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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면서
신혼 초 인터넷을 접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가입한 곳이 이곳인데 십 년이 넘어 겨우 글을 하나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욕심으로는 카페 가입하면서 목표로 삼은 10년 내 10억 자산 만들기 성공 후기를 올리고 싶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글을 써야 되나 고민하다 보니 10년이 훌쩍 넘어 버렸네요.
처음 카페를 접했을 때 저도 대부분의 신혼부부와 마찬가지로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 밖에 없었고 막연하게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뉴스를 통해 텐인텐을 알게 되었고 여러 회원 분들의 글 하나 하나를 정독하면서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되었고 비록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후회 없는 10년이었기에 회원 분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고자 스스로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졸필이지만 용기 내어 올려 봅니다.
저는 중학교까지 깊은 산골에서 자라 워낙 주변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가난을 가난으로 느끼지 못하고 마냥 즐겁게 자랐습니다. 그러다 고향엔 고등학교가 없어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도시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부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막연하게 부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같은 자취생이었지만 저 같은 경우는 화장실이 밖에 있는 조그만 단독주택의 문간방에서 당시 고3이었던 누나 2명, 초등학교 6학년인 남동생과 같이 궁핍하게 생활한 반면 주변엔 고등학생 혼자 24평 아파트에 살면서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으로 LP 듣고 롤렉스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도 학비나 생활비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집은 아니었기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기 시작한 대학생활부터 자격지심 없이 낙천적으로 살게 되었고 당시 학생회 간부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부의 축적과 동경에 대해 오히려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지역 대안언론사 기자로 있던 선배의 추천으로 시험 본 지방 언론사에 합격하면서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바른 기자생활을 시작하였고 기득권층의 온갖 비리와 실상을 접하게 되면서 더욱 사회와 가진 자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었습니다.
결혼은 모든 것을 바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저도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신혼 살림을 시작하게 되면서 부에 대한 생각이 확 바뀌게 되었습니다. 당시 IMF를 막 지나온 지방신문사는 급여를 제대로 주지 못해 월 40만원의 활동비만 받고 있었기에 생활은 대기업을 다니고 있던 아내가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돈 벌어다 주는 아내가 좋았지만 놀기 좋아하던 저는 어려서부터 절약이 몸에 밴 아내의 생활 습관을 받아 들이기 너무 어려웠습니다.
한 예로 96년 말에 처음 업무상으로 만났으니 아내를 알게 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아내와 단 둘이 커피숍에서 음료를 사먹어 본적이 없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안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연애하면서 커피숍 한번 데려가지 않고 결혼할 수 있었는지.. 얼마 전 추석에 동생 내외랑 공원에서 애들하고 쉬면서 천원짜리 편의점 카페라테를 사먹었는데 아내가 먹는 방법을 몰라서 당황하더군요. 그냥 뚜껑의 구멍으로 빨대를 꽂아 넣으면 되는데 아내는 투명 뚜껑을 열고 속 뚜껑을 따려고 했거든요. 저는 아내가 한번도 그런 음료를 사먹어 보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 못한채 무식하다고 놀렸습니다. 네. 많이 후회스럽고 미안합니다.
평강공주를 만난 온달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만 아내는 대기업 사원인데다 사내 행사 꽃순이를 도맡아 할 정도로 미모가 출중해 사내 인기가 많은 것은 기본이었고 주변에서도 주로 사자 돌림 자리의 선이 무척 많이 들어왔었는데 집에 거짓말(과장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남들만큼은 번다고)까지 하면서 조건이 가장 안 좋았던 저를 선택하였습니다. 게다가 저는 장손에 연봉 8백짜리 사원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당시 대지 한필지를 갖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큰아들 장성해서 나중에 결혼하면 방 구하라고 주신 돈과 얼마 안 되는 제 돈을 합해 총각 시절에 분양 받아 놓은 토공택지입니다. 당시 아파트 전세를 구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무작정 한국토지공사 미분양 택지에 꽂혀 무리하게 구입하였습니다. 당시 혹시나 나중에 증여세 시비가 생길까 싶어 국세청에 증여신고도 마쳤으니 댓 글로 부모님이 주신 돈 증여세 포탈이라고 시비 걸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엔 제가 돈이 없어 연애도 주로 차 안에서 만나고 식사는 기사 식당이 맛있다고 칼국수나 가정식백반, 해장국 같은 곳만 데려갔는데 오히려 아내는 제가 허세부리는 것보다 그렇게 절약하고 살아야 된다고 좋아해 주었습니다.
인생 계획을 세우다
우여곡절 끝에 친구였던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같이 살게 되면서 제일 충격 받은 것은 신혼여행 후 보여준 아내의 엑셀 파일이었습니다. 그 파일엔 우리 둘의 나이, 현재 자산, 미래에 태어날 아이 생년, 예상 지출 및 수입 등을 고려한 미래 계획이 80세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다음 달 급여 일만 기다리며 살았던 저에게 인생계획이라니.. 대단한 충격이었죠. 그때 결심했습니다. 아내만 믿고 살자. 이 사람만 믿고 살면 내 인생은 후회는 없겠구나 말이죠.
아내는 그 표를 설명 해 주면서 약간은 미안해 했습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경제권과 생활계획을 아내가 갖고 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또한 아내는 성인 이후 경제적으로 독립을 바로 해서 그런지 제가 결혼 초기에 생활이 어려워 부모님에게서 도움 받으려고 하는 것을 한심하게 생각하였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한번 도움 받기 시작하면 습관이 되니 굶어 죽기 전에는 부모에게 손 벌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저도 결혼 후부터는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한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작은 수입이었지만 어려운 와중에서도 아내는 아끼고 아껴서 작은 가전이나 부모님 옷 등을 수시로 본가에 선물하였고 제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 선물하는 것도 기쁜 일이구나. 이제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다졌던 것 같습니다. 신혼 초에는 주택 구입자금으로 사 두었던 우리사주가 폭락하는 바람에 생활이 급 어려워졌었습니다. 언젠가 시골 제수음식 마련할 돈이 없어 저녁에 돼지 저금통을 쪼개어 동전까지 들고 장보러 나가면서 꼭 성공해서 먹는 것이라도 풍족하게 사자고 다짐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안 쓰는 것이 버는 것이다
목표 달성을 위한 우리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저였습니다. 학교 다닐 때 아르바이트 수입이 좋았던 제가 평소에 쓰는 비용이 큰 데다가 따르는 후배들도 많았고 술 담배 값으로 항상 급여가 부족하여 현금 서비스 돌려 막기가 생활화 되어 있던 때라 무엇인가 큰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우선 금연을 시작했습니다. 보통 건강을 생각해서 금연을 하는데 저는 담뱃값이 아까워 금연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금연이 지금 14년을 넘었습니다.
신혼 살림은 제가 총각시절에 살던 25백만원짜리 전세집에 도배장판만 새로 하고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부모님 소유의 집이어서 무상으로 살았고 이사가면서 25백만원에 전세를 놓고 이 돈을 제가 38백만원짜리 전세로 가는데 차용했었습니다. 다행히 몇 년 지나서 부모님께 갚을 수 있었는데 겨울엔 입김이 나고 화장실은 문밖에 있는 낡은 20평 주택이었지만 그렇게 고생하면서 시작하여 2년 후 투룸 전세로 들어갔을 때 화장실이 문 안에 있어 겨울에 춥지 않게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신혼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살았다면 결코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에게 낡은 신혼집은 지금의 집을 갖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결혼 때 가구는 이사 도중에 파손이 심하니 내 집 장만 시까지 미룬다고 침대 하나만 구입하였고 신혼여행도 아내 회사 콘도를 빌려 경주, 설악을 직접 운전하여 돌았습니다. 신혼여행 때 외식비가 부담스러워 쌀하고 반찬, 라면을 챙겨갔었는데 피곤해서 처음 삼일은 콘도에서 잠만 잤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첫날밤은 호텔에 근무 했던 큰 매형 덕분에 유성에 있는 특급 호텔에서 보냈답니다. 결국 옷장과 소파 등 대형 가구는 2006년 서울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처음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때 미치게 원했던 '사회정의' 실천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시민단체 봉사자 같았던 지방기자 급여로는 생활비 충당도 힘들었기에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 두고 전공을 살려 실업자 재취업 교육으로 웹마스터 과정을 배웠습니다. 6개월을 다녔는데 이곳이 저의 새로운 시작점이었습니다. 당시 학원에는 300원짜리 커피 자판기가 있었는데 실업자교육 받는 사람들이 자판기 커피를 사먹는 것이 사치라 생각하여 대형마트에서 믹스커피, 녹차, 컵 등 재료를 사다 놓고 무인 판매대를 설치했습니다. 모든 음료를 100원에 판매하여 40명이 교육 받았던 우리 과정 사람들만을 상대로도 한 잔 팔면 30원이 남는 사업으로 하루 3천원을 벌게 되었습니다. 커피 값을 원가로 하고 싶었지만 거스름돈 관리가 더 어려워 수익의 일부는 무료 음료로 대체하는 식으로 이윤을 줄였습니다. 물론 가끔 동료들과의 점심 값으로도 사용 했습니다.
이렇게 공부한 덕에 저는 신문사 퇴사 후 7개월 만에 서울 IT업체로 취업을 하게 되어 주말 부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손위 처남이 투 룸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다행히 작은방 하나를 저에게 내 주어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었습니다. 6개월간의 짧은 주말부부 기간이었지만 낯선 서울 하늘 아래에서 큰 도움이 되었었습니다. 당시 저의 한달 용돈은 5만원이었는데 실제로 그것을 다 써본 적은 없었습니다. 아예 소비를 안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터미널 500원짜리 어묵이 먹고 싶었는데 꾹 참고 퇴근 해서 집 앞 슈퍼에 가서 천원 짜리 어묵을 사와 집에서 혼자 다 삶아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또 가끔 야근 후 지하철이 성수에서 끊기면 택시비가 아까워 처남집이 있던 구의역까지 두 정거장을 걸어다녔던 기억도 납니다. 나중에 서울에서 자리 잡고나서야 대형 냉장고를 사 드리는것으로 작은 감사의 표시를 하였지만 늘 고마운 분이십니다.
2004년엔 서울 아파트도 준공이 되어 입주 할 수 있었지만 임대를 주고 2006년까지 지방 전셋집에서 계속 생활하였고 서울 직장으론 새벽 첫차를 타고 왕복 5시간 4년을 통근하였습니다. 덕분에 직장 회식이나 친구들 모임에선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었고 여가 시간 부족으로 돈을 쓸 수 있는 상황도 없었습니다. 신혼 초 아기가 생기기전이 종자돈을 만들기 가장 좋은 시기이나 놀고 싶은 유혹도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혼자 벌다 대부분 둘이 벌면서 갑자기 여유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돈 쓰는 것이 무서워 신혼 초 친구들을 오륙년 못 보고 지냈지만 지금은 친구 모임도 제가 주선하고 비용도 많이 쓰는 편입니다. 수십년 된 친구들이라 젊었을 때 몇 년 못 봤다고 우정이 식지는 않더군요.
직장생활은 곧 연봉이 진리
지방신문사를 벗어나 처음 들어간 회사는 IT회사 치고 직원이 3백명 가까운 큰 회사였습니다. 당시 대표님의 권유로 대졸 신입 수습사원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고 첫 연봉은 18백 만원이었습니다. 당시 제 또래 연봉은 30백 만원 이상이었지만 8백 만원 연봉을 받던 저에게는 매우 큰 액수여서 마냥 행복했습니다. 그곳에서 30이 넘은 나이로 처음 일반 회사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기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개발이 아닌 영업부서에 배치되어 과장명함을 달고 인력관리와 대외영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을 보냈던 지방을 떠나 서울에 홀로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돈 쓸 일이 없어지었고 절약이 불편하지 않게 됐습니다. 모두들 꺼려하는 사장님과의 식사도 돈이 굳는다는 재미에 늘 따라다니게 되었고 저녁 술자리에 운전기사로도 다니면서 개인적인 가르침과 약간의 용돈 (사장님 댁에 주차하고 귀가시 받는 택시비)도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일년 뒤 연봉 재 협상 시에 선례가 없다며 과장 대우가 아닌 연봉 50만원 증가와 사원 2년차 진급하는데 그쳐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하여 같은 고민을 하던 선배의 권유로 회사를 옮기며 연봉 3천으로 수직 상승하게 되면서 연봉 상승에 대한 재미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곳의 연봉 조건에 성과급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매출액의 2%를 받는 조건이었습니다. 처음엔 제가 맡은 부서의 매출이 없어 성과급이라는 것이 유명무실했는데 일년 후 월 매출액이 1억을 넘어 사장님이 성과급 조건을 변경해 백만원 한도로 바꿔야 될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처음 팀장이라는 것을 맡은 곳이어서 정이 많았지만 열심히 일한 결과로 늘어난 성과급 지급 조건을 일방적으로 바꾸어 버린 사장님과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고 마침 저를 추천한 선배도 비슷한 이유로 해고되어 다시 퇴사를 하였습니다. 바로 이직이 되었는데 그 동안 제 업무 스타일을 봐오던 거래처 팀장님께 퇴직 인사 하러 갔다가 바로 채용이 되 버린 것입니다. 원래 창업을 준비하던 중이라 고민하였는데 아내가 퇴사 후 창업을 하고 전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장을 준비하던 벤처기업이라 연봉보다 스톡옵션이 좋았던 회사이지만 기본 연봉도 5천을 넘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2년을 일 했는데 초기 입사 조건으로 약속 하였던 주5일 근무제와 팀 신설 후 팀장 보임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아내가 하던 회사가 잘 되어 다시 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퇴직을 알리니 또 납품 처였던 대기업에서 입사 제의가 들어와 취업이 되면서 아내도 지방에 있던 회사를 정리하고 서울로 완전히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2006년 그룹 모회사에 과장으로 입사해 만 9년 후 2014년 팀장으로 퇴사 하였는데 퇴직금 포함 평균 6천 정도의 급여를 받은 것 같습니다. 대기업 사원이었던 아내가 퇴직 후 차린 기획사도 제가 영업을 병행한 덕에 연 1억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만 제가 대기업에 입사하면서 아내 회사 업무를 도와 줄 수 없었고 아이도 유치원에 들어갈 때라 아쉽지만 아내 회사는 3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고 아내 회사를 계속했다면 수익 면에서는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부동산 막차를 타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급여 생활로만은 도저히 목표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여 관심있던 임대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2001년 당시 원룸 임대사업이 활성화 되어 있었기에 99년 분양 받아 놓았던 택지 일대도 원룸 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둘 다 직장 생활을 해야 했기에 업무상 알게 되었던 건설업체 사장님을 믿고 당시 연봉의 10배에 해당하는 1억을 대출받아 원룸을 신축하였습니다. 그전부터 내 집을 직접 짓고 싶어 건설업체 사장님을 3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워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건설업체 사장님과 부동산 중계인들의 눈에 저는 그저 호구였나 봅니다. 6천 투자한 택지에 대출과 보증금 2억을 넘게 들여 3층짜리 원룸을 짓고 임대사업을 하다 결국 매매를 하여 택지 구입 2년 만에 약 5천의 수익을 올렸지만 믿고 의지했던 지인들이 저를 속이려고 시도하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바로 원룸 임대 사업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건설업은 눈에 안보이면 바로 속이는 것 같습니다. 분명 내가 선택한 자제가 들어온 것 까지 확인했는데 일주일 후 보면 다른 자재로 시공되어있다거나 계약서에 없는 청구서가 들어오고 부동산 중계인들은 담합하여 거짓말하고.. 한 일년은 건물과 임차인들 때문에 머리가 아파 하루 세시간도 잠도 못 잤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계속 원룸 사업을 하던 지인들이 십여 년 더해서 지금 몇 십 억대 건물을 올리는 것을 보면 부러움은 있지만 제 길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첫 번째 투자에서 약간의 이득을 얻는 저는 서울 생활을 위해 서울 아파트 구입에 나섰습니다. 당시 다니던 서울 사장님께서 개포 주공 18평을 2억 3천에 팔았는데 향후 전망이 좋으니 저보고 사라고 권유하셨었습니다. 현장에 가보니 너무 아파트가 낡아서 지방 40평 새 아파트를 살 수 있는 돈으로 그런 좁고 낡은 아파트를 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섰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고점에서 떨어진 것이 8,9억을 호가하고 있는데 사장님의 권유를 믿었다면 지금 10in10 목표는 무난히 달성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살 집이 필요했던 저는 2002년 초 분양가 1억6천 봉천동 24평 재건축 아파트를 2천 3천 프리미엄을 주고 수중에 있던 돈과 대출을 끼어 1억8천에 1억 9천에 계약하였습니다.
2004년에 준공되었는데 월세 받아 준다는 부동산 중계인의 말에 혹하여 입주를 포기하고 월 1백에 임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은 결국 잠 한번 못 자보고 2009년 3억5천에 매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생각이 참 단순했는데 당시 24평과 32평 아파트 시세 차이가 2년 만에 5천에서 약 1억으로 벌어지는 것을 보고 일년에 2천씩 저축해서 3년 뒤에 30평대로 갈 수 있겠다는 순진한 생각이 틀리게 됨을 알게 되었고 기존 분양 받은 아파트가 있음에도 무리해서 2004년 신림동 32평 재건축아파트를 대출을 받아 2억7천에 또 매수하게 되었습니다. 2006년 준공이라 잔금 납부엔 시간이 있었고 아내 회사가 한참 잘 될 때였지만 3개월마다 2천이 넘는 중도금을 마련하기 위해 생필품 구매 외엔 문화소비를 할 상황이 못 되었습니다.
이 아파트에선 2006년부터 약 4년을 거주하다 2010년에 4억5천에 매도하였고 지금은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전원형 빌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1983년에 준공되어 30년이 넘은 오래된 빌라이고 대지 지분이 높아 (33평 기준 96평 86평) 재개발을 염두에 두고 들어왔었는데 5년을 살아보니 워낙 자연 환경이 좋아 지금은 저도 재개발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옛날의 저라면 무조건 다 부셔버리고 고층 아파트 지어 시세차익을 생각 했을 텐데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부동산은 매입과 매도 모두 세금이 발생합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개인의 상황에 따라 세율이 바뀌어 단순히 매입 금액과 매도 금액의 차이가 수익은 아닙니다. 중계수수료, 등기대행료, 세무비용, 관리비, 수리비 외 기회비용까지 고려한 후에야 비교적 정확한 수익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
처음 결혼할 때 수중에 제 수중엔 백 만원이 없었는데 좋은 친구 같은 아내와 악착같이 살다 보니 서울에 큰집도 생겼고 직장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곳이라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소비가 많이 늘었습니다. 하여 최근 들어 자산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다 올 초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맡아 진행하면서 많은 동료, 선배, 후배들의 사직원을 받아 내면서 지난 10년을 돌아보게 되었고 어느덧 나태해진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어느새 자기 엄마만큼 컸는데도 저는 아들의 성장에 대해 별 기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싶어 동료들과 함께 얼마 전 희망퇴직을 하였습니다.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하나는 가족과의 삶이었고 두 번째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퇴사 후 3개월 동안 전업주부의 삶을 살면서 아내의 고생에 조금이나마 보답을 하였고 아들과 많이 친해졌으며 많이 부딪치고 약간은 실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화해와 용서로 서운한 것도 거의 없어지고 참된 행복을 자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제 일만 찾으면 되는데 그전 직장보다 편하고 수입이 좋은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더 어렵고 더 수입이 좋은 일은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찾기 위해 이제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10년 만에 카페에 글을 올리며 지금 시작하는 젊은 부부들에게 조금은 힘이 될 수 있고 저 자신에게도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1999년 지방 25백만원 전세에서 시작하여 2014년 서울 소재 전원형 빌라 자가거주 40대 중반
* 세상에 싸고 좋은 것과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 매일경제 모든 기사를 5년간 정독합니다. 이후엔 경제 뉴스 보는 방법을 스스로 깨닭습니다.
* 돈 버는 방법은 여러 길이 있지만 모으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안 쓰면 됩니다.
* 처음 1억을 만드는데 몇 년이 걸리지만 나중엔 1년에 몇 억도 벌 수 있습니다.
* 신혼을 고생하며 시작해야 나중에 작은 성취에도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남들 부러워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 모두들 지금은 어렵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기회로 삼아 큰 돈을 벌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도 그랬고 IMF 때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내 앞에 있는 기회입니다.
* 추신: 세상 좋아졌습니다. 글 정리하고 옛날 집 생각나서 스트리트뷰로 찾아봤는데 다 그대로 있습니다.
그땐 살기 힘들어 사진 한장 남기질 못했네요. 너무 글만 있는 것 같아 올립니다.
먼저 신혼집입니다. 우선 화장실이 밖에 있어 엄청 추웠고 여름되면 방수가 안되어 곰팡이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아래층에서 저와 아내가 신혼살림을 하였고 윗 옥탑방엔 당시 대학다니던 제 동생이 살았습니다.
이집에서 2년을 살았는데 방음도 안되고 춥고 화장실도 밖에 있고 벌레도 많아 아이 만들 분위기가 안됐어요.
하여 25백에 전세 놓고 그동안 모은 돈을 더해 38백 당시 고속버스터미널 근처 신축 빌라로 들어갔습니다.
Oh! My God!! 이게 집이죠.. 이 집에서 4년을 새벽 5시반에 나와 서울로 통근했습니다.
이곳은 서울 32평 아파트입니니다. TV가 없어서 거실이 휑하죠..^^ TV는 작년에 샀답니다.
아파트는 다 비슷하니 특별할게 없네요. 저희에겐 궁궐같은 곳이었습니다.
평생 살거라 인테리어도 많이 했는데 결국 다시 단독으로 이사 나가게 되죠.
워낙 깨끗하고 잘 꾸며놓은 집이라 매물로 내어 놓으니 같은 동 아래층에 전세 살던 분이 바로 매수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빌라입니다. 옛날 구조라 좀 특이합니다. 계단도 많고... 청소하기가 특히 힘들죠.
투자라 생각하고 이사온 집인데 어쩌다 보니 제일 오래 거주한 집이기도 하고 어쩌면 마지막 집이 될 것 같습니다.
빌라단지 앞에 조성된 '서울푸른수목원'입니다. 사진 상단으로 빌라 지붕들이 보이네요.
아직 개장한지 2년도 되지 않아 수목원이란 이름이 부끄럽긴 하지만 십년 뒤엔 꽤 좋아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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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이야기 감사 합니다.
그*빌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정말 살아보고 싶어요 ㅠㅠ) 검색해서 이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담담히 쓰셨지만 정말 열심히 사셨던 것이 다 느껴지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뒤늦은 댓글이지만 앞으로도 화이팅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