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旣視感)이다.
우크라이나가 전쟁터의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 대상 연령을 27세에서 25세로 낮추고 △동원의 효율성을 높이고 기피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새 동원법을 도입한 데 이어 △수감자들을 동원하는 법안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서명하는 모습을 접하며 드는 느낌이다.
러시아는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한 첫 해(2022년) 9월, 당초 투입한 15만명 안팎의 병력으로는 1천km에 이르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공격과 방어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실감한 뒤, 전격적으로 부분 동원령을 선포했다. 예비군 30만명 징병이 목표. 그러나 그 대상자 상당수가 아연실색해 육로로, 해상으로, 항공편으로 해외 탈출을 꿈꿨다.
특히 국경을 접한 핀란드와 그루지야(조지아), 카자흐스탄 등으로 나가는 국경검문소에는 보기드문 인파가 한꺼번에 몰렸고, 서방 외신들의 조롱거리가 됐다.
2022년 9월 카자흐스탄 국경을 넘기 위해 줄지어선 러시아 해외 도피 차량들/캡처
우크라이나의 '현재'가 바로 1년 7, 8개월전의 러시아다.
병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최고라다(의회)가 채택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이 서명한 새 동원법이 18일로 발효됐다. 새 동원법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18~60세 남성들은 오는 7월 16일까지 군사 동원및 징집 사무실(통칭 군사위원회, 우리 식으로는 병무청)에 병역 사항을 다시 신고하고 '군사 수첩'(병역 수첩)을 새로 발부받아야 한다. 이 수첩이 없으면 해외여행을 포함해 일상 생활에서 자동차 운전 금지 등 숱한 불편을 각오해야 한다.
문제는 군사 수첩을 발급받는 과정에서 곧바로 최전선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우크라이나 보통 사람들의 두려움이다. 지금도 길거리 강제동원을 피하기 위해 별 짓을 다하는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순순히 병역 신고에 나서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새 동원법은 7월 16일까지 신고하지 않는 사람은 곧바로 병역(동원) 기피자로 등록되고, 형사처벌 대상이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더욱 촘촘하고 가혹해진 동원 그물 망에서 벗어나려는 우크라이나 동원 대상자들은 아예 목숨을 걸고 해외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러시아판 '해외 도피' 조롱거리를 넘어선다. '인권, 생명권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지경이다.
이들의 주장은 1년 7, 8개월전 러시아를 탈출한 사람들과 똑같다. 전쟁터로 끌려가 헛되게(?) 목숨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 명예나 애국심 등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인간의 본성인 '생존 욕구'를 넘어서지 못한다. '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로 탈출하는데, 여기에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안타깝다.
◇ 목숨을 건 해외탈출극
우크라이나 동원 대상 남성들이 처한 이같은 문제에 먼저 주목한 곳은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NYT)다. 이 신문은 지난 달(4월) 13일 수천 명의 남성이 루마니아와의 국경 지대를 흐르는 티사(Tisa) 강을 건너 우크라이나를 탈출하려다 그 곳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NYT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고 있다"며 "동원되는 것은 최전선으로 가는 편도 티켓을 받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상대 측인 루마니아 당국은 러시아의 군사작전 개시 이후 6천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티사강을 통해 자국으로 피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과정에서 성공하기보다 죽을 확률이 높아 티사는 '죽음의 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NYT는 전했다.
티사강에서 발견된 익사체/사진출처:우크라 국경수비대
징병 기피자들은 또 카르파티아 산맥(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에 걸쳐 있는 산맥/편집자)을 넘어 '전화(戰禍)가 없는 곳'으로 길을 떠난다. 그 길은 원래 위조 담배 밀수업차들이 애용하던 비밀 통로였는데, 이제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비밀리에 루마니아로 도피시키는 루트가 됐다. 길 안내 전문 조직 50여개는 이미 우크라이나 국경 수비대에 의해 적발돼 손을 뗐다고 한다.
그러나 비밀 조직은 여전히 존재하고, 수요(도피 희망자)에 비해 공급(길 안내 요원)이 적으니, 1인당 비용이 2천 달러에서 1만 달러로 폭등했다. 국경 수비대도 적외선 카메라를 늘리고, 발자국 센서를 설치하는 등 국경 보안의 강화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국경수비대 요원/사진출처:스트라나.ua
결국, 여기서도 '불행한 사건'이 터졌다.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으려고 한 남성을 국경수비대 요원이 사살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검찰은 17일 카르파티아 산악지대서 국경을 넘으려던 남성을 사살한 혐의로 국경수비대 요원을 형사 기소했다. 유죄가 확정될 경우, 최대 징역 9년형을 받을 수 있다.
피살된 남성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이 곳으로 와 이틀 전(15일) 밤, 국경을 넘으려다 변을 당했다. 국경수비대 측은 그에게 여러 차례 경고, 경고 사격을 가한 뒤, 조준 사격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중에 발견된 그 남성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려져 있었다고 한다.
◇ 그래도 티사강 도강에 목숨을 건다
우크라이나 언론에 거의 매일 오르는 뉴스는 역시 티사강 익사 사건이다. 지난 7일에도 티사강에서 익사한 남성 4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 중의 한 명은 이제 갓 20세였다. 동원 대상자가 아닌 20세 남성이 왜 무모하게 티사강 탈출을 시도했는지 의문스럽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티사강 익사체는 루마니아 국경수비대에 의해 발견되기도 한다. 대부분 장기간 물에 노출된 흔적이 있는 시신이다. 군사작전 개시후 벌써 30번째 시신이다. 거의 성공 직전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합법적으로 해외 여행이 가능한 한 남성도 티사강을 헤엄쳐 건너려다 국경수비대에 붙잡혔다. 그는 합법적으로 출국할 수 없는 줄 알고, 1,500달러에 티사강 도강((渡江) 도움을 받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벌금을 문 뒤 합법적으로 출국했다.
무모한 티사강 도강 도전은 최근 한 남자가 2분 만에 강을 건너가는데 성공한 영상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현지 전문가들은 도강은 티사강의 급류와 강한 조류로 몹시 위험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티사강을 헤엄쳐 건너는 모습. 성공한 영상에서 캡처
이들이 티사강 도강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단 건너가기만 하면, 루마니아 국경수비대에 불법 입국으로 체포되더라도 우크라이나로는 돌려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라디오 리버티(Radio Liberty)에 따르면 루마니아 당국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동원 대상 연령자 1만1,000여명이 불법적으로 자국에 입국했다고 밝혔다. 2023년에는 불법 체류자 유입이 주춤했으나 올해 초부터 다시 증가했다. 이들은 대부분 루마니아측에 '전장에 나가 싸우고 싶지 않다'며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 '웃픈' 해외탈출기
탈출에 목숨을 바치는 건 아니지만, '웃픈' 탈출극은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여성으로 변장한 뒤 여동생의 여권을 사용해 루마니아로 가려던 44세 남성이 체포됐다. 그는 화장을 진하게 한 뒤 가발을 쓰고, 치마를 입고 여동생의 여권을 내밀었다가 발각됐다. 국경수비대는 텔레그램을 통해 '매력적인 세르지에타'가 끝까지 '자신은 여자'라고 주장했다고 썼다.
여장한 뒤 우크라이나를 탈출하려다 체포된 44세 남성/캡처
국제적십자 위원회 요원으로 위장해 탈출하려다 붙잡힌 남성들/사진출처:우크라 경찰
앞서 국제적십자 자원봉사자로 위장한 남성 5명이 루마니아로 탈출 직전 잡히기도 했다. 국경수비대는 지난 4월 12일 국제적십자 위원회의 위조 문서를 이용해 루마니아로 도망치려던 남성 5명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가짜 문서를 만들고 복장도 그럴 사하게 챙겨 입었다.
국경 수비대에 따르면 매일 약 10여명의 남성이 가짜 문서를 내고 검문소를 통과하려다 검거된다.
오데사 지역에서는 국경을 지켜야 하는 국경수비대 요원이 근무중 이웃 몰도바로 도망가기도 했다. 그는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잠들자,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군복과 총기를 근처에 버려두고 국경을 넘어갔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자녀가 많거나 장애를 가진 여성을 찾는다는 남성들의 광고다. 수도 키예프(키이우)에서는 새 동원법이 통과된 뒤인 지난달 28일 그같은 광고가 인터넷에 올라왔다. 다자녀 혹은 장애 여성과 결혼하면, 일단 동원 대상에서 제외되고, 군사 수첩이 없더라도 해외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자녀 여성을 찾는다는 광고/캡처
실제로 장애 여성과 결혼한 한 남성이 몰도바로 떠나려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국경검문소 통과 과정에서 두 사람이 서로 엉뚱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거의 모르는 사이인 데다가 사는 곳도 같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 9명의 자녀를 둔 여성이 각기 다른 남성에게 돈을 받고 동원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계약을 맺었다가 체포됐다. 그녀는 법정에서 상대 남성이 전쟁에 끌려가지 않도록 막기 위해 일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 유명 축구 선수의 자진 입대 공방전
국가에 공헌한다는 이유로 동원 대상에서 제외된 단체나 기업이 조직적으로 병역 기피자를 만들고 있다는 비판도 일각에서는 나온다. 마리아나 베주글라야 의원은 지난 4월 28일 공영 TV 채널인 '수스필리네'(Суспильне)가 예비역들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해 동원에서 제외되도록 했다고 비판했다. 스베틀라나 오스타파 방송감독위원회(우리 식으로 방통위원회) 위원장의 아들도 그런 식으로 동원에서 빠졌다는 것.
TV 채널 외에도 프로 축구구단 5개와 서커스 예술단체도 선수들과 단원들의 동원 면제 특혜를 이용해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유명 축구선수의 동원 면제와 관련, 지난달 초 영국에서 불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에서 손흥민과 한솥밥을 먹었던 세르주 오리에(31·갈라타사라이)가 4월 8일 우크라이나 출신 올렉산드르 진첸코(27·아스널)에게 ‘말만 하지 말고 입대하라’고 저격했다. 진첸코가 영국 BBC 방송과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나를 소집하면 전쟁에 나가겠다”며 “같은 학교에 다녔던 친구들이 조국을 지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우크라이나에 있는 것보다 런던에 있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이 전쟁이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라고 한 말을 겨냥한 것이다.
◇ 폴란드보다는 슬로바키아로?
루마니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몰도바와 슬로바키아로 탈출하려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적지 않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몰도바와 가까운 우크라이나 팔랑카 지역의 도로변에 많은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영상이 지난 9일 온라인에 올라왔다. 이 차량들은 해외 탈출자들이 버리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정권 교체로 친러 성향이 짙은 슬로바키아로 탈출하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슬로바키아 국경 경찰 대변인 아그네스 코페르니카는 지난 9일 슬로바키아로 탈출하는 우크라이나 남성의 수가 작년에 비해 두 배나 늘었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4개월 동안 국경수비대가 불법 입국을 시도한 338명의 우크라이나인을 체포했다가 풀어줬다는 것. 지난해 같은 기간(166명)에 비해 두배 이상 많은 숫자다.
이들은 대부분 일정 기간의 구금이 끝나면 체류 허가를 받은 뒤 석방된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슬로바키아에서 총 1,484명이 불법 입국 혐의로 체포됐지만, 우크라이나로 추방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는 게 슬로바키아 측의 공식 발표다.
그러나 폴란드는 불법 입국한 우크라이나인들을 돌려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폴란드는 최근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은 우크라이나인들을 강제로 귀국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우크라이나 국경수비대에 의해 확인됐다. 우크라이나 국경수비대가 지난 10일 '서부 부그'(Западный Буг)강을 헤엄쳐 건너 폴란드로 들어간 동원 대상자의 신병을 폴란드로부터 인도받았다고 발표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군사위원회는 즉각 그에게 동원 소환장(우리 식으로는 입대 통지서)을 전달했다.(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편집자)
그 전날에도 도네츠크 출신 26세 남성이 우크라이나로 인도됐다. 그도 동원 연령이 25세로 낮아지면서 동원 소환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