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여자
송성원
*
먼 곳에서 바람 이는 소리 들려왔다. 바람은 허공을 찌르며 북소리처럼 가까워지고 있었다. 약국 앞에 이른 나는 핸들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길은 2차선으로 좁아지며 신호등이 나타난다. 녹색 신호가 짧은 곳이라 빨간 불에 걸리곤 했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바람은 어느새 다가와 차창을 흔들었고, 나는 건너편 담벼락에 붙어 펄럭이는 현수막의 검은 글씨를 바라보았다.
<헤어진 가족을 찾아 줍니다.>
순간, 내 기억의 파편들이 일제히 물보라를 일으켰다. 차창으로 몰아치던 바람이 길바닥의 먼지를 부풀리며 사라진다. 흐려진 시야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아려왔다. 찌푸린 눈을 경찰서 안으로 돌리자, 푸르른 정원수들이 맑은 햇살을 받아내며 서 있었다. 정문을 지키는 보초와 시선을 마주쳤을 때, 나는 계면쩍은 듯 고개를 숙이다가, 길가에 붙은 민원실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구나. 나는 아버지를 잊고 있었다.
시간의 어둠에 잠겨버린, 그러나 지워질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이, 바람이 멈추어버린 정원의 빛살을 받아내며 다가왔다. 저무는 여름날, 나뭇잎 사이로 내리는 기억의 성근 빛, 그 빛 속으로 번져오는 하얀 그리움이 꿈엔 듯 눈부시다.
나는 좌회전 신호를 받고 경찰서로 들어갔다. 뜰의 높은 나무에서 들려오는 매미의 울음이 사무치게 흘러들었다. 매미의 울음을 들을 때면, 나는 밤마다 사내의 몸을 탐하던 어머니를 떠올리곤 했다. 어머니의 본능 속엔 아버지를 향한 내 그리움과 원망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까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민원실 가까운 곳에 차를 대고, 뒤편 쪽문을 향해 걸었다. 민원실 뒤에서 들어온 나는 앞을 향해 기역 자로 꺾인창구로 돌아섰다. 앞쪽 공간으로 몸을 돌리자, 직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오른편 첫 번째에 앉은 여직원한테 다가갔고, 현수막 내용을 말했다.
“찾는 이와 어떤 관계죠.”
“아버지입니다. 내 아버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연세는?”
나는 내 기억을 더듬어 어머니의 나이에 셋을 보탰다. 갸름한 얼굴의 핏기 없는 여자는 메모지에다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사람을 찾는데 필요한 잡다한 정보들까지 빠짐없이 적었다. 그리고는 눈동자에 연민의 정을 담은 듯, 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우리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주셔야 해요.”
다감한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내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을 향해 걸었고, 여전히 그치지 않은 매미의 애잔한 울음을 들어야 했다.
2주가량이 지나, 나는 그 뜰에서 들려오던 매미의 울음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다정히 들려오던 그녀의 전화 목소리를 떠올리며, 녹색으로 치장한 경찰서 민원실에 들어갔다. 처음 들어갔을 때보다 더욱 가슴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안은 여전히 한가했고, 매미는 끊임없이 울어댔다. 전과 달리 제복의 칼라가 말끔해진 창구의 그녀는 나비 모양의 노란 머리핀을 입에 문 채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아 틀어 올리고 있었다.
"저어, 전화를 받고 온……."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박에 나를 알아본 그녀는 머리에서 손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짓을 받고 고개를 든 사람은 뒤에 앉은 경찰관이었다. 중년에 접어든 남자는 푸근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구 쪽으로 옮겨 앉았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버님은 승적을 가지신 분입니다.“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의 말이 끝날 무렵 갸름한 얼굴의 여직원이 에어컨을 꺼버렸다.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열어젖힌 창문 사이로 더운 바람이 들어왔고, 바람에 섞인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아버지가 승려라 했다. 그 사이 아버지의 인생에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나는 햇살이 넘어가는 검고 희미한 벽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상봉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 전해주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정갈한 필체로 적어 준 아버지의 연락처를 호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소나기가 쏟아질 듯 하늘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몸에 남아 있을 아버지의 주먹 자국처럼이나.
그날, 교실 창 너머로 외삼촌이 서 있었다. 문을 밀치고 들어 온 외삼촌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던 담임 선생에게 나지막이 무슨 말인가를 던졌다. 곧 담임 선생이 나를 쳐다보았고, 이분이 외삼촌이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녀린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으며 이어 주섬주섬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가방을 챙겨야 했다. 수업 시간에 외삼촌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에게 넘겨졌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나를 데리고 외가로 갔다. 그리고 더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눈을 뜨니 시계는 8시를 넘기고 있었다. 방문을 열었다. 아침 손님을 치른 흔적으로 식당 주방에는 빈 그릇들이 수북이 쌓였다. 어머니가 고무장갑을 끼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엔 주방장이 있고 찬모도 있건만, 어머니는 늘 손수 그 많은 빈 그릇들을 씻었다. 문밖으로 드러난 흐릿한 하늘이 종일 걷히지 않을 것 같았다. 늘어난 손님에 대비해 아주머니 한 분을 새로 들였는데, 보이지 않는다. 결근이 잦던 늘씬한 몸매의 젊은 여자는 또 출근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결근하는 날이면 어머니는 주방장 아주머니와 마주 앉아 그녀의 흉을 보았다.
“예쁜 게 탈이야. 어젯밤엔 또 누구랑 잤을꼬.”
방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사람이 제 허물은 보지 못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외삼촌의 말을 빌리자면, 어머니의 육체는 아직 단내가 풀풀 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라고, 외삼촌은 늘 혀를 차곤 했다. 외삼촌의 말처럼 타인의 눈에 비치는 어머니의 외모는 내게도 여러 문제를남겼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백수가 이렇게 일찍 어딜 가니?”
백수라지만 어머니는 고무장갑을 낀 채로, 말끔한 옷으로 단장한 나를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비밀이에요.”
나는 새 구두를 찾아 신은 뒤 미소를 띠었다.
‘그래, 저 아름다운 육체는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래도 밥은 묵고 가거라.”
나는 약속 시간을 떠올렸다. 까칠한 입을 쓰다듬으며 어머니의 말을 팽개치고 밖으로나왔다. 택시를 타고 서둘러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을 적엔 아홉 시가 넘어있었다. 잊었다 싶은 아버지를 만난다는 거.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할까. 도시의 변두리를 빠져나올 때까지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남편에 대한 미련을 되살리고 받아들이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이즈음에서 어머니도 남편에 대한 미운 감정들은 삭여버렸을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부산행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지난 세월 어머니가 아버지를받아들이던 자발적 행위에 대해 돌아보았다. 언젠가 용하다는 점 집에 갔다 온 어머니는 밤을 꼬박 새우며 굿을 해댔다. 아버지가 죽었고, 구천을 헤매는 영혼을 좋은 데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 그 뒤로도 정성스레 재상을 올리던 어머니는 점쟁이가 구천을 떠돈다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
다방에 들어선 나는, 은은히 흐르는 올드팝송의 선율에 감겨들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약속 시간이 약간 지나있었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제저녁, 전화기에서 들려오던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느라 나는 입구에서 주춤거렸다. 목소리만 아는 여자라 감으로 찾아내야 했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 순간, 손짓하는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어머니 또래는 되었음 직한 그녀의 뒤편 창 너머 바다에는, 솔숲을 이룬 돌섬이 길게 뻗쳐 누워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앉은 자리에 다가가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여자의 목으로 하얀 블라우스의 깃이 비어져 나왔다. 목을 감싼 블라우스의 카라는 도톰한 입술의 연보라 색 립스틱과 잘 어울렸다. 난하지 않은 치장으로, 내 아버지를 후릴 만큼 세련된 여인이었다.
“훤칠하니 스님을 빼닮았어요.”
여자의 눈가에 온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경찰관이 적어 준 전화번호는 아버지와 직통할 수 있는 연락처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여인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그러나 그 경찰관은 연락이 가능한, 정확히는 아버지가 믿을 수 있는, 독실한 불교 신자의 전화번호라고 말했다.
“이렇게 건장하게 잘 자라준 아들을….”
“.....”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줄곧 빛났다.
“스님이 부러워요”
옅은 미소가 번진 표정으로 바라보는 여자의 두 뺨에 보조개가 파이고, 그녀의 보조개는 적당히 도드라진 입술과 어울리며 더욱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나는 여인의 분위기에 빨려들기보다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내 본능은 다시금 그리움으로 피어났다.
“스님을 찻집으로 불러들이기보다…….”
그래서 그녀의 집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믿으며, 우리는 찻집을 빠져나왔다.
나는 앞서 걷는 중년 여자의 뒤를 바라보다 아들이 있는, 그 아들이 찾아온 수도승의 과거, 그 비밀스러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여자라면, 과연 성직자와 신도라는 그런 평범한 사이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한편으로 나는 아버지가 타락한 승려이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파계를 할 수 있는 데다, 어머니와도 결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갯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도시의 오염된 바다에서 악취가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 냄새는 아버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고, 어머니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정욕의 비린내 같기도 했다. 그때, 어머니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냄새는 내게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여름이었다. 방학을 맞은 나는 어머니를 따라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누르께한 창호지에 달빛이 비쳐든 그 밤에, 나는 여자의 가쁜 숨소리를 들었다. 열한 살 아들이 어른들이 내질러 댄 교성에 깨어난 줄도 모르고, 그녀는 사내의 아랫도리를 깔고 부산한 몸짓을 해대고 있었다. 밤이었지만, 나는 벌거벗은 어머니의 뽀얀 살결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시골집, 그 사내의 골방에서 괴이하게 벌어지던 그 밤의 기억, 어머니의 알몸은 내 안에서 시퍼런 멍울로 엉겨 붙어 내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 여자를 알고 연애를 하면서, 나는 내 여자의 몸 위에서, 그때 어머니의 뽀얀 살결과 뒤엉긴 덥수룩한 사내의 기분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녀가 걸어가는 방향은 도심의 번화한 거리 쪽이었다. 나는 대리석으로 장식된 8층 상가 건물을 끼고 돌았다. 골목 안쪽은 길이 막혀 있고, 정면에 하얀색 철 대문이 화려하게 서 있었다. 붉은 벽돌의 3층 집이 보이고, 그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문턱을 넘자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마당이 넓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붉은 보도블록 양편에 서 있는 정원수들이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릴 적 외가의 평범한 시골집에 길들어진 내게, 그 여자네 집은 서구 어느 귀족의 성처럼 느껴졌다.
주저하며 그녀의 뒤를 따르던 나는 드넓은 거실로 안내되었다. 소파를 놓을만한 거실도 없는 그저 식당 한켠에 딸린 방에서 거주하는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가죽의 느낌이 보드라운 소파에 앉았다. 줄곧 긴장을 풀지 못한 채로 버스를 타고 왔던 내 몸이 편안히 묻혔다.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밝았고, 어머니 같은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다. 초면이지만 초면이 아닌 듯, 다감하게 다가와 앉아서는 과일을 깎았다. 그 순간에 소파 뒤 벽면에 붙은 인터폰이 울렸고, 곧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설비회사 직원이 왔다 갔어요.”
그녀가 반쯤 깎인 과일을 손에 놓았다.
“어떻게 해야 한 대요?”
“지금 수리하지 않으면 더 큰 고장으로 이어진다 해서….”
“그럼, 애초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남자의 굵은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다시 과일을 깎았고,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아, 들어오는 입구에 서 있는 상가 빌딩의 관리인이지.”
그러고 보니 마당이 그 건물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주어 아버님이 고마워하겠어.”
나는 그녀가 내미는 과일의 달콤한 맛을 빨아들이며, 발바닥에서 전해져오는 카펫의 보드라운 감촉을 즐겼다. 하지만 늦도록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어제저녁 전화를 했을 때, 나는 이쪽 사정은 따져보지 않았고, 그 여자도 서두르던 나를 굳이 따돌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미리 연락할 수 없었고. 스님은 아직도 절에 돌아오지 않으셨다니.”
나는 그날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
무더운 공기가 사라지면서 설렁탕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지나자 손님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오전부터 귀퉁이에 붙은 방안에서 줄곧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책장을 덮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식당 안에는 초가을 고즈넉한 햇살이 비껴들었다. 잠시 한가로운 사이, 새로 들인 그 몸매 늘씬한 아줌마가 계산대에 앉아 졸고 있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갑자기 다가온 아버지의 존재를 어머니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다. 어머니는 마침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얘, 햇고구마 빛깔이 참 좋더라.”
나는 쟁반을 들고 방바닥에 퍼질러 앉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비밀이라고 했던 거 말해 줘야겠어요.”
“그래, 들어보자꾸나.”
“우선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삶은 고구마 껍질을 벗겨주고 있던 어머니의 손길이 잠시 멎는가 싶었다.
“결혼이라도 하려나”
“나 없을 때 이모님이 자주 했다던 말이 뭐였죠.”
“그럼 나더러 또 결혼하라는 거냐.”
“그래요, 하지만 재혼이니 삼혼이니 하는 거 보다 재결합.”
“무슨 뚱딴지같이......”
“그러니까 아버지를 찾았어요.”
순간, 어머니의 눈동자에서 광채가 달아났다.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다 반쯤 까놓은 고구마를 던지듯 놓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자식은 키워봤자 애비 찾아 가버린다더니!”
미닫이문이 세차게 닫혔다. 이윽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옛말 그른 거 없제!”
쇠 된 목소리가 내 등을 후려쳤다.
부산에 다녀온 뒤로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버지는 무슨 연유로 연락처를 다른 쪽으로 가르쳐 주었을까. 그녀는 스님과 연락이 닿는 대로 전화를 걸겠다. 라고 했는데, 나는 왜 그 여자를 통해 아버지와 연락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그 의문은 아버지를 만나면 풀어질 것이었지만, 한동안 연락이 오지 않았다.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 오시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디로요?”
하고 물었다.
“스님이 절간에서 만나는 걸 원치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여전히 다감했다.
그러고 보면 절에서 아들을 만나는 것은 신도들이나 다른 수도승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전화를 끊었을 때는, 조급하게 굴었다는 후회를 했다. 하지만 조급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그녀는 받아들였으리라 믿었다.
다음 날, 나는 열차를 이용해 부산에 도착했다. 열차를 이용한 것은 그녀가 별도의 장소에서 만나기보다 집으로 오라 하였기 때문이었고, 그녀의 집은 역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역에서 내려 택시를 잡고 8층 빌딩 앞에 도착하기까지는 10분가량 걸렸을까. 다시 만난 여자는 머리카락이 짧아졌고, 화장기가 더 진한데다, 허리가 잘록해 보였다. 나는 곡선미가 도드라진 그녀의 복장에 매력을 느꼈고, 이전보다 어려 보이는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여자의 마음에 변화가 있으면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버님은 장례를 치르는 집에 갔어요.”
“.......”
“기다리면 이리로 오실 거예요.”
또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없이 흘러간 그 많은 시간에 비하면, 이 기다림은 행복한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향이 진한 커피는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향수 내와 섞여 미묘한 감각으로 전해져왔다. 창가에서 거리를 둔 곳에 선반이 있고, 그 선반에 가지런히 개어진 잿빛 승복이 눈에 띄었다. 나는 시선을 던졌다.
“아버지의 승복인가 봐요.”
그녀가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달랐다.
“부산 구경도 괜찮을 텐데”
“....”
“나랑 시간을 죽이고 오면 어떨까.”
장례를 치르는 집에 불려가는 것은 목사나 스님들이 할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겨두기로 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낙동강 하구가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확 트인 시야로 들어오는 드넓은 수면, ― 3층 창 너머 반짝이는 강에는 작은 고깃배들이 오가고 있었다. 바람 이는 수면 위로 고깃배 한 척이 가물거리며 사라졌을 때, 나는 또 뜬금없는 말을 들어야 했다.
“사랑할 수 있을까?”
“........”
“그 나이에서 바라보는 내 모습이 너무 늙지 않았을까.”
“아니에요.”
“그럼?”
나는 긴장을 풀어놓고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이 여자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아직은 매력을 지녔어요.“
여자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나는 깊이 빨려드는 빛나는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창 너머 여름이 떠나간 갈대숲에는 새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돌아온 철새들은 새로운 둥지를 틀 것이었고,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남자는 여자가 누리고 싶은 자유를 이해할까?”
“자유라뇨.”
“사랑하고픈 사람을 사랑하는.”
낮게 깔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처연히 들렸다. 나는 반짝이는 눈빛 속으로 빨려들다가 고개를 돌렸다.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여자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내 어머니와 근접한 연령대인가 싶은데, 하지만 강렬한 눈빛 속에 스미는 그녀 자유의 대상이 나일 수 있다는 감에 사로잡혔다. 아니, 나는 이미 나긋이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그녀 심연을 헤집고 있었다.
사랑은 눈빛만으로도 족하다.
욕망이 일렁이는 강에는 어스름이 내리고, 만선을 이룬 배들이 잠길 듯 까딱이며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나니, 텔레비전 화면에는 9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고, 내 눈은 뉴스 화면에 붙박여 있었다. 여자가 저녁을 짓는 동안, 둘 사이엔 의미 없는 낱말들만 오고 갔다. 그러다 찻잔을 놓고 마주 앉자, 그녀가 내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카페에서 보았던 그 깊고 강렬한 눈빛이었다.
“아직 젊어 느끼지 못하겠지만, 세상살이란 녹록지 않아요.”
“.......”
“젊은이들에겐 때로 징검다리가 필요하지.”
여자는 찻물이 묻은 입술로 의미 있는 말을 쏟아내다 표정이 깊어졌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뉴스가 끝났고,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밤 열한 시가 임박한 시각, 아버지는 오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내 머릿속을 채워버렸다. 나는 귀가 시간을 의식했고,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래 앉은 탓으로 몸이 굳은 느낌이라 무릎에 두 손을 대고 근육을 풀었다.
“백수라면서”
“.......”
“막차에 미련 두지 말아요.”
“......”
“이대로 여기서 주무셔요.”
나는 완강하다가 은은해지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였다. 하지만 곧 거부할 수 없는 표정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백수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무릎을 풀고 일어나 망설이며, 작은 방들의 문에다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여자는 더 권할 것도 없다는 듯, 안방으로 들어갔다. 은색의 갖가지 문양이 박혀 현란하게 반짝이는 자개장롱을 열고 새 이불을 꺼냈다. 그리고는 안방 바닥에다 깔았다.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지만, 이쯤이면 나는 더욱 돌아설 수 없는 처지라고 생각했다.
“다른 방은 청소가 안 되어 누추하니 여기서 주무셔야 해요.”
이 여인은 아버지의 여자일까. 그렇다 해도 나와는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았다. 나는 강가의 카페에서 보았던 그 깊은, 그윽한 눈빛을 떠올렸다. 유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 안의 움직임이 복잡해졌다.
그래 아버지의 여자, 그럴 수는 없다.
아버지의 여자가 아니라 해도 남의 집 안방에 들어가 잠자는 건 불편하다. 하지만 나는 이불을 깔아놓은 여자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고집스러운 목소리에 이끌려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운동복 아버님 거예요.” 하얀색 운동복을 내어주기에 갈아입고 누웠더니, 그녀도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녀와 나 사이, 복판은 비어 있고 그 공간은 넘을 수 없는 선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불이 꺼지자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그녀와 내가 뱉어내는 숨소리만 들렸다.
혼란한 머릿속이 비워지지 않는다. 여자는 왜 나를 안방으로 끌어들이고, 옆자리에 눕게 했을까. 삶이 녹록지 않을 테니, 징검다리가 필요할 것이라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말은 재력 있는 여자들이 젊은 사내를 유혹할 때 써먹는 말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무릎 위에 올라타, 흘레붙은 개의 수컷처럼 할딱이던 어머니의 그 부풀어 오른 속살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 내 옆에 그런 여체가 있다. 울룩불룩한 여자의 잠옷 속 부위가 눈에 어리었고, 고요함 때문에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광포한 괴음이 들리기도 했고, 그녀의 몸속으로 왈칵, 내 정액이 쏟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밤 내내 나는 졸다 깨다 하면서, 본능과 이성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마침내 욕망을 꿈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
이즈음 어머니는 동창 자녀들의 결혼식장에 다녀오는 일이 잦아졌다. 어머니는 예식장에 다녀올 적마다 깊은 생각에 잠겼고, 양말을 벗으며 한숨을 길게 뿜어내곤 했다. 당신이 뿜어내던 그 긴 숨은 내 결혼식장에서 비어 있어야 할 아버지의 자리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너도 과부의 아들이 아니다.’
내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으로 나는 어머니의 몸에서 밤마다 흘러나오는 흐느낌 같은 소리가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그 어느 때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단말마 같은 숨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까닭이 무엇 때문인지 모른 채,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서로 엉겨있던 커다란 어른의 몸이 순식간에 떨어지며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밤마다 내가 들어야 했던 어머니의 숨소리는 그때, 사내가 사라지고 난 뒤 흘러나오던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를 힐끔 쳐다보다가 비굴한 표정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던 어머니의 또 다른 사내를,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놓고 내내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그리움의 하얀 도화지일 뿐, 어머니의 몸에서 흐느낌이 들려올 적마다, 그 뽀얀 몸 위로 또 다른 낯선 사내의 헐떡임이 다가오는 것 같았고, 그럴 적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곤 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솟구치는 그 욕정의 빈자리를 나는 간절히 내 아버지가 채워주기를 바랐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비는 마른 땅에 스미었고, 빗줄기를 바라보던 나는 그리움에 젖어 들었다. 책상에서 떨어져 의자를 젖히고는 창가에 다가앉았다. 아버지는 왜 만날 수 없는 것일까. 차가운 빗물이 가슴을 적셔오는 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나 대구역인데 나와 줄 수 있겠니.”
연락도 없이 대구로 온 건 내가 백수이기 때문일 테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경어체가 사라졌다. 경어체가 사라진 것은 단순히 나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일는지. 아니면 그동안 가깝게 느껴진 탓일는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딱히 따져볼 일은 아니었다. 내 안의 초점은 하나로 집중되었다. 그녀가 왜 나를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대구로 올라왔을까.
왜 그런지 그 여자의 목소리에는 안정감이 빠져있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옷을 두꺼운 것으로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겠다는 감이 스쳤고, 집으로 금방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지난주에도 나는 부산에 내려갔다. 물론 기다리던 소식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답답하고 몸이 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는 만날 수 없었다. 드디어는 아버지가 나를 만나지 않으려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내게 용서를 바랐다. ‘실은 스님이 다른 절에 가 계셔요.’ 목소리가 가늘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부산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나요.’
‘더 솔직한 말은 나중에 할게요.’
내 분위기를 간파한 여자는 간절히 용서를 바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명히 꿈틀거리고 있는, 그러나 쉽사리 끄집어내지 못하는, 그 여자의 오묘한 감정을 차마 읽어내지 못할 만큼, 나도 우둔한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딘지 감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에 병이 있어 거동이 불편한 건 아닌지 하는.
그녀는 내 표정의 변화를 읽어내었다.
“아버님은 건강해요.”
그날 나는 아버지가 머문다는 사찰에 그녀와 함께 가기로 약속을 받아내고 돌아왔다.
대구역 바깥 출구에선,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나팔꽃처럼 벌어지며 광장으로 흩어져 나왔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역사 안 대기실로 들어갔다. 어렵잖게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그녀를 찾아내었다. 대기실은 무언가에 쫓기듯, 이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긴 의자에 열을 지어 앉은 한 여자의 시선이 반짝 빛났다.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는 그녀의 손이 뜨거웠다.
“첫눈이 내린다 데”
찻집을 찾아들려던 내겐 뜬금없는 말이었다.
“거기로 가자.”
오늘 저기압의 영향은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다고 ― 눈이 내리는 곳은 북쪽이라고 ―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소녀처럼 밝았다.
비 그친 밖은 눈이 내릴 듯 흐릿하고, 역사 안의 창문마다 김이 서렸다. 북적이는 대기실의 더운 공기를 뚫고, 스피커에서 서울행 열차가 들어올 거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바깥으로 향하려던 내 발길을 그녀가 안으로 낚아챘다. 한쪽에선 흐르는 물처럼 개찰구를 향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부할 수 없는 완강한 눈길에 쏘인 나는, 매표구를 향하는 그녀의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진솔하게 말하자면, 마침내 아버지를 만날 것이라는 소망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우리는 개찰구로 밀려들어 갔다.
대구발 상행선 열차는 정오에 떠났다. 찬 서리를 맞고 마르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차창에 어리어 스쳐 지났다. 우리는 붙어 앉았고, 그녀가 창 쪽에 앉았다. 천정에서 내리 퍼지는 흐릿한 불빛이 숱 많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에둘렀고, 내 시선은 적당히 불룩한 그녀의 가슴을 헤집었다.
“다시 한번 용서를.”
“......”
“널 처음 보는 순간에 나는 내가 아니었어.”
기차는 어느새 흐린 날의 바깥 영상들을 지우며, 끝을 모를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에 어둠이 깔리면서, 객실의 전등은 희미한 찬연함을 뿜어냈다. 어둠을 가르며 미동도 없이 달리는 열차, 모든 감각이 솜털처럼 가벼워질 때, 나는 여체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고개를 기울이며, 머리를 내 오른쪽 어깨 위에 얹었다. 여인의 목을 타고 흐르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카락이, 내 등을 감싸며 흩어졌다. 윤기 있는 머리카락에서 훅 향내가 스며 나오자, 나는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아무 말 하지 말아 줘.”
“.......”
“이러는 나 주제넘고 주책없는 여자라는 거 알고 있어.”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 길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먼 산 아래로 시원히 뻗은 벌판이 펼쳐진다. 벌판의 마른 논 한편으로는 검은 새들이 내려앉는다. 흐릿한 허공에 나선형을 그리다 내린 새들은 그루터기를 쪼아대며 주둥이를 할딱인다. 차디찬 허무를 헤집는 새들의 겨울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 안은 새들의 겨울 들녘처럼 차갑지도 뜨겁지도 아니하였다.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그리고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당신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이런저런 상념들로 채우고 있었다.
대전을 지나치자 객실엔 빈자리가 많아졌고, 듬성듬성 남은 사람들은 고개를 젖혔거나 수그리고 있었다. 불빛 희미한 객실엔 두 사람만이 졸음에 개의치 않았다. 천안에 이르렀을 즈음엔 차창으로 눈발이 비치기 시작했다.
“첫눈, 아! 하얀 눈.”
나직이 소리 내는 그녀의 눈동자가 소녀처럼 맑아졌다. 소녀의 시선은 차창 밖으로 붙박였고, 나는 희뿌연 형광등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는 차창에 어리는 해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분위기를 흩트렸다.
“오늘은 어차피….”
그렇다. 민가에서 머지않은 산속이라 해도 사람이든 자동차든 눈 내리는 날의 언덕길을 오르내리긴 곤란할 것이었다. 내 추측의 촉수가 들이대는 방향은 틀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곳이 어디든 오늘 밤은 그녀와 지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녀가 아버지의 여자라는 걸 잊지 않기로 했다.
오산역에서 서둘러 내린 우리는 차츰 눈이 쌓여가는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바닥이 미끄러운 탓으로 여자는 내 팔을 꼭 끼고 천천히 걸어달라고 요구했다. 곁을 스치는 사람들이 흘끔 고개를 돌려보기도 했다. 나는 그 여자의 팔을 끼고 균형을 잡아주는 일을 빼고는 택시를 타는 일도, 설령 호텔에 들어간다 해도, 철저히 그녀를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를 또 한 번 의식했다. 눈이 내리는 탓일까. 택시 승강장에는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빈 택시 몇 대가 그냥 지나쳤다. 간신히 택시를 잡고 보니, 늙수그레한 운전사가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어디로 가요!”
“호텔 프린스!”
그녀도 운전사도 목소리에 힘이 차올랐다.
“타세요.”
눈이 내리는 날이라 승객으로서는 뭘 따져야 할 게 아니었다. 그녀와 나란히 뒷자리에 앉았는데, 운전사는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 집이 있다고, 그래서 눈을 피해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
호텔 프린스 303호. 눈 내리는 창밖을 응시하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나는 가운을 걸친 여자의 몸에서 텔레비전 화면으로 시선을 떼어냈다.
“넌 미혼이고, 난 사별한 여자야. 불륜일까.”
나는 그녀의 집에서 옷을 갈아입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난, 네 인생의 지름길에 놓인 징검다리로만 여겨 줘.”
“......”
“다만 내가 원하는 걸 줘. 네가 원하는 걸 줄게.”
그녀는 자신이 지닌 재력의 배경을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내키지 않는, 그러나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물음을 던졌다.
“그럼 아버지는?”
“내일이면 오신대두.”
“.......”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희미한 불빛 아래 함박눈이 내리어 쌓인다. 함박눈 쌓이는 소리가 보드란 양탄자를 딛고 다가온다. 화장대에서 침대로 다가오는 여인은 핑크빛 나이트가운을 걸쳤고, 앞자락 사이사이로 희뜩희뜩 넉넉한 여체가 드러난다. 그녀의 살결은 매끄럽고 하얗다. 아버지의 여자라는 거. 하지만 당신은 살아 있고 움직이며, 순화하고 변화한다. 나는 아득하면서도 본체가 분명한 욕망의 노예가 되고 있었다.
그래, 사랑은 몸으로 느끼는 거라고.
은은한 불빛을 뚫은 향기로운 여체가 내 곁으로 파고들었다. 내 깊은 곳에서 북소리가 끓어오른다. 몰랑몰랑한 유두의 감촉이 닿자, 심연의 북소리는 더욱 요란해진다. 여자의 자애로운 입술이 천천히 다가와 내 입술에 포개어졌다. 나는 깊숙이 그녀를 받아들인다. 나도 그녀도 숨결이 가팔라 올랐다.
그러나 일순, 나는 어둠의 깊은 곳에서 펼쳐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아야 했다. 어릴 적의 기억, 내 트라우마로 자리한 그 사내의 신음과 어머니의 뽀얀 속살, 나는 깊은 어둠을 피하며 돌아누웠다. 돌아눕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미안해. 난 널 바라보면서 생명 있는 것들의 허무를 생각했지.”
“.......”
“넌 아버지를 소망했고, 난 널 소망했어.”
“.....”
“내 나이, 내 생애 마지막을 꿈꾸었어. 사랑.”
나직이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그러나 그때 그 남자의 무릎에 올라타 몸부림치던 어머니의 괴음으로 들렸다. 나는 뒤에서 밀착해 들어오는 그녀의 몸짓을 살폿 밀었다. 그녀가 돌아눕는다. 어둠 속으로 번지는 여인의 가녀린 흐느낌이 아린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애욕 ― 그 본능의 경계는 어디인가.
창 너머 평원의 먼 굴곡에서 바람이 일어나고, 서리 돋은 창문에는 함박눈이 일렁인다. 나는 본능을 누르고자 욕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 꿇어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아직은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눈을 뜨니 옆이 허전하다. 그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욕실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쳐다보려는데, 머리맡에 하얀 종이가 놓여 있었다. 나는 볼펜으로 쓰인 검은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10시에 단층 커피숍> 그녀가 방안에 없다는 거였고, 그렇다면 커피숍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아니면 아버지이다. 나는 아버지이기를 바라며, 허전함과 설렘이 교차하는 것을 누르고 욕실로 향했다.
하루 사이 까끌해진 수염을 미는 동안, 나는 뒤 늦게 다가오는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는 파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젊은 날 아버지의 격정이 빚어낸 폭력성을 어머니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어머니도 흠결을 남겼다. 나는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두 사람 간의 응집력은 내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말리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늦잠에 빠졌을까 봐 전화했어.”
그녀의 목소리이다. 그러고 보니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랬어. 나를”
그녀의 흐느낌을 떠올린 나는 진솔해야 했다.
“아버지의 여자를….”
“그럼 내가…. 아니야. 아니라구.”
”......“
“난 스님을 믿으며 따랐고 존경했어. 그뿐이었어.”
나는 이마에 내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전화기를 놓지 못했다. 차츰 차분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어졌다. 아버지는 그 절에서 탱화를 그려주고 있었다고, 종교화를 그리는 스님의 마음을 흩트려놓고 싶지 않았던 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다고, 누구나 비밀은 갖는 거라며 말을 끊었다. 전화가 끊어지자 한줄기 써늘한 바람이 내 안을 스쳐 지났다. 그 바람의 여운이 길었다.
그리고 누구나 비밀은 있다고.
양말을 신고 채비를 마감한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눈은 그치지 않았다. 눈 사이로 잿빛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한 승려가 호텔로 들어오고 있었다. (끝)
첫댓글 글이 쉼없이 흐르고 동반되는 궁금증으로 끝없이 빨려들게 만드는 소설, 아주 잘 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난
여인의 이야기-
중간중간 엄마의 이야기
아버지의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