 동물들까지 미라로 만들었다. 도시마다 특정한 동물이 정해져 있기도 했다. 따라서 고양이가 죽으면 고양이 전담 도시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사후세계를 준비시켰다. 1888 년 베니 하산이란 곳에서는 약 30 만 마리의 고양이 미라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트랙터로 발굴된 직후 톤당 18.43 달러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운송된 뒤 가루로 만들어져 비료로 이용되었다.
고양이 미라들만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방부처리되거나 미라로 처리된 수많은 인간 미라들 중에서 박물관에 보관된 미라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 말에는 수백만 구의 인간 미라들이 이집트의 기관차 연료로 이용되었다. 목재나 석탄이 귀한 이집트에서는 미라가 훌륭한 대체연료였다. 미국작가 마크 트웨인은 열차를 타고 이집트 여행을 하던 도중 기관사가 "아니 이 평민 녀석들은 왜 이렇게 잘 안 타는 거야, 야, 왕 한번 태워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인간 미라를 비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지붕 덮개로 이용하기도 했다. 관에서 나온 목재는 간난한 이집트인들의 취사용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의 어떤 집들은 그런 목재로 벽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의 화가들은 보다 밝은 색상을 내기 위해 미라 가루를 물감에 섞어 썼다. 미국과 캐나다 회사들은 배에 가득 실린 미라들을 수입해서, 그들을 싼 천들을 이용하여 포장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포장지가 콜레라 전염병의 원인으로 밝혀지면서 생산이 중단 되었다. 미라의 놀라운 이용법에는 위와 같은 것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1100 년경부터 유럽이나 중동 지역에서는 의약품으로서의 미라에 대한 수요가 늘어갔다. 처음에는 미라를 밀봉하는 송진만 이용했다. 한 아랍 의사는 "처음에는 값이 싸서, 송진이 가득 채워진 머리 세 개를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미라 자체를 가루로 빻아 의약품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카이로의 한 의사는 "송진 확보가 힘들면 미라로 대체했다."고 말했다. 15세기의 카이로 시민들은 물에 미라를 넣고 끓인 후 위에 떠오른 기름기를 제거한 뒤 프랑스인들에게 팔기도 했다고 한다. 판매되는 미라 가루 중엔 송진과 약초를 섞어서 만든 가짜도 있었다. 아마 이런 가짜 가루는 미라 근처에도 안 갔던 것이므로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최악의 불량품은 질병으로 죽은 거지나 죄수들의 시신을 말려서 미라라고 속여 판 비양심적인 공급업자들의 제품이었다. 이런 시신들 중엔 죽은 지 몇년 되지도 않아서 건조된 뒤 가루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17세기 유럽의 의학계는 이집트 미라의 가루가 광범위한 질병 치료에 특효라고 주장했다. 의사들은 미라 크림이 지혈작용을 한다고 생각해서 상처에 바르기도 했고, 여러 가지 내과질환에도 좋다고 생각해서 환자들이 먹는 음식이나 차에 섞어 먹게 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미라 가루는 타박상이나 골절, 마비증, 편두통, 간질, 기침, 구토증, 간이나 비장의 질환, 독극물 중독 등의 치료제로 쓰이기도 했다. 마치 우리가 아스피린을 먹듯 당시 유럽 전역의 유럽인들이 미라 가루를 가까이 두고 먹었다고 한다.
17세기 스코틀렌드에서는 8실랑만 주면 1 파운드의 미라를 살 수 있었다. 1970 년대의 뉴욕 골동품 판매점에서는 미라 1온스가 40 달러에 팔렸다.
결국 의사들은 미라 가루가 생각만큼 의학적 효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17세기 프랑스 외과의사 앙브로즈 파레는 이렇게 썼다. "이 끔찍한 약은 환자에게 효과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복통만 유발시킨다. 하도 냄새가 고약해서 심한 구토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 이 때문에 혈액을 자극해서 출혈을 막기는커녕 더 악화시킨다." 그는 미라의 유일한 효능은 낚시 미끼로 쓸 때뿐이라고 주장했다. 2.두 개골을 이용한 치료: 기이한 민간요법들 의사들이 한때 거머리를 이용하여 피를 나게 하는 방법(방혈, 사혈)을 이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오늘날 이용하지 않는 흥미로운 치료법들이 과거엔 많이 있었다. 역병(페스트) 발진 치료: 살아 있는 비둘기를 반으로 잘라 절반을 상처에 바르면 독이 빠진다. 두통 치료: 교수형 당한 사람의 밧줄을 사용한다. 통풍 치료: 교수형 당한 사람의 두 개골을 갈아 마신다. 코담배 흡연: 교수형 당한 사람의 두개골에 붙은 머리카락 냄새를 맡는다. 고약: 갓난아기의 지방을 이용한다. 남성음란증: 커다란 찬물통에 뛰어들거나 쐐기풀을 성기에 씌운다.
그밖에 이, 도마뱀의 오줌, 두꺼비의 피부조직, 일각수 뿔(사실은 코뿔소 뿔이나 고래 어금니), 위 석(양, 소 따위의 체내 결석), 산 두더지 내장, 기타 다양한 배설물 등을 이용하여 비정상적인 많은 의약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금을 녹이는 물질로 값비싼 보석들을 갈아서 소비하기도 했다. 스페인 의사 니콜라스 모나르데스가 '신세계로부터 온 기쁜 소식'(1577)이란 책 속에서 담배의 의학적 효능을 칭찬한 후, 의사들은 두통, 치통, 관절염, 복통, 상처, 호흡곤란 등 각종 질환 치료에 담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에는 방울뱀 독이 간질 치료에 이용되기도 했다. 1950 년대에는 약 100 만 명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편도선염이나 난청, 머리 피부병, 여드름 등을 치료하기 위해 비교적 많은 양의 방사능이 사용되었다. 이들이 문제 부위에 쪼인 방사능 양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생종자들이 같은 부위에 쪼였던 방사능 양보다 훨씬 많았다. 결국 이 치료법으로 인해 뇌암을 비롯한 여러 심각한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통령 보좌관이었던 크리스틴 바니에 따르면 "당시에는 그런 방사능 요법이 아주 훌륭한 치료법이라고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화학요법의 치료 효과를 지켜보면, 바로 이 치료법이 그런 것이 아닌가 가장 의심스럽다.) 1600 년대에는 제비 기름이 근육이완증 회복에 인기가 있었다. 제비 기름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둥지에서 꺼낸 어린 제비 열두 마리와 로즈마리꽃의 연한 끝부분 한 웅큼, 월계수잎 한 웅큼 등을 준비한다. 제비의 긴 깃털과 날개, 꼬리 등을 제거 하고 나머지 부분을 돌절구에 넣은 뒤 그 위에 준비한 풀들을 놓는다. 제비의 내장, 털, 뼈, 풀,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쳐서 짓이긴다." 독사의 살도 여러 약제에 이용되었으며 특히 해독제로 많이 쓰였다. 반면 독사를 넣고 담근 술은 최음제 효능이 있다고 여겨졌다. 독사주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살아 있는 독사 여섯 마리와 약간의 술을 섞는다. 열을 가하지 않고 여섯 달 동안 삭힌 후 술을 짜낸다."
17세기에는 찰스 2세의 전의 중 한 명이 '위 청소용 솔'이란 장치를 고안해 냈다. 사용자는 우선 위벽을 따라 붙어 있는 굳어진 음식물들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따뜻한 물이나 술을 마신다. 그 다음은 솔을 알코올에 묻힌 뒤 철사 손잡이를 돌려가면서 천천히 사용자의 목을 통해 목 아래쪽으로 집어넣는다. 일단 솔이 위 속으로 들어가면 위를 깨끗이 청소하기 위해 위 아래로 잡아당겼다. 이런 솔 청소를 일 주일에 두 번 하면 사용자의 생명의 연장된다고 믿었다. 헨리 모건이란 유명한 해적을 치료했던 한스 슬로우안 경은 소화촉진을 위해 하루에 두 번씩 살아 있는 노래기 오십 마리를 넣은 물을 마시라고 권장했다. 이런 모든 기이한 처방들은 의학의 권위를 많이 깎아내렸다. 1832 년 제임스 메리언 심즈가 아버지에게 의사가 되겠다고 말하자, 사우스 캘리포니아 랭카스터의 호텔 주인이자 군(고을 군) 보안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내가 제일 경멸하는 직업이 바로 그 직업이다. 그건 전혀 진지한 학문이 아니야, 아무런 명예나 명성도 얻을수 없을 거다. 내 아들이 한 손에는 약상자를 들고 다른 손에는 주사기를 든 채 이 집, 저 집 돌아다닌다는 사실은 생각도 하기 싫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준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얘기는 아예 하지도 말거라." 3.생쥐 변론에 성공한 변호사: 동물재판 사례들 9세기부터 12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거의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파문했다. 1225 년에는 뱀장어가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1386 년에는 프랑스 팔레에서 암퇘지가 쫓겨났고, 1389 년에는 디종에서 말이 추방당했다. 1405 년에는 소가 추방당했으며, 생쥐와 거머리는 1451 년 스위스의 베른에서 추방당했다. 1906 년 스위스의 델리몬트에서 파문당한 개가 가장 마지막으로 파문당한 동물 중의 하나였다. 고양이만은 예외로 이런 불명예를 당하지 않았는데, 고양이가 사탄과 한패라고 믿었던 기독교의 전통을 감안한다면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고양이도 이 기나긴 동물 학대 기간에 교회법의 무자비한 손아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마녀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고, 마술과 무관한 일반 고소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사실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피고, 원고, 심지어 증인의 신분으로 법적 소송에 연관됐었다.
동물들이 이처럼 재판에 관련된 것은 분명히 동물들도 지능이 있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물재판의 기원은 적어도 플라톤(기원전 427 년경에서 기원전 347 년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법'에서 이렇게 썻다. "짐을 나르는 짐승이건 기타 짐승이건, 사람을 죽였을 때 그 행위가 경기 중에 일어난 일만 아니라면, 사망자의 인척이 살인을 저지른 동물을 처벌할 수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동물재판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서구 유럽에는 종교재판소와 민간재판소 모두에서 동물들에 대한 재판 절차가 정해져 있었다. 양쪽 경우 모두 변호사가 지정됐으며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동물들을 소환했다. 물론 동물들에게도 유리한 예외 규정이 있었다. 예컨대 아직 어리거나, 몸이 작거나, 명성이 높다는 이유로 형이 감량되는 경우도 있었다. 1750 년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프랑스의 한 암당나귀가 성질이 유순하다는 이유로 사면받기도 했다." 1457 년 프랑스 라브뉴이 지방에서는 암퇘지 한 마리와 새끼돼지 여섯 마리가 아이를 죽여서 먹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어미 암퇘지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새끼돼지들은 아직 어리고, 어미가 나쁜 본을 보인 것이며, 새끼들이 어미의 범죄에 가담했다는 증거도 불충분하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무죄방면되었다. 1522 년 프랑스 오탱에서 있었던 한 유명한 재판에서는 생쥐 몇 마리가 그 지방의 보리 수확물을 멋대로 훔쳐먹고 망쳐버렸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소환되었다. 그러나 생쥐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생쥐측 변호사는 소환 내용이 너무 특정 쥐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지역 교구의 모든 생쥐들을 함께 소환해야 하고 소환장도 교구 내 모든 마을의 설교단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도 이에 동의했으며 재판 일정도 다시 잡혔다. 그러나 생쥐들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피고측 변호사는 생쥐들이 진정으로 법정에 오고 싶어하지만 원고측에서 풀어놓은 고양이들의 감시가 두려워서 먼 길을 올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양이들이 절대로 자신의 고객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생쥐들이 출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판사들도 이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고측은 고양이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겠다고 반발했다. 재판은 다음 날짜가 정해지지도 않은 채 다시 연기됐고 결국 생쥐측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바르톨로뮤 샤스네라는 생쥐측 변호사는 곧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변호사가 되었다. 사실 동물재판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E. P. 에번스의 '동물재판과 사형'(1906)에서는 824 년부터 책이 출간되던 해까지 있었던 191건의 동물재판 사례들을 다루고 있다. 가정에서 키우는 가축들은 주로 민간 형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대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비해 야생동물들은 주로 종교재판소에 끌려와 재판을 받았으며, 대개 추방이나 파문, 사형을 당했다. 로버트 체임버즈가 쓴 '내가 보낸 시절'(1862--1864)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아일랜드의 수호 성인 성 패트릭(389?--461?)이 파충류를 바다로 추방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 성 버나드는 귓가에서 윙윙대는 쇠금파리가 하도 귀찮아서 "너는 파문이다"라고 얘기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교구의 파리들을 전멸시켰다." 야생동물에 대한 종교재판은 매우 심각한 일로 받아들여졌으며 매우 복잡한 일이기도 했다. 1487 년 프랑스 생 쥘리앙에서 있었던 곤충재판에서는, 곤충들이 전용으로 쓸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이 꽤 넓고 비옥한 땅을 내놓기로 결정했다. 전쟁이 터지거나 마을에 재난이 닥쳐왔을 때에만, 곤충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람들이 그곳으로 피난가거나 토지를 이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이를 위해 지형학적인 조사가 철저히 이루어졌고 그 부지의 모든 식물들에 대한 기록 작업도 행해졌다. 그러나 이 계획은 몇 달 동안 지연되다가 곤충측 변호사가 그 부지가 자신의 고객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제안을 거부해 버리는 바람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얼마 후 법원은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부지 조사를 다시 시켰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재판에 대한 이후의 기록은 쥐나 곤충들에 의해 파손되어, 결국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났는지 알 수 없다. 대개 정상적인 동물재판의 절차는 이렇다. 어떤 지역의 주민들이 특정한 종류의 동물이나 해충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면, 불편 사항을 법원에 제소한다. 그러면 법원에서는 전문가들을 시켜 피해 정도를 조사한다. 동물측을 변호할 변호인이 선임되고 재판을 성직자가 맡을지 일반인들이 맡을지 결정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먼저 변호인이 피고 동물들의 소환 부당성을 설명한다. 그의 변론에 설득력이 없으면 몇 차례 더 변론 기회가 주어진다. 그후 법원 관리가 문제의 동물들이나 해충들이 서식하는 지역을 방문하여 (라틴어로 된) 공식적인 법률용어로 쓰여 있는 소환장을 낭송하며, 이들에게 당장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을 멈추든지, 법원에 출두하는지 선택하려고 경고한다.
1478 년 스위스에서 '잉거'라는 이름의 한 투구벌레를 재판하는데 사용했던 소환장이 좋은 예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분별 없는, 덜 떨어진 곤충 녀석 일거야... 로잔의 주교님께서 너에게 당장 나쁜 짓을 그만두라는 경고를 하도록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 만약 네가 이 경고를 무시하고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다면, 또 그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신성한 교회를 위하여 앞으로 엿새 후 오후 한시까지 위프리 스부르크로 나와 로잔의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들 앞에서, 변호인을 통해 변명할 것을 충고하는 바이다. 주교님과 신부님들께서는 합법적인 절차와 정해진 관행에 따라 너에게 파문을 내리시든지 용서를 하시든지 할 것이다.
죄를 저지른 동물이 법정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결석으로 치부되어 불리한 판결이 내려졌고 정해진 기한 내에 그 지역을 떠나야 한다는 계고장이 발부되었다. 다음은 그런 판결의 한 예이다. 재판관 중의 한 명이 사건명을 '메뚜기 사건'이라고 낭독한 뒤 피고 해충의 죄상이 명백히 입증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는 계속 이렇게 말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성부,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또 거룩하신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권위를 빌려, 우리는 서류의 내용을 근거로 메뚜기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피고 해충은 향후 엿새 이내에 즉시 이곳의 포도밭이나 기타 밭들에서 떠나 더 이상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저주가 내릴 것이다. 1487 년 프랑스 오탱에서는 사흘간의 재판 끝에 달팽이들에게 그 지역을 떠나라는 경고가 내려졌다. 물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종교지도자들이 파문의식을 거행하여 저주를 내릴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주었다.
그러나 이런 판결이 순조롭고 원만하게 이행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법제도가 마치 미로나 수렁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물재판을 관장하던 종교재판소의 법 관행은 오늘날의 법제도보다도 훨씬 더 악명 높았다. 동물측 변호사는 법전에 나와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해당 동물의 파문과 추방을 연기시키거나 방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또 피고 동물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더라도 변호사가 상급 법원에 항소하면 뒤집히기 일쑤였다. 사실 해충의 경우 파문이나 추방 선언이 내려진 후, 지상에서 멸종되기는커녕 그전과 똑같이 활동하거나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며 심하게 해를 끼치는 수가 많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판결이나 추방 결정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원인을 사탄의 심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서의 욥기에서처럼, 하나님께서는 종종 사탄에게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일반 사람들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해충들의 파괴 행위가 해충들 자신의 짓이 아니라 악마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바르톨로뮤 샤스네 변호사는 "이런 경우는 해충들이 아니라, 이런 어리석은 해충들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악마에게 직접 저주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물들은 사실 인간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노아의 방주에도 동승했었으며, 안식일에 휴식을 취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관대하고 정의롭게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동물재판에는 경비도 많이 들었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기타 의식들을 치루는 데 많은 비용이 필요했는데 이 비용은 주로 마을 사람들이 부담해야 했다. 또 재판을 시작하려면 마을사람들은 미리 십일조를 교회에 완납해야만 했다. 로버트 체임버즈는 이에 대해 "마을사람들은 해충들에게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변호사들이나 교회에 의해서도 돈을 갈취당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동물재판은 이처럼 비용이 많이 들고 아주 지루한 일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불법으로 주문장이나 부적 같은 것을 구입해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불법물을 사용하다 들키면 악마와 교통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재판을 받은 후, 말뚝에 묶어 고문을 당하다가 화형에 처해졌다.
악마와의 교통 행위는 특히 심각하게 처벌되었다. 재판도 없이 수십만 마리의 고양이들이 처형되어 멸종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미국의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재판에서는 스무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들과 함께 개 두 마리도 처형당했다. 1474 년 프랑스 바슬에서는 수탉이 알을 낳았다는 이유로 마녀재판을 받은 적도 있다. 검사는 수탉의 알이 여러 가지 마법적인 조제약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납을 금으로 만드는 효능이 있다고 여겨졌던 연금술사의 '현자의 돌'보다도 훨씬 효과가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탉의 알들은 마녀들이 부화시키며, 이렇게 부화한 닭들은 경건한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신앙심에 극히 해롭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피고측 변호사는 문제의 수탉은 아무런 악의도 없었으며 알을 낳은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사탄과는 무관하다고 반박했다. 또 사탄이 동물들과 직접 접촉한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검사는 비록 사탄이 동물들과 직접 접촉은 하지 않더라도 가끔 그들 몸에 들리는 수가 있다고 주장하며, 돼지의 몸에 들린 악령들을 예수가 쫓아내자 돼지가 바로 바다로 뛰어들어가 죽어버렸다는 마태복음 8장 32절의 내용을 인용했다. 돼지의 몸에 악령이 깃들인 것이 돼지의 의사와는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징벌을 당하지 않았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결국 법원은 문제의 수탉이 수탉의 형체를 빌린 악마라고 판결을 내렸으며, 수탉과 알들은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소위 형사 동물재판에서는 동물들이 고문대에 묶여 자백을 강요당하며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재판관들이 실제로 동물들로부터 자백을 얻어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법 진행상의 요식 행위를 따른 것뿐이었다. 어떤 경우는 고문 때문에 재판관의 관대한 판결이 나오는 수도 있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선고가 채찍질, 투옥, 추방, 혹은 기타 형벌로 감형되곤 했다. 동물들은 증인으로 불려 나오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집안에 침입한 낯선 사람을 죽이면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낯선 사람을 고의로 자기 집 안에 끌어들인 뒤 살해하고, 그 사람이 침입자였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살인범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재판이 벌어졌을때 증인이 없으면, 그의 집에서 같이 살면서 사건을 목격한 동물들, 예컨대 개나 고양이라도 데려와야지 그렇지 못하면 무죄판결을 받기가 힘들었다. 피고인은 데려온 동물 앞에서 자신이 무죄임을 강변한다. 만약 그 동물이 그렇지 않다고 큰 소리로 반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무죄인 것으로 판결이 났다. 이런 판결의 이면에는, 만약 피고가 정말로 살인범이라면 하나님께서 그가 정의를 회피할 수 있도록 방치하지 않고 동물들에게 반박할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을 것이라는 발상이 깔려 있었다. (1991 년 11월 3일 캘리포니아 주 산타 로자에서 제인 질이란 여성이 목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굶주림에 지친 앵무새 한 마리와 함께 그녀의 침실에서 발견되었다. 애완동물 전문가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한 앵무새는 "리처드, 안돼, 안돼, 안돼!"라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마침 질의 사업 파트너가 그녀를 죽인 살인범으로 재판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들 중 리처드란 이름을 지닌 유일한 사람은 전에 그녀와 집을 같이 쓴 적이 있는 절친한 친구뿐이었다. 그러나 판사는 이 앵무새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물재판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재판 사례들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1991 년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의 한 판사는 개 한 마리에게 종신형을 언도했다. 죄목은 주인의 세 살배기 양아들 살인죄였다. 일 년 뒤 탄자니아에서는 염소 한 마리가 남의 집에 들어가 잔디를 뜯어 먹었다는 죄로 일주일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후 다시 일 년 후엔 케냐의 염소 한 마리가 과일장수로부터 2 달러 25센트를 훔쳤다는 죄로 이틀간 투옥되었다. 또 한 가게주인은 살아 있는 생쥐 네 마리를, 자신의 빵을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끌고와서 투옥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 녀석들을 빨리 투옥시켜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그의 정신을 감정해 본 후 보건담당자에게 인계했다. 동물재판에 관한 위의 내용들이 쉽게 수긍가지 않는다면 다음 얘기는 어떨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는 무생물까지도 징벌했다. 아테네에서는 그런 물체들을 대중 앞에서 탄핵한 후, 일종의 추방 의식으로서 아테네 바깥 지역으로 내던져버렸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생명이 없는 물체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만약 그 물체가 신이 내리는 천둥 같은 것이 아니고, 그를 때리거나 배거나 충격을 준 물체라면 마치 동물처럼 시 경계선 바깥 지역으로 추방해야 한다."
시인이었던 테오그니스의 흉상이 바로 그런 대접을 받았다. 그것이 받침대 위에서 우연히 사람 위로 떨어져 살인을 했던 것이다. 한 유명한 운동선수의 조상(조상)도 라이벌 운동선수의 팬들 위로 넘어져 한 명이 목숨을 잃은 적이 있다. 물론 합당한 재판 절차를 거친 후 조상은 바다에 내던져졌다.
무생물의 유죄성에 관한 발상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E. P. 에번스의 저서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가까운 과거에 중국에서는 한 고위 계급 군인의 죽음을 야기시켰다는 이유로 목조상 열다섯 개를 재판하여 목을 자르는 형벌을 부과한 적이 있다. 그 도시를 다스리던 태수는 죽은 군인 가족의 탄원을 듣고, 문제의 조상들을 그 도시의 형사재판소로 출두시키라고 명령했다. 재판소는 적절한 재판과정을 거쳐 문제의 조상들의 머리를 자르고 연못에 내던지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 내용에 동조하며 저주를 퍼붓는 많은 군중들 앞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군중들이 너무 흥분해서 불행한 목조상들뿐만 아니라 마치 군중들 자신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듯한 분위기 였다.
(1705 년 영국의 웨스트 하틀풀 해안에 원숭이 한 마리가 보트를 타고 표류해 온 적이 있다. 난파선의 마스코트였던 원숭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때까지 한 번도 원숭이를 본 적이 없었고, 마침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중이었던 까닭에, 이 이상한 동물은 프랑스의 스파이로 간주되어 즉시 체포되었다. 결국 이 원숭이는 군사재판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고 곧 교수대로 보내졌다.)
1591 년 5월 15일 러시아 이반 2세의 아들 드미트리가 유배지 유클리치에서 암살당했다. 그런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그 도시의 큰 종이 반란이라도 하듯 울려대기 시작했다. 이런 중대한 범죄로 인해 이 종은 시베리아 종신형을 언도받고 다른 유배자들과 함께 토볼스크로 이송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외롭게 고립돼 있으면서, 탄원 등에 의해 어느 정도 죄가 감면된 종은 시베리아 수도의 교회탑에 다시 매달리게 되었다. 1892 년에는 완전히 사면되어 유글리치의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 왔다. 17세기 말엽에는 성문을 공격하는 망치에 대해서 러시아 재판소가 비슷한 판결을 내렸던 적도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도 무생물들에 대해 파문하고, 추방하고, 저주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4.신화 속에 갇힌 영광: 잊혀진 고대인들의 지식 문화란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해 오다가 현대의 진보된 사회에서 최고조를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여러 시대를 통해 오면서 전반적인 문화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의 지식과 기술 발전은 긴 세월 동안 상당히 심한 기복을 보여왔다. 고대 사회에서 이룩되었던 많은 훌륭한 업적들이 잊혀졌다가 여러 세기가 지난후 재발견되는 경후도 많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고대 문명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달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피터 제임스와 닉 톨프는 자신들의 저서 "고대의 발명품"(1994)에서 "현대인들은 피라미드 축조자들이나 선사시대의 동굴벽화 채색자들이 자신들보다 지능이 다소 떨어진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적어도 지난 5 만 년간 인간의 지능이 조금이라도 더 진화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현대인들은 더 높아진 지능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지식과 실험 결과들 때문에 혜택을 보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지능이 선조들의 지능보다 더 우수하다고 보는 태도는 '자기 시대 중심주의'라는 잘못된 역사관에 기인한다. 즉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가장 중요하며, 인간의 업적도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런 자기 시대 중심적인 시각은 19세기에 유행했던 진보 사상의 유물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서툴게 적용시킨 이 이론은 고대 사회의 기술적, 문화적 업적을 입증시켜주는 고고학적 증거들에 대하여 숱한 오해를 야기시켰다. 서구인들의 역사에서는 서구 문명을 인간 지식 발전의 중심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세계의 다른 지역들을 현대로 인도해 준 등불이 바로 서구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대 중국 문명처럼, 유럽이 아직 미신이 판치는 낙후된 암흑기였던 시절에 이미 상당히 발전했던 사회들이 많았다. 사실 유럽을 궁극적으로 암흑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던 것은 바로 아랍 문명의 방대한 유입이었다. 사실 아랍인들은 그리스인이나 페르시아인, 중국인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지식을 얻었으며, 거기에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추가시켰다. 그들의 지식에는 아라비아 숫자(원래 인도에서 처음 사용했다.), 대수학(처음에는 중국, 페르시아, 인도 동부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그리스와 아랍에서 발달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온 대부분의 고전 문학작품들(아랍인들이 잘 보관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소실되고 말았을 것이다)이 포함되었다. 바그다드나 카이로, 코르도바의 많은 학술원과 대학에서 과학, 천문학, 수학, 역사학, 문학, 철학, 의학 등의 학문이 연구되었다. 유럽의 르네상스도 아랍 상인들과의 접촉이나, 비잔틴 제국 멸망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의 장서와 지식을 통해서 촉발된 것이다. 그리스로마 문화가 유일하게 남아 있던 비잔틴 제국은 1453 년 오토만 투르크족에 의해 멸망했으며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이를 이스탄불이라고 개명했다. 그 동안 세계 도처에서 잊혀지거나 분실됐던 고대인들의 지식을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되찾게 된 것은 수많은 세기가 지난 다음이었다. 예를 들어 중국인들은 3세기에 이미 알루미늄으로 물건을 만들어 썼다. 1956 년 고고학자들은 서기 297 년에 죽은 한 중국 장군의 묘에서 알루미늄 장식물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서구 문명에서는 1827 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모든 지식이 총 동원되어 알루미늄이 재발견되었다. 수확 기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기계는 1799 년 영국에서 발명됐는데 비슷한 기계가 기원전 1세기경 이미 프랑골 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사실 중세 유럽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발명품으로 칭송받는 인쇄술과 화약도, 따지고 보면 수세기 전에 이미 다른 지역에서 사용되던 것들이다. 화약은 9세기경 불로장생약을 연구하다 중국의 연금술사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들은 화약을 오늘날 우리가 쓰는 것과 똑같은 용도로 사용했다. 화약이 유럽에 등장한 것은 이로부터 5세기가 지난 후 아랍 상인들에 의해서였다. 인쇄술과 활자는 15세기 중반경 유럽에서 동시에 등장했다. 그러나 이보다 반세기 앞서서 한국에서 이미 활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1041 년에 사용됬다는 기록도 있다. 크레타 섬에 사는 미노아인들은 기원전 1700 년경에 벌써 자신들의 상형 문자를 찍기 위해 초보적인 활자를 사용했다. 인쇄술은 기원전 7세기경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기원전 6세기부터 1세기에 걸쳐 완성된 역사상 최초의 백과사전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대인들의 삶은 사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발전된 것이었다. 한 고대 도시의 유적에서는 약 30에이커의 넓은 지역에 걸쳐 좁은 길과 마당들을 따라 깨끗이 정돈된, 천여 채의 벽돌집이 발견된 적도 있다. 이 거주지역의 집 벽에는 깨끗한 회반죽이 칠해져 있었으며 그 위에 정교한 벽화와 프레스코화까지 그려져 있었다. 약 7,000 명 이상의 주민들이 수십 종의 곡물을 재배하고, 많은 가축들을 기르고, 직조한 면, 금속제 도구, 정교한 보석류, 광택 나는 돌거울 등의 수공예품을 만들며 살았다. 이 모든 것들이 이미 8,000 년 전에 현재 터키의 사탈 휴유크 지역에 존재했다. 이 도시는 신석기 시대의 도시로 분류되지만 주민들은 이미 구리와 납을 이용하고 있었다. 한 고고학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탈 휴유크 지역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예술품이나 수공예품은 초기 청동기 시대의 발달된 문명과 맞먹는 것이다. 발견물 중 빠진 것이라곤 부기책이나 글자, 음악 정도였다." 바빌론, 아시리아(두 나라 모두 현재의 이라크), 이집트는 단순한 형태의 우편제도까지 실시했다. 대개 '지급'이란 내용이 적혀 있는 진흙판을 담은 진흙봉투를 부치는 방법이었다. 또 당시의 바빌론에는 대출 전용 은행도 등장했다. 9세기경 바그다드에서는 은행에서 수표까지 발행했으며 중국같이 먼나라에 지점까지 두었다. 이 나라에는 무료 병원이나 약국, 수천 명의 의사, 훌륭한 상하수도 시설, 제지공장 등도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50 년경부터 기원후 250 년 경까지 존재했던 바그다드 근처의 한 무덤에서는 전기 배터리까지 발견됐다고 주장한다. 배터리의 용도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배터리는 1796 년이 되어서야 이탈리아인 알레산드로 볼타에 의해 재발명되었다. 중부 이탈리아의 에트루스칸인들은 기원전 6--7세기경에 의치를 만들고 치아 브리지 치료법을 이용했다. 또 인도에서는 기원전 수세기 전에 외과용 메스, 바늘, 핀셋, 주사기, 반사경 같은 120여 개의 외과 수술 도구들을 이용했다. 이런 도구들은 정교한 안과 수술, 뇌 수술, 성형 수술을 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유럽인들이 이를 알게 된것은 이로부터 15세기가 흐른 다음이었다. 중국인들은 또 같은 시기에 소변에서 성호르몬이나 뇌하수체 호르몬을 추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구 유럽 의학에서는 1927 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중국인들은 또 10세기에 천연두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1717 년 터키인들의 천연두 예방접종을 처음 보고 유럽 의사들은 그 효과를 믿지 못했다. 로마인들은 박테리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로마 장군 바로(기원전 116--기원전 27)의 다음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늪지대 근처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런 곳이는 눈에 안 보이는 아주 미세한 생명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기 중에 떠다니다 입이나 코 등을 통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 질병을 일으킨다." 박테리아는 1676 년이 되어서야 안톤 반 레벤후크의 조잡한 현미경을 통해 우연히 재발견되었다. 그나마 이 발견은 1857 년 루이 파스퇴르가 이들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할 때까지 거의 무시되었다. 수단인들은 항생제가 재발견되기 무려 1,400 년 전에 이미 테트라사이클린(항생제의 일종)을 사용했다.
스파게티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부터 이탈리아로 전파했다는게 통설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에트루스칸인들은 기원전 4세기경에 이미 현재의 이탈리아 지역에서, 스파게티에 들어가는 파스타 향료를 이용했다. 그리스인들과 이집트 인들도 이 향료를 사용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들) * "지긋지긋한 여자들! 우리 주변을 얼마나 귀찮게 맴돌고 있는가! 여자들이란 옆에 있어도 살 수 없고, 옆에 없어도 살 수 없다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은 진실이다."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50--기원전 385) * 언제나 쇼핑만 하는 여자란 동물. 오비드(기원전 43--기원후 18) 로마의 여성들은 기원전 1세기에 비키니를 입었으며, 로마에는 아파트와 창유리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다. 사실 오물 처리 시설을 갖춘 최초의 실내 수세식 화장실은 기원전 2800 년 전 스코틀랜드의 오크니 군도에 이미 존재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인들도 손으로 비우는 실내 화장실을 이용했다. 인더스 강 유역(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이나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서는 실외 화장실을 이용했다. 기원전 2700 년경 인더스 강 유역 사람들은 토기 급수관을 이용한 실내 배관시설까지 만들었다. 그로부터 250 년 뒤에는 금속제 파이프가 이집트에서 사용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4세기에 파이프를 이용해 끌어들인 물로 샤워를 즐겼으며, 중국인들은 589 년경 화장지를 사용했다. 화장실 위생과 관련된 이런 앞선 문화가 미국에 출현한 것은 대략 150 년 전의 일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피뢰침을 발견하여 많은 건물을 벼락으로부터 보호했다. 그러나 기원전 212 년에 이미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의 사원에 피뢰침을 사용했으며, 기원전 1500 년경에는 미노아인들이 이를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1세기경의 이집트 사원에서는 동전으로 작동하는 성수 자동판매기가 발견되었다. 페루의 나즈칸인들은 기원전 500 년에서 기원후 900 년 사이에 뜨거운 공기를 이용한 풍선을 타고 하늘을 비행했다는 증거도 있다. 서방세계에서 이런 기구 비행이 다시 등장한 것은 1709 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브라질 출신 예수회 신부 바르톨로메우 구스망의 시범비행을 통해서 였다. 그리고 1783 년 파리에서 몽골피에 형제가 다시 기구 비행을 했다.
잠수 장비도 뒤늦게 다시 발견된 기술이다. 1425 년경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있었던 한 전쟁을 묘사한 그림 속에는 물갈퀴와 가죽헬멧, 공기호스 등을 장착한 다이버의 모습이 등장한다. 화약으로 가득 찬 상자로 수중기뢰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이다. 비슷한 잠수 장비들이 12세기 아라비아 만 유역이나 12세기의 독일 지역에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다. 비잔틴(현재의 이스탄불)인들은 647 년 화염발사기를 이용하여 침략자들을 막아냈다. 이들은 화염 발생 액체를 호스로 펌프질을 하거나 투석기를 이용하여 발사시켰다. 13세기에 쓰여진 한 원고에 의하면 이 액체의 성분은 가솔린, 송진, 수지, 유황, 초석 등이었다고 한다. 10세기의 아랍인들도 구리관을 사용하여 초석과 유황화염을 발사했다. 화염발사기는 975 년경 중국인들이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약 5분 동안 화염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연료를 채운 대나무관을 창 끝에 연결해 이동식 발사기를 만들어 썼다. (증기기관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는 로버트 풀턴이 증기선에 관한 아이디어를 나폴레옹에게 얘기하자, 이 프랑스 황제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뭐요? 갑판 밑에 모닥불을 때서 그 힘으로 바람과 조류를 거슬러 갈 수 있다고요?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바보 같은 말을 들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소.")
가솔린(휘발유)은 비잔틴 제국에서 가장 먼저 사용됐으며, 나중에 아랍 전역에서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계란 모양의 도자기나 유리병에 휘발유를 담은 이 화염병에는 종종 '영광'이나 '알라'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사실 이 화염병이, 충돌에 의해서 터지지 않고 폭발에 의해 터지도록 만들어졌다면 최초의 수류탄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파인애플 모양의 수류탄과 매우 흡사했다. 이 화염병이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인들은 휘발유 대신 화약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1128 년에 대포를 사용했으며 유럽인들이 14세기에 처음으로 초보적인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미 이동식 대포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기원전 4세기경에 독가스까지 이용했다. 이들은 공격할 도시의 지하에 땅굴을 판 뒤, 겨자나 향쑥을 태워 그 가스를 점토관을 이용해 도시 쪽으로 풀무질해 보냈다.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중국인들과 이집트인들은 독가스를 피워 집안의 벼룩을 방제하기도 했다.
살충제는 기원전 3세기경 중국에서 이미 이용되고 있었다. 새들이 먹지 못하도록 곡식 씨앗에 뿌려졌다. 또 곡식을 심기 전에 땅에 뿌려 해충과 잡초를 방제했으며, 동물들이 먹지 못하게 하거나 수확한 곡물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데도 사용했다. 당시 사용되던 살충제 중에는 삼나무 잎을 으깨 만든 추출물로 만든 시안화수소산 살충제도 있었다.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은 기원전 1세기에 파이프를 이용하여 수마일 떨어진 곳에서 천연가스를 끌어다 난방 및 조명용으로 사용했다. 이에 비해 서양에서는 1821 년에 처음으로 천연가스를 발굴했다. 중국에서는 2세기경 이미 성냥을 이용하여 불을 붙였는데 서양에서는 천 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성냥을 사용하였다.
중국의 발달된 발명 역사를 감안할 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이 이 나라에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153 년에 문을 연 '마우칭 바구니 치킨'이란 곳은 지금까지도 포장용 음식을 팔고 있다고 한다.
역사의 여러 시기마다 상당한 양의 지식이 불실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침략이었다. 아랍인들은 기독교도들의 침략으로 많은 것을 잃었으며, 중국인들은 몽고인들에 의해 침략당한 뒤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던 몽고 황제들의 통치를 받으며 많은 것을 잃었다. 한 사회가 타민족의 침략을 받게 되면 수세기에 걸쳐 이룩한 문화를 순식간에 잃게 된다. 물론 역사를 통해 보면 혁명이나 자연 재해, 역병, 종교 등도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대개 힘이 강한 침략국가의 정복자들은 정복당하는 국가에 대해 경멸감을 갖는다. 그 결과 정복당한 국가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는 생각은 거의 없고 자신들이 파괴하는 그 국가의 문화에 대한 존경심도 전혀 없다. 대표적인 예가 스페인인들의 아스텍 문명 파괴다. 콘키스타도라는 이름의 이들 스페인 정복자들은 한 역사가의 지적처럼 "자신들의 조국에서 선발된 가장 질 낮은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싸움꾼이나 범죄자, 영세민 등 동시대의 유럽인들 중에서 가장 저급한 인간 쓰레기들이었다. 이들이 원정대에 참가한 유일한 이유는 황금을 찾겠다는 추악한 탐욕뿐이었다.... 사실 당시 멕시코 지역의 문화수준은 로마 제국의 그것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상당했다고 생각된다." 아스텍 문명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야만적인 종교다. 이들은 전쟁포로들을 잡아다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단지 오락을 위해서 사람들을 사자에게 집어던지지 않았던가. 아스텍인들은 단순한 인간 희생 이상의 의미를 추구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1519 년 아스텍 문명의 수도 테노치티틀란(현재의 멕시코시티)을 처음 보았을 때 엄청나게 놀랐다. 유럽의 어떠한 도시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사실상 정치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지닌 두 개의 자매 도시로 이루어진 이 도시의 인구는 25 만 명이나 됐으며 이는 스페인에서 가장 큰 도시 세빌랴의 인구보다도 거의 여섯 배나 많은 숫자였다. 이 웅장한 도시에는 신전과 궁전, 오벨리스크(첨탑), 분수, 병원, 이발소, 사우나, 다양한 물건들을 파는 시장이 있었다. 정복대장 헤르난 코르테즈는 "약국 같은 곳에서 상비약과 연고, 찜질약까지 팔 정도였다"고 말했다. 효율적인 우편제도도 있어서 발빠른 배달원들이 벽토를 바른 도로망을 돌아다녔다. 도로들은 너무 깨끗해서 스페인인들은 "발에 먼지 하나 묻히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건물 내부는 테피스트리, 그림, 값비싼 금세공품, 향나무 천장 등으로 장식돼 있었다. 또 온수 공급 시스템, 요리용 철판, 향수뿌리개, 흑요석을 닦아 만든 거울, 거북딱지로 만든 멋지게 조각된 식기 등이 구비돼 있었다. 아스텍인들은 화려한 모직 외투와 가죽 옷을 입었으며 고무로 만든 신을 신었다. 여성들은 주로 치마와 소매 없는 블라우스를 입었으며 금, 은, 비취 등으로 만든 장신구를 달고 다녔다. 음식의 종류도 다양했는데, 칠면조, 생선, 새우, 맛있는 수프, 양념이 강한 요리, 칠리, 토티야, 와플 케이크를 먹었으며 방부제도 사용했다. 아스텍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는 초콜리틀이란 음료로 바닐라나 기타 향신료를 타서 차게 마시는 초콜릿 크림이었다. 또 알로에로 만든 풀케라는 술도 마셨다. 이들은 금박을 입힌 나무 파이프에 담배를 넣어 피웠으며 담배를 멋진 덮개로 싸서 시가 형태로 피기도 했다. 이들은 껌도 몹시 좋아했다. 그러나 우연이도 껌이 유럽에 들어오게 된 것은 1870 년 토마스 애덤스와 그 몇 년 뒤 윌리엄 리글리 2세에 의해서였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들) * "소득세를 내야 될 때 정직한 사람은 정당한 소득세를 내려고 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똑같은 수입인데도 좀더 적게 내려고 발버둥친다는 사실." 플리톤(기원전 427 년경--기원전 347 년경)
아스텍 사회는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사회이기도 했다. 남자아이들은 의무적으로 학교에 다녀야 했으며 여자아이들의 경우는 농민과 상인의 딸들에게만 의무교육이 권장되었다. 이들의 수학 수준은 매우 뛰어나서 세제곱이나 영의 개념까지 이용하고 있었다. 수학에 있어서 획기적인 개념이었던 영(제로)은 아랍인들이 처음 사용한 후 유럽 쪽으로 전파되었다. 아스택인들은 정교한 상형문자도 이용했다. 또 이들은 종이도 사용했으며 아스텍 정부의 연간 종이 소비량은 48 만 장으로 추산된다. 이들의 책은 한 장의 긴 종이를 아코디언이나 지도 모양으로 접어 만든 형태였으며 양쪽 끝에 표지가 달려 있었고 양면 인쇄가 돼 있었다. 책 한 권의 길이는 13야드나 되었다.
이들의 정부 조직도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믿음직한 경찰제도 덕택에 아스텍 사회에는 범죄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범죄자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서구 사회와는 달리 대부분의 범죄에 있어서 일반인보다 부유층이 훨씬 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사람들이 매우 정직해서 집 문을 열고놓고 살아도 강도의 위험이 거의 없었으며, 문에 갈대 가지를 꽂아 외출했다는 사실을 표시했다고 한다. 절도 문제로 재판이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한 이 사회에는 거지도 없었다.
아스텍 문서들에 의하면 이들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검약, 자비, 성실, 신중, 질서, 활력, 조심성, 근면, 순종, 겸손, 품위, 사려분별, 좋은 기억력, 중용, 용기, 결단력"등의 가치들을 중시했다. 반면에 "태만, 무자비, 신뢰부족, 거짓, 통명스러움, 어리석음, 낭비, 기만, 좀도둑질, 동요, 불경, 배반"등은 혐오했다. 몇몇 이웃 민족들은 간음과 나체 생활을 싫어한다는 이유 때문에 아스텍인들을 지나치게 얌전한 민족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의 멕시코시티에 해당하는 아스텍의 수도는 텍스코코라는 호수 위의 섬에 위치했으며 섬과 본토는 높이 솟은 길로 연결되었다. 섬은 물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기단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는데 기단은 떠내려가지 않도록 기둥에 묶여 있었다. 이 단들 위에는 농가들이 있었다. 기단 하나는 대개 폭 30 피트, 길이 300 피트 정도의 크기였으며 4 피트 깊이의 흙으로 만들어졌다. 이 기단은 버드나무가 자랄 정도로 튼튼했다. 이들은 여기서 토마토, 아보카도 나무 열매, 삼, 장미 등 각종 작물을 재배했다.
아스텍인들은 아마도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을지 모르는 식물원과 동물원들도 갖고 있었다. 동물원에는 라마, 사슴, 비큐나, 들소, 독사 등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이 있었다. 대형 동물들은 큰 방 크기의 나무 우리에 수용됐으며 뱀 같은 동물들은 커다란 구유통에 수용되었다. 조류 사육장이 딸린 한 맹금류 동물원은 관리인만 300 명이 필요했다. 새들이 하루에 먹어치우는 식량만 칠면조 500 마리였다고 한다. 또 어떤 조류 동물원은 수로를 파서 한가운데 호수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300여 명의 관리인들은 새들의 먹이로 쓰이는 250 파운드의 생선과 엄청난 양의 곤충을 관리하는 일에 주로 종사했다.
식물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열대식물과 꽃들이 있었다. 숲과 정원에는 대리석 포장길로 둘러싸인 장식용 연못도 있었다. 16세기에 가르칠라소 드라 베가라는 사람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했을 당시 페루에 있던 잉카족의 한 식물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곳은 왕국에서 가장 멋진 나무와 가장 아름다운 꽃들, 가장 달콤한 향기가 나는 풀들이 자라는 곳이었다. 이들 식물들은 새싹에서부터 완전히 다 자란 모양에 이르기까지 각 성장 단계별로 다양하게 금과 은으로 복제되어 있기도 했다. 은 줄기와 황금 이삭이 달린 곡식 밭도 있었다. 밭에는 은빛 이파리와, 곡식 낟알, 줄기가 보였다. 식물원에는 식물 외에도 토끼, 쥐, 도마뱀, 뱀, 나비, 여우, 들고양이 같은 온갖 종류의 금, 은 동물 복제품들이 보였다. 나뭇가지 위에는 새들이 앉아 있었고, 그중에는 꽃에 얼굴을 파묻고 꿀을 먹는 새도 보였다. 1545 년 유럽 최초로 파두아에 만들어진 식물원은 분명히 이 아스텍 식물원을 본딴 것이었다. 아스텍 수도를 처음 보고 난 후, 원정대장 코르테즈의 부관 중 한 명이었던 베르날 디아즈 델 카스티요는 이렇게 썼다. "물 위에 건설된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 또 마른 땅 위의 많은 마을들, 똑바로 멕시코까지 이어지는 도로들을 보고 너무 놀라 우리가 혹시 전설 속에 나오는 마법의 국가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물 위로 솟아 있는 화강암 탑들과 건물들로 인해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정대원들 중엔 자신들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스텍과 적대 관계에 있던 원주민들의 도움을 얻어, 스페인 정복대는 황금을 찾는 과정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해 나갔다. 디아즈 델 카스티요의 말처럼 "눈에 보였던 놀라운 문물들이 모두 파괴되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아스텍 문화는 이처럼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이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멕시코시티 근처에 살고 있다. 이들의 관습이나 종교는 스페인 식을 따르고 있지만, 언어는 아직도 아스텍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코르테즈와 그의 부하들이 아스텍 문명에 가한 만행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가공할 만행을 피자로와 그의 잔인한 부하들은 더 앞선 문화를 지녔던 페루의 잉카문명에 저질렀다. 그러나 이런 만행을 저질렀던 당시 스페인 왕국은 약탈품에 너무 의존하다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의 문화는 아스텍 문화와 같은 식으로 말살되지는 않았다. 잘못된 우월감에 빠졌던 이 탐욕스러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스페인인들의 만행에 의해 도대체 어떤 놀라운 유물들이 영원히 파괴돼 버리고 만 것인지 제대로 알 길조차 없다. 고고학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던 과거 문명의 유적들을 끊임없이 발견해 내고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여러 가지 고대인들의 지식과 발명들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줄 것이다.
5.마누라 팔아먹기: 여성에 대한 실용적 관념 바가지 심한 마누라와 함께 살다 지쳐버린 착한 남편들이여, 말 안 듣고, 성질 못된 마누라는 목에 밧줄을 걸어 시장으로 데리고 나가라. 1696 년경에 유행했던 이 노래는 부인 매매를 통한 이혼 관습을 말해 해준다. 부인을 팔아서 이혼하던 이런 관습이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8세기 무렵 영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 시골 하층민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됐을 것이다. 분명히 이 관습은 세 가지 기본적인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첫째는 여자란 본질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생각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 참정권 운동이 서서히 득세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까지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존재해 왔다. 사실 서구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전에는 여성이 막대한 유산의 재산 행사권을 갖고 있거나, 자신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만만한 남편을 만나거나, 아니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노예의 인생보다 별로 나을 게 없었다. 두 번째 고정관념은, 대개 결혼이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이유 때문에 행해지는 계약이란 생각이다. 낭만적인 사랑을 위해 결혼한다는 생각이 중세 시대에 생겨나기도 했지만 이런 식의 낭만적인 사랑법은 19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나타나 널리 퍼지게 된다. 이때까지 결혼이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하는 게 상례였으며, 남편들은 낭만적인 사람을 정부로부터 찾았다. 아주 드문 경우, 특히 유럽의 상류층 사이에서는 부인들이 바람을 피기도 했다. 사랑 없는 이런 결혼생활에서 성생활은 순전히 재산 상속이나 노후에 자신들을 돌봐줄 2세 생산을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다. 대신 남자들은 쾌락을 위한 성생활은 종종 매춘부에게서 찾았다. 세 번째 고정관념은 관습법에 규정돼 있는 결혼관이다. 일단 남녀가 같이 살면 종교적, 혹은 공적 결혼 의식을 거행했건 안했건 간에 이들을 법적으로 결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 특히 하층계급 사람들이 이런 관습법적인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런 결혼생활에서 만약 둘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 여자측에서 집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대개 이런 여자들은 교육을 못 받은 경우가 많았고, 자신을 부양할 일자리도 얻기 어려웠다. 따라서 여자가 싫어진, 불만에 찬 남편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를 데려갈 능력이 있는 다른 남자들을 찾는 것이었다. 이런 모든 요인들이 합쳐져서 아내를 팔아먹는 개탄스러운 못된 관습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런 관습이 얼마나 폭넓게 퍼져 있었는지는 사실 확실치 않다. 그러나 많은 사례들이 문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부인 매매는 노예나 소 경매와 매우 흡사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남편이 부인의 목에 밧줄을 걸고 시장으로 끌고 나와 가축 전시장에 매어 놓는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에게 그녀의 가치를 칭찬하며 경매에 붙인다. 만약 단 한 사람만 관심을 보이면 우선 되는 대로 명목상의 값을 불렀다. 대개 5실링과 맥주 한 병이 적정가격이었다. 가격 흥정이 끝나면 판매증서를 작성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나 존 오스본은 내 마누라 메리 오스본을 1 파운드를 받고 윌리암 서전에게 판매하는 데 동의한다. 앞으로 마누라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며 이에 대한 증표로 여기 서명하는 바이다. 1815 년 1월 3일 메이드스톤에서 존 오스본" 입찰자는 새로 구입한 부인의 밧줄을 풀어준 뒤, 집으로 데려가기 전에 시장을 돌며 끌고 다녔다. 브리스톨에서 발행된 1823 년 5월 29일자의 한 신문에는 그런 매매 행위에 대한 생생한 목격담이 실려 있다. 요즈음 우리 고향의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주 보기 싫은 장면이 세인트 토마스 시장에서 또 한번 연출되었다. 로즈메리에 사는 존 내쉬라는 한 가축상(이름값도 못하는)이 자기 마누라를 밧줄에 묶어 끌고 시장에 나타났다. 뒤에는 구경꾼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벨야드 맞은편까지 오자 그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자신의 부인을 경매에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그 부인이 현재의 남편 손에 있는 게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한 한 젊은이가 나와 6 페니라는 후한 값을 불렀다! 판매인 남편은 또 다른 입찰자를 기다렸지만 헛수고였다. 아내의 가치를 칭찬하고 착한 성품을 자랑해도 1 페니도 더 맣은 액수를 내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남편은, 마누라를 다시 데려가느니 그 젊은이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부인은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지만 젊은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곧 거래를 후회하며 이 부인을 다시 경매에 붙였는데, 9 페니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자 즉시 이를 받아들이고 부인을 넘겨버렸다. 부인은 이 두번째 거래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도망을 치고 말았으나 결국 구입자가 다시 붙잡아와서 자신의 재산임을 주장하였다. 부인은 이 거래가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치안판사의 명령으로 기각되었다. 원래 남편 내쉬는 분노한 군중들은 피해 급히 도망쳤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매매 행위를 금지시키려고 애를 썼다. 경찰이나 판사들도 이런 관습을 못마땅해 해서 중지시키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818 년 애쉬번의 한 치안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판매 현장에 경찰관을 보낸 진짜 목적은 물론 그런 창피한 거래를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면적인 목적은 시장의 평화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거래가 벌어지면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며 질서를 파괴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내가 거래를 중지시키거나 방해할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있어왔던 관습이기 때문에 이를 법으로 막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결국 부인 매매 행위는 계속되었다.
또 다른 목격담 하나가 "스테이트맨"지 1814 년 2월 26일자에 실렸다. 여기서는 이런 매매 행위가 비정상적인 행위로 간주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부인매매 노팅검에 사는 링커라는 한 용감한 군신의 아들은 이미 오십 줄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비록 요조숙녀는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여성들을 사로잡을 힘이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툰이라는 한 민병대원의 아내가 그가 정복한 여성들 명단에 추가되었다. 마침 휴가를 받아 노팅검에 와 있던 툰은 마누라의 부정을 의심하게 되어 그녀를 경매를 통해 처분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기왕이면 이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이익을 얻고 싶었다. 남편에게 짐만 되었던 부인은 토요일 저녁 돼지 시장에서 판매됐으며 처음 경매 가격은 3 펜스 였다. 그러나 아무런 응찰자도 없자 고귀한 군신의 아들 링커가 기꺼이 값을 6 펜스로 후하게 올려 불렀으며 결국 부인은 목에 밧줄이 걸린 채 그에게 인도되었다. 수많은 구경꾼들은 이 사랑스러운 전리품이 그녀를 사랑하는 구입자의 손 안으로 념겨지는 것을 아무런 질투의 감정 없이 지켜보았다.
간혹 불만을 품은 남편이 부인을 판매하다는 광고를 지역신문에 내기도 했다. 다음은 1796 년에 있었던 그런 광고의 한 예이다.
나의 부인 제인 헤블런드를 5실링에 판매합니다. 튼튼한 체격에 신체도 매우 건강합니다. 씨도 잘 뿌리고 수확도 잘하며, 쟁기도 잘 잡고 소도 잘 몹니다. 건장한 사내 몇 명의 몫은 할 것입니다. 고집이 좀 세지만 적절히 잘 다루기만 하면 토끼처럼 순하게 부릴 수 있습니다. 가끔 잘 지켜보지 않으면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남편이 감당하기가 다소 힘들기에 팔려고 내놓은 것입니다. 관심 있는 사람은 광고제작업자에게 문의하십시오 특기사항: 그녀의 옷가지 전부를 함께 제공합니다.
("이른바 남자라는 자들은 여자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가 아니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서 온 존재인가? 하나님과 여자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는가? 사실 남자야말로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다.". 이사벨라 폰 바그너, 1851) 마치 가축처럼 무게를 달아 여자들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예는 1696 년 옥스포드셔 테임에서 있었던 종교재판 기록에 나온다.
토마스 히스는 조지 풀러 부인을 파운드당 2 펜스에 구입해서 테임의 여인숙으로 데리고 왔음을 증명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틀 밤낮을 묵었으며 그 동안 그는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그녀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그녀를 벤슨에 있는 화이트 하우스로 데려왔으며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러나 맹세코 그녀의 육체에 음욕을 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 태임의 존 프리켓은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조지 풀러의 아내의 체중이 계측되고 그에 해당하는 29실링의 가격이 지불되는 것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파운드당 2 펜스고 1실링은 12 펜스이므로 부인의 몸무게는 174 파운드라는 얘기가 된다. 이 사건에서 히스라는 사람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고 군중들 앞에서 속죄를 해야 했다.
가난한 빈민들만이 부인을 매매했던 것은 아니다. 런던 출신의 한 부유한 가축 상인은 자신의 부인을 50기니의 현금과 구매자가 타고 있던 말을 받고 팔아버렸다. 어떤 경우는 교회에서 이런 관습을 옹호하기도 했다. 스웨들린코트라는 교구의 위원회에서는 남편이 도망간 부인을 금화 1 플로린을 받고 시장에 내다 팔도록 허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부인 매매 관습은 영국에서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베트남 같은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도 이런 관습이 있었다. 에드워드 브라운이란 이름의 한 영국 선원은 1857 년 베트남 해적들을 피해 달아나서 코친차이나(현재의 배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지역)에 혼자 남게 된 적이 있다. 결국 그는 몇 달 만에 영국 관리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 동안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부러 감옥에 갇혔다. 이때의 경험을 기록한 "코친차이나에서의 경험"(1861)이란 책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전 가족을 팔아먹는 한 죄수 이야기를 했다. 이즈음 감옥 안에 아주 우울한 일이 벌어졌다. 마누라를 팔아먹은 어떤 남편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4 년 전 쌀 한 푸대를 훔친 죄로 송치됐던 사람인데, 늘 그렇듯 판결 내용은 특별한 명령이 있을 때까지 감옥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열두 달쯤 지나자 그는 모범적인 감옥생활 덕택에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그에게는 두 살에서 여섯 살에 이르는 세 명의 자식이 있었다. 두 명은 딸이고 한 명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가족을 다시 만난 지 여섯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여섯 살 난 자신의 큰딸을 현금 5 만원, 즉 약 13 달러를 받고 팔아버렸다. 다시 여섯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아직 세 살밖에 안 된 어린 막내딸을 현금 2 만원, 즉 약 5 달러를 받고 다시 팔아버렸다. 일 년이 지난 후 마지막 남은 아들은 현금 17,000원, 즉 4 달러 조금 넘는 헐값에 팔았다. 이제는 부인마저 팔아치울 요량이었다. 그녀는 외모가 출중한 27세 가량의 코친차이나 여자였다. 남편이 10 년 전에 코친차이나의 관례를 따라 돈을 주고 사서 결혼한 여자였다. 그녀가 팔려 나가는 날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그녀는 비통하게 울고 있었으며 남편이 말을 붙이자 혐오하듯 외면해 버렸다. 나는 그녀가 너무 불쌍했다. 현재의 처지보다도, 그전에 자녀들과 헤어질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제 그녀 자신이 팔리는 날이 온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팔려야만 했던 걸까? 남편이란 작자의 부족한 생필품을 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나았다. 이 작자는 아편을 사려는 사악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내를 팔아먹었던 것이다. 자 이제 이야기를 끝맺자. 이 불쌍한 여인은 아주 험상궃어 보이는 남자 세 명에게 인도되었다. 그중 한 명이 남편이 서명한 서류와 판매증서를 받았다. 그들은 여자의 옷가지 꾸러미도 인수했다. 끝으로 판매 대금을 치룬 뒤 그들은 여자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녀의 몸값은 현금 8 만원, 즉 20 달러 정도였다. 부인을 팔아치움으로써 이혼을 하는 관습은 영국인들에 의해 미국에도 도입되었다. 1645 년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의 '특별재판' 기록에는 "자신의 아내를 젊은 남자에게 판 바게트 이글스턴이란 남자에게 벌금 20실링을 부과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1736 년 3월 15일 "보스턴 이브닝 포스트"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보스턴: 지난 주 초 우리 시에서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사이에 아주 기이하고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 남자들이 각각 이 여자를 자신의 부인이라고 우겼던 것이다. 사실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15실링을 받고 자신의 부인에 대한 권리를 다른 남자에게 팔기로 약속했었는데, 구매자인 남자가 10실링만 지불하고 나머지 5실링은 지불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자를 포기하고 차라리 선금을 날려버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침 옆에서 이 거래를 지켜보던 두 사람의 친구인 두 신사가 화해를 시키기 위해 구매한 남자에게 돈을 꿔주어 무사히 셈을 치를 수 있게 해주었다. 채권자인 남자는 기꺼이 돈을 받고 전 부인에게 성의 없는 작별인사를 한 뒤 그녀를 구매자에게 넘겼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부인 매매 관습이 미국에서는 크게 번지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1887 년 7월 13일 셰필드에 사는 에이브러험 부스로이드라는 사람이 자신의 부인 클라라를 5실링에 팔아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1885 년 영국은 16세 이하의 소녀를 매매하거나 납치해서 윤락 행위를 시키는 일을 방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면 16세 이상의 여자들에 대한 거래는 합법적이라는 소리였다. 1891 년에는 자신의 부인을 감금하는 일이 불법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