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종언 이후의 공동체 논의와 랑시에르의 미적 공동체
<요약문>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몰락 이후 유토피아와 함께 사라졌던 공동체가 이제 자본주의 진영 중심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68혁명 이후 차이와 다양성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좌파진영 내에서 공동체를 ‘전체주의’와 동의어로
금기시한 것이 공동체에 내려진 사망선고였다.
탈근대 철학 이후에 공동체 담론은 니체와 데리다, 들뢰즈에 이르러 동일성 및 총체성에 대한 비판(동일성과 총체성을 중시하는 사고는 ‘특이성을 보편성에 포획한다.’)을 통해 거부되었고 나아가 공동체 자체가 부정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오히려 국제블럭 뿐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영역까지 연결함으로써 거대한 소비
공동체 구상을 실현해가고 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시장과 전쟁, 그에 따른 난민과 기아, 이민정책을 둘러싼 갈등과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환경파괴와 사회양극화의 심화 등은 전체 인류의 삶 자체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의 생명 불안과 공포를 키우고 있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미적 공동체는 미술가들, 예술 애호가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감각의 공동체이다.
여기서 감각의 공동체는 공통적인 감정이나 단일성에 기초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치안의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개인들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재배치를 통해 다시 접합시키고 통일시키는 공동체이다.
치안의 공동체는 몫이 없는 자들을 공동체 내부로부터 합의를 통해 배제 혹은 포획함으로써 치안을 유지해왔다.
미적 공동체는 이러한 합의에 불일치를 제기함으로써 해방을 여는 정치적이자 미학적인 도전이다.
랑시에르는 미학의 정치화를 통해 이러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재배치함으로써 몫이 없는 자들이 몫을 가지는 탈정체화
된 공동체로 나아가며, 여기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넘어 하나가 되는 주체화의 과정이 발생
한다.
Ⅰ. 서문
Ⅱ. 공동체 종언 이후의 공동체
1. 무위의 공동체
2. 부정의 공동체
3. 다중의 공동체
4. 열린 공동체와 새로운 문제설정
Ⅲ. 랑시에르의 미적 공동체
1. 랑시에르의 정치와 미학
2. 미학의 정치와 감각적인 것의 식별 체제
3. 윤리적 공동체와 미학의 윤리화 비판
4. 미적 공동체
Ⅳ. 결론
I. 서문
오늘날 공동체가 다시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공동체 논의는 이미 탈근대, 포스트모더니즘 기류에서‘주체’와‘동일성’의 비판을 통해 유효성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된 터라 공동체 논의의 부활이라는 현상은 더 새삼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정부공모사업(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사업 및 새뜰사업 등)에서조차 지역공동체의 유무가 주요선정
기준으로 제시될 만큼, 공동체 논의는 이제 우리 삶에서 대세가 된 듯하다.
인간은 오랜 기간 동안 자연과 사회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사유와 실천을 해왔으며, 인간 최대의 발명은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현실의 억압과 고통을 벗어나 희망을 바라던 상상(유토피아)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인간을 해방시키
기 위해 고안된 공동체는 어느덧 인간을 옥죄는 공동체로 돌변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공동체에서 배제됨으로써, 혹은 공동체에 포획됨으로써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몰락 이후‘유토피아’와 함께 사라졌던 공동체가 이제 자본주의 진영 중심에서 논의되기 시작
했다.
68혁명 이후 차이와 다양성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에 의해 좌파진영 내에서 공동체는‘전체주의’와 동의어
로 금기시되면서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런 만큼 오늘날‘공동체주의’의 논의처럼 자본주의에서 활발해지는 공동체 논의는 인간의 해방을 기대하고 전망할
때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해 내려진 공동체에 대한 사망선고를 재심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탈근대 철학 이후에 공동체와 해방 담론은 니체와 데리다,
들뢰즈에 이르러 그것이 동일성과 총체성을 중시하여 ‘특이성을 보편성에 포획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고, 나아가
공동체 자체가 부정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국제 블록 뿐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영역까지 연결함으로써 거대한 소비
공동체 구상을 실현해가고 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시장과 전쟁, 그에 따른 난민과 기아, 이민정책을 둘러싼 갈등과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환경파괴와 사회양극화의 심화 등은 전체 인류의 삶 자체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의 생명 불안과 공포를 키우고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불의한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부당한 폭력에 대한 저항이 공동체 없이도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
된다.
나아가 이 논문은 공동체의‘종언’이후에 민주주의와 해방을 공동체적 삶의 관점에서 전망해보려는 시도이다.
공동체‘종언’이후에도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공동체, 진보와 인간의 해방 요청과 시도,
그리고 이러한 해방의 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랑시에르의 미학적 공동체를 검토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한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Ⅱ. 공동체 종언 이후의 공동체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후쿠야마가‘더 이상 역사발전에서 변증법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인해 역사는 멈추었고 유토피아와 공동체는 이제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최근 십 수 년 사이, 특히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2008년 미국 발‘서브프라임 모기지론’사태로 인한
세계 경제의 붕괴는 68년 이후 자본주의의 새로운 질서였던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우려를 낳고 있다.
이와 더불어 68년 반전운동을 기점으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침묵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
이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첨병이라는 비난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칼 포퍼는 이미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를 전체주의로 취급하여‘열린사회의 적’들로 규정한 바 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는 나치즘과 아울러 스탈린주의도 모두 차이와 다양성을 절멸시키는 동일성의‘전체주
의’라고 규정하여 거부하였다.
그러나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독주는 국가와 그 속의 개인을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갔다.
이에 따라 복지는 축소되었고, 테러는 더욱 빈번해지고 지구촌은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공동체주의는 이러한 문제들이 과도한 개인주의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이 공동체주의는 해체된 공동체의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경제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자본의 질서를 구축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된 사회, 정치, 경제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해방의 공동체에 대해 논의할 토대를 제공해준다 할 것
이다.
1. 무위의 공동체
낭시의 이론은 우리나라에 『마주한 공동체』(2001)로 소개된 바가 있다.
낭시가 『무위의 공동체』(2010)에서 제시하는‘공동체'(communauté)의 위험성은 공동체가 지닌 반근대・반민주적인
종교적 신비주의라는 기원과 파시즘의 집단주의적 광기 및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의 기원에 있다.
또한‘공산주의’(communisme)는 이미 현실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당대의 지평에서 그 의미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 유일한 현실적 지평으로 나타나는 것은‘공산주의’(communisme)가 아니라
개인주의이다.1)
따라서 낭시의 목표는 동일성과 전체성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낭시에 따르면 폭압적인 공동체는 공동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의 집단, 하나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강하게 결집
하고자 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이런 경우에는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조차 공동체의 목표에 사로잡혀 공동체가 추구하는 것이라면 폭력적이고 비인간
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2)
낭시는 그간 공동체가 강조해왔던 동일성과 전체성의 위험을 지적하고 그 대안적 방법으로‘작동하지 않는(un-working)
공동체’, ‘무위(desœuvrement, 영inoperative)의 공동체’를 제안한다.
이는 전체성에 의해 사라진‘차이’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불안정한 공동체를 의미한다.3)
공동체란‘나’와 ‘너’혹은‘나’와 또 다른 ‘나’들의 결합 즉 ‘우리(we)’의 관계이다.
메를로-퐁티가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기술을 찾지 못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4)고 한 것은 그만큼 공동체와 그 전제로서 인간관계의 상관성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우리’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단순히 부가적이거나 부차적인 존재인 원자적 개인들의 결합이 아니며, 어떤
이념과 목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공동체도 아니다.5)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우리’라는 관계는 생산과 부에 헌신하게 되어있는 단위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우리’는 정치와 경제적 삶을 통해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와 경제 속에서‘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때 낭시가 포착하는 우리의 관계에는 인권이나 휴머니즘이 아니라 경제적・정치적인 기획 혹은 프로그램으로 인해
동일화될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우리’의 근거가 있다.
여기서 이러한 근거로부터 돌아서야 하는‘위험하고 급진적인’박탈과 비움의 움직임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무위의 움직임이다.
무위의 공동체에서는 이론적으로 개인들 사이에는 상이한 사회・경제적 위상으로 편위(偏位, clinamen)가 존재한다.
‘공동체’는 절대전능의 힘과 유일함만이 통용되는 공간이 아니라‘함께’하면서도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 간격을
두고 서로 다른 존재와 어울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6)
무위(無爲)의 공동체에서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란 공동체가 어떤 원리나 기준, 이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함께 있음’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공동체로 향해 있는 정념” 즉, ‘(개인이) 집단을 동일화하는
것’과 반대로‘(집단이) 개인을 동일성 내에 묶는 것’의 정념을 해체하고‘우리’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낭시는 이처럼 개인과 공동체의 긴장을 해결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데리다와 들뢰즈의 문제처럼 낭시는 왜 공동체를 해체하지 않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동체가 왜 필요한가?
낭시의 대답은 인간이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낭시의 공동체에서 핵심은 탈자태(脫自態, extase)이다.
탈자태란 하이데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낭시가 파악하는 탈자태는 하이데거에서처럼 모든 현존재(Dasein)의 시・공간적 존재(관계)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 구조를 표현한다.8)
쉽게 말해, 탈자태란, “‘나’를 벗어남”, “‘내’가 타자에게로 열려있음”이다.
다시 말해 “‘내’가 외부에 있음[외존, exposition, 노출, 전시]”이다.
‘우리’로 열려있는 인간관계는 단순히 서로 ‘다정한 관계’ 혹은‘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맺어지는 필연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즉 낭시가 포착하는 공동체에서는 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내재성을 버리고 함께-존재하면서 나의 한계인 바깥과
타자의 한계인 바깥이 계속해서 만나는 실존(즉 존재)이 공동체로 된다.9)
개인이‘우리’로 향해 나아가는 외존은 절대타자의 영역에서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공동체 역시 사회로
부터 벗어난 특별한 사람들의 예외적 공동체가 아니고, 사회(국가, 민족, 정당, 회사 등) 내에 있지만 사회로 통합
되지 않고 사회 한 가운데로 도래하는, 하지만 언제나 사회와는 다른 공동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동체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개인은 공동체에서 타자와 함께 존재함이 가능하다.
때문에‘무위의 공동체’는 지켜야 할 어떠한 정체성도 없으며, 외부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끊임없이 자신들의 세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공동체이다.
자신들을 규정짓는 상태나 순수성,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무언가 추가될 때마다 다른 것이 되는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이 이 공동체의 특징이다.10)
이 공동체는 세 명이면 삼각형, 한명이 더 들어와서 네 명이 되면 사각형으로 변한다.
반대로 누군가가 빠져나간다 해도 공동체는 허물어지지 않고, 다른 형태의 공동체로 나간다.11)
따라서 이 공동체는 구심점이나 경계가 없다.
오직 타인을 향해 존재하고 타인과의 관계 내에서 존재(공동-내-존재)할 뿐이다.
공동-내-존재는 어떤 결론이나 목표, 관념의 일치로 나아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의 공유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위의 공동체는 특정한 공동체로 고정되지 않는다.
2. 부정의 공동체
블랑쇼는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1983)가 던진 공동체에 대한 화답으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1983)를 발표한다.
그리고 20년 후에 낭시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서문격인 『마주한 공동체』를 발표하면서 그간의 공동체 논의와
9·11 이후, “시민전쟁”12)의 양상을 띠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공동체가 하나의 당위 이상의 것일 수 있다는 당위성
을 찾고자 한다.
소련의 해체 후, 공산주의와 함께 공동체에 대한 사고도 버려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블랑쇼는 결코 아니라고 답한다.13)
블랑쇼에게 공동체는 그의 70년 글쓰기에서 일관된 주제다.14)
공산주의는 인간 해방을 위한 거대한 공동체 실험이었고, 20세기 말 그 거대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블랑쇼는
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블랑쇼의 특이한 전력은 그가 극단적인 전향을 했다는 것이다.
1930년까지 극우국가주의 신봉자였던 블랑쇼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부터는 극좌국제주의로 전향을 했다.
그의 글쓰기는 주로 당시 좌파진영의 핵심적인 잡지 등에서 소개되었고, 그도 전격적으로 잡지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는 블랑쇼가‘우에서 좌로 이동’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블랑쇼의 공산주의에서 핵심적인 것은 정파나 당을 통한 혁명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설정 및
일상생활의 틀 짓기 등 사고방식의 전환이기 때문이다.15)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타자가 필요하고, 인간은 이를 통해 공동체를 구성한다.
낭시와 마찬가지로 블랑쇼에게 인간은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다.
“인간 존재는 혼자서는 스스로에게 갇히게 되며 무감각해지고 평온 가운데 잠잠해지게 된다.”16)
그런데 인간을 혼자만의 무감각과 평온 가운데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핍이다.
여기서 결핍은 경제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혹은 정치적인 문제 등 인간 활동의 전 영역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결핍으로 인해 인간 존재는 자기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고, 이 문제제기로 인해 타자의 존재를 요구하게 되며,
타자의 필연성을 긍정하게 된다. 이 타자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곧 공동체의 필연성이다.
한편 ‘순수한 개체적 실재’를 상정하는 개인은 타자조차도 자기동일성으로 환원하는 절대적 내재성을 요구한다.
이 절대적 내재성은 개인의 자기 동일성을 위해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개인은 “자신 이외의 다른 기원을 갖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타자에게 의존하고 있음에 무관심
한 채 스스로를 긍정”하고, “과거에서든 미래에서든 무한정 반복해서 정립된 자신”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자 불사의 존재”이다.17)
따라서 블랑쇼에게 공동체는 개인의 유한성으로 인해 불러들여지지만, 반대로 개인의 내재성으로 인해 해체되는 역설
적인 공동체로서 제시된다.
그렇다면 블랑쇼가 말하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전통적으로 공동체는 어떤 공통성 혹은 단일성을 기준으로 형성되고, 또 그 단일성의 성격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이
결정된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되는 공동체는 그 단일성에 의해 배제되는 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블랑쇼는 이처럼 공동체에서 배제된 자들의 공동체(공동체 아닌 공동체, 부정의 공동체), 바타이유가 말하는 바처
럼‘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가 불가능한가를 묻는다.
전통적인 공동체가 주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라면 블랑쇼의 공동체는‘타자의 공동체’다.
그런데 타자는 나에게 궁극적으로 알려질 수 없다. 왜냐하면 나와 타자는 돌이킬 수 없이‘분리’(separation)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분리’ 또는‘거리’는‘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상호 매개의 부재를 드러내고, 이 때문에 어떤 공통의
관념이 지배하는 것과 그에 따라 나와 타자가 전체성 속에서 똑같이 종속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분리는 소통과 반대되지 않는다.18)
왜냐하면 진정한 소통은 타자를 동일자로 포섭하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열리기 때문이다.19)
또한 공산주의 혁명과 공동체의 실패를 통해서 블랑쇼가 사유하는 것은 혁명과 공동체가 안고 있는 본원적 불가능성에
대해서이다.
블랑쇼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부재의 위협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서 공동체는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과 만나는 공간이다.20)
이러한 블랑쇼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소통은 주체도 없고 전달되는 내용도 없다.
공동체 내의 소통은 단지, ‘함께-있음’일 뿐이다.
3. 다중의 공동체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2001)은 출간하자마자 진보진영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산주의 공동체의 몰락과 함께 거대서사에 사망선고가 내려진 오늘의 시대에 해방을 위한 새로운
거대서사를 제시했기 때문이다.21)
네그리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쫓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법칙에 따라 공동체와 그 구성방법 즉 혁명을 기획
한다.
이 기획은 그의 주요 저서 3부작 『제국』, 『다중』, 『공통체』를 따라 전개된다.
우선 『제국』에서 네그리는 20세기 이후 영토를 기반으로 하던 제국주의가 탈영토기반의 혼합정체(국제기구, 다국적
기업, 국가, 문화상품 및 npo 등)의 세계 제국으로 변하면서 정치주체가 인민 혹은 대중에서 다중으로 변화했고,
자본의 지배 역시 공장에서 사회전체로 확장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노동의 형태가‘물질노동’에서‘비물질노동’22)으로 전환되면서 저항이 자본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부에서
조직된다.
다음으로 『다중』에서 네그리는 다중이 스피노자의 ‘물티투도(multitudo)’에서 유래한 것으로, 자본의 생산・재생산
과정에 의해 종속되는 모든 사람들의 범주로서 어떠한 배제나 우열을 전제하지 않는 개방적인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이러한 다중 없이는 사회적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이들이 가진 활력이 운동을 생산한다.23)
또한 네그리는 마지막 저서인 『공통체』에서 공통적인 것에 기반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네그리와 하트에 의하면 비물질노동에서 공통적인 것은 지식, 언어, 정서, 아이디어 등이다.
그러나 비물질노동 자체에 내재된 상호작용과 협력 및 공통성을 기반으로 인해 공동체에 대한 사유, 즉 다중의 공동체가
가능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네그리는 푸코의 생명정치에 영감을 얻어 삶-정치 개념을 고안한다.
비물질노동환경에서는 “곧 비물질노동 그 자체가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의 전면화”를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삶-정치란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의 경계가 무너지고 “생산의 다양하고 특이한
형태들 사이에 충분한 공통적인 토대, 상호작용 그리고 소통”의 가능성이 제공되는 새로운 지평을 말한다.
기존의 물질적 생산이 사회적 삶의 수단을 창출했다면, 비물질적 생산은 사회적 삶 자체와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을 생산
하기 때문에 삶-정치적 생산이 된다.24)
쉽게 말해 삶-정치적 생산은 오늘날 지배적인 생산에서는 생산되는 상품이 곧 주체성 자체의 생산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국의 질서에서 피지배자는 점차 자율적이게 된다.
왜냐하면 과거 자본가는 노동자를 공장에 모아놓고 도구와 계획을 조직하고 시간과 노동을 관리할 수 있었으나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일어나는 비물질노동의 형태에서는 그런 관리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체의 생산과 조건은 노동의 자율성과 민주주의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한편, 자본이 생산에 직접 개입하는 능력
은 감소하게 된다.25)
다중의 전략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네그리와 하트는 엑소더스(exodus)를 계급투쟁의 전략으로 제안한다.
엑소더스는 “노동력의 잠재적 자율성을 현실화함으로써 자본과의 관계를 빠져나가는 과정”26)을 말한다.27)
오늘날 지배적인 생산체제에서는 자본이 삶-정치적 노동에 비대칭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엑소더스가 가장 효과적
인 계급투쟁일수 있다.
“주체성들이 어떤 지형을 비우면 진공이 창출되며, 삶-권력은 그 진공을 견디지 못한다.” 28)
여기서 엑소더스를 해체주의의‘탈주’의 반복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유에서든 개별적 인간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몸을 뺀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심지어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한다. 따라서 엑소더스는 단순한 탈출이나 도주가 아니라 노동의 잠재적 자율성을
현실화하는 일이다.
이때 새로운 삶의 형태를 발견하고 구축하는 일이 동반되어야 하고 이것은 공통적인 것을 기반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29)
그러므로 오늘날 사회 운동에서 공통적인 것의 확장과 강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통적인 것에는 땅, 물, 공기, 자원 등과 같은 물질적인 부와 지식, 언어, 정서, 정동(affect)과 같은 비물질적인
부가 있다.
사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울타리치기(Enclosure) 즉, 공유지를 사유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공통적인 것의 확장과 강화를 위해서는 주체 자신의 변화가 중요하게 요구된다.
네그리와 하트는 자유를 ‘탈거의 자유’와 ‘해방의 자유’로 구분한다.
탈거는 정체성, 즉 진정한 자신일 수 있는 자유인 반면에 해방은 자기결정과 자기변형의 자유다.30)
『공통체』는 우리에게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감각을 펼치는 자유인으로 살라고 촉구한다.
이때 다중의 공동체가 지니는 특이점은 그것이 데리다 식의 해체주의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의‘종언’이후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본질과 주체, 그리고 동일성 등의 가치를 모두 해체하는 흐름 속에서,
다중의 공동체는 비록 전통 사회주의 이론의 시대적 변형이긴 하지만 계급과 주체, 그리고 제도화까지 제안한다.
이 때문에 네그리의 다중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공동체의 종언 이후 제기
되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공동체이론으로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4. 열린 공동체와 새로운 문제설정
필자는 앞에서 공동체 종언 이후의 공동체 논의를 살펴보았다.
유한한 인간에게서 삶의 가능성을 확대하고 권리를 신장할 수 있는 부정될 수 없는 삶의 방편이 곧 공동체이다.
그런데 20세기 인간의 공동체에 대한 추구는 오히려 개인의 특성과 차이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코뮨적 공동체 논의는 사라졌지만, 현실에서 공동체는 사라질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현실의 공동체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인간의 해방을 전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공동체 논의를 둘러싼 다양한 해답이 제출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 영향을 그대로 계승하여 들뢰즈는 분자주의, 즉 공동체를 근원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서
‘따로-존재’를 주장한다.
그리고 낭시와 블랑쇼의 무위의 공동체와 부정의 공동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들의 필연적인 공동체에서 전체성
(총체성)의 위험성을 제거하는‘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제안한다.
즉 그들은 나와 타자는 결코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을 바탕으로 타자의 권리를 중심으로 놓음으로써 목적 없는 공동체를
제시한다.
다음으로 네그리와 하트의‘다중의 공동체’는 다시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 즉 비물질노동생산 과정에서 형성되는
다중이 주체가 되는 공동체다.
다중의 공동체는 다중의 욕망, 즉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처럼 통일성이나 지도자 없는 공동행동을 통해 해방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로써 들뢰즈의 방식이나 낭시와 블랑쇼의 방식, 그리고 네그리와 하트의 방식은 모두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에서 개인
의 의사와 욕구를 중심으로 문제없이 해결한 듯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진보진영의 개인해방의 해법이 오늘날 공동체주의와는 어떤 차별성을 두고 있을까.
로즈(Rose)는 푸코의‘통치성’을 원용하여, 오늘날 범람하는 마을공동체운동은 신자유주의 도시화에 저항하는
‘해방적 장치’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구조적이고 광범위한 신자유주의의 기획인‘공동체를 통한 통치’의 사전
작업이라고 본다.31)
문화가 산업을 대체하면서 진보적 문화기획과 예술실천이 지자체에서 각광받고 있는 반면에 오히려 문화도시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역주하고, 마을 주민들은 삶의 애로를 호소한다.
이처럼 억압이 아니라 자율이 자본주의 통치술이 되는 이 엄청난 역설 앞에서, 전체주의라는 사악한 물을 뺀 공동체는
어째서 이 역설 앞에서 무기력한가.
해방의 기획은 타자의 권리 인정이라는 양심적인 문제, 윤리적인 문제나 어떤 초월적인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동체의 해방을 위한 주체와 그것의 힘이 결국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자신을 해방한다.
랑시에르는 배제된 자들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정치를 제시한다.
랑시에르는 타자의 권리와 공동체의 대립을 지양시키지 않으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역설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제시한다.
Ⅲ. 랑시에르의 미적 공동체
1. 랑시에르의 정치
우리가 랑시에르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정치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벗어나는 것이다.
기존 정치학 교과서를 지배해온 정치의 개념은‘권력투쟁’이라거나 혹은‘국가 자원의 분배’, 즉‘조정’이다.
먼저 공동체의 맥락에서 정치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몇몇 선행연구를 살펴보자.
박주원에 따르면 아렌트와 하버마스는“마르크스가 정치의 소멸을 주장하였다”고 오독(誤讀)한다. 32)
그는“마르크스는 근대 자유주의가 정치(politics)를 종교나 철학, 윤리의 영역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인간에
게 외적인 통제 권력으로 자립화되었음을 비판하고, 이를 인간들 스스로의 정당한 질서나‘공동체(Gemeinwesen)’
로 재정의 하려 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치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하나의 외적 권력(Gewalt)이나 통제술이 아니라 “인간들 간의 교류의 힘
(Macht)”이라고 정의했다. 33)
레닌은 정치를 국가 권력을 둘러싼 “제 계급들 간의 투쟁”이라고 정의한다.34)
아렌트는 『정치란 무엇인가?』에서 역설적인 주장을 했다.
그녀에게 “정치는 (행위의) 자유다.”35) 아렌트에게 자유는 개인과 개인의 소유로부터 출발하는 신자유주의의
자유를 넘어 관계와 연대 안에서 발생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당연히) 공동체를 요구하며 그 안에서 한 인간은 타인이 자유로운 정도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37)
자유는 늘 공동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막스 베버는 정치를 “권력의 분배에 관여하거나 권력의 분배에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38)”으로 정의하면서 사실상
권력투쟁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39)
라스웰(Lasswell)은 정치를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라는 역시 권력 투쟁적 정치로서 정의
하고, 반면에 이스턴(Easton)은 “사회를 위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정책 결정론적 정의를 내린다.40)
이처럼 정치에 대한 통념에 따르면 정치는 권력투쟁 및 공동체와 사회적 합의에 의한 조정이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정치(politics)를, 공동체 내부의 질서를 유지(통치)하기 위한 치안(police)과 구별한다.
치안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정치에 대한 요약은 치안일 뿐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치안은 인간들을 그들의 감각 및 지각 능력에 따라 두 대립된 범주에 의해 구분하는‘감각적인
것의 나눔(partage)’이며41), 그리고 그것에 따라 사회적 몫을 분배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을
확정하는 통치 과정이다.42)
반대로 정치는 치안의 질서, 치안의 셈하기에 의해 확정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다시 짜는 행위이다.
따라서 정치는 이러한 치안질서에 문제를 제기하고 평등전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정치는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강제 혹은 합의에 의해 배제된 자들을 공동체 내부에서 드러내고, 다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은 서로 이질적인 치안과 정치가 마주치는 현장43) 이 된다.
2. 미학의 정치와 감각적인 것의 식별 체제
1) 미학의 정치
랑시에르는 치안의 질서에서 배제된 자의 해방의 정치를 미학에서 찾는다.
랑시에르에게서 미학은 아름다움과 예술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랑시에르는 미학(aesthetics)을 바움가르텐과 같이 감성적 인식의 학으로 포착한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감각적인 것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감각 방식이자 판단이다.
다시 말해 미학은 감성학[감성론]으로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감각적인 것들을 나누고 식별하는 체계이다.
이점에서 랑시에르의 미학은 정치와 만난다.
왜냐하면 랑시에르의 ‘정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함으로서 배제된 자들도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즉 원래부터 평등한 존재라는 것(평등전제)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치의 과정은 몸을 통해 감각으로 드러나고 지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랑시에르는 “치안이란 통치의 과정으로서 사람들을 공동체로 결집하여 그들의 동의를 조직하는 것
으로 이루어지며, 나아가 자리와 직무를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44)
다시 말해 치안은 곧 사회적 몫을 분배할 때 발생하는 불평등을 확정하는 통치 과정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정치는 특정 정치체제 안에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짜임관계를
다시 짜는 것이 된다.
또한 이렇게 기존의 짜임관계를 다시 짜는 행위들이 정치적인 행위들이며, 이 반복적인 행위들은 곧 해방의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랑시에르에서 정치적 주체는 정치 행위자들이 치안의 논리에서 정치를 분리해내고, 그 스스로 감각적인
것의 ‘다시 나눔’을 통해 치안의 질서 속에서 모든 인간들의 근본적 평등을 지속적으로 관철시킬 때 형성된다.
따라서 미학의 정치는 이러한 공동체 내부에서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문제를 제기하고,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다시 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학의 정치는 정치적인 것이 감성적[미학적]으로 출현45) 할 때, 다시 말해 기존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문제를 제기할 때 이루어진다.
2) 공동체와 감각적인 것의 식별 체제
공동체 내에서 배제된 자들, 몫이 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다.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공동체가 그들의 감각 및 지각(과 그에 바탕을 둔 이해능
력)을 공동체에서 배제한 결과이다.
그런데 특정한 정치 체제에서는 구성원들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그 적절성에 의해서 인정하고, 치안의 질서에 의심을
하지 않도록 불평등의 틈을 메우기 위한 미장(통치술)이 있다.
미학의 정치에서는 미학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결정하기 때문에, 미학은 또한 공동체의 규율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
이 된다. 46)
이 말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그 공동체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또한 그 공동체의 민주주의와 평등의 수준을
지각하는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미학이 그동안 다루어왔던 예술을 불러들여 설명한다.
랑시에르는 예술에 대한 식별 체제를 이미지의 윤리적 체제, 예술의 재현적 체제, 그리고 예술의 미적 체제로 나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미지의 윤리적 체제는 플라톤의 예술관에 의해 설명된다.
플라톤에게서 이미지(회화나 조각에서의 형상)는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의 사물을 다시 모방한 이중 모방이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사물보다 진리와 더 멀다.
그리고 예술의 재현적 체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관에 의해 설명된다.
이 체제에서 예술(현상)은 ‘이미지의 윤리적 체제’에서와 달리 현실과 삶의 진리를 인식하게 해준다.
그러나 예술은 여전히 진리인식이나 인간의 도덕적 고양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 본성(본질 혹은 동일성)에 맞는 기준에 따라 ‘재현할 만 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고상한 주제’와 ‘천박한 주제’ 등의 내용과 형식에서 위계가 성립하였다.
마지막 체제는 예술의 미적 체제이다.
예술의 미적 체제에서 미학은 예술(이론)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지각하는 방식, 이해하는
사유방식을 지시한다.47)
여기서 미학은 재현의 미메시스적 질서가 전제하던 ‘인간 본성’과 단절한다. 48)
이 체제는 예술의 특이성을 통해, 대립하는 것들의 역설적이고 모순적 통일을 통해, 모방 혹은 재현의 이분법적 구조를
폐기함으로써, 이미 형성된 감각적인 것의 분할(위계)을 재편한다.
그런데 이런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 과정은 기존의 나눔 체계와 항상 대립적이다.
따라서 미학의 정치, 즉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 과정은 언제나 불법적이고 위반적이다.
그리고 미학[즉 감성학]은 사람들의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 소통하고 공통성을 구축한다.
예술이 그 예술을 식별하는 체제 속에서만 존재하듯이 공동체의 존재 역시 구성원들의 공동체를 감각하고 지각하는 식별
체제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미학과 예술의 논의는 곧 공동체의 규율 혹은 정치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3. 윤리적 공동체와 미학의 윤리화 비판
1) 윤리적 공동체 비판
공동체 아닌 공동체, 즉 전체성의 냄새가 가신 공동체, 공동체 내에서 개별성의 원리가 작동함으로서 ‘함께-있음’
이 가능한 공동체의 한 모델로 우리는 윤리적 공동체를 주목한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 주된 흐름이 된 이후 타자에 대한 극진하고 공손한 대우는
이제 상식이 되어버린 듯하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포스트 유토피아 시대의 미학과 예술은 그가 ‘윤리적 전회’라고
부르는 현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49)
사람들은 예술의 급진성, 다시 말해 집단적 존재조건의 절대적 변화를 만드는 예술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학의 정치성은 의심이 되고 있으며, 그 빈자리를 윤리가 들어와 메우고 있다.51)
공동체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주체들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각 주체들의 도덕 및 윤리를 문제
삼으며 그들의 사고및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52)
여기서 미학이 윤리적이 된다는 말은 미와 예술에 도덕적 요소가 강조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랑시에르가 포착하는 윤리적 공동체의 대표적 사례는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상향으로서의 국가이다.
따라서 윤리적 공동체는 그렇게 환영할만한 게 아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통치자[철인]와 수호자, 그리고 장인의 세 계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정의는 각 계급이 자신의 덕을 발휘하여 그것이 국가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예컨대 장인은 노동시간을 비워서 민회에 나가지 않으며, 국가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계급간의 이동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국가는 효용성을 기준으로 위계질서가 지켜지는 윤리적 공동체이다.
랑시에르는 이미지의 윤리적 체제에서 이데아와 현상, 그리고 이미지로 이어지는 진리의 위계를 통해, 윤리적 공동체를
비판했다.
이와 같이 윤리적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가문, 재산, 국적 또는 직위나 직업 등의 효용성을 기준으로 불평등한 위계질서
를 인정하는 공동체다.
또한 윤리적 공동체에서 윤리는 정치를 사라지게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윤리가 지배한다는 것은 윤리의 기준이 사실이 아니라 합의(consensus)가 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지만 공격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윤리는 ‘정치’가 아니라 ‘치안’의 논리를
따른다.
여기서 윤리는 곧 합의의 영역이다.
따라서 윤리는 정치의 핵심인 불일치(dissensus)를 일치(consensus)로 바꾼다.
따라서 윤리적 전회는 예술과 정치행위에서 도덕적 판단보다 합의를 통해 예술적이고 정치적인 불화를 사라지게 만든다.
53) 또한 윤리는 도덕적 폭력을 낳을 수 있다.
외상을 가진 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공동체는 그 범죄에 대해 처벌한다.
랑시에르가 예로 드는 영화 <도그빌>에서 이방인인 그레이스의 아버지는 이방인에게 악의 화신이 된 마을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아버지와 그레이스는 논쟁을 통해 인간으로서 인간을 용서해야 하는 것과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것을 두고 설전을
벌인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다. “인간은 개(dog)가 아니기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악을 처단해야 한다.” 이처럼 윤리적 공동체는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불행한
범죄자도 불가피하게 처단해야 한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9·11 테러 이후 대테러 작전은 인류공동체의 보호라는 도덕적 당위를 정치에 기입함으로써 성립되
었다.
이제 우리는 윤리가 마련해준 합의 속에서 우리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랑시에르는 윤리적 공동체가 정치를 해소할 뿐 아니라 국제적인 군사개입을 정당화 할 수도 있다고 비판
한다.
리오타르는 「타자의 권리」에서 아렌트의 인권 개념의 난제를 피하기 위해 시민권이 없는 자들에게는 비인간의 권리,
즉 사케르(sacer)의 신성성을 선사했다.54)
사케르는 공동체 바깥의 타자이기 때문에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따라서 “침묵 속에서 우리는 그것의 목소리를 통역해서 발언자들의 공동체에 전달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한다.”55)
조금 더 들어보면, “그것(사케르)은 대화로 길들이려 해도 우리와 같은 모습이 아니고, 그것이 호의적인 모습일지
악의적인 모습일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듣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신일 수도 있고, 그것은 동물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다, (……) 이런 방식에 의해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를 변증법적인 것과 같은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타인의 이질성은 전체화를 회피할 수 있게 해준다. (……)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불만과 포스트모던적 고난은
이러한 타자의 배제에서 비롯된다.”56)
리오타르는 공동체의 전체성을 피하기 위해 비인간을 대화공동체 바깥으로 몰아내고, 자기들만의 (평등한) 대화공동체
를 세웠다.
리오타르가 말하는 타자의 권리는 공동체 안에서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혹은 리오타르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리오타르의 대화공동체에서는 공동체 바깥의 타자(사케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가
있어야 하며 바로 여기서 윤리적 공동체의 세계화, 즉 윤리의 세계화가 승인된다.
타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도주의적 간섭의 권리를 통해 인도주의적 전쟁을 철학적으로 정당화
하는 논리가 된다. 57) 이로써 윤리적 공동체에서 정치의 말소는 세계적 범위에서 정치의 사라짐을 맞게 된다.
2) 미학의 윤리화
푸코에 의하면 동일자가 타자를 만났을 때 취하게 되는 행위는 동일화 혹은 무화(無化)시키는 행위이다.
윤리적 공동체에서 정치의 사라짐, 즉 불화의 정치가 사라지는 것은 내적으로는 합의와 외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절대적
거부에 의해서다.58)
랑시에르에 따르면 예술과 미적 성찰에서 윤리적 전회는 끝나지 않는 재앙을 증언하는 것에 헌신하는 예술과 사회적
연대를 위해 헌신하는 예술을 상찬하는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난다. 59)
첫 번째 경향은 타자의 미학이다.
리오타르는 칸트로부터 ‘구상력과 이성의 불일치’에서 오는 고통과 놀라움의 감정인 숭고(sublime)를 가져온다.
리오타르에게 타자는 곧 아무리 알려 해도 알 수가 없는, 끝없이 미끄러지는 대상으로서 숭고 혹은 재현불가능성이다.
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겪은 타자는 재현불가능하며, 그는 담론의 절대적 피해자다.
따라서 이 타자의 미학이 제안하는 공동체는 모든 정치적 질서와 담론의 너머에 있는 재현불가능한 절대적 타자를 증거
하고, 그 속에서 하나가 되는 윤리적 주체들의 공동체다. 60)
이처럼 숭고의 미학에서 진정한 예술은 무한한 사건을 재현하는 것, 즉 ‘총체성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증언이다.
재현의 의미가 서사 혹은 인간 본성을 통한 인과관계와 제작과 감상, 감각과 인식의 일치를 만들어, 하나의 전체를
만드는 지각방식이기 때문에, 리오타르의 타자미학의 최고 목적은 이러한 재앙에 대한 고발로서 재현불가능성을 위
해서만 존재한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미학의 윤리화의 딱딱한 버전으로 본다.61)
때문에 리오타르는 자신의 타자미학 또한 대화공동체에서 감각될 수 없는 사케르, 비인간에 대해서는 자신이 혐오하는
배제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경향은 참여미술이다.
비숍은 랑시에르가 참여미술을 윤리적 전회라고 특정하지는 않았다62)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참여미술에 대한 분석
을 랑시에르의 지적과 연결시킨다.
랑시에르는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는 예술은 과거에는 현실에 이질적인 요소들을 기입하는 방식으로, “착취세계의
모순들을 강조하고, 이 갈등적 세계 안에서 예술과 그 제도들의 자리를 문제 삼는”63) 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같은 방식을 활용한 오늘날의 작업은 “공통세계의 잃어버린 의미를 다시 부여하고 사회적 관계(연대)의 균열들
을 보수하는”64) 기능을 하는 식으로 전화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는 동시대의 예술은 ‘합의’의 범주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비숍은 참여미술의 윤리적 전회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한다. 그녀에 따르면 참여미술의 사회적 전회는 세 번의 시기로
나타난다.
그 시기는 1920년대와 1960년대, 그리고 1990년대이다. 앞의 두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과 68혁명의 시기와 겹치며,
90년대는 소련사회주의 몰락과 시기적으로 겹친다.
참여미술은 소련의 몰락이후 집단적으로 공동의 가치를 형성하여 사회적 연대를 회복할 필요로부터 부상했다고 볼 수
있다.65)
그런데 비숍이 문제시하는 것은 90년대 이후의 참여미술이 ‘윤리적 전회’의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그간의 참여미술은 사회적 참여를 위해 윤리적인 것,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같은 범주에서 목표를 설정해왔다.
그러나 90년 이후부터 참여미술은 미적인 것을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켜 버리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채 행동주의와 미학주의 사이에서 요동치게 되었다.
더구나 현재 참여미술은 신자유주의의 부드러운 사회공학의 일환인 지역(재)개발이나 관광산업, 체험경제 등의 맥락에
종속되어 버리는 위험에 처해있다.66)
랑시에르는 관계미술 역시 두 번째 경향에 속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하여 부리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와 같은 스펙터클한 발전의 궁극적인 단계에 있다.
개인의 지위는 수동적이고 순수하게 영향을 받아들이는 위치에서 상품의 명령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최소한의 행동
으로 이행했다. […… ]
이제 우리는 스펙터클의 단역이 되길 권유 받는다.”
관계미술은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상호작용과 그것의 사회적 맥락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지난 기간 제조업
중심의 상품경제가 서비스기반 경제로 이행한 결과이다.
즉 이로 인해 사람들 간의 면대면의 욕망이 생겨나고, 작가들은 DIY식의 접근방법을 채택하여 나름의 ‘가능한 소우
주’를 실천한다.67)
그런데 관계미술가들은 유토피아적 의제를 회피하고, ‘지금 이곳’에서의 일시적 해결을 도모하며, 환경을 변화
시키기 보다는 세계 속에서 더 낫게 거주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68)
때문에 부리요는 “현재의 이웃과 가능한 관계를 창안하는 것이 행복한 미래를 찬양하는 것 보다 더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69)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리요는 정작 관계미술이 어떤 인간관계를 산출하였는지, 그러한 관계가 누구를 위해 무슨 이유로 산출되었
는지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70)
4. 미적 공동체
랑시에르에 의하면 미적 공동체는 미술가들, 예술 애호가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감각의 공동체이다.71)
이 공동체는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는 가시적 형태가 규정되어 있는 제도와 체계로서의 공통세계가 아니다.
이 공동체는 어떤 실천들, 가시성의 형태들, 이해의 패턴을 함께 결합시키는 공간과 시간을 잘라내는 것이다.72)
이 공동체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존재 방식과 점유방식의 구성・재구성을 통해 변화하는 공동체,
가능성의 공동체이다.
이러한 감각의 공동체는 공통적인 감정이나 단일성에 기초한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감각의 공동체는 그 구성원의 감각과 인식이 일치하면서(‘함께’) 동시에 불일치하는(‘따로’)
(being together and apart) 공동체이다.
이와 관련하여 랑시에르의 정치는 치안과 정치를 마주치게 함으로써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분할을 다시 조정하는 것
이다.
여기서 예술은 감각의 공동체가 지니는 감각적인 것들의 짜임의 관계 즉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분할선을 만드는 대표
적인 형식이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감각의 공동체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전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첫째는 감각자료들의 결합,
둘째는 기존의 결합된 감각 자료들과 단절하는 “감각의 서로 다른 감각들의 결합”,
셋째는 “이러한 것을 가시화하고 무대에 올리는 시적이거나 예술적인 발화가 바로 그것이다.”73)
여기서 첫 번째가 ‘함께’라면, 두 번째가 ‘따로’이며, 세 번째는 그것을 무대화하는, 그것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재현하고 가시화해주는 예술 형식이다.74)
우리는 예술작품들 속에서 이러한 감각의 공동체를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분을 모르며,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것들을
익숙한 공간에서 떼어내서 경험의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끝나지 않는 모순 속에서 예술의 독특성을 보여주고,
사회적 합의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치적 감각 공동체의 틀을 만들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75)
리오타르식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재현을 극복하기 위해 반재현을 선택했다.
이로써 그것은 예술을 다른 영역과 구분하여 자율적으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적이었지만 반대로 예술을 공동체 내에서
소통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정치화하지 못했다.
이와 달리 랑시에르는 재현과 반재현의 방법을 구별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랑시에르에게서 미학의 효과는 ‘
따로-함께’의 역설에 있다.
이때 미적 공동체에서는 인간 집단들 사이의 근본적인 불일치를 인정하고, 그렇게 확정된 인간들 및 집단의 정체성을
해체시키는 탈정체화 과정이 발생한다.
여기서 미학의 효과는 탈정체화의 효과이며, 탈정체화된 다중의 공동체로 나아간다.
또한 여기서 그렇게 탈정체화된 인간들이 상호 동일화를 추구하는 주체화 과정이 발생한다. 76)“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치안의 질서 내에서 우리가 (우리와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전제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넘어서) 그 전제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행동할 때 우리는 주체, 정치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77)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의 미적 공동체는 일치와 불일치가 공존하는 “함께-따로”인 공동체이다.
미적 공동체는 감각적으로 경험된 평등이 공동체의 신체에 기입된 공동체, 즉 “함께”의 공동체이자, 동시에 감각
적인 경험이 불평등한 기존의 합의를 재조정하기 위해, 예술과 삶을 일치시키는 재현의 체제와 끊임없이 단절해야하는
“분리”의 공동체이다.
미적 공동체는 사람들이 감각적인 것을 통해 소통하고 그 공통성을 기반으로 형성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공통성은 특이성과 갈등하기 때문에 공동체 내에서 항상 감각적인 분할선은 유동적이어야 한다.
때문에 랑시에르의 미적 공동체는 확정적이지 않고, 제도화될 수 없으며,
(시인으로 대표되는) 예술가는 이 분할선을 끊임없이 조정하는 실천가다.
Ⅳ. 결론
공동체 종언 이후, 공동체의 주체는 추방되고 인간은 사케르가 되어 세계 난민으로 떠돈다.
그렇다면 몫이 없는 자들의 해방은 누구의 힘으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랑시에르는 말한다. “자본의 전개 과정이 만들어 낸 전 지구적 주체라는 형상을 포기하면 우리는 주체화를 국지적,
임시적으로 발생하는 단절들이 만들어놓은 시공간의 확장・연장으로 사유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주체화의 특성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는, 투쟁들을 연결하고 당(party) 형태
의 지속을 통해 주체화에 일관성을 부여하자고 한다.
그러나 투쟁들을 연결하는 모델은 가상일뿐이다.
다양한 장소로 향하는 옛 노동자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려면 식별 가능한 사회집단과의 모든 동일시를 넘어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전체인 자들의 정치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78)
사회적 운동이 자연운동과 달리 주체의 해방과정이라고 할 때, 저항의 관점에서 저항의 거점을 완전히 해체해버린
포스트모더니즘, 자본주의 내부에서 저항이 조직되고 주체가 조직되고 있다는 다중의 공동체, 그리고 그 두 경계에서
랑시에르의 미적 공동체는 각각 서로 다른 해방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랑시에르는 ‘함께-따로’라는 역설을 통해 단지 ‘함께-있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변형시킬 주체성까지
복원하고 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복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공동체 종언 이후에 공동체에 대한 고려에서 가장 큰 장애는 전체주의에 대한 자기검열이다.
푸코에 의하면 신자유주의 통치는 억압적 명령이 아니라 자율적 통제라 할 수 있고, 이미 신자유주의의 고도의 기획은
그동안 정치의 외부였던 공동체까지 통치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조차도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에서 공동체(와 전체주의)를 금기시하는 시각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인 듯하다.
그렇지만 랑시에르가 말하는 연대와 당(party) 없는 주체화과정이 어떻게 현실화 될지는 아직 의문이다.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 따라 출몰하는 시공간에서 사건으로 존재하는 평등의 공동체가 기존의 질서를 확정하는 것에
불과한 윤리적 공동체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기획으로서 정치적 주체를 성장시킬 수 있는지에 대
해서는 아직 확정적인 말을 할 수 없을 듯하다.
랑시에르의 기획이 들뢰즈의 탈주와 다르다곤 하지만 주체화가 개인들의 분노와 각성에만 달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그것과는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녘에 날아오르듯,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현실 인간들의 실천에서 나타날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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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의진, 「68년 5월 이후의 공동체성에 대한 장-뤽 낭시와 모리스 블랑쇼의 대화」, 『프랑스학회학술대회자료집』, 프랑스학회 학술대회, Vol. 2015, No.2, 2015, 80쪽.
2)Jean-Luc Nancy, The Inoperative Communit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41-42쪽.
3)권미원, 『장소 특정적 미술』, 김인규・우정아・이영욱 역, 현실문화, 2013, 249쪽.
4)모리스 메를로-퐁티, 『휴머니즘과 폭력』, 박현모 외 옮김, 문학과 지성, 2004, 178쪽.
5)박준상, 『무위의 공동체』의 몇몇 개념들에 대하여,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46권, 2010, 65쪽.
6)문태운, 「무위의 공동체」, 『인문사회과학연구』, 제46권, 2015, 50쪽.
7)박준상, 앞의 글, 82쪽.
8)박준상, 앞의 글, 74-75쪽.
9)김상철, 김진아, 「영화 웰컨투동막골에서 나타난 공동체의 특징」, 『현대영화연구』, 20권, 2015, 235-236쪽.
10)김상철, 김진아, 같은 글, 237쪽.
11)김상철, 김진아, 같은 곳.
12)문정애,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 모리스 블랑쇼/ 장-뤽 낭시, 」,『오늘의 문예비평』, 2006 봄, 통권60호, 2006, 290쪽.
13)고재정, 「모리스 블랑쇼와 공동체의 사유」, 『한국프랑스문학논집』, 제49권, 2005, 182쪽.
14)고재정, 같은 곳.
15)고재정, 같은 곳.
16)모리스 블랑쇼, 장 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역, 문학과지성사, 2005, 18쪽.
17)모리스 블랑쇼, 장 뤽 낭시, 같은 책, 13쪽.
18)박준상, 「이름없는 공동체-레비나스와 블랑쇼에 대해」,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18권, 2001, 76쪽.
19)고재정, 앞의 글, 183쪽.
20)고재정, 앞의 글, 182-183쪽.
21)서관모,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기획에 대한 비판」,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6권 제4호, 2009. 127쪽.
22)네그리, 하트, 『다중』, 비물질노동이란 연극과 같이 생산과 동시에 소비되는 상품 생산으로써 편안한 느낌, 웰빙, 만족, 흥분, 열정 등과 같은 정동들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노동이다.
23)조배준, 「‘제국’ 그리고 ‘다중’」, 인터넷 마르크스주의 사상사<15> 안토니오 네그리, 2012.7.2.
24)조배준, 같은 곳 참조.
25)윤영광,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기획에 대한 비판」,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12권 제3호, 2015, 60쪽.
26)네그리, 하트, 『공통체-자본과 국가 너머의 세상』, 정남영, 윤영광 옮김, 사월의 책, 2014, 226쪽.
27)윤영광, 위의 글, 69쪽.
28)네그리, 하트, 위의 책, 같은 곳.
29)네그리, 하트, 위의 책, 같은 곳.
30)네그리, 하트, 앞의 책, 453-454쪽. 윤영광, 앞의 글, 70쪽, 재인용.
31)박주형, 「도구화되는 공동체」, 『공간과 사회』, 제23권 1호, 2013, 5쪽.
32)아렌트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정치의 소멸을 주장한 것은 인간의 활동이 ‘행위’가 아니라 ‘노동’, 즉 생산활동에만 연관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한다. 하버마스 역시 인간의 활동을 상호작용이나 실천이 아니라 노동으로 고정한 것에 대한 비판한다. 이에 대해, 박주원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하 노동소외의 상황에 근거한 근대 자유주의적 정치의 소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며, 아렌트와 하버마스가 오히려 마르크스의 노동개념을 생산활동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문제라 지적하면서, 마르크스가 비록 노동개념을 생산활동과 혼용을 하고는 있지만, 마르크스의 전 저작에서 나타나는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나 ‘자본주의적 생산활동’과는 구분되는, ‘행위’ 혹은 ‘자기행위’, ‘실천’ 등으로 보아야 한다고 반박한다. 박주원, 「마르크스 사상에서 ‘생산’과 ‘정치’개념」, 『한국정치학회보』, 제35권, 3호, 2001, 87-93쪽.
33)박주원, 「마르크스 사상에서 ‘생산’과 ‘정치’개념」, 『한국정치학회보』, 제35권, 3호, 2001, 100쪽.
34)박정호, 『철학사전』, 한국철학사상연구회편, 동녘, 1989, 1153쪽.
35)H. Arendt, Was ist Politik?, Ursula Ludz 묶음, 1993, 28쪽.
36)박혁, 「정치 현상으로서의 자유」, 『사회와 철학』, Vol.- No.18, 419쪽.
37)박혁, 같은 글, 424-425쪽.
38)Max Weber, 2009[1918]. From Max Weber: Essays in Sociology. New York: Routledge. 80족.
39)김종기, 같은 논문, 90쪽 참조.
40)최영진, 「헤게모니 정치 개념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정치학회보』, Vol.48 No.1, 2014, 6쪽.
41)김종기, 「랑시에르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시대와 철학』, 제27권 3호, 2016, 90쪽 참조.
42)김종기, 같은 논문, 90쪽 참조.
43)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역, 도서출판 길, 2008, 136쪽.
44)Jacques Rancière, Aux bord du poltique, 양창렬 옮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도서출판 길, 2016. 112쪽.
45)이택광, 「문학의 정치성: 랑시에르의 들뢰즈 비판에 대하여」, 『비평과 이론』, 제15권 2호, 2010, 173쪽.
46)박기순, 「랑시에르의 로댕」, 『미학』, 제76집, 2013, 108쪽.
47)박기순, 「랑시에르의 로댕」, 『미학』, 제76집, 2013, 108쪽.
48)자크 랑시에르, 홍익대 강연문, 4쪽.
49)이영욱, 「참여미술에서의 윤리와 미학」, 『미학』, 제78집, 2014, 151쪽.
50)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역, 인간사랑, 47쪽 참조.
51)이영욱, 앞의 글, 2014, 151쪽.
52)김가희, 앞의 글, 56쪽.
53)이영욱, 위의 글, 같은 곳.
54)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1』,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524-542쪽 참조. 인권은 추상적인 인간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인간의 권리는 현실에서 시민으로서 권리와 생물학적 인간으로서의 권리로 구분된다. 아렌트는 공동체내에서 지켜지는 인권이란 시민권뿐이므로 인권은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한 자들’의 권리가 되기에 결국 추상적인 인권은 무용하다고 하였다. 즉 리오타르가 대화공동체에 끼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었다는 비인간(사케르)의 권리가 이처럼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한 자들의 권리다. 랑시에르에게는 셈에 들지 않는 자, 아감벤에 의하면 호모 사케르로 사용된다.
55)리오타르, 「타자의 권리」, 『현대사상과 인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옮김, 사람생각, 184쪽.
56)리오타르, 같은 곳.
57)Jacques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in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 307-308쪽
58)이영욱, 위의 글, 152쪽.
59)랑시에르, 앞의 책, 185쪽 참조. 진은영,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 『시대와 철학』, 제20권, 2009, 429쪽에서 재인용.
60)박기순, 「랑시에르의 미학과 정치」, 『미학』, 61집, 2010, 87쪽.
61)랑시에르, 앞의 책, 199쪽. 진은영, 같은 글, 422쪽에서 재인용.
62)Claire Bishop, Artificial Hells, 2012, 28쪽 참조. 이영욱, 위의 글, 153쪽에서 재인용.
63)랑시에르는 여기서 베트남 전쟁 당시 익명의 희생자를 위한 1972년의 크리스 버든의 기념비 작업과 2000년에 제작된 크리스티안 볼탄스키의 <전화가입자들>이라는 작품의 비교를 통해 참여미술의 윤리적 전회를 비판한다.
64)랑시에르, 위의 책, 188쪽 참조. 진은영, 같은 곳에서 재인용.
65)Claire Bishop, ed., Participation,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06, 12-13쪽.
66)이영욱, 위의 글, 153쪽.
67)이영욱, 위의 글, 149쪽.
68)이영욱, 위의 글, 150쪽.
69)니콜라 부리요, 『관계의 미학』, 미진사, 2011. 79-80쪽.
70)Claire Bishop,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 October, 110, Fall, 2004, 65쪽 참조. 이영욱, 위의 글 재인용.
71)J. Rancière, Spectator, 2009, 57-58쪽 참조.
72)Jacques Rancière, “Contemporary Art and the Politics of Aesthetics”, in Beth Hinderliter and 4 person (ed.) Community of Sense. Rethinking Aesthetisc and Politics, Duke University Press Durham & London 2009, p. 31.
73)김종기, 앞의 논문, 116 쪽, Jacques Rancière, The Emancipated Spectator, Verso, 2009, 57-58쪽 참조.
74)정혜욱, 「랑시에르의 미학적 공동체와 따로-함께의 역설」, 『비평과 이론』, 제8권 1호, 2013, 211쪽.
75)정혜욱, 같은 곳.
76)김종기, 앞의 논문, 117쪽 참조.
77)김종기, 같은 논문, 117쪽.
78)랑시에르, 동시대 세계의 정치적 주체화 형태들, 중앙대강연문, 2008.12.4., 7쪽.
이강민(부산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