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People-정상환 story, 노예에서 시민으로
‘와스프’(WASF)라는 말이 있다.
그동안 미국인들이라면, 또 미국에 가서 살려면, 꼭 인식해두어야 했던 기초적 합성어였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인들과 세계인들의 인식 속에서 지워지고 있는 역사적 유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한 인식의 변화는, 세계가 하나로 엮이는 글로벌리즘의 시대, 흑백의 피부색으로 인한 인종차별이 없어진 휴머니즘의 시대가 되면서 부터이다.
-2009년 7월 젊고 잘생긴 흑인 부부와 두 딸이, 17세기 아프리카 노예무역 본거지로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돼 있는, 가나의 케이프코스트 캐슬을 방문했다. 그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미국으로 팔려가기 전, 머물렀던 지하 동굴과, 노예들이 배에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통과했던, ‘돌아올 수 없는 문’도 둘러봤다. 아마도 240여 년 전 쿤타 킨테가 옷이 벗겨지고, 두들겨 맞은 채 치욕스럽게 떠났을 그 자리를, 전 세계인의 지대한 관심과 주목 속에 방문한 이 유명한 흑인 부부는 남다른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이곳이 엄청남 슬픔이 깃든 장소라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운명의 여행을 떠났던 곳이라 느낌이 남다르다. 고통스러운 과거가 아프리카뿐 아니라 전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악과 싸울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부부는 44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부부였다. 오바마는 그의 대통령 당선을, 오랜 세월 차별 속에서 고통당한 미국 흑인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직도 기본적 인권과 자유가 유린당한 채, 악의 구조에 시달리는 전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렇게 책은 그 끝을 맺었다.
바로 정상환 변호사님이 펴낸 ‘노예에서 시민으로’라는 제목의 책의 끝맺음이 그랬다.
정 변호사님은 나와는 특별한 관계로, 2004년 7월 1일 내 검찰현직에서의 마지막 보직인, 대검찰청 감찰부 감찰 제 2과 감사담당관의 임무가 주어졌을 때 그때, 같은 부서에서 일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정도 깊어, 나이가 더 위인 나를, 깍듯이 챙겨준 분이어서, 늘 내 가슴 깊은 곳에, ‘정말 감사한 검사’로 정겹게 담겨있는 분이다.
그런 인연이 있기에, 정 변호사님으로부터 출판기념회를 갖는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만사 제쳐놓고서라도 그 자리에는 꼭 발걸음할 것이라고 작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그 현장으로 달려가서 40,000원이라는 책값을 치르고, ‘노예에서 시민으로’라는 그 책과 ‘대통령의 용기’라는 책 두 권을 받아들게 되었는데, 우선 저자가 직접 썼다는 ‘노예에서 시민으로’라는 그 책을 먼저 펴든 것이다.
정 변호사님은 책머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라는 제목을 붙여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쿤타 킨테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쿤타 킨테라고 하면 미국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6대조 200년간에 걸친 방대한 가족사를 쓴 ‘뿌리’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헤일리가 어린 시절에 할머니로부터 늘 듣던 ‘그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그 소설은, 1977년 미국 ABC사에서 8부작 TV시리즈물로 제작되어 미국뿐만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750년 이른 봄, 서아프리카 감비아 해안에서 나흘 정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닿는 주푸레 마을에서, 오모로 킨테와 빈타 킨테 사이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나는데, 그가 바로 그 소설의 주인공인 쿤타 킨테라 했다.
쿤타 킨테의 어린 시절, 그 삶의 모습을 담은 그 일부를 여기 옮겨 적는다.
-어린 쿤타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와, 대지를 두들기며 세차게 퍼붓는 빗소리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할머니가 어린 아이들을 모아놓고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언제나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만딩카 족은 나이를 언급할 때, 우기를 몇 번이나 맞았느냐고 물을 정도로,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갔다. 바람과 비는 그의 육체를 키웠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마을의 역사와 위대한 조상들의 이야기는, 그의 정신을 살찌웠다. 아프리카는 최초의 인류가 출현한 곳이고, 풍부한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연과 자신들의 전통, 그리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어린 쿤타는 어느 날, 어머니가 푸다노 잎을 갈아 국을 끓였다가 식힌 후, 그 새까만 잉크 빛 국에 손과 발을 담그는 것을 보고,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아버지가 대답했다. “여자들은 검을수록 더 아름다운 법이다.” 쿤타는 왜 그러느냐고 다시 물었다. 오모로는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겠지.”라고 말했다.-
미국의 많은 흑인들은, 오랜 기간, 어쩌면 지금도 일부는, 피부색이 옅을수록, 머리가 직모에 가까울수록 아름답다고 생각해왔고, 많은 흑인들은 조금이라도 백인에 가까워지기 위해, 독한 화학약품을 사용하여 심한 곱슬머리를 펴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피부색을 희게 하기 위해, 약품 처리를 하고 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쿤타 역시 어릴 때부터, 미국의 흑인들이 그들의 자랑스러운 문화와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그 몸부림 속에서, 함께 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767년 어느 날 북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구하러 마을을 나섰던 쿤타는, 4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는 눈이 가리고 입이 막힌 채 묶여 있었다. 백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였으며, 달군 쇠로 그의 몸을 지졌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자유를 찾으려는 그의 의지까지 꺾지는 못하였다. 그는 노예선에서 반란을 시도하였으며, 미국에 건너와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로 인해 한쪽 발이 잘려나가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랑스러운 만딩카 전사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미국 땅으로 잡혀간 아프리카 초기노예들의 그 처참한 순간들이, 소름끼치는 전율로 내 가슴에 담겼다.
같이 잡힌 흑인들의 태반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쿤타 킨테는 그해 메릴랜드 주 애나폴리스에 도착했고, 곧바로 버지니아 주 어느 농장으로 팔려갔으며, 그 농장 주인으로부터 토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같은 농장 흑인 노예인 벨 윌러와 결혼하여, 유일한 혈육인 딸 키지를 낳는다.
노예의 어린 자녀들을 마구 팔아넘기곤 하던, 당시 백인 사회 분위기가 무서워, 단지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뜻에서, 만딩카 어로 ‘붙어 있으라’라는 의미를 담아 그 이름을 지어줬던 딸 키지, 10대 후반에 노스캐롤라이나로 팔려갔고, 그곳에서 백인 주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바로 ‘뿌리’ 그 책을 쓴 알렉스 헤일리의 4대조 할아버지라고 했다.
2008년 미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흑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통해 널이 유포된 문장이 있는데, 바로 이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로사가 앉았기 때문에 마틴이 걸었고, 마틴이 걸었기 때문에 버락이 달렸고, 버락이 달렸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날 것이다.-
400여 년의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문제인, 흑백 인종 갈등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잘 정리되어 있는 문장이라고 한다.
정 변호사님은 ‘검은 혁명’ 그 책머리에서, 그 문장에 담긴 사연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로사 파크스라는 42세의 흑인 여성이, 시의 조례 및 관행에 따라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을 요구한 백인 버스기사의 요구를 거절하고, 계속 자리에 앉아 있다가 체포된 일이 발생하였다. 이 작은 사건은, 미국 민권운동사에서 큰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었으며, 유명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한 젊은 흑인 지도자가,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다. 그는 여러 차례 투옥과 테러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수많은 가두 행진과 연좌 농성 등을 주도하였으며, 마침내 1963년 8월 워싱턴 D.C.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한 워싱턴 행진을 이끌었다. 그날 그는 링컨 대통령 기념관 앞에서 그 유명한 “I have a dream”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이 있은 지 45년 후, 버락 오바마는 최초의 주요 정당 흑인 대통령 후보로서 선거에 출마하였다(달렸다). 오바마가 민주당의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한 것 자체도 충분히 역사적인 사건이었는데, 이에서 더 나아가, 그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발판을 딛고, 흑인 아이들이 앞으로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듯 희망의 삶을 살 것이라고, 정 변호사님은 미국 사회의 미래 진단을 했다.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불을 지핀 로사 파크스 여사가, 지난 2005년 10월 24일 저녁,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녀가 사망하자 교회와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로사에게 국회의사당에서 조의를 받는 영예를 줘야한다고 까지 주장하고 나설 정도로, 로사는 흑인뿐만이 아니라 백인까지도 포함하는 미국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책의 요약은 이렇다.
1장 흑인 노예제의 시작, 2장 노예해방과 남북전쟁, 3장 다시 찾아온 암흑기, 4장 검은 혁명, 5장 투쟁은 법정에서도, 6장 위대한 흑인의 시대, 이렇게 여섯 개의 장으로 쓴 이 책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넘어오는 두세 달 동안 배 안에서 수많은 흑인들이 숨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너무나 비참한 초기 흑인 노예들의 삶과, 흑인 노예를 채찍질하고 신체 일부를 절단하거나 거세하거나 불에 태우는 등의 잔혹한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던 백인들의 만행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흑인들의 비참한 삶을 그린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라는 책을 쓴 헤리엇 비처 스토 부인의 이야기, 흑인들은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간에 미국 헌법상 시민이 될 수 없으며 연방의회는 연방의 관할 내에서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한 1857년의 연방 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대 샌퍼드’ 판결 이야기, 남북전쟁 직후인 1877년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하자마자 남부 각 주에서 이미 주어진 흑인들의 투표권을 다시 제한하고 흑인들이 백인들과 공공시설을 함께 이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한 법률들의 통칭인 ‘짐 크로우(Jim Crow) 법률’에 대한 이야기, ‘분리되지만 평등한’ 좌석을 제공한다는 핑계로 열차에 흑인과 백인의 좌석을 분리한 법률에 도전한 흑인 호머 플레시에 대한 1896년 연방 대법원의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 이야기, 세계흑인개선협회를 조직해서 ‘블랙 파워’그리고 ‘Black is beautiful’ 등을 주창하면서 흑인들에게 인종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킨 자메이카 출신의 마커스 가비 이야기, 시위를 금지하는 법원의 명령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된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가 쓴 ‘버밍엄 감옥으로부터의 편지’ 이야기, 그리고 그가 1967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시에서 마침 그곳 시장 선거에 출마한 칼 스토크스의 지원 유세에 나섰다가, 묵고 있던 숙소에서 몇 발의 총성과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만 이야기, ‘누구도 당신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누구도 당신에게 평등이나 정의나 다른 어떤 것을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남자라면 스스로 쟁취해야 합니다.’라면서 흑인들에게 과격한 저항을 부추겼던 맬컴 엑스 이야기, 흑인들을 위한 민권법률의 제정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 시대의 위대한 흑인으로 평가되는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와, 영화배우 겸 가수 윌 스미스와,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과,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 골프의 황제 타이거 우즈와,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 콜린 파월과, 최초의 흑인 여성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와, 세계 최고의 소아과 신경외과 전문의 벤자민 카슨 교수와,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 닐 타이슨 박사 이야기 등, 흑인들의 이야기가 시대적 배경과 함께 총 망라되어 있었다.
해리엇 비처 스토 부인 이야기다.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났고, 남편도 작은 신학교 교수였던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죽어가야 하는 톰 아저씨의 질곡 같이 슬픈 사연을 담은 것으로, ‘편견으로 가득 찬 책’이라는 노예제도 찬성론자들의 격렬한 비판 속에서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그 책은 비인간적인 노예제도 폐지 여론을 불러일으켜, 그 이후 9년 뒤 남북전쟁을 촉발하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작품 속에서의 톰의 말이다.
"비록 나의 몸은 당신에게 팔려 왔지만, 내 영혼만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 이야기다.
1968년 4월 4일 저녁,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 킹 목사가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시 로레인모텔 306호 발코니에서 모텔 밖의 군중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날아든 한 발의 총탄이 킹의 목을 관통했다.
그가 이곳을 찾은 것은 청소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범인으로 체포된 제임스 얼 레이는 당초의 자백을 곧 번복하며 자신은 단지 ‘거대한 음모’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주장해서, 한 때 FBI와 군부 배후설 등 온갖 음모론도 제기됐지만, 레이는 결국 99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난 1998년 감옥에서 숨졌다.
킹의 죽음에 분노한 흑인들은 미국 전역의 168개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켜, 46명이 사망하고, 2만1,000여명이나 부상했으며, 불이 난 곳도 2,600여 곳이나 됐다.
당시 대통령인 존슨은, 연방정부 건물에 반기 게양을 지시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시신은 1억2 000만 명의 미국인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조지아 주 애틀랜타 묘지에 묻혔는데, 그 묘비에는 그때로부터 5년 전 워싱턴 대행진 때의 연설 구절인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혔다 한다.
-자유롭게 되라. 자유롭게 되라. 나는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
1963년 8월 28일, 킹은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 광장을 가득 메운 30만의 인파 앞에서, “I Have a Dream”이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인종차별이 종식되고 정의의 강물이 흐를 때까지, 비폭력운동을 계속하겠노라고 선언하던 킹 목사의 그 열변을, 사람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맬컴 엑스 이야기다.
맬컴은 미국 오마하, 네브래스카에서 얼 리틀(Earl Little)목사의 일곱 번째 아들인 맬컴 리틀(Malcolm Little)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프리카 귀향 운동을 주도했는데, 이것이 백인들의 분노를 샀고, 맬컴이 출타중일 때, 한 무리의 백인들이 어느 날 맬컴의 집을 습격해 아버지와 형제들을 살해했다.
맬컴의 회상에 의하면,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죽어있었고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었다고 했는데, 이때부터 맬컴은 정신이상이 된 어머니와 함께 가난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맬컴 어머니 루이즈 노턴(Louisa Norton)은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며, 그래서 맬컴은 평소, "내 안에 흐르는 백인 강간자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증오한다."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맬컴은, 중학교 시절의 백인 영어선생님에게 들은 이 한마디로, 변호사가 되려했던 꿈을 접고, 보스턴에 사는 이복누이에게 얹어 살면서, 빈민가의 그 험한 삶에 익숙해진다.
“삶에서 제일 필요한 건 현실적인 자세다.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마라. 사람들이 너를 좋아한다는 건 너도 알 거야. 하지만 넌 깜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네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해봐라. 넌 물건 만드는 재주가 좋지. 모두들 목수 솜씨를 높이 쳐준다. 왜 목수 일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니? 사람들이 인간적으로는 너를 좋아하니까 일거리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거야.”
챙겨주는 척 하면서, 청소년의 꿈을 짓밟아버린, 백인 선생의 모진 그 비 인격이 참 얄밉다.
맬컴은 어릴 때 백인들에 의해 붙여졌던 '리틀'이라는 성을 버리고, ‘알 수 없다.’는 뜻의 ‘엑스’(X)를 자신의 성으로 사용했다.
흑인들의 성이, 원래 자신들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이마저도 백인들의 강간에 의해 혈통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혹은 평원에서 노예 사냥꾼에게 사냥 당해서, 신대륙에 끌려온 흑인들은, 미국사회에서 약 400년여 동안 농·공업은 물론 각종 전쟁에서까지, 그야말로 검은 황금 노릇을 해왔다. 이런 흑인자원들은 백인과의 혼혈 정도에 따라 종자가 구분됐다. 미국, 흑인과 백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는 '뮬라토(Mulatto)', 뮬라토와 백인사이의 아이는 '쿼드룬(Quadroon)', 쿼드룬과 백인사이의 아이는 '옥토룬(Octoroon)'이라 부르며, 정책적으로 강간하여 종자를 개량하면서, 기독교식 성(姓)을 지어줬다. 백인 상전의 명령에 따른 육체노동만 알아야 했으므로, 행여 스스로 글을 깨우치거나 배우려고 했다면 죽임을 당했다. 내 성(Family Name)은 진짜 나의 성씨가 아니라, 백인이 강요한 것이다. 내 조상이 물려준 아프리칸의 성씨를 찾을 때까지, 내 성을 X라고 불러 달라."
맬컴은 어느 한 연설에서, 백인들을 가리켜 '파란 눈의 악마', '악마 같은 인종', '국제적인 암살범이자 강간범'이라는 격렬한 어조로 백인들을 싸잡아 비판하고 나서서, 백인들 온통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또 맬컴은, 흑인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비폭력투쟁을 주장한 킹 목사와는 달리, 흑인들의 현실과 분노를 그대로 고발한 연설로, 차차 흑인 인권운동에서 명성을 쌓는다.
심지어 킹 목사 그를 향해, '흑인의 탈을 쓴 백인'이라면서, 그의 흑인민권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 이유로, 흑인들 중 과격파들은 맬컴 엑스를 지지했고, 그들은 또 뭇 흑인들을 선동해서 폭력을 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마약과 술과 범죄에 중독된 흑인빈민촌의 흑인들을 찾아, 백인들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흑인들을 계몽하려는 활동도 꾸준히 진행하였다.
그 연설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이렇게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가, 본디 아프리카 제국의 왕족이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왜 검은 피부를 희게 보이려고 노력하는가? 곱슬머리를 바로 펴려고 하는 것은 누구를 닮겠다고 하는 짓인가? 검은 종족이란 사실이 감출만큼 부끄러운 것인가? 왜 우리가 이곳에 강제로 끌려와 살게 된 것도 분하고 억울한데, 왜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을 닮으려고 하는가? 비록 아프리카 우리들 고향에서 살지는 못하지만, 조상이 물려준 유산인 신체를 당당하고 소중하게 여깁시다.”
과격한 맬컴은 주위에 적을 많이 만들게 되고, 결국 1965년 2월 21일 오후 3시 10분, 뉴욕 맨해튼의 오두본 볼룸에서 연설 중, 3명의 흑인분리주의 결사단체 소속 저격수에 의해, 16발의 총탄을 받고 피살당한다.
이 책 속에서, 정 변호사님의 휴머니티와 땀의 흔적을 봤고, 흑인들의 투쟁과 쟁취의 그 역사에 내 또 깊이 감동했다.
내 진정한 마음으로, 그 모두에게 찬사를 보낸다.
끝으로, 1920년대에 활동한 흑인 문학가로서 흑인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기치로 내 건, 소위 ‘할렘 르네상스’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랭스턴 휴즈의 시 한 편을 마지막으로 옮겨 적으면서, 정 변호사님이 쓴 ‘검은 혁명’ 그 독후감의 끝을 맺는다.
백인의 피가 어느 정도 섞인 랭스턴 휴즈 역시, 어린 시절에 그 아버지의 삶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술회할 정도로, 너무나 아픈 어린 시절을 보낸 이력이 있다.
“나는 나의 아버지와 그의 이상한 ‘자신의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흑인들을 매우 많이 좋아했다”
1921년 ‘The Crisis’에 발표된 것으로, ‘흑인이 강을 노래하다’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그 시 전문은 이렇다.
나는 강들을 알고 있다.
태고 적부터 존재하였고
사람의 정맥을 흐르는 피보다 더 오래된
수치스럽게 내쫒기고 갇혀서
우리의 저주받은 운명을 조롱하는
미치고 주린 개들에게 둘러싸인 채,
우리가 죽어야함 한다면, 그래 고귀하게 죽자.
우리의 귀중한 피를 헛되이 흘리지 않도록
그러면 우리가 맞서는 저 괴물들도
우리의 주검 앞에,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으리.
오! 동포여!
우리는 공동의 적에 함께 맞서야 한다.
수적으로 압도당할지라도
우리의 용기를 보여주자.
천 번의 공격에
단 한 번의 치명타로
열린 무덤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들 어떠랴?
남자답게 저 겁쟁이 살인자들에 맞서자.
막다른 벽에 몰려 죽어가면서도
마지막 주먹을 날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