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마르제악(The Marzeaḥ) 제도와 죽은 자를 위한 제의(Rites for the Dead) 2012. 11. 23. 16:25 |
고대 마르제악(The Marzeaḥ) 제도와 죽은 자를 위한 제의(Rites for the Dead):
문제와 해결책
1. 들어가는 말
마르제악(marzeah) 제도는 사회정의를 해친다는 이유로 구약시대 8세기-6세기에 걸쳐 예언자들로부터 신랄히 비판받은 사회역학들 중의 하나이다. 구약성경에 오직 두 번 등장하는데, 먼저 한글개역성경 아모스 6:7에서는 이 단어를 “떠드는 소리”로, 예레미아 16:5는 “상가”로 번역하고 있어서 웬만큼 성경을 정독하는 사람도 이 단어의 의미를 쉽게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제도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감추인 유산”이 되어 왔다. 그래서, 주의깊은 성서 독자들에게는 물론, 학계에도, 유감스럽지만 이 제도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거나 심지어 내노라 하는 서구의 학계 역시 불충분한 이해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제도는 구약성서 외의 서부 셈족어 문화권에서는 초기 청동기 시대 (2,500 BCE)의 도시 에블라로부터 시작해서, 우가릿 (14세기 BCE; 현대의 라스 샴라), 트랜스요르단, 페니키아, 엘레판틴, 나바티아, 팔미라, 로마시대 동요르단의 Madeba (6세기 CE)에서 나온 지도 그리고 랍비 문헌들에 언급되고 있으므로, 거의 삼천 년여에 걸쳐 오랫동안 널리 실행된 고대사회에 잘 알려진 제도이었다. 마르제악이란 단어는 앗카드어로 ma-ar-zi-ḥi, mar-ze-i, mar-za-i로 그리고 우가릿어로 mrzḥ 혹은 mrz‘로 쓰여지는데, 히브리어 marzeaḥ (이하에서 h 밑의 표시점을 전제함)이 학계의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아직 정설이 없이. 1966년, 오토 아이스펠트의 시도 이래, 두세 가지 설명이 시도되고 있다. 영어로는 종종 “revelry" (술잔치) 혹은 “banquet” (연회)으로 번역된다. 칠십인역은 종교적 길드 혹은 조합, 결사(confraternity)를 지칭하는 thiásos로 번역하고 있다. 도시국가 팔미라에서는 그리스어 sumposium, 즉 심포지움으로 대용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레미아 16:5의 고대 번역자들(예, 페쉬타)은 이를 “(초상을 당해 우는) 애곡(mourning)”로 이해하였다. Susan Ackerman은 에스겔 8:7-13에서 마르제악 제도의 모습을 발견하였으며, 최근에는 Eleanor Beach가 아모스 6:4-7의 상아침대의 조각상징들이 삶과 죽음의 교차(즉, 장례나 추모식)나 정권교체(왕위계승식) 등의 상황 속에서 연속성과 합법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적 상징들을 담고 있음을 주변문화,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상아장식과의 비교를 통해 밝힌 바 있다. 필자 역시 이러한 제도가 다른 예언본문들, 예를 들면 이사야 28장과 호세아 7장에도--후자의 경우, 기존의 주석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보다 올바르고 충분한 예언서 본문의 해석과 적절한 구약세계 이해를 위해 이 마르제악제도의 이해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선행적으로 요청된다.
최근까지 마르제악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는 데, 이 제도의 성격과 기능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모든 증거로 보아 여타의 주변적 요소들과 함께, 마르제악이 “酒神(바쿠스)祭 같은 술잔치” (a bacchanalian feast and drinking bout)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논의에서 가장 큰 불일치를 불러일으키는 마르제악의 요소는 이 제도가 “죽은 자를 위한 제의”의 일부인 조상숭배와 명백한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혹자는 양자의 상관성을, 혹은 무관성을, 혹은 중간적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아모스 6:7(“시끄러운 소리”)은 酒宴으로 묘사하고, 예레미아 16:5(“喪家”)는 喪禮와 연결짓고 있으므로, 어떻게 이 제도를 가장 잘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본 연구는 마르제악과 죽은 자를 위한 제의와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최근까지의 학계의 업적과 이루지 못한 점들을 밝히고 각 의견들을 비평적으로 분석하면서, 아울러 드러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방법론적인 연구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2. 마르제악 제도의 자료와 주요 특징
2.1. 자료들
마르제악 제도는 특히 단어의 어원, 그리고 그 단어가 나오는 본문의 언어학적인 해석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되어 왔다. 상당한 수의 학자들이 이 제도에 대해 잘 고찰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모든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들에 대한 또 다른 포괄적인 검토를 하지 않겠다.
대다수의 일차자료에 대해, David Bryan이 그의 1973년 죤스 홉킨스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에서 상세히 다루었고, 그 이후로 새로이 에블라, 페니키아, 요단 동부 자료가 추가로 출판되었다.
1) 1980-1981년에 G. Pettinato에 의해 출판된 에블라의 행정문서에 “Ishu 월, marzeah의 날에” 여러 가지 의복을 세 여인에게 주었다든지, “마르제악의 감독인 두다사”가 3벌의 의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 mar-za-u9이라고 불리는 축제도 지켜졌다 (기원전 2500년경). 이 당시의 marzeah은 모종의 회합(association)임을 암시한다.
2) 기원전 4세기로 연대가 추정되는 청동대접에는 페니키아어로 “우리는 두 잔을 샤마쉬 신의 marzeah에 바칩니다”라고 새겨있다. 이 대접은 납작하고 용량이 크다.
3) 요단동부 문헌은 1991년 P. Bordeuil와 D. Pardee에 의해 출판되었는데, 내용은 다음 같다: “그래서 신들이(gods=elohim) 사라(Sarah)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마르제악, 맷돌과 가옥은 당신 것이요, 왜냐하면 잇샤(Isha)가 (권리)기권했기 때문이요. 그리고 밀카(Milka)가 보증인(lit. the third man)이요.” 여기서, marzeah은 양도가 가능한 동산 (動産)으로 취급된다. 여기서 마르제악은 일종의 환유법(metonym)으로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본문의 단편성 까닭에 marzeah에 대한 결론적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
2.2. 주요 특징
모든 증거들을 통해 나타나는 마르제악의 주요 특징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주로 술을 마시는 연회(a banquet)로서, 종종 떠들며 만취할 정도로 마신다. (KTU 1.114 [RS 24.258] 와 샤마쉬 神의 마르제앜에 봉헌된 페니키아의 큰 청동대접). 단언하기는 이르나, 喪禮와의 관련 속에서도 지켜진다.
2) 참여하는 회원들은 주로 지배계층, 즉, 군(軍)의 남성 엘리트 전쟁 용사들 (male elite military warriors)로 한정된다.
3) rb mrzh(rabbu marzihi)라고 불리는 이 모임의 관장 (presiding officer)이 있어, 이 모임을 관리하고 벌금을 징수하는 일들을 한다 (KTU 3.9 와 팔미라 텍스트).
4) 특별한 marzeah 집에서 모인다. 이 집은 모임만을 위하여 별도로 지었거나, 얻었거나, 때로, 회원의 집의 일부를 전적으로 회합을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KTU 3.9).
5) 후대의 증거는 marzeah이 정기적으로, 며칠씩 계속되었음을 보인다.
6) 우가릿 왕 Niqmepa는 "한 marzeah 사람들의 집"이 "그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가 됨을 공포한다 (RS 15.70, 15:88).
7) marzeah 마다 후원신(patron deity)이 있다 (샤트라나, 아낫, 이쉬타르, 엘, 샤마쉬, 두샤라, 벨, 등등).
8) 우가릿의 각 고을마다 하나의 marzeah회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RS 18.01에, “Ary 고을의 marzeah 사람들”과 “Siyannu 고을의 marzeah 사람들”이란 언급이 나온다.
9) marzeah 회원들은 회합의 유지를 위해서 포도원이나, 그 밖의 토지를 소유했다 (KTU 4.399, 4.642).
이상의 아홉 가지 특성들은 이 용어가 삼천여 년에 걸쳐 한 가지 이상의 제도로 시행되었음을 나타낸다. 위의 묘사는 이 제도가 큰 변화를 거치지 않고 실행되었음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Greenfield가 지적한 것처럼, “이 제도가 번성한 사회들의 사회, 종족, 정치구조에 의해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불변하는, 또 주변 문화나 가변하는 경제적 여건을 반영하지도 않는 정적인(static) 제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잘못일 것이다.” 우리도 이 언급을 염두에 두고, marzeah 제도가 어떤 유연성(flexibility)을 가졌을 것으로 상정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증거자료의 단편성과 희소성 (the fragmentary and scanty nature of the evidence)으로 인한 우리 지식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위 특성들이 marzeah의 전체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것들은 보다 완성된 모습의 marzeah을 위해 보충될 필요가 있다.
3. Marzeah과 죽은 자를 위한 제의와의 관계: 재검토
최근 학계의 지대한 관심은, 술잔치의 특성을 항상 지니는 이 제도가 죽은 자를 위한 제의와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이 주제에 관해 세 가지 주요견해가 제시되었다: “연관,” “무관,” 그리고,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연관.”
이 견해들을 검토하기 앞서, 두 가지 前理解가 요청된다.
1) 간략히 과거 학계의 연구태도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marzeah은 사회적이며 동시에 종교적 제도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1974년 Jonas Greenfield가 이 제도가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활동에 연루되는 것을 근거로 그 사회적 특성을 부각시킨 공로로 보편화되었다. 그 이전에는 marzeah의 실체를 오직 종교적 회합으로만 규정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우리의 재검토가 보여주려는 바와 같이, marzeah이 두 가지 영역에서 실행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학계를 종잡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학자들은 이 두 영역이 어떻게 조화롭게 통합될 수 있는 지를 해명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marzeah과 죽은 자를 위한 제의의 관계에 대한 이제까지의 논의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보다 더 긴요한 것은 “죽은 자를 위한 제의 (rites for the dead)”에 대한 학계의 용어사용의 혼선문제이다. 학계는 “cult of the dead," "death cult," "funerary cult or rite," "mortuary cult or rite," ‘ancestor worship or veneration," "the care, feeding and commemoration of the dead," "exorcism[축마술] and necromancy[초혼술] 등과 같은 용어들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장황한 논의는 피하고, 간략히 세 가지 구분을 시도해 본다. 첫째, “의례(rite)와 제의(cult)"의 구분이다. 전자는 일회적 사건을, 후자는 반복적 예전적 행위를 지칭한다. 둘째, "조상제의(ancestor cult)”와 “死者제의(cult of the dead)"의 구분이다. 전자는 동일가계에 속한 조상을, 후자는 혈족과 관계없이 죽은 자를 섬기는 제의행위를 말한다. 셋째, ”예배, 숭배 (worship) 혹은 공경 (veneration)"과 “초혼술 (necromancy)”의 구분이다. 예배/숭배와 공경은 죽은 자의 능력의 크기에 따라 구분된다: 전자는 죽은 자가 신들과 동일한 능력을 행사한다고 믿을 때, 후자는 죽은 자가 신들보다 열등한 위치에서 산 자를 위해 중재적 역할을 한다고 믿는 경우를 의미한다. 한편, necromancy는 “죽은 자의 혼령을 마술로 불러내는 기술 혹은 행위”인데, 이 때 “죽은 자”는 동일계보의 조상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분류는 중복과 혼동을 내포하기에, Brian Schmidt가 간편하게 용어정리를 시도한다. 그는 (1) 상례예식 (장례와 애곡), (2) 죽은 자/조상제의 (cult of the dead/ancestor), (3) 死者제의(mortuary cult (조상이 아닌 死者를 돌보고, 먹이고, 기념하는 일), (4)초혼술이나 축마술 같은 마술적인 제사예식 (magical mortuary rites)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Schmidt의 분류는 신중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용어정의와 그 실제적 사용에 몇 가지 문제들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은 자의 능력의 크기를-- 신과 독립적이건, 교통을 통해서 활동하건--가늠할 수 있겠는가? 또, 고대사회에서 계보를 확증해주는 족보는 의도적(on purpose)으로 전수되며, 때로는 유입 혹은 위조되기도(coopted or counterfeited)하는데 친족과 비친족의 정밀한 구분이 가능한가? 또 이러한 정의를 통한 제도의 구분이 우리의 분석에 어느 정도나 유용하겠는가? 예를 들면, 고대의 영웅들은 지파들의 공동조상으로 포함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죽은 자를 위한 제의”는 친족중심의 조상제의와 친족이 아닌 일반 死者祭儀, 두 영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조상제의는 상례 (funerary rite)와 제례(mortuary cult)를, 일반 死者祭儀에는 영웅숭배와 초혼술을 포함하는 범주들을 기본적인 테두리로 삼고자 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보편적이지만 특수한 인간경험에 대한 경험적 인식과 이론적 논의의 한계를 시인해야 한다. 또 여러 가지 문화적 배경 속에서 죽은 자와 유족간의 관계는 복합적인 정황을 전제하므로 이 이상의 어떠한 정밀한 정의도 내리기가 어렵다. 이 분야에 관한 한, 학자들은 용어사용의 부정확성을 종종 깨닫지 못하고 있음도 아울러 지적해 둔다.
3.1. “연관”: “초상집 잔치(A Funeral Banquet)"
극대주의(maximalist)라 불리는 이 입장은 Marvin Pope에 의해 주창되었고, 우가릿, 이스라엘, 그리고 모든 지역에서 마르제악은 조상제의를 실행하는 현장(location) 으로 본다. 직접적 문헌증거는 KTU 1.114 (=RS 24.258), KTU 1.21, 그리고 렘 16:5-9 등이고, 그 밖은 간접적이다.
3.1.1. KTU 1.114
우가릿 범신전의 최고신인 엘은 잔치로서 marzeah을 배설하며 신들을 자기 marzeah에 초대하여, 만취하도록 술을 마신다. 그 결과, 엘 신은 마치 죽은 자처럼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Pope는 이 본문에서 “marzeah의 주특징이 술이나 취하게 만드는 음료를 마시는 것이며,”“만취한 뒤에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퍼마시는 것이 예전적 음주의 (목적이 아니라면) 흔한 결말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더욱이, 그는 “이것이 바알(신의 죽음)을 위한 밤샘(a wake)"이며, 엘 신은 팔미라판 marzeah의 rb mrzh 혹은 향연의 주최자 (symposiarch)와 상응하는 marzeah의 주인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본문의 몇몇 단어가 상례와의 연관성을 지닌다는 점을 타문화와의 비교하는 방식의 주석을 바탕으로, marzeah을 "죽은 자를 위한 잔치를 목적으로 모이는 조합(sodality devoted to feasts for the dead)"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 논의는 Lewis와 Schmidt에 의해 설득력있게 논박되었다. KTU 1.114는 marzeah이란 단어 외에 喪禮와 결부시킬 고리가 극히 부족한 것이 지적된다. 반대로, 상례에 대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전혀 무관하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시기상조이다.
3.1.2. KTU 1.20-22 (르파임 텍스트)
여러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본문의 이야기상의 맥락이나 전후관계에 논의의 소지가 남아 있지만, 이 본문은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지칭하는 rpum이 marzeah 잔치에 반복적으로 초대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문제는 초대를 하는 호스트의 정체와 2회 [m]rz‘y로 표현된 단어와 marzeah의 일치성, 그리고 rpum의 기능이다. 1) 가장 큰 관심은 marzeah과 [m]rz‘y의 일치문제다. 시카고 동양연구소의 우가릿 권위자 Dennis Pardee는 /ḥ/과 /‘/이 동일단어 속에서 상호교체 가능한 글씨가 아니며, 일치설은 “순수한 사변”에 불과하다고 맹공한다. 그러나, 우가릿 음운론과 정사법에 대한 현 지식은 파르디의 논점의 확실성을 배제한다. 이에 관해, Cyrus Gordon은 우가릿 음운법에 무성의 /ḫ/이 /r/를 포함한 유성의 /ǵ/과 교체되는 예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우가릿 후두음(guttural)의 철자법칙에 모호함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우가릿의 음운론이나 필사법은 이 두 단어의 일치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본문의 맥락에서 단어의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두 단어는 상응하는 의미를 지닌다. 2) 잔치의 호스트에 관한 한, 엘 신 혹은 다니엘 (잃어버린 아들 아캇을 찾아나서는 왕)이라는 설명이 가능한데, 필자는 호스트가 marzeah의 후원신인 엘 신으로 본다. 그러나, 증거의 침묵 때문에 궁극적인 해답을 단안하기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3) rpum의 기능은 儀典텍스트 KTU 1.161(=RS 34.126)에서 추측이 가능하다. KTU 1.161은 우가릿 왕 니크맛두 III의 임종시, 후계자 암무라피 III가 이용한 왕실 장례문이며, 여기서 rpum을 초혼하여 먹고 마시게 한다. 이렇게 볼 때, KTU 1.20-22은 marzeah과 죽은 자를 위한 제의와의 연관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헌이다.
3.1.3. 기타
가장 명백하게 “연관성”을 입증해주는 렘 16:5 (“喪家[house of marzeah]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외에, 간접적으로 연관성이 유도되는 본문들이 있다.
1) 엘레판틴 텍스트: 어떤 Itto란 사람이 Ashai에게 marzeah을 위해 돈을 요구한다. 이런 행위는 상조회의 장(Itto)이 죽은 회원을 추모하는 잔치에 Ashai의 몫을 요청한 것으로 해석된다.
2) 랍비 텍스트: 민수기 25:2 ([싯딤에서 모압]여인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sacrifice) 할 때에 [이스라엘]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매”)에 대해 Targum Pseudo-Jonathan은 “그 신들”을 “그들의 우상들”로 읽고 그 장소가 “그들의 marzeaḥin" 이라고 부언하며, 또, Sifre Numbers 131는 암몬여인들을 추가하며, 역시 mrzḥn을 삽입하며 그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자기 신들의 제사”에 초대했다고 읽는다. 한편, 동일 귀절에 대해 시 106:28는 “저희가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로 이해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랍비문헌은 “신들”=“죽은 자”라는 등식을 갖고, marzeah이란 장소에서 제사를 드린 것으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이 등식에서 “죽은 자”가 생명 없는 우상을 가르키는지, 혹은 죽은 조상의 영혼을 의미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본인은 후자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Lewis는 이 문제의 해법을 위해 랍비 텍스트를 이용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3) Nabtean texts: Gustav Dalman이 Petra에서 발굴한 한 텍스트는 “Ziqqa의 아들, Obaidu와 그의 동료들, 神 Obodas의 marzeah"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오보다스가 marzeah의 후원신인가 아니면 죽은 조상인지 하는 것이다. 나바티아 역사에 해박한 Hammond는 Obodas 왕이 죽은 뒤 신격화된 것으로 설명한다. 이 본문 역시 marzeah과 신격화된 죽은 왕의 관계가 분명하나, 그 정황에 대한 그 이상의 논의는 현재로는 불가능하다.
이 견해는 marzeah이 항상 죽은 조합원의 장례를 위해서만 개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거 자료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비평을 면키 어렵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KTU 1.20-22과 렘 16:5 외에는 그 연관성을 고집하기가 어렵다. 기타 자료들은 부차적 증거만 제공한다. 또,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그 전제를 정당히 입증하기보다는 본문들로부터 해석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보다 실제적으로, 위에서 묘사한 특징 중, 고액 벌금이나, 동산의 소유권 문제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죽은 자를 위해 잔치를 여는 조합”의 활동과 연관될 수 있는 지를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marzeah를 오직 제의단체로만 정의하고 사자제의와의 관련하에서만 모든 자료를 설명하려고 하는 한, 이 입장은 여전히 분석력이 부족하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 견해에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왜 술잔치가 조상숭배로서의 marzeah에 필요한 일부였을까? 어떻게 제의적 회합이 사회의 정치경제사회의 활동과 연결되는가? 하는 것들이다.
3.2. “무관”: “술잔치(A Drinking Banquet)”
연관설과 반대로 이 견해는 marzeah이 喪葬禮와 전혀 무관하며 엘리트 지배계층의 술잔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극소주의 견해(a minimalist view)라고 부른다.
1) D. Bryan은 그의 논문에서 대부분의 증거본문을 소상히 분석한 뒤, “렘 16:5과 그 관련본문을 제외하고는 상가의 애곡이나, 죽은 자를 위한 제의를 지칭할만한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결론짓고, marzeah은 특별한 연회장소(place)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2) C. H. L'Heureux는 KTU 1.20-22의 rpum을 죽은 자의 영들(shades)이 아니라, 신들(gods)로 이해한다. 그 근거로서 ilnym, ilm, 그리고 mtm이 rpum과 평행하게 묘사되는 Šapšu 텍스트(KTU 1.6.44b-49)에서 mtm을 “인간영웅”이거나 전접어(enclitic) m이 붙은 신명 Mot, 즉, Motima로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의 mtm 읽기는 근거가 부족하여 수긍하기 어렵다. 따라서 rpum을 “죽은 자들”로 보는 통상적인 이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marzeah가 상례와 무관하다는 정황을 만들어 보려는 그의 해석적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3) J. L. McLaughlin은 marzeah의 특성을 규명할 때, 우가릿 본문에만 국한할 일이지, 후대의 증거를 이용하여 설명해서는 안된다고 못박는다. 그는 KTU 1.114가 marzeah을 초상가의 제의식사(ritual meal)로 볼 근거가 없고, KTU 1.20-22도 르파임의 상례관련은 오직 추측일 뿐이며, KTU 1.20-22에서 marzeah은 어떤 활동(activity)보다는 집, 궁전과 같은 장소(place)를 말할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그에게, marzeah은 단지 한 사회적 회합이다.
4) Pardee도 McLaughlin과 같은 견해인데 보다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marzeah을 메소포타미아의 kispu 그리고 우가릿의 喪祭儀와 상관관계 속에 논한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a. mrzh(marzihu)의 일차적 활동은 술 먹는 일이고, 렘 16:5는 이차적으로 간혹 있을 수 있다.
b. 특정 신과 연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제사가 언급되지 않는 점으로 볼 때, marzeah은 非제의적이다(non-cultic).
c. 렘 16:5과 바알브올 사건을 다루는 랍비 텍스트에서 보여주는 상례와의 관련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우연이다 (not in essense but merely per accidens).
d. KTU 1.20-22의 [m]rz‘y (my mrzh‘) = marzihu는 순전히 사변일 뿐이다.
e. marzihu는 개인의 집을 이용할 수 있으므로, 성소와의 연결고리가 없다.
f. 우가릿의 상제례 존재를 상정하는 KTU 1.17 (“이상적인 아들의 의무")은 marzihu는 물론이고 왕실 kispu와 상관없는 일반 평민의 제의관례일 뿐이다.
g. 종종 마르제악 집과 연관되어 설명되는 rytons이라 불리는 우가릿의 건물구조는 발굴 결과, 오직 4면 벽 중에서 3면에만 벽에만 앉을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는데 이는 제의시설보다는 오직, 술잔치에나 알맞는 시설이다.
그는 marzihu의 제의적 무관성을 밝히고자 한다. 위 논지는 몇 가지로 논박해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우가릿 상제례의 존재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상례와 marzeah 관계도 전면부정하지 않는다 (contra a,c). 암 6:1-7 (marzeah 언급)에는 우리 안에 기른 우양의 도살을 전제한 행위가 언급되는데 이는 희생예식을 암시한다 (contra b). 별도의 성소가 아니더라도 개인의 집 일부가 성소로 쓰일 수 있다 (사사기 17장의 미가의 집: contra e). 현재 우리가 읽는 우가릿 본문은 모두 우가릿 왕실에서 나온 것이므로, KTU 1.17의 내용을 일반인의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다(contra f).
Pardee는 시종 “장차 또 다른 본문의 등장을 기다려야 한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연관)가설을 입증하거나, 반박할 방도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 주제 연구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그가 겨냥한 것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본문증거의 단 한 조각도 (왕실 장례문 KTU 1.161을 제외하고) 우가릿의 marzihu와 상례의 연관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KTU 1.161도 그가 보기에는 간접적일 뿐이다. 그러나, 우가릿 자료의 단편성은 충분한 맥락도 제공해 주지 않고 파손된 부분을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본문으로부터 특정한 해석을 이끌어 내기가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Pardee의 본문위주의 해석방법은 필수불가결한 과정이긴 하나, 그 내면에는 이러한 근본적 한계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Pardee의 연구는 은연중에 우리로 하여금 다른 방법론적 대응안을 모색하도록 유도한다.
5) Schmidt는 marzeah을 “무절제하고 방종하게 퍼마시는 음주(wanton drinking)”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이 상제례와는 무관하고, 일차적으로 회원의 경제적, 사회적 관심사를 위해 운영된 것으로 믿는다. 또 O. Loretz는 양식비평을 이용하여 시 23:5에서 상을 베푸는 것은 왕실에서 거나하게 술을 먹는 축제 때에 벌여놓은 “상”을 암시하고, 시 133의 삶의 자리는 관청이나, marzeah 집에서 불렀을 “음주가(drinking song)”였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6) 마지막으로, 무관설의 가장 큰 난제인 렘 16:5-9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살펴보자. 연관설은 이 구절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반면, 무관설은 지나치듯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문제는 이 귀절 안에 언급된 제도가 술잔치 하나인가, 아니면 술잔치와 상장례 제도 둘인가 하는 것이다. 즉, 렘 16:5의 “초상집(house of the marzeah)이 암시하듯, 16:5-9이 모두 “죽은 자를 위해 잔치를 여는 일이 주목적인 조합”(a sodality devoted to feasts for the dead)을 설명하는가? 아니면 이 “초상집”이 16:8의 “술먹는 집(house of drinking)”과 같은 동일한 제도, 즉, 그저 단순한 술잔치 집을 언급하는가? 하는 문제가 걸려있다.
5)야웨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초상집(bēt marzĕah=house of marzeah)에 들어가거나 가서 통곡하거나 애도를 표하지 말라 이는 내가 이 백성들에게서 평안을 제하였고, 야웨의 말씀이다, 인자와 긍휼도 거두어갔기 때문이다. 6) 큰 자나 작은 자나 이 땅에서 죽을 것이요; 그들은 매장되지 못할 것이요, 그들을 위해 애곡하는 자도 없을 것이요,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 할 자도 없을 것이다. 7) 아무도 죽은 자들 까닭에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려고 떡을 떼는 자도 없을 것이요, 아무도 아버지나 어머니들이 죽었다고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의 잔을 내어놓을 자도 없을 것이다. 8) 너희는 잔치집(bēt mištē=house of feasting)에 들어가 그들과 앉아 먹고 마시지 말라. 9)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야웨가 이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이 곳에서, 네가 사는 날 동안에, 네 보는 앞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끊어지게 할 것이다.
5절의 bêt marzeah와 8절의 bêt mišteh의 관계를 교차구조(chiastic structure)로 보고 그 안에서 대략적인 동의어로 보고 하나의 제도, 즉, 상례만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Schmidt는 이런 견해에는 행복과 즐거움의 소리를 언급하는 소문단의 결론부인 9절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근거로 이상의 견해를 반대한다. Schmidt에 의하면, 5절과 집과 8절의 집이 다르다. 16:1-9라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이 단락은 각기 ki로 시작하는 동기절(motivational clause)을 동반하는 3개의 평행절을 포함한 이중(two-fold)구조로 되어있다. 그 안에서, 16:5-9는 喪禮(vv 5-7)와 결혼(vv 8-9)이라는 두 상이한 제도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9절은 2절(결혼금지명령)과 함께 봉합구조(inclusio)를 이루기 때문에 5절 이하의 상례보다는 결혼 금지령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더욱이 그에 의하면, bt mrzh이 상례와 연관을 맺게 된 것은 헬라시대 이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고 주장함으로써 원래 bt mrzh와 술잔치의 상관성을 부인한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H.-J. Fabry가 분석한 16:1-9에 대한 문서형성역사 (compositional history)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작용하는 것을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주장은 아주 임의적이며 그래서 신빙성이 없어서 Schmidt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래에서 이 문서형성사 이해의 신빙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문학구조 성장사에 대한 틸의 견해를 수용한 파브리는 원본문을 1, 5a, 8절로만 국한하고, 2, 6, 7절은 이차적인 첨가, 3, 4, 9절은 후기 신명기적 첨가로 분류한다. 이렇게 볼 때, bt marzeah은 5bc-7절의 죽은 자를 위한 제의와 본래 무관하였으며 후기 편집자들에 의해 삽입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반대 상황을 서술하려고 bt mrzh와 bt mišteh 사이에 넣은, 죽은 자를 위한 제의들이 후대의 오해에 위해 bt mrzh과 연관되었고, 역시 본문 전수과정에서 Peshitta는 “초상집(house of mourning)”으로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주장이지만, 원 문서층(1, 5a, 8)과 관련하여 즉시 의문이 제기된다. 최초 저자에게 두 동의적 표현인 bt mrzh와 bt mišteh가 왜 필요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둘이 동의어라면 적어도 둘 중의 하나는 보충적 기능을 가질 것이며 처음부터 연이어 나란히 언급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오히려, 처음부터 두 집이(슬픈 초상집과 즐거운 술집) 서로 상반된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서 언급되었다고 보는 것이 전체 그림에 더욱 개연성을 부여할 것이다. 그래서, 정상생활의 전체, 즉, 슬픔과 기쁨, 상례와 결혼, 그리고 죽음과 생명을 표현하는 짝 (pair or merism) 표현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더구나 Tiel과 Fabry의 주장도 비판받고 있는 만큼, 이 단락에서의 신명기적 편집을 인정하더라도 그 범위는 여전히 논란이 된다. 이상으로 보아, 16:5-7에서 bt mrzh과 상례적 연관성은 부인될 수 없을 것 같다.
이 견해는 연관설이 제시하는 자료의 빈곤함을 공격함으로써 극대주의를 부정한다. 비록 결정적인 논박은 아니지만, mrz'과 르파임의 기능에 대한 그들의 의구심, 렘 16:9의 면밀한 연구에 대해 일면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이 견해가 성공적으로 보여 준 것은 marzeah이 음주가 주특징인 사회적 제도임을 다시 검증한 것이며, 반면에 실패한 것은 어떻게 이 제도가 죽은 자를 위한 제의와 완벽하게 무관한 것인지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본문에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거나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상제례나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이 없다는 증거라고 결론짓고, 더 이상의 탐구노력을 아예 포기해 버리는 태도이다. 더 많은 본문의 증거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되풀이 말하는 것은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정체상태임(a stalemate)을 보여준다.
극소주의 입장은 방법론적으로 너무 협소하며(narrow), 미세적이며(atomistic), 본문위주(text-centered)이다. 이런 본문중심 접근법이 근본적이기는 하나, 한 제도가 전체 사회 속에서 무슨 함축성을 지니는지를 밝히기에는 역부족이다. 단편적인 토판의 증거란 기껏해야 부분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견해는 방법론을 확대하여, 구성요인들이 상호 작용하는 전체 사회체계의 역학 속(dynamics of an entire system whose components are interactive)에서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3.3.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연관 (Often But Not Always Connection)
앞서의 두 견해와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이 견해는 많지 않은 고고학적 및 본문 증거를 근거로 marzeah이 “항상” 상례나 제례와 연관을 가지지는 “않지만, 종종” 연관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앞의 두 입장과 달리 중도적 극대주의(moderate maximalist) 로 불린다. 이 견해를 대표하는 T. Lewis는 우가릿의 법률문서에서 말하는 marzeah과 (신화론적) KTU 1.21, 1.114에서 말하는 marzeah이 다름을 고찰하고 “이 두 종류의 텍스트를 marzeah의 喪禮적 측면과 함께 묶을 실마리가 있는가?”하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marzeah이 상가집 잔치와는 가끔씩만 관련이 있는 술잔치로 알려진 모임 (즉, 음주클럽, a drinking club)이었고, mrzh이 상례와 별개라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이 항상 상가집 잔치와 연루되었다는 논지는 아주 약하다”고 결론짓는다.
Lewis는 모든 증거본문을 편견 없이 정당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견해 역시 무엇이 死者제의이며, 무엇이 조상숭배인가라는 정의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논의의 범위가 여전히 협소하며 특정적이다. 루이스는 만일 marzeah이 상례를 치루는 조직(funerary organization)이라면, 왜 그 조직을 언급하는 다른 본문들에서 의식들을(rituals)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나타나는지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가 한 제도, 즉, marzeah 안에 다양한 측면들(포도원 이전, 벌금, 집 소유권 이전 등)이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추구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을 갖는다. 사실, 제도란 같은 사회 속에서 상이한 측면들--제의, 정치, 경제, 법률적 활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증거본문 중에 특정하게 연관성을 입증해주는 본문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르파임 텍스트(KTU 1.21-22)와 렘 16:5-7이다. 그 외 왕실 장례문(KTU 1.161=RS 34.126)은 르파임의 제의관련성을 위한 자료이고, KTU 1.114 (엘 신의 marzeah)는 조직의 사회적 측면(숙취와 그 해소)을, KTU 3.9(marzeah 집 계약)는 조직의 계약활동을, KTU 4.642는 조직의 소유재산과 재산권의 이전을, 암 6:4-7은 marzeah 회합의 양상을 다른 각도에서 각각 조명해 준다. 이 세 번 째 견해가 그래도 가장 개연성이 있긴 하나, 서로 다른 저 양상들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는다.
4. 마치는 말
이상의 논의로부터, marzeah 증거본문들은 marzeah이 항상 죽은 자를 위한 제의의 일부로서 실행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pace maximalist). 대신. 정기적으로 열리는 술잔치이며, 그 모임의 목적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참여자의 권력, 부, 그리고 위신을 위해서였을 것임이 받아들여져야 할 것 같다(minimalist). 동시에, 드물지만, 명백하게 죽은 자를 위한 제의와 연관되어 기능하였다(moderate maximalist)는 점이 주목된다.
위의 세 견해는 각각 강점과 약점을 보인다. 극대주의적 입장은 직감적으로 연관성을 잘 지적했지만, 결론을 전제한 채 왜 제의적 제도가 소유권이나 집 계약 등의 사회경제적 활동과 연루된 잔치였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극소주의적 입장은 제한된 자료로부터 건전한 결론을 도출하지만, 논의의 범위를 본문증거로만 한정함으로써 폭넓은 사회적 관계영역 속에서 문제를 보지 못한다. 이 견해에 제기할 수 있는 반대 질문은, 순수 술잔치인 marzeah에 왜 죽은 왕의 영들을 초혼하는가? 또, marzeah과 상제례의 상관관계가 우연일 뿐이라는 설명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은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끝으로 중도적 극대주의 입장은 양자(술잔치와 상제례)의 상관성을 가장 적절히 긍정한다. 이 견해는 marzeah의 두 특성을 조화시키려고 부심하는 것이 눈에 띠지만, 앞서의 두 입장들처럼 여전히 무엇이 死者祭儀이고 아니라는 식의 용어정의에 따른 논의를 추구한다. 이 입장에서는 왜, 술잔치가 의례히 이어지는 대관식이나 결혼식 같은 즐거운 행사를 기록하는 본문에 이 marzeah이 언급되고 있지 않은 지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이 문제에 관한 한, 학계는 엄청난 연구 분량에도 불구하고 미결상태이며 또 비슷한 연구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 학계의 정체상태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 정체상태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에 기인한다. 첫째로, 이 제도의 두 양상--제의적이며 사회적(cultic and social aspects)--을 서로 다른 영역의 두 실체(two separate entities)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둘째로, 죽은 자를 위한 제의에 대해 협소한 정의를 내렸기 때문이다. 셋째로, 증거본문은 단편적이어서 특정한 해석을 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증거 본문의 자료들을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종교사적으로만 연구하는 방법론적 협소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체상태의 해소를 위해서는 방법론적 변화가 요청된다. 이에 사회과학적 전망은 가장 적절한 대응책이다. 이 전망으로 보면 marzeah의 두 양상인 제의영역과 사회적 영역은 불가 분리하게 얽혀 있으며, 본문이 말하지 않는 정보에 대해 보다 개연성 있는 사회적 정황을 설정하여 그 안에서 본문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에 위의 정체요인들을 훨씬 용이하게 해소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marzeah 회합의 제반 양상들은 한 사회의 총체적 역학 속에서 체계적으로(in a systemic way) 통합 설명할 때, 하나의 완성된 퍼즐 안에서 조화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메소포타미아의 kispu, 서부 아프리카의 상제례, 현대 팔레스틴 시골의 사자제의, 그리고 한국의 상제례를 마르제악 증거본문과의 비교를 통해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死者祭儀의 모델을 도출하고 그 모델을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경제 역학 속에서 이해한 결과, 본인은 마르제악 제도를 “武將들의 結社(military confraternity)”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 제도 안에서 회원들인 무장들과 지배계층은 함께 특정 수호신과 죽은 영웅을 숭배하며 회원의 상제례를 중심으로 모여 벌리는 술잔치를 통해 구성원의 결속을 다지고 권력과 부, 신분유지 및 그 승계를 승인해주며 권력을 배후에서 조정하였다. 이 제도는 조직의 운영 및 유지를 위해 회원의 집이나 포도원을 공동 소유하고 모임을 경영했는데 가족관계(실제 혹은 가상)를 유지하며 회장 격인 대표가 이 일을 관장하였다. 구약성서의 8세기-7세기의 예언자들은 이 제도와 구성원들--지도자 계층--이 사회와 국가 일반에 치명적으로 끼친 경제적(암 6:4-7), 정치적(사 28와 호 7), 종교적(겔 8:7-13) 폐단을 통렬히 고발하고 있음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 본 marzeah 연구에 대한 최근 학계의 동향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성 구약학은 대개, 용어정의로부터 시작하거나, 교실 안에서 본문을 붙잡고 언어학적인 씨름을 하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본문에 없는 것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가 시사하는 바처럼, 고대의 본문이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고, 문자로 표현하지 않은 많은 문화적, 사회적 정보를 전제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적절한 고려가 없는 본문해석은 언제나 불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적절한 방법론을 이용하여, 저변사회와 문화의 총체적 역학 속에서 고대의 제도를 이해할 때, 그 제도를 언급한 증거본문들은 모호하게 들릴 지 모를 수많은 저 예언서 본문들과 함께 보다 나은 그리고 보다 충분히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천여 년 동안, 서구의 신학적 방법론은 충분히 발전하였지만, 때로, marzeah 문제처럼, 방법론적 한계에 부딪혀 정체상태에 있는 경우도 있다. 본인은 이런 부분들이 바로 한국인으로서의 신학함이 절실히 필요한 부분이라고 믿는다. 한국인 고유의 문화와 사고의 틀은(이는 벗어버릴 수 없는 우리의 전이해이다) 서구신학의 정체상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상당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마르제악 제도에 관한 한, 한국의 신학자가 한국인의 조상제사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이용하여 정체된 서구적 해석의 매듭을 풀 수 있다면, 이는 관련 예언서 본문과 이스라엘의 감추인 종교사회적 제도에 대한 지난날의 불확실하고 불충분한 해석과 이해에 하나의 교두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신학함은 한국인의 신학이 세계 교회와 서구 신학에 지고 있는 사랑의 빚을 갚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