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손씨대종택 3명의 大儒 배출 예정된 550년 古宅 외부기고자 조용헌 경주 양동 마을의 손(孫)씨 대종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거쳐야 할 몇 가지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먼저 한국에서 명문가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물음이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하는 한국적 물음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19세기 후반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세 100년의 역사는 명문가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굴곡이 많고 가파른 역사였기 때문이다. 일제 때는 친일에 걸리고, 해방 이후에는 좌익에 걸리지 않으면 우익에 걸렸고, 그렇지 않으면 독재정권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상처받아야만 했다. 흠집 하나 없는 온전한 집안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한국사회에는 존경받는 명문가나 지도층은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모두 도둑놈’이라고까지 잘라 말하면서, ‘사회 지도층’이라는 말 자체도 꺼내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듣기도 하였다. 그러한 질타에 깔려 있는 분노(?)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사회도 새로운 질서, 새로운 패러다임에 진입하고 있다. 그동안 품격이고 뭐고 따질 여가 없이 빵 문제에 골몰하면서 헐떡거리고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우리도 인간의 품위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명문가를 탐색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집안은 없지만,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흥망성쇠의 부침을 겪는 와중에도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려고 애쓴 집안들이 한국에는 아직 남아 있다. 그러한 집안이 어떤 집안이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필자는 명문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물증(物證) 한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고택(古宅) 여부를 꼽는다. 현재까지 그 집안에서 수십 칸 규모의 고색창연한 기와집을 지니고 있으면 일단 명문가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수십 칸의 고택을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는 집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는 역사성이다. 고택을 지닌 집들은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집안들이다. 짧게는 100~200년, 길게는 400~500년 동안 그 지역에서 대대로 거주했음을 의미한다. 역사가 오래 되었다는 것은 전통문화가 축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자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보존과 이해가 있어야 명문가다. 자기 문화의 전통에 무지하면 뼈대가 없는 ‘뜨내기’ 집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둘째는 도덕성이다. 도덕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백 년간 집안을 이어올 수 없다. 수백 년이라는 역사는 그냥 흘러온 것이 아니라 주변사람들로부터 그만큼 검증받았다는 말이 된다. 도덕성이라는 것을 뒤집어 보면 존경이다. 존경받지 못한 집들은 사회적 격변기에 거의 불타 버렸다. 셋째는 인물이다. 학문과 인품이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그 집안이 여태까지 유지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고택들은 대체로 ‘○○고택’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예를 들면 퇴계나 율곡 같은 인물이 배출되면 그 후손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다. 그 자부심과 긍지는 후손들에게 자랑거리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손들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계율’로도 작용한다. 인물을 배출한 집안의 후손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나 처신에 매우 조심하면서 사는 경향이 있다. 넷째는 재력이다. 재력이 없으면 대지 500~1,000여 평에 수십 칸 규모의 저택을 현재까지 유지하璲?불가능하다. 때문에 이러한 고택을 유지하고 있는 배경에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재력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재력이 없으면 고택의 유지 관리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다섯째는 명당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택들은 풍수적으로 보면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의 전통건축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풍수를 알아야 한다. 풍수라는 문법을 모르면 한국의 고택들이 지닌 사상적 배경을 해독할 수 없다. 한국의 고플敾?건축 자체만 가지고 외국 건물과 비교해 보면 별것 아니다. 초라할 뿐이다. 목조에 기왓장 그리고 구들장이 전부인 한옥을 어떻게 서구라파의 어마어마한 석조건축과 비교하겠는가. 그렇지만 고택이 깔고 있는 풍수사상에 들어가면 서구라파 사람들이 한 수 배워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나타난다.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주역(周易)의 64괘, 그리고 ‘육십갑자’(六十甲子)라는 상징으로 대변되는 풍수는 천(天)·지(地)·인(人) ‘삼재사상’(三才思想)의 결정체다. 이를 종합해 보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고색창연한 한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명문가 여부를 가늠하는 실질적인 척도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고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명문가인 집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8대를 내리 판서를 지낸 명문가인 우당(又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집안은 일제때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서울 명동에 있던 고택을 처분한 사례다. 이런 집안들은 현재 고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명문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고택 하나로 100% 판단하기는 무리이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어떤 지역에 고택이 많이 남아 있는가. 영남 지역이다. 답사를 다녀 보면 충청이나 호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남 지역에 고택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음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는 안동 일대를 꼽을 수 있다. ‘선비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른 지역에 비해 몇 배나 많은 수의 한옥들이 밀집해 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오늘날 영남 지역에 왜 이렇게 많은 고택들이 보존되게 된 것일까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충청이나 호남에도 영남 못지않게 고택들이 많았을 터인데, 산업사회로 전환이 되면서 충청·호남에서는 현저하게 줄어든 반면 영남에서는 그래도 보존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나는 그 원인을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서백당 사랑채 마루에서 바라본 동남쪽의 성주산.동남방에 봉우리가 있으면 외손이 잘 된다고 한다.서백당을 지을 때부터 사랑채는 성주산을 의식하고 방향을 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古宅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 영남 첫째는 조선시대 남인(南人) 집안들이 고택을 비롯한 집안을 보존하는 데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 노론이나 소론 집안들에 비해 남인들이 상대적으로 자기 집안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것 같다. 남인들이 거주하던 영남 지역은 조선 후기 약 150년 가깝게 정권에서 배제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심각한 지역차별을 당한 셈이다. 영남 사람 가운데 영의정이 배출된 사례를 보면 선조 때 서애(西涯) 류성용(柳成龍·1542~1607)이 있었고, 조선 말기인 고종에 이르러서야 서애의 8대손인 류후조(柳厚祚·1798~1868)가 겨우 좌의정을 지낼 정도였다. 그 중간에는 영의정 급이 배출되지 못 했던 것이다. 특히 남인들은 영조 이후 중앙 정치무대에서 철저하게 소외받아야만 하였다. 고위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기호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던 노론으로부터 철저하게 견제받은 결과였다. 벼슬길이 봉쇄당하자 남인들이 보인 대응은 ‘노론! 너희들끼리 잘해 먹어라. 우리는 고향에서 책이나 보고 공부하면서 도나 닦겠다’였다. ‘맹자’ ‘진심경’(盡心經)에 보면 ‘통칙겸선천하 궁칙독선기신’(通則兼善天下 窮則獨善其身, 잘 풀릴 때는 세상에 나가 벼슬도 하지만, 안 풀릴 때는 홀로 수양하는 데 힘쓴다)이라는 유명한 대목이 나오는데, 남인들은 ‘독선기신’(獨善其身) 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벼슬길에 나가 분주한 생활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내면적인 수양이나 독서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기 어렵다. 이처럼 남인들은 초야의 한가한 처사로 머무르면서 내면적인 수양에 힘쓰는 쪽으로 가닥을 잡지 않았나 싶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로 대변되는 외향적 삶보다 ‘수신제가’(修身齊家)로 요약되는 내향적 삶을 살았다고나 할까. 그 내면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문건이 바로 ‘남보’(南譜)다. ‘남보’는 남인들만의 족보를 말한다. 남인들은 노론과의 혼사를 꺼리면서 자신들끼리만 혼맥을 맺고 자손들을 낳아 길렀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남보’다. 일명 ‘오보’(午譜)라고도 부른다. ‘오’(午)는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킨다. ‘남보’라고 하면 너무 직설적으로 느껴지니 한 바퀴 돌려 ‘오보’라고 표현하였다. 이념과 혈연이 이중으로 결합된 결과가 ‘남보’라는 남인들만의 족보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남인들의 대단한 결속력을 읽을 수 있다. 이는 물론 노론에는 없는 족보다. 노론 쪽에서 ‘노보’(老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까. 남인들은 외부의 벼슬살이보다 상대적으로 내부의 가학(家學)과 가풍(家風)을 보존하는 일을 더 중시했던 것 같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지 않았나 싶다. 영남뿐만 아니라 호남에서 소외받고 살았던 남인 집안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경향이 발견된다. 대표적 예를 들면 호남에서 고택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사례인 전남 해남의 녹우당(綠雨堂, 고산 윤선도 고택)이다. 녹우당 역시 조선시대 남인 집안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되돌아보면 남인들이 받았던 정치적 소외가 전통문화를 지키는 거름으로 작용하였음을 인식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출세하고 잘나갔더라면 과연 그렇게 절치부심하며 가풍과 가학의 보존에 치중했겠는가. 조선 후기 150년의 차별과 소외감이 아이로니컬하게도 전통문화의 품격과 향기를 보존하는 자양분으로 작용하게 된 것을 보면서 역사는 돌고 돈다는 느낌이 든다. 영남지역에 고택이 많이 보존된 두번째 이유는 6·25 전쟁이다. 영남은 충청이나 호남에 비해 6·25의 피해가 적었다고 본다. 낙동강 이남은 점령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충청도는 피해가 아주 심했다. 충남 아산 같은 지역은 1·4 후퇴때 또 다시 공산군에 점령당했다. 비유하자면 톱질을 두 번이나 당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모모한 양반 집안들이 결정적 피해를 보았다. 학자들도 죽고 고서들도 불타 버렸음은 물론이다. ‘충청도’ 하면 양반으로 유명한 동네인데, 오늘날 고택이나 고서들이 과거의 명성에 비해 적게 남아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추측된다. 400년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영남이 직격탄을 맞아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기호나 호남이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면, 6·25는 그 반대였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영남에 많은 고서가 남아 있는 배경에는 6·25의 피해가 적었음을 감안해야 한다.세번째 이유는 서울과의 거리다. 충청과 호남은 서울과 가깝다. 들판이 많아서 교통이 편리하다. 안동을 비롯한 영남 일대는 교통이 불편한 오지다. 지금이니 이 정도이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안동·봉화 일대에서 서울 가려면 큰맘 먹어야 갈 수 있는 오지였다. 아무래도 왕래가 불편한 산간 지역은 서울의 영향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다. 서울이 상징하는 바는 서구화, 현대화, 산업화를 의미한다. 한국에서 전통 고택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민속마을을 거론한다면 충남 아산시 외암리, 경북 하회, 그리고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良洞)마을을 꼽을 수 있다. 세 군데 모두 사대부들이 살았던 유명한 반촌(班村)이다. 이번에 찾아가는 양동은 조선조 양반 마을의 분위기가 잘 보존된 곳이다. 대략 60여 채의 기와집이 남아 있는 양동은 조선시대 500년의 역사를 지닌 상류 주택의 품격과 스케일을 종합적으로 느낄 수 있는 명소다. 산업화와 개발이라는 폭풍을 겪으면서도 용하다 싶을 정도로 그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은 마을이다. 양동마을의 고택들을 다년간 조사한 김봉렬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이렇다. ‘양동마을이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존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입지부터 산업사회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이점을 안고 있다. 한반도 동남권의 핵심 도시인 경주와 포항 사이에 위치해 불과 30분이면 출퇴근하고, 도시의 문화생활도 누릴 수 있다. 특히 지척 거리의 안강읍에는 독점 군수산업체인 풍산금속이 자리잡아 생업에 전혀 문제가 없다. 그야말로 최상의 전원주택지인 셈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일제기부터 고등교육에 몰두해 수많은 고위 공무원과 대학교수, 재벌 사업가들을 배출했다. 따라서 탐방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구차한 장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비록 낡은 집에 살지만 그것을 긍지와 자랑으로 삼을 수 있는 정신적 여유에 충만하다.’(김봉렬,‘시대를 담는 그릇’230쪽,1999) img2R“경주와 포항 사이에 자리잡아 굳이 직장문제 때문에 집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경제적 이점과, 많은 상류층 인사들을 배출했다고 하는 정신적 긍지가 맞물려 오늘의 양동 마을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만약 직장 때문에 동네를 떠나야만 하는 입지조건이었다면 현재 상태의 동네 유지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정학적 원인으로 인해 양동은 현재에도 여전히 영남 제일의 반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살기 좋은 반촌으로 네 군데를 꼽았다. 경주의 양동, 안동의 하회, 안동의 내앞(川前), 봉화의 닭실(酉谷)이 바로 영남의 소문난 명당이다. 이 네 곳 가운데 어떤 곳을 첫째로 꼽는가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랐다. 어떤 사람은 양동 마을을 제일로 생각하고 하회를 그 다음으로 보았던 반면, 하회를 제일로 생각하고 양동을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차이는 마치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놓고 비교하는 것과 같다. 과거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차이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하였다. 양동이 하회보다 더욱 품격 있는 마을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하회는 상업화라고 하는 발목에 잡혀 본래 면목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각종 기념품 가게, 민박집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하회 마을의 동네 인심이 사나워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안간이지만, 손님을 유치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경쟁관계로 변모해 버리는 수가 있다. 상업화되었다는 측면에서 하회 마을의 품격이 반감되었다고 한다면 양동 마을에는 그런 상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가한 정취가 남아 있다. 나는 이제까지 양동 마을을 7~8번 답사하였지만, 답사할 때마다 느꼈던 인상은 입체적인 마을이라는 점이었다. 한국의 고택들은 대부분 배산(背山)이 버티고 있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평면적 배치가 대부분이다. 즉, 산 중턱의 높이에 집단적으로 자리잡은 반촌은 드물다는 말이다. 그러나 양동은 이와 다르다. 평지가 아닌 언덕배기 중간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방문객들에게 입체적인 인상을 준다. 과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반촌 가운데 이러한 입체적 입지조건을 갖춘 곳은 양동 마을뿐인 것 같다. 방문객의 눈높이 또는 눈높이보다 약간 높은 곳에 고택들이 위엄 있게 자리잡고 있다. 주택의 위치는 역시 약간 높은 곳이어야 위엄을 풍기는 입지조건에 해당되는 되는 수가 많다. 구라파의 귀족들이 선호했던 주택의 입지들이 대체적으로 전망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로마 시내의 팔라티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 언덕은 일찍부터 로마 귀족들이 선호하였던 집터였다. 귀족이 사라진 20세기에 들어서는 부자들이 언덕 위의 집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고급주택들을 보더라도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집값이 비싸진다. 외국의 경우 주택 입지의 높이와 전망 그리고 품격과 가격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망이 높아질수록 그에 비례해 통찰력도 얻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하여튼 구라파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평지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주택들을 보다 양동에 와서 유별난 찬사를 보내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양동이 지닌 입체적 입지조건에서 연유된 것이다. 양동에 살면서 외국인들을 안내해 주는 문화유산 해설사인 이지휴 씨의 설명에 따르면 백인들이 특히 양동에 와서 감탄한다고 한다. 백인이라 하면 독일·아일랜드·노르웨이·러시아·스페인·덴마크·체코·스위스·호주·헝가리 등에서 온 사람들이다. 북구라파 사람들이 많다. 북구라파에까지 한국에 가면 양동이라는 동네가 볼 만하다는 정보가 노출된 것이다. 이들은 대개 여행 마니아이거나 문화에 대한 식견이 상당한 인텔리들이라고 한다. 단체로 오는 법이 없고 한두 명씩 배낭을 지고 한가롭게 찾아온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다니면서 기와집들을 이 잡듯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다. 한번 이 동네에 들어오면 민박을 하는 수도 있고, 적어도 7~8시간에 걸쳐 샅샅이 들여다보다 간다. 가면서 하는 말이 한국에 와서 가장 인상적인 곳을 보았다는 소감을 피력하고는 한다는 것이 이지휴 씨의 이야기다. 서백당의 현판.집 이름에'서백'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이유는 '참을 인자를 100번씩쓴다'는 의미에서다. 조선시대의 베벌리 힐스, 양동 마을 조선시대의 베벌리 힐스인 양동 마을에서 가장 오래 된 고택은 경주(月城) 손씨 대종택이다. 전국에 산재한 경주 손씨 인구를 어림잡으면 약 10만명 가량이 된다고 하는데, 그 10만명 되는 경주 손씨의 대종택이 바로 이 집이다. 흔히 ‘서백당’(書百堂)이라는 당호(堂號)로 일반에 알려져 있다. 집 이름에 ‘서백’(書百)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이유는 ‘참을 인자(忍字)를 100번씩 쓴다’는 의미에서다. 적어도 10만명 인구의 손씨 집안 대종택을 지키는 종손이 되려면 그만큼 참고 인내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만 종손 노릇하기도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집이 지어진 시기는 손씨가 양동에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1433~84)때부터다. 손소는 1458년부터 처가 마을인 양동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으므로 서백당도 이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양민공의 아들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대에 이르러 손씨 집안의 명성이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양민공부터 따져보면 현재의 종손 손성훈(孫成熏·48) 씨는 20대 종손이 된다. 이렇게 보면 서백당은 20대, 550년의 역사를 지닌 집이다. 민간 주택으로 500년의 세월이 넘는 역사를 가진 경우는 희소하다. 전문가들은 충남 아산에 있는 북향집인 ‘맹씨행단’(1330년대) 다음으로 이 집이 가장 오래 된 개인주택이라고 여긴다.
그만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집이다. 6개월 단위로 바뀌는 한국적 상황에서 자그마치 550년의 역사를 가진 집이 아직 한국에 남아 있다는 게 경탄스러울 뿐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철골 콘크리트 구조이지만 10년만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을지 의심스러운 판에 550년 전에 지은 목조주택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은 외경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550년의 역사’, 이 한 가지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img3L“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양동 마을의 서백당을 비롯한 수십 채 고택들은 전통문화의 ‘씨암탉’이자 ‘종돈’과 같은 존재다. 이 ‘씨암탉’이라도 남아 있으니 전통문화가 멸종되지 않고 앞으로 병아리를 생산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양동 마을에는 손씨 대종가인 서백당뿐만 아니라, 여강(驪江) 이(李)씨들의 고택들도 즐비하다. 동네 중심에 자리잡은 무첨당(無添堂)은 바로 여강 이씨 종택으로, 1500년대 초반에 지은 집이다. 500년의 역사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양동에서 배출된 이후 양동에는 손씨와 이씨, 두 집안의 고택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서게 된다.
500년 동안 양동 마을이 반가촌을 형성하면서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살 수 있었던 지리적 배경은 무엇인가. 수백 년 동안 세거지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동네의 지리적 입지조건이 우수했음을 시사한다. 검증된 터라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살다 동네를 떠나게 마련이다. 풍수적 관점에서 양동을 분석해 보자. 양동 마을 전체 형국은 물(勿)자 형국으로 불린다. 동네 전체 언덕의 배치 형상이 한자의 ‘물’자와 흡사한 모습이다. 배산인 설창산(雪蒼山, 161m)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지맥이 4군데다. 그 4군데 지맥 이쪽 저쪽으로 집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4군데 맥의 뻗어내린 모습이 물자와 흡사하다. 동네의 전체적인 형국을 이야기할 때 동물의 모습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물형법(物形法)이 있다. 소에 비유한 와우혈(臥牛穴)이라든가, 호랑이에 비유한 복호혈(伏虎穴), 뱀에 비유한 사두혈(巳頭穴) 등이다. 형국을 보면서 소가 보이고, 호랑이가 보이고, 뱀과 같은 동물이 보이면 대단한 경지다. 산세와 바위의 모습을 보았을 때 동물의 형태로 보이는 사람은 한 경지 열린 지관이다. 모든 사물을 살아 있는 생명으로 생각할 때에서야 비로소 산세가 동물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고로 동네의 이름을 처음 지은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대단한 고수들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수들이 함부로 동네 이름 짓는 것이 아니다. 분별이 떨어져야 인간과 동물 그리고 산천이 서로 호환(互換)되는 경지가 가능하다. 일반인들은 한참 설명해 주어도 그 동물의 모습이 들어올까 말까 한다. 사물이 죽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산을 십 몇 년 다녀 보았지만 분별이 떨어지지 않아 고수가 설명해 주어야 비로소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가 된다. 물형법 다음에는 문자의 모습으로 치환해 보는 법이 있다. 물자 형국이라는 게 바로 그런 방법이다. 어떤 곳은 을(乙)자에 배대시켜 보기도 하고, 용(用)자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양동은 물자 형국인 동네라서 몇 가지 장점이 있다. 먼저 겨울에 찬바람이 들이치지 않는다. 양동은 동네 골짜기로 들어오는 입구가 좁고, 동네 안으로 들어올수록 점점 넓어지는 형세다. 그래서 아무리 겨울이라도 이 바람이 동네 안으로 들어오면 넓게 퍼져 버린다. 바람의 세기가 약화된다. 거기에다 4개의 언덕들이 가로막으면서 이 바람을 또 한번 여과시키기 때문에 온순해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바람이 ‘스리쿠션’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일조량도 많다. 앞이 낮고 뒤가 높아 햇볕을 받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 대신 여름에는 동네가 시원하다. 언덕의 높이가 해발 50~70m 위치여서 여름에는 시원하다.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삼복 더위에도 서백당 사랑채의 마루에 앉아 있으면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시원하다. 서백당의 위치는 물자 형국에서 가장 뒤쪽, 그러니까 가장 배후가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잡은 집터인만큼 풍수적으로 보았을 때 물자 형국에서 가장 핵심 자리를 우선적으로 잡은 셈이다. 양동이 지닌 또 한 가지 장점은 풍수해가 없다는 점이다. 어지간히 홍수가 와도 피해가 적다. 언덕 위에 집들이 있기 때문에 물에 잠기지 않는다. 1959년 사라호 태풍때 그렇게 많은 비가 왔지만 동네 아래에까지만 물이 찼지 언덕 위의 집들은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 서백당은 바로 그런 터다. 2002년 여름에 닥친 태풍 ‘루사’때 실감했겠지만 바람이 불면 물도 같이 따라 온다. 그래서 풍수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풍’ 가는 데 ‘수’도 따라 온다. 풍수는 과도한 풍과 수를 피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풍수를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잡은 터는 태풍이 불 때 큰 피해를 보는 수가 많다. 풍과 수가 밀어닥칠 때 ‘풍수’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언덕 위라는 입지조건이 무조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점도 있다. 공간이 협소하다는 문제다. 언덕이라서 평평한 공간이 좁을 수 있다. 그래서 80~90칸의 건물은 지을 수 없다. 다른 반촌에서 볼 수 있는 넓은 대지에 80~90칸짜리 건물이 양동에는 없다. 터가 좁아서다. 노비들의 집들이 밖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던 이유도 이러한 언덕이 지닌 입지적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양동 마을의 노비들은 주인집으로 출퇴근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는 주인집 담장 밖에 있는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 하루 종일 근무하다 밤에 잠을 잘 때 도 행랑채에서 자는 것보다 주인집 대문을 벗어나 자기 집에 가서 자는 것이 어떻게 보면 편했을 것 같기도 하다. 외손이 발복하는 터(外孫發福地), 양동 양동의 지리적 조건을 살펴볼 때 주목할 사항이 ‘외손발복지’(外孫發福地)라는 구전이다. 양동은 외손들이 특히 잘 되는 터라고 전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손씨도 외손들에 해당한다. 손 소의 장인은 풍덕 류(柳)씨 류복하(柳復河)였다. 류복하의 딸에게 장가든 손 소가 처가 동네인 이곳에 살면서 뿌리를 내리고, 우재 손중돈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이 동네에서 배출되면서 외손인 손씨들이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씨들은 손씨 집안의 외손이었다. 손 소의 외동딸에게 이 번(李蕃)이 장가들면서 역시 양동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이 번의 둘째아들이 회재 이언적이다. 이언적이 배출되면서 또한 양동에는 여강 이씨들이 번창하게 된다. 그러니 손 소의 외손자가 이언적이다. 계속해서 외손들이 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위나 외손들이 번창하게 되는 배경에는 당시의 유산 상속 풍습도 한몫 했다. 조선 후기와 달리 조선 초기에는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처가 동네에 살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배경은 딸이 받았던 유산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는가. 외손발복지라는 구전이 전해지기까지에는 풍수적인 이유가 별도로 감추어져 있다. 터가 외손들에게 유리한 형세라는 점이다. 그동안 양동 마을을 소개하는 많은 글들을 읽어 보았지만, 정작 이 풍수적 조건을 분석하는 문건은 없었던 것 같다. 필자가 끼여들 몫이 아직 남아 있는 셈이다. 강호에 숨어 있는 대가들의 조언을 참고하여 필자가 정리한 외손발복지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외손이 발복하는 터는 풍수적으로 볼 때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세 가지를 전부 갖추는 경우도 있고, 세가지 중 하나만 갖추는 수도 있다. 그 첫째는 청룡이나 백호 줄기에서 갈라져 나간 맥이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나성(羅城)이 좋은 경우다. 여기서 나성이라 하면 안산 너머로 멀리 보이는 조산(朝山)급 산들을 일컫는다. 즉, 동네 앞으로 멀리 20~30리쯤 떨어진 곳의 산들이 형세가 좋은 경우다. 세번째는 패철로 방위를 잴 때 손방(巽方:동남방향) 위치의 산봉우리가 좋은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외손이 발복한다고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양동은 이 세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전형적인 외손 발복터라는 구전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양동의 지세는 백호 줄기에서 갈라져 나간 맥이 여러 갈래로 뻗은 형국이다. 풍수에서 청룡이나 백호 줄기는 아들과 딸, 또는 장남과 차남 등으로 본다. 청룡·백호에서 다시 갈라져 나간 줄기가 좋다는 것은 청룡이나 백호가 한 가닥이 아니고 여러 가닥으로 분화되면서, 그 분화되는 지맥마다에 혈자리가 맺히는 경우를 가리킨다. 양동은 백호 줄기가 여러 가닥이다. 특히 서백당의 위치에서 보면 백호가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서백당은 물자의 맨 뒤에 있는 형국이니 물자를 곰곰이 뜯어보면 백호가 여러 자락이라는 것이 이해가 간다. 백호는 딸로 보기도 하는데, 백호에서 다시 갈라져 나간 맥이 좋다는 것은 딸에서 갈라져 나온 자식, 즉 딸이 낳은 자식들이 좋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는 백호뿐만 아니라 청룡맥에도 역시 해당된다고 본다. 다만 청룡보다 백호가 더 확률이 높다고 본다. 나성이 좋다는 대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양동 주변의 산세가 어떤가를 보아야 한다. 양동 마을 앞으로는 넓은 안강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산이 많고 들판이 적은 경상도에서 안강평야 정도의 들판은 아주 넓은 들에 해당한다. 그 들판 주위로 멀리 둘러싸고 있는 산세들은 한결같이 중후한 느낌을 준다. 평평한 모습의 토체이거나, 둥글둥글한 모습의 금체들이 주종을 이루는 산세다. 토·금체의 형상들은 모두 점잖은 산세라고 본다. 방정한 모습들이다. 울퉁불퉁 솟은 바위산이 거의 없다. 울퉁불퉁한 바위산이나 암벽이 주위에 보이면 이것은 살기로 본다. 바위에서는 지기(地氣)가 강하게 방사된다. 주변에 바위산이 많이 보이면 지기가 지나치게 강해서 살기로 작용한다. 물론 이 바위들도 절터 주변에 있으면 오히려 좋은 것으로 본다. 절터는 도를 닦는 곳이기 때문에 강력한 지기가 필요하다. 바위는 기도발로 변한다. 그러나 일반인이 사는 주택에서는 살기로 작용한다. 안강평야 주변의 산세는 바위산이 보이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양동의 끝자락 맥에 자리잡은 관가정(觀稼亭)에서 안강평야 너머를 바라보았을 때 멀리 보이는 조산들의 모습이 좋다. 둥그런 모습의 금체와, 마체(馬體)가 이쪽을 바라본다. 마체는 말안장과 같은 모습의 산세다. 2개의 둥그런 봉우리가 연달아 연결되어 있으면 이를 말안장이라고 보고 마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는 벼슬이 나온다고 믿는다. 마체를 일명 ‘벼슬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동에서 정면으로 멀리 보이는 조산들에는 단정하면서 귀봉(貴峰)들이 많다. 서백당이 배출한 인물, 우재 손중돈 외손 발복의 조건 가운데 하나는 손방(巽方)에 있는 봉우리다. 지관들이 사용하는 패철에서 가리키는 손방이란 동남방이다. 이 방향에 좋은 봉우리가 있으면 외손이 잘 된다고 한다. 왜 그런가. 손(巽)은 주역의 팔괘(八卦)가운데 하나다. 손은 사람에 비유하면 장녀(長女)에 해당한다. 아들과 딸로 대별하면 딸쪽에 가깝다. 때문에 이 방향에 좋은 봉우리가 보이면 장녀 또는 딸이 잘 된다는 것이라고 전통 지관들은 해석한다. 주역을 모르면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아울려 주역의 팔괘가 우리의 전통문화에 얼마나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양동은 과연 손방이 좋다는 말인가. 필자는 서백당에 앉아 손방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서백당의 좌향은 남향이다. 그런데 사랑채의 마루는 동남방향을 향하여 열려 있는 구조다. 남향은 백호에서 내려온 안산이 가로막고 있어 약간 답답한 느낌을 준다. 그 답답한 느낌을 해소해 주는 방향이 동남방, 즉 손방이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동남방향으로는 시원하게 전망이 열려 있다. 그 동남방인 손방에 성주산(108m)이 보인다. 마루에서 보면 손방의 성주산은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다. 적당한 눈높이다. 사랑채 마루에서 보면 성주산이 안산에 해당한다. 또한 성주산은 바가지 모양으로 둥그런 모습이다. 잘 생긴 봉우리다. 서백당을 지을 때부터 사랑채는 성주산을 의식하고 방향을 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양동 마을, 좁게 보면 서백당은 외손발복터에 해당하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음이 발견된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양동은 외손이 잘 된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답사를 다니면서 느끼는 쾌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암호처럼 모호하게 내려오던 구전을 해독할 수 있는 방정식을 풀어 냈을 때 오는 쾌감. 그 쾌감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즐거움이다. 서백당은 대지 1,300평에 사랑채와 안채를 합해 33~34칸에 이른다. 칸수만 놓고 다른 저택들과 비교해 보면 그렇게 큰 집은 아니다. 서백당에서 배출된 인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우재 손중돈이다. 류씨 어머니가 태양이 품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낳았다고 전한다. 27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경상·전라·충청·함경도 등의 관찰사를 거쳐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43세때 중종반정 직후 상주 목사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그곳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선생을 추모할 정도였다. 살아 있는 사람을 사당에 모신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우재의 인품과 덕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우재의 선정비는 현재 상주시 교육연구원 정문에 세워져 있다. 우재의 경륜과 선비정신을 짐작하게 하는 문건이 임금에게 올린 ‘오조소’(五條疏)이다. 1. 군주는 오로지 배움에 힘써야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다. 2. 군주와 그 신하는 항상 백성을 사랑하고 아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3. 왕실과 고관대작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허례허식을 버리고 근검절약의 풍습을 진작시켜야 한다. 4. 국가가 사람을 쓸 때 어질고 총명한 사람을 가려야 기강이 바로 선다. 5. 국가의 직무를 담당하는 선비들이 풍류나 즐기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지는 폐습을 경계해야 한다. 이 ‘오조소’는 국가의 지도층인 관료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밝혀 놓은 지침서다. 조선조가 500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선비들의 이러한 각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부패한 양반만 있었다면 어떻게 50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우재가 상주 목사 재임 시절 상주 백성들이 생사당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우재는 이 ‘오조소’를 평소의 벼슬살이에서 철저하게 실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말 따로 행동 따로였다면 생사당까지 지었겠는가. 우재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회재가 작성한 제문이다. 조카인 회재 선생은 외삼촌인 우재를 추모한 제문에 이렇게 썼다. ‘외삼촌의 넓고 크고 강직한 성품은 이미 타고난 것이어서 덕이 완성되고 행적이 높아 별 노력을 하지 않고도 스스로 남의 모범이 되셨다. 내가 조금이라도 의(義)를 안다면 모두 외삼촌이 주신 것이다.’(‘양동 마을과 경주 손씨’, 8쪽) 조카인 회재도 언급하였지만 우재의 성품은 이미 타고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뛰어난 인물들은 후천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선천적 자질 또한 중요하다. 세상을 살아볼수록 선천적 자질이 더 비중을 차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부터 더욱 그런 생각이 된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운명론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후천의 노력보다 선천적 자질을 강조하다 보면 운명론에 빠질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타고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入胎와 出産이 이루어지는 별도의 방, 産室 어떤 집안이 명문으로 발돋음하는 데 제1차적인 조건은 뛰어난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물의 탄생은 출생지부터 비범한 경우가 많다. 손씨 집안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서백당은 ‘3명의 혈식군자(血食君子)가 나오는 자리’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혈식군자란 서원에 배향되는 정도의 인물을 가리킨다. 그 첫 인물이 바로 우재였다. 우재는 서백당의 안채 오른쪽에 자리잡은 산실(産室)에서 출생하였다. 조선시대 명문가들은 입태(入胎)와 출산(出産)이 이루어지는 별도의 방이 있었다. 그게 산실이다. 요즘에야 신혼여행지의 호텔방에서 입태가 이루어지고, 산부인과에서 출산이 이루어지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입출(入出)이 특별한 기운이 뭉쳐 있다고 여겨지는 산실에서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그래야 정기를 받아 큰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나온다. 쓰레기를 매립하고 그 위에 지은 아파트 10층에서 낳은 아이와 명당의 정기가 어린 산실에서 낳은 아이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부정모혈(父精母血)이 만나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은 그 사람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가 결정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 장소도 중요하다. 서백당의 안채에 마련된 산실은 이 집의 새댁들이 거처하는 ‘새댁방’이라고도 부른다. 우재는 바로 이 산실에서 출생했던 것이다. 영지(靈地)에서 아이가 잉태되면 그 어머니에게 반드시 특별한 꿈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게 태몽(胎夢)이다. 태몽을 보면 태어날 아이의 일생을 점칠 수 있다. 태몽은 알파요, 오메가이다. 4차원에서 3차원으로 넘어오는 순간 한 장면 보이는 것이 태몽이다. 불교의 전생을 대입해 설명한다면 태몽은 전생성적표다. 전생에 그 영혼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전생 성적이 A급이었는가, B급이었는가, 또는 C급이었는가는 태몽을 보고 짐작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집단 무의식 속에는 태몽이 각인되어 있다. 오랜 경험을 통해 태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 우리 조상들은 그 사람의 행장을 쓸 때 반드시 태몽이 무엇이었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그 인물의 총체적 함량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우재의 경우는 ‘태양이 품에 들어오는 태몽’이었다고 전한다. 상서로운 태몽이었음이 틀림없다. 나는 우리나라 명문가의 인물들이 태어났던 산실들을 몇 군데 가보았다. 산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일부러 그 방에 앉아 10분 정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보고는 하였는데,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낀 소감은 강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는 기감(氣感)이었다. 산실은 공통적으로 기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기가 강한 방에 앉아 있으면 기운이 척추뼈를 타고 올라와 뒷머리를 돌아 앞이마에까지 찌르르 하고 전달된다. 서백당의 산실도 역시 마찬가지다. 종손인 손성훈 씨의 설명에 따르면 수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끔 서백당에 들르는데, 이 사람들이 수맥 탐지봉을 가지고 이곳 저곳을 조사하면서 다니다 산실 부근에 오면 이구동성으로 ‘이곳이 기가 강하게 흐르는 지점’이라고 외친다는 것이다.
서백당 산실에서 우재 다음으로 태어난 인물이 회재 이언적이다. 회재의 어머니가 해산 무렵이 되자 친정인 서백당에 와서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산실의 혈식군자 할당량은 3장이었는데 그 중의 1장을 이씨 집에서 가져간 셈이다. 이후로부터 손씨 집 딸들은 이 산실에서 출산하는 기회가 차단되었다. 그래서 손씨집 딸들은 출산할 때가 되면 서백당 주변의 집들에서 아이를 낳아야만 하였다. 혈식군자의 할당량은 아직 1장 더 남아 있다. 고택들을 답사하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나무다. 어떤 나무를 심었는가를 살핀다. 나무는 인간보다 수십 배 오래 사는 식물이다. 오래 산다는 것은 축적이고, 축적에서 지혜가 나오게 마련이다. 수백 년 이상 살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한 증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나무가 지니는 이러한 역사성을 의식하면서 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나무를 심었는가를 보면 그 심은 사람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서백당이 고택으로서의 품위를 지니는 요소 중 하나가 마당 우측에 심어져 있는 장중한 향나무의 자태다. 집을 지을 당시 양민공이 직접 심은 기념 식수라고 하니 500년이 넘는 수령이다. 자태가 장중하면서 고색창연한 이 집의 분위기를 그대로 말해준다. 나무가 원체 좋다 보니 1970년대 초반에는 이 나무를 팔 수 없느냐는 제의가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삼성측에서 용인 에버랜드를 조성하면서 이 나무를 사겠다는 요청이 있었다. 당시 2,000만원을 지불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10억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거절하였다. 궁금했던 부분은 이 거대한 나무를 어떻게 손상시키지 않고 옮겨갈 것인가였다. 헬기 2대로 나무를 묶어 옮겨가는 방법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양동에는 향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그 원조는 서백당의 향나무다. 향나무 다음에 필자의 주목을 끄는 나무는 회화나무다. 서백당 대문앞에 오래 된 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향나무와 마찬가지로 양동 곳곳에는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회화나무는 괴목(槐木)이라고 불리는 나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느티나무와 비슷해 혼동을 일으킨다. 느티나무는 귀목(槻木)이라고 부른다. 느티나무가 거북이(龜)처럼 오랜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느티나무를 가리키는 ‘귀목’과 회화나무를 가리키는 ‘괴목’의 발음이 비슷해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느티나무를 ‘괴목’이라고 부르는 오류를 상당기간 범했으니 말이다. 회화나무(槐木)에는 귀신 귀(鬼)자가 들어 있다. 그 이유는 이 나무가 귀신을 쫓는, 벽사(闢邪)의 효능이 있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원이나 사찰 그리고 선비 집안에 많이 심는 관습이 있었다. ‘격암유록’에 보면 후천개벽이 되어 좋은 세상이 될 때 ‘청괴만정’(靑槐滿庭)이 된다고 적혀 있다. 집집마다 정원에 회화나무가 가득 심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주택뿐만 아니라 사찰에서도 이 회화나무를 건축재로 많이 사용하였다. 질기고 단단한 재질이다. 선방(禪房)의 대들보로도 사용하였다. 대들보나 서까래가 회화나무로 된 선방에서 좌선하면 스님들이 피곤을 덜 느낀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지금은 변했지만 서울 삼막사의 경우는 선방 전체가 회화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무튼 회화나무는 선비의 집안에 심는 나무라고 알려져 양동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이 동네의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회화나무는 습기를 빨아들이는 효과도 뛰어나다고 한다. 그래서 피부병 또는 문둥병을 예방해 주는 나무라는 것이다. 습기를 빨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양동에 와서 처음 들었다. 책에는 안 나오는 내용이다. 서백당의 20대 종손인 손성훈 씨를 만나 보았다. 소탈한 인상을 풍긴다. 어떻게 보면 경주 손씨 문중의 20대 장문인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만큼 종손 자리는 책임이 무거운 자리다. 현재 대구에서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규모도 작고 위험부담이 거의 없는 사업이라고 합니다.” ― 그렇다면 종손으로서 집을 지켜야 하는데 부득이 집을 많이 비우는 상황이 되겠네요? “그 부분에 대해 참 책임을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주말이면 거의 다른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주중에는 대구에 있지만, 주말이면 서백당에 와서 있습니다. 양동의 저희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분들에게 여러 가지 설명도 해 주고 안내도 합니다.” ― 사업하시는 분이라면 주말에 사업 관계로 대인관계도 많을 텐데 어떻게 그것을 다 거절합니까. “그러다 보니 사업적으로는 약간 손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말만큼은 서백당을 지키는 것이 종손으로서 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주중에라도 집안에 일이 있으면 양동으로 옵니다.” 경주 손씨 집안의 정신, 執中有權 ― 종손이 사업하는 경우는 드문데요? “그렇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집안 8촌 이내에는 전부 학교 선생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직업은 거의 없었죠. 저는 이 분위기를 좀 벗어나 보고 싶었습니다. 대학도 일부러 영문과에 진학했죠. 유학적인 분위기를 벗어나 보고 싶은 제 나름대로의 도전이었죠. 영문과에 다닐 때도 일부러 교직과목은 이수하지 않았습니다. 집안 친척들이 거의 선생인데, 저만큼은 선생 말고 다른 직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 선친께서는 그에 대해 어떤 제재(?)가 없었습니까. “45세까지만 사회생활을 해라. 그 이후로는 집을 지키라고 당부했습니다. 그전까지 번 돈은 다 쓰라고 했습니다. 45세 이전까지는 자유를 준 셈이죠.” ― 서백당 20대 종손으로서 갖는 장단점이 있을 텐데요? “단점은 중압감과 책임감입니다. 예를 들어 경주에 오면 술집 출입을 마음대로 못합니다. 제 스스로 제약을 가하는 셈이죠. 서백당 종손이 혹시 흐트러진 태도를 보이면 그게 가십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처신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상중(喪中·3년)에는 사람을 만날 때도 다방이나 술집에서 만나지 말라’는 당부를 집안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당부입니다. 작고하신 선친의 경우 장날에는 외출을 삼갔읍니다. 보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아는 체하니 번거로운 면도 있었고, 서백당 주인이 장바닥에 나오면 품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장점은 뭡니까. “사업체 사장으로서의 대접보다 서백당 종손으로서의 대접이 훨씬 낫습니다. 사장이라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지만, 서백당 종손이라고 밝히면 대접이 달라집니다. 관공서에서도 양동 서백당 종손이라고 하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선대에 저희 집안 어른들이 쌓아놓은 음덕을 제가 받는 셈이죠. 그러니 제가 어떻게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읍니까.” 손성훈 씨와 이야기 도중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뚜껑에 ‘집중유권’(執中有權)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내 휴대폰에는 어떻게 하면 도시 봉급쟁이 생활을 청산하고 산으로 갈까를 고민한 나머지 ‘산으로 간다’고 새겨 놓았지만, 손성훈 씨 휴대폰에는 ‘집중유권’이 새겨져 있다.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 다른 것이다. ― 왜 휴대폰에 하필 ‘집중유권’이라고 새겨놓았습니까. “제가 10만명 경주 손씨의 종손입니다. 어떻게 보면 집안을 대표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려면 처신하는 데 ‘중용’(中庸)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용을 벗어나면 후유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중용을 취하는 데서 권위가 생긴다’는 뜻이죠. 저희 집안이 500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 내지 정신을 찾는다면 바로 이 중용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중(時中)에 맞추어 일을 처리하고 처신하는 것이 참 어렵지만, 저희 집안 사람들은 중용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휴대폰 뚜껑을 열 때마다 이 말을 명심합니다.” 이 집안의 유명 인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동보일러 회장을 지낸 故 손도익(孫道翼), 문교부 장관을 지내고 위덕대학 총장으로 있는 손제석(孫制錫), 동양석판(주) 회장 손열호(孫烈鎬), 퍼시스(주) 회장 손동창(孫東昌), 서울대 교수 손봉호(孫鳳鎬) 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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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명가 ①]경주손씨대종택 |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