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비 살짝 내리던 날.
저녁무렵에 우산 들고 송파구 잠실역 전철역으로 나갔다.
몽촌토성역으로 가는 전철 타려고 다가서는데 눈에 익힌 얼굴이, 많이도 닮은 노신사.
아니 저분이? 대전 사시는 분의 얼굴 같은데? 하는 의혹이 일어났다.
대전역에서 서울역으로, 잠실역을 거쳐서 몽촌토성으로 물어물어 찾아가는 대전 동문 김규봉 친구?
맞다! 함께 전철을 탔고, 함께 몽촌토성역 2번 출구를 빠져 나왔다.
바로 코앞의 큰 건물에 산들해 음식점 상호가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모임 장소를 전철역 바로 가까이에 잡은 안경호 동문의 배려는 늘 이렇게 안성마춤이라니까.'
비 살짝 내리는 날, 많은 걷는 것은 싫어유.
안경호 동문의 간단한 인사말이 이어졌다.
오랜 만에 보는 얼굴들.
김규봉, 김낙중, 김종관, 백선기,송영무, 안경호, 윤종웅, 이종철, 최윤환 등.
1965~67년 충남 대전 목동 위 아카시아 향기가 은은히 번지던 충남고등학교에서 맺어진 인연들.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 걸치는 많은 시간과 지리적 공간을 넘어서도 그리워하고 번가워 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오늘 모임 참가 인원도 아주 적절했다.
많은 동문들이 현직에서 아직도 일하는 평일이기에 많은 성원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흡족하게 참석했다.
푸짐한 한식요리 테이블이 세 석이나 들어와 따뜻한 저녁밥을 들었다.
하이트 맥주, 소주, 사이다 등으로 잔을 채운 뒤 잔을 살짝 부딛치며 마셨다. 옆 친구의 빈 잔에 또 채워주면서.
까까머리 남학생이었던 친구들의 머리카락 색깔이 백색이거나 히끗히끗 했다.
고교를 졸업한 지도 벌써 50주년이 거의 가까워진다. 2018년 1월이면 50주년이 되겠지.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는 듯이 머리카락 숫자는 조금은 휑한 친구도 있었다.
이야기기 오고 가기 시작했다.
대전에서 올라 온 김규봉 동문.
서울동창 모임과 대전동참 모임이 예전처럼 합동으로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언급했다. 오래 전에는 서울과 대전 동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악수를 했는데, 어쩌다가 합동모임이 중단되었는지 하는 안타까움도 피력했다.
모두 동감하는 아쉬움이이다.
또 이번 11월 27일 1박2일간의 경주 수학여행(?)에 관해서 잠깐 말을 했다.
많이들 참석하면 좋으려만 그날은 금요일 평일이라서 직장에 나가는 동문으로서는 참가하기가 어렵겠다는 조심스러운 의견도 있었다.
꼭 많이, 다 참석하는 게 당연한 일이나 세상일이 어디 그러냐? 형편에 따라서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도 생길 터.
참석하는 인원이 많든 적든 가에 이런 모임이 지속적으로 명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데에는 의견일치를 보았다.
시골에서 백수건달로 지내는 나는 올 봄 서울에 와서 쉬므로, 별다른 일이 없기에 참석해야겠다는 의무감도 들었다.
얼굴이라도 보여주는 것만으로 존재 가치를 내야 하는 나.
모두들 다 바쁘니까.
서울이나 대전이나 모임이 더 자주 있었으면 하는 개 모두의 바람이며 희망이다.
즉 나이가 들어갈 수록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며, 건강이 조금씩 나빠진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수록 더 자주 만나야 하는데...
등산회, 골프회, 여행회, 반창회 등등의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고개를 주억걸렸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더 만나야 할 게다. 값이 저렴한 열차나 무료인 전철 등 노인우대 혜택을 받아가면서라도 멀리 외지로도 바람을 쐬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맞췄다.
주민등록지가 시골로 되어 있는 나.
무슨 핑계를 대어서라도 서울에서 모임이 있다는 전갈만 받으면, 서해안 벽촌에서 득달같이 올라 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올 추운 겨울이 지나면, 해동되면 나는 도로 시골로 내려가 엉터리 농사꾼이 되겠다는 계획도 살짝 언급했다. 돈 버는 농사가 아니라 돈 까 먹는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말했다.
동문들은 시골생활 전원생활은 되도록이면 간소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벅찬 농사일에 치우치지 말고 즐기는 농사를 권장했다.
김규봉 동문은 나한테 감 농사를 권장했다.
사과, 배 등은 벌레가 많이 끼므로 이런 전문농업은 지양하고, 농약 한 두 번만 치는 감 농사를 짓도록 나한테 권유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감농사에 도전해 봐야겠다. 물 빠짐이 좋은 곳에 감 몇 그루를 심어서 그의 조언대로 5년만 기다리면 한 해 몇 자루라도 딸 수 있을 게다.
김규봉 동문의 얼굴에서 살이 조금은 빠졌다.
배도 많이 홀쭉해졌다. 그만큼 건강해졌다는 뜻이다.
늘 긍정적인 마음과 자꾸만 움직이려는 생활습성이 그의 건강을 많이도 회복시키는 작용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번 모임(내년 봄철)에는 더욱 건강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요즘 세상은 못 먹어서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다.
질 좋은 음식물을 먹고도 운동하지 않는 이유로 건강을 해치게 마련이다. 나도 자꾸만 움직이어야겠다. 내가 시골에 도로 내려가 살던, 처자식이 있는 서울로 자주 올라오던 간에 반가운 친구들,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이런 마음가짐이 곧 좋은 운동이 아닐까? 마음운동.
일전 시골에서 고교 앨범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 글 쓰면서 앨범을 펼쳐 본다.
1반, 2반, 3반, 4반, 5반, 6반, 7반, 8빈의 남녀 동문들의 앳된 얼굴이다.
앨범 속에는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도 못한 채 저 너머의 세상으로 훌쩍 떠난 친구도 더러더러 있다.
남학생은 교모를 쓴 얼굴은 1967년의 앳된 학생이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깎고 하얀 카라의 교복을 입은 청순한 여고생들의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로 앨범 속에서 산다.
모두 그립고 보고 반가운 얼굴들이다.
고교 졸업 30주년 모임에 만났던 얼굴에는 '30주'라고 연필로 표시되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별명도 있다.
3반 반장이었던 송영래 동문 이름에는 '곰', 박계원 이름에는 '샤일록', 김규봉 이름에는 '꺅시', 등이 남아 있다.
앨범 속의 안경호는 그 당시 무시무시했던 기율부 임원이었다.
워쩐지... 나, 복장과 행동 늘 조심하겠시유.
앨범 보니까 오늘 참석한 백선기, 이종철, 송영무 동문은 고교시절 태권도반이었어?
워쩐지, 몸이 지금도 짱짱해 보이더라.
어이 친구들. 나는 늘 거들먹거려도 되지?, 친구들이 내 경호원 역할 해 줄 거지?
아쉽게도 오래 전 명을 달리한 친구들,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도 살짝 언급했다.
고교 졸업한 지도 참으로 오래 되다보니까 안타까운 이별도 자주 생긴다는 뜻.
앨범에는 연필로 '사망'라는 글자가 자꾸만 늘어나는 현실.
한 반에 열 명도 훨씬 넘는다는 계산에 참석자 모두 놀라워 했다. 특히 3-4반에는 열 명이 훨씬 넘는다는 통계 20%. 친구가 먼 여행길을 떠났기에 이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증거다.
나는 , 예전에는 앨범을 참으로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 앨범 속에는 죽은 동생의 이름이 들어 있기에.
그런데도 오늘 나는 앨범을 다시 보았다. 동생의 친구들과 만나서 악수도 했다.
윤종웅과는 같이 구역 안에서 살기에 귀가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충청인으로 선정된 유명인사이기에 늘 자랑스러운 친구다. 무척이나 다정다감도 하고...
오늘 3-4반창회 참석해 준 동문한테 고마워 한다.
또 생업에 바쁘고 여러 가지 일때문에 부득히 오늘 모임에 참가하지 못했던 동문들한테도 고마워 한다.
살아 있기에, 몸이 건강하기에 아직도 열심히 일하는 능력을 부러워 하기에..
특히나 멀리 대전에서 올라 온 김규봉 동문한테는 곱절이나 고마워 한다.
김낙중 동문이 대전으로 되돌아 가는 김규봉 동문을 서울역까지 배웅했다.
대전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도록 배웅해 준 김낙중 동문에게도 고마워 한다.
김형, 대전에 잘 안착하시소.
안경호 동문이 오늘 모임을 주선하고 또 저녁 한끼를 멋지게 샀다.
형인 나한테 대접했으니 나는 또 고마워 한다.
쌍둥이동생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고, 늘 든든하다고.
오늘은 그를 형이라고 부르고 싶다.
안형 수고 했시유. 고마우이.
안경호 동문, 정말로 수고 많으셨소, 오늘 모임이 아주 성대히 잘 치루어졌소이다.
2015. 11.25. 수요일. 해비치.
나는 11월 27일 금요일 경주수학여행에 참가합니다유.
야들, 동생 친구들을 만나서, 형(兄) 대접을 받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