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족은 왜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바쳤나?
수·당 vs 고구려 전쟁 기록을 보면
유독 말갈족 전사들이 눈에 띈다.
고구려군으로 참전한 이들은 어찌나 용맹했던지
중국 역사서에서는
'동쪽 오랑캐 중 최강'이라는 표현까지 할 정도다.
특히 당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온 645년의 침략 전쟁에서
말갈족 병사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이자,
후에 유독 말갈족 병사들만
3,300명을 집단 생매장 시키기도 했다.
황제가 속해 있는 부대를 직접 공격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실학자 정약용은
정약용
"이때의 충격으로 말갈족이 발해의 건국을 직접 도왔다."
라고 해석을 할 정도다.
고구려가 망한 뒤로 말갈족은
고구려 부흥 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이들이었다.
고구려가 망한지 9년 뒤에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 있던 유민들의 저항이 드세지자,
당나라는 인질로 끌고갔던 보장왕을
다시 고구려 옛 영토인 '안동도호부'로 보내서
그를 통해 유민들을 통치하고자 했다.
일종의 바지사장이었다.
보장왕
그러나 보장왕은 당나라의 의도와 달리,
속말말갈족과 내통하여 고구려 복국을 도모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들은
다시 강제로 중국 오지로 끌려가게 됐다.
그러던 중 696년 요서의 영주에 끌려가 있던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들은
중국 내부에서 반란을 일어나자
그 혼란을 틈타 집단 탈출하여
고구려의 옛 땅인 지금의 길림성 연변 부근에 '발해'를 세우게 된다.
이때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인 걸걸중상,
그리고 말갈족의 추장 걸사비우가 이들을 이끌었다.
이후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들을 고구려를 계승한 후계국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용은 좀 이상하지 않는가?
왜 말갈족이 고구려를 부흥시키려고 한 것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 흔히 말갈족은
우리 민족과는 전혀 상관없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 풍습도 전혀 다른,
여진족과 만주족의 선조 아니었나?
맞다.
만주족은 우리 민족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왜 그들은 한사코 고구려 부흥을 꾀하고
또 새로 나라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후계자임을 자처했던 것일까?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 말갈족의 족보
삼국사기에 보면
무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겨날 때부터
말갈족들은 한반도 곳곳을 휘젓고 다니고 있다.
1세기 경에 백제를 치더니
2세기 경에는 신라를 치고
3세기에는 다시 백제를 친다.
앵? 이게 가능함??
말갈의 지리적 위치나, 출현시기를 생각해보면
너무도 황당스럽기만 한 일인데..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는 말갈이라는 명칭은
563년에 처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초반에 나오는 말갈은 그 말갈이 아니다.
흔히 '짝퉁말갈'이라고 해서 위(僞)말갈이라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동예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 강원도에 살던 동예족이 삼국사기 초반에 나왔던 말갈족이다.
그러나 6세기 이후 등장하는 말갈은
이른바 '진짜말갈'이라고 해서 진(眞)말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이 거주하던 곳은
짝퉁말갈이 거주하던 강원도 산골짜기가 아니라,
백두산과 송화강, 흑룡강, 연해주의 삼림지대였다.
즉, 유목민이 아니었다.
▲ 만주 동쪽은 대부분 타이가 숲의 삼림지대다.
우리는 흔히 말갈족, 여진족을 유목민으로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이들은 농경민족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렵·농경 민족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배도 잘 탄다.
그래서 여진족은 해적질도 잘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유목민족인
거란족이나 선비족과 착각하는 것 같다.
유목민족은 만주 서쪽에 건조한 스텝지역에서 살았고
이들은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주 동쪽은 숲이 무성한 타이가 침엽수림 지역으로
이곳에 살던 삼림족들은
중세시대 이전에는 상당히 낙후되게 살아갔었다.
▲ 만주 서쪽(거란족, 선비족, 몽골족) vs 만주 동쪽 (말갈족, 여진족)
이참에 확실히 구분하자.
아무튼 말갈족은 바로 만주 동쪽에 살던 삼림민족으로서
이들의 계보는 일반적으로 이렇다.
상고시대 숙신 → 5세기까지 읍루 → 6세기까지 물길 →
12세기까지 말갈 → 16세기까지 여진 → 오늘날 만주
● 말갈족들은 어떻게 살았었나?
실제로 시기 차이가 큰 여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숙신, 읍루, 물길, 말갈은
몇 가지 특징적인 공통 문화가 있었다.
이들은 예맥족 등의 농경족과 달리 반농 반수렵의 삼림족이었다.
(만주의 종족은 : 유목민인 동호, 농경민인 예맥, 삼림족인 숙신으로 나눠진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이들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① 부여인들과 생김새는 비슷했으나 언어가 달랐다.
언어가 달랐다는 것은 곧 문화가 달랐다는 의미다.
▲ 만주족은 유전적으로 한국인과 가장 닮았다.
다만, 언어적으로는 한국어보다는 몽골어에 가깝다.
어찌보면 현대 한국어는 부여어보다 삼한어에 가깝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② 삼림 속에 살고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살았다.
특히 이들은 반지하식 수혈주거를 하였는데
이는 겨울철 추위가 무척이나 혹독했기 때문이다.
집을 지을 때 지하로 얼마나 깊이 파고 들어가는가
하는 것이 부와 권력의 척도였다.
그래서 족장의 경우에는
사다리를 아홉개나 놓고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③ 군장은 없고 읍락 수준의 촌장이 있었다.
인구가 만명 이상으로 규합되지 않고
수천명 정도의 읍락 부족들이 이합집산을 하고 있었다.
국가발달 수준으로 보면
초기 삼한의 소국들보다 못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④ 더럽고 냄새가 많이 나고 변소를 집안 가운데 짓고 산다.
기록에 보면 집안 가운데에 변소을 두고 살았고,
오줌으로 세수를 했다고 한다.
대략 엄청나게 더럽게 살았던 것이다.
중국 사서에서도 말갈족들을
대단히 지저분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인들은 위생 상태가 좋았다고 하니
이웃끼리 사뭇 달랐던 것이다.
⑤ 문화적인 발달 수준은 매우 낙후됐다.
문화적인 발달 수준도 상당히 낙후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변방에 있어서
중국의 선진문물이 들어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지역은 청동기, 철기 도입 시기가
상당히 늦었고 석기를 오랜동안 사용했다.
그래서 이 지역의 특산물로는
화살과 돌로 만든 화살촉이 유명했다.
중국에 대한 조공물도 돌화살촉과 화살이 주된 물품이었다.
▲ 돌화살촉
⑥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이들의 사냥 솜씨는 상당했던 모양이다.
중국 사서에는 이들은 독을 바른 화살을 잘 쏘았으며
쏘면 백발백중이고
맞으면 즉시 독이 퍼져 죽는다고 적어 놓았다.
⑦ 돼지는 매우 중요한 가축이었다.
돼지고기를 주요한 식량으로 삼았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철이 되면 모두 지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돼지기름을 온몸에 발랐다.
일종의 방한용 크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돼지는 말갈족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재산이었다.
실제로 말갈족의 거주지를 발굴하면
당시 이들이 먹었을 돼지뼈가 다량 출토되곤 한다.
⑧ 여름철이 되면 지하에서 밖으로 나와 숲 속에서 사냥을 했다.
그러다 추위가 닥치면
다시 지하 주거지로 들어갔다.
이들은 농경민과 달리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면서 살았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서
계절에 따라 이동을 했다는 점에서
목초지를 찾아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유목민과는 성격이 달랐다.
⑨ 도둑질을 잘해 주위 나라에 근심거리다.
자연 환경이 원체 열악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유목민족들처럼 이웃한 농경민족을 약탈했는데,
고구려, 부여, 고려, 조선시대까지
농사를 짓고 살던 우리 민족은
내내 이들의 약탈을 당하곤 했었다.
이 때문에 사서에는
말갈족들은 상당히 호전적이라고 쓰여져 있다.
⑩ 법과 풍속의 기강이 없다.
힘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경로사상이나 장유유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경험과 연륜을 중요시하여
노인들이 존중받는 농경사회와는 달리
말갈족들은 힘이 센자가 우선시 되었으므로
젊은이를 더 귀하게 취급한 사회였다.
⑪ 오곡, 베, 담비 털을 생산했다.
만주 지역은 겨울철에는 기후가 매우 낮지만
여름에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고온 다습한 지역이다.
때문에 이곳의 식생은 스텝이 아니라
대부분 침엽수림이 드넓게 펼쳐진 티이가 지대로
주로 숲을 태워 화전을 하는 방식으로
경작지를 넓혀나갔다.
이곳에서는 오곡(기장, 보리, 쌀, 조, 콩) 생산이 모두 가능했고
▲ 만주의 넓은 평야
베를 재배하여 여름철에는 삼베 옷을 입었고
겨울철에는 짐승의 털가죽을 입었다.
특히 담비가죽은 이들의 주요한 특산물이었다.
⑫ 부여족과는 달리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략 손으로 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대시대에 음식을 먹을때
도구를 사용했던 민족은 별로 없었다.
당시 일본도 손으로 음식을 먹었고
유럽은 무려 17세기까지도 대부분 그랬다.
▲ 최후의 만찬 : 모두 맨손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지금도 전세계 인구 중 40%는 손으로 식사를 한다.
그런데 부여족이나 삼한 사람들은
옛부터 그릇과 도구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다.
⑬ 이들은 부여족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실제로 부여와 고구려 영토 안에는 여러 말갈 부족들이 살았다.
고려 시대에도 많은 여진족들이 고려 영토 내에 살았었다.
말갈인들이 보기에 부여인들은
자신들보다 문화수준이 높고 선진적인 생활을 하던 집단들이었다.
때로는 힘으로서 이들의 물건을 강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스스로 복속하면서
높은 문화 수준을 영유하고자 했던게 전통적인 말갈족이었다.
그래서 발해라는 국가를 세우면서도
고구려 유민(혹은 속말말갈 출신)들은 인구의 소수를 차지했지만
지배적인 위치에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들은 중국 역사서에서
숙신, 읍루, 물길, 말갈족의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동시대 기록을 보면 부여 > 삼한 > 일본 > 말갈 순으로 발달된 듯 하다.)
● 과연 이들의 족보가 맞을까?
가끔은 정설로 믿어왔던 신념들이
새로운 검증을 통해 산산히 부숴지기도 한다.
말갈족의 족보가 그러하다.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 → 여진 → 만주
이 족보가 과연 맞을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쭉 그렇게 믿어왔지만
최근 학계의 연구결과는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특히 숙신 → 읍루 → 물길로 이어지는 족보에는
각자 살고 있었던 위치도 틀리고
또 같은 시대에 공존하던 때도 있어서
누가 누구의 조상이라는 식으로
단정 짓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물론 동만주 삼림지역에서
숙신이 가장 먼저 생기고, 읍루, 물길의 순서로 출현한 것은 맞기는 하다.
다만 직계 조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1세기부터 6세기까지
숙신과 읍루, 물길이 거주하던 곳은 대략 이렇다.
그러나 7세기 이후 등장한 말갈은
이들 지역을 모두 포함하되,
북쪽 지역으로 더 확대되는 지역 범위를 지칭한다.
여기에는 숙신, 읍루, 물길 등의 후손이 중심을 이뤘지만
그 주변에 거주하던 사람들까지 몽땅 포함되었다.
망한 나라 부여의 유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로 말갈은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니라,
동쪽 만주일대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이런 말갈은 아래와 같이
크게 7개 부락으로 이뤄졌었는데 아래와 같았다.
물론 이걸 다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속말, 백산, 흑수말갈 정도는 알고 있는게 좋다.
여기서 백돌과 속말은 물길+부여의 혼혈 후손이고
백산은 읍루+옥저의 혼혈 후손이다.
즉 이들은 단순한 말갈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피도 어느 정도 섞인 혼혈인들이었다.
● 고구려가 말갈 부족을 흡수하는 과정
7세기 이전까지 동쪽 만주 일대에는
중국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말갈계 종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선진 문물을 전파해 준 세력은 부여와 고구려였다.
특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었다.
3세기 이래 말갈의 거주지와 고구려의 영역은
만주 일대에서 일정 기간 동안 서로 겹치고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가 말갈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직·간접적으로 통치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말갈족은
결코 단순히 지배를 받던 세력만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망하자 대부분의 말갈족도
구심점을 잃고 사라지게 되는데,
실제로 7개 말갈 부족 중 고구려가 망하자
6개 부족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고구려 시절부터 독자적인 노선이 강했던
북쪽의 흑수말갈만 따로 세력을 이루게 되는 정도였다.
이유가 뭘까?
바로 고구려-말갈의 관계가
흔히 생각하는 지배-종속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갈인들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일원으로 생각했고
토착 고구려인들 역시
말갈인들을 차별적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고구려의 피 점령지였던
낙랑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말갈인들 스스로가 고구려 부흥운동에
주도적으로 발 벗고 나서게 된 것이리라.
이는 말갈족이 고구려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동화되어 살아갔던 세력들인지 살펴보면 대충 감이 온다.
백산말갈
백산말갈은 백두산 일대에 터를 잡고 살던 말갈족들이다.
▲ 백두산
이 백산말갈족은 고구려 건국시기 때부터
고구려인들과 마찰이 잦았다.
초기에 압록강 중류에 살고 있던 토착 고구려인들은
이들 백두산의 사나운 말갈족을 두려워했지만,
말갈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이후로는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말갈족들도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들 백산말갈족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때가 1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 1세기 후반 고구려 영역 : 백산말갈은 이때부터 복속되었다.
이후 이곳은 600년간 고구려의 영토로 유지되면서
고구려의 영토 중 어느 곳보다 더 안정적인 영역으로 운영되게 된다.
사실 민족이라는 것은 100년만 같이 섞여 살아도
대부분은 완벽히 동화를 하기 마련인데,
600년의 시간을 고구려인들과 함께 살았다면
백산말갈족은 그냥 고구려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속말말갈
옛 부여의 영토였던 곳에 부여의 힘이 약해지자
말갈족이 하나 둘씩 들어와 살게되는데,
▲ 만주 벌판
4세기 이후 고구려가 이 일대를 편입하자,
자연스레 속말말갈족도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된다.
(이때 속말말갈족은 이미 부여+말갈의 혼혈인들이었다.)
이들도 300여년 동안을 고구려의 지배 속에 살게되다보니
사실상 완벽히 고구려인으로 동화되게 된다.
사실 발해를 세웠던 주역들도
상당수가 속말말갈 출신들이었는데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발해를 '속말말갈'인들이 세운 나라 쯤을 생각했던 터이다.
가령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하듯이..
이곳에는 부여 유민들도 상당수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간접+직접을 혼용해서 통치하게 된다.
해당 말갈족에게는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게 된다.
고구려인들과 언어도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구려는 이곳을 한때 간접 지배 했던 적이 있었던 정도다.
집단적으로 간접 통치를 했다.
군사적인 면으로 의무를 다했다.
유사시 몸빵에 앞장섰던 것이다.
특수 부대원으로서 전쟁터에서 활약하게 했다.
수당 전쟁 기간 동안 활약했던 말갈군이 바로 이들이었다.
여기에는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순수한 고구려인은 20%밖에 안된다는 논문도 발표했던 터이다.
심지어 당시에는 서역인들도 꽤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로 고구려는 오늘날로 치면 다민족 국가였던 것이다.
단연 두드러진 존재가 말갈족이었다.
생활 풍속면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싸웠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주변 국가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번번히 고구려로 이주했던 것이다.
거물급 인사들이 당시 줄줄이 망명을 해왔다.
당시 집단 망명을 해왔다.
불교라는 종교가 필요했다.
불교를 국가적으로 진흥하게 된 것이다.
유민들은 서서히 고구려인이 될 수 있었다.
또 중국의 선진문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고구려의 국력향상에 기여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바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치세기였다.
또 거물급 망명자에게는 되도록이면 자율권을 부여하고자 했다.
중국인 망명 정치가들을 자주 활용했다.
동수, 유주자사 진 등이 대표적이 인물이었다.
고구려인 특유의 개방성과 포용력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첫댓글 장문어 글을 한참동안이나 읽었습니다
복잡하고 헷갈리고 어렵습니다 ~.~
내용이 많은 자료죠ㅎ. 우리가 배우는 우리나라고대사 대부분이 왜곡되었고, 특히 일본식민지 시절에 많이 왜곡 되었습니다.
많이 공부했네요~
고대사는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할 내용입니다^^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여러번 읽어봐얄 것 같네요...^^
우리가 알아야 고대사 내용입니다^^ 조선시대때 중국에 사대하느라 고대사 관련 책들이 많이 없어졌다고 하더군요.그리고 일제시대 친일 사학계열이 판치는 우리나라에서 좋은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고구려인이 한국에 몇%나 될까요?? 당이 중국각지로 흩어버린 걸로 아는데. 한반도엔 신라인이 50%는 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