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마음을 추슬러서 윗집 친구와 여행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속리산 자락 ‘화양 구곡’이라는 계곡하고 안동으로 삼았다.
시골길을 달려가는 맛이 그런대로 여행기분이 나서 좋았다.
낙엽은 아직 붙어 있고 길은 한적해서 운전하기도 무리가 없고 이야기로 지루한 줄을 모르면서 달렸다.
또 가다가 간간히 보기가 좋은 곳이 있으면 내려서 사진도 찍고 그러면서 달려갔다.
한참을 가다 드리어 이런 저런 계곡을 훑어서 정작 가고자 했던 화양계곡에 도달하니 시간도 너무 늦고 입장료도 내야 하는 지라 우리는 그냥 안동을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고 드디어 안동에 도달하여 하회마을에 친구가 안다는 탈박물관의 관장을 만나러 갔지만 문전박대 당하고 하릴없이 시내로 달려갔다.
시내에서 적당히 저녁을 마치고는 우리 친구가 아는 사람을 만나 소주한잔을 걸치는 사이 나는 차 속에서 모자랐던 잠을 보충하고 우리는 잠과 샤워를 해결하려고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가격은 5천원으로 큰 도시보다는 싼 편이란다.
우리 와이프는 자주 가는 곳이긴 하지만 난 생전 처음 찜질방에 들어가는 길이라서 조금은 긴장도 되고 흥미롭기도 했다.
왜냐면 나는 그런 다중에 섞여서 잠을 잔다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또 새로운 환경에 발을 들여놓는 다는 것이 좀 두렵기도 한 반면 뭐든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조금의 흥분을 유발하기에 그럴 것이다.
먼저 샤워를 하려고 남탕에 들어가니 여기 저기 많이 다닌 목욕탕 중에서도 처음 보는 시설물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촌구석 목욕탕에서 생전 처음 보는 시설물을 만난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그것은 우선 밑변이 50cm정도 되는 반구 형태의 표면이 거친 시멘트덩어리이다.
이것은 발의 각질 때를 문지르라고 만들어 놓은 모양인데 그 배려가 너무도 자상하여 늘 갈라진 발의 각질로 추운계절만 돌아오면 고생을 하는 나로서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고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보통의 목욕탕에서도 가끔 거친 시멘트 바닥을 구석에 조금 해 놓은 곳이나 거친 돌 판을 설치한 곳이 없는 것은 아니나 여기처럼 여자의 앞가슴처럼 봉긋하게 해서 발뒤축은 물론이거니와 마당발이 아닌 나는 다른 목욕탕 시설에서는 늘 아쉬움으로 남던 발의 오목한 바닥부분도 샅샅이 비벼서 껍질을 벗겨 낼 수 있는 참으로 절묘한 시설물이고 배려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벼 볼수록 신묘한 느낌이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벽면을 보니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가려운 곳을 긁어 주고도 남는 신묘한 기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등밀이 기계였다.
일 미터 높이의 사각형 기계에 20센티 정도의 약간 봉긋하면서도 커다란 호떡 같은 것은 이태리 때밀이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스위치를 누르면 그것이 천천히 돌아가고 거기에다 등짝만을 대면 자연히 등짝의 때를 밀 수 있는 그런 도구인데 이것은 단순히 주인의 창의물이 아니고 분명 대량 생산된 기계일진데 여기서 처음 본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아마는 다른 용도의 기계를 특별히 주인의 창안에 의해서 변용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혹시 주인이 ‘때밀이 출신?’
우리나라는 아직 때밀이 해서 이런 커다란 업소를 만들 수 있는 그런 좋은 나라가 아직은 아니다.
아무튼 절묘한 도구였다.
우리가 등짝의 때 때문에 또 얼마나 찜찜함을 안고서 목욕탕을 나오는가?
나같이 유연성이 부족한 놈은 양손을 위로 밑으로 해서 난리를 쳐가면서 꼬고 비틀고 하며 비벼도 등짝 한 복판 호떡 댓 개 크기는 늘 불모지로 남겨 놓는 통에 목욕이 다 끝나도 그 미완의 아쉬움이 얼마나 컸던가?
누구보고 밀어 달라고 등을 내밀 수도 없고 수건을 잡고 위아래로 비벼보니 처삼촌 묘 벌초 격이고 깨끗이 씻은 얼굴에 코딱지 묻어 있는 듯 한 그 찜찜함이란!
그 옛날 우리 아버지들은 그래서 꼭 우리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셨는지도 모르겠다.
간지러운 고사리 손일 망정 사랑이라는 때밀이 수건이 밀어 주는 그 스침은 그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충분할 만큼의 혈육의 정을 피부로 확인 하는 일종의 의식이면서 기쁨이셨을 것 같다.
요즈음은 다 샤워기로 ‘쏴아!’하면 부정이고 등짝의 때고 아쉬움이고 다 ‘개코나발이’되는 통에 멋도 정도 다 사라졌다 하겠다.
이어서 우리는 찜질방으로 향했다.
나는 당연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귀마개를 챙겨 갔다.
아니나 다를까 찜질방 안은 내 어릴 적 시골 바깥마당만큼이나 커다란 공간이었는데 사람들이 이리저리 막 잔칫상 치우기 끝의 어질러진 젓가락처럼 제멋대로 한 개만 뒹구는 놈 짝으로 뒹굴러 있는 놈 할 것 없이 널브러져 있는데 벌써 여러 개의 코고는 음이 여기저기서 각자의 폼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이미 피곤이 쌓여서 잠의 연속에서 몸이 움직이고 있던 터라 귀마개를 힘 있게 틀어넣고 대충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는데 막은 귓구멍 너머로도 코고는 소리와 특히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지만 그래도 잠이 더 깊어서 그런 것들을 다 덮고도 남았다.
한참을 자는데 모가지로 땀이 차오를 만큼의 더위가 ‘스몰스몰’ 차올라 나의 깊은 잠을 막았다.
나는 원래 오랜 자취생활 끝에 결혼을 한 지라 결혼초의 그 더위가 참으로 고역이었다.
이불에서는 도망 갈 곳이 달리 없는 터라 할 수 없이 다리 한 짝이나 팔 한 짝을 마누라에게 주고 나는 개구리가 벽에 붙어 다리듯이 벽에 몸을 붙여서 열기를 식히면서 잠을 청하곤 하였다. 그리고는 적응이 되어서 오랜 세월을 지나다 요즈음은 다시 작업실로 나와 지내면서 다시 그 자취시절의 시원함으로 자의 반 타의 반의 형편으로 해서 돌아간 형편이다.
따라서 적당히 시원함에 내 몸이 알맞게 적응되어 있는 상황인지라 목에 땀 차오르는 것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고역이 다시 돼 버렸다.
그런 지금 이렇게 여행 나와서 그런 지경과 맞닥트리니 난감하기만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뒤척이면서 잠을 자고 깨니 내가 아침 운동을 하러 갈 시간 그 시간이 아닌가?
몸이란 놈은 참으로 묘해서 피곤이나 정신을 앞질러 가는 모양이다.
이왕 깬 잠 다시 자기도 그렇고 후덥지근함도 싫고 해서 부스럭대서 친구를 깨워서 우리는 해장국집을 찾았다.
얼떨결에 들어간 해장국집은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붐비고 맛도 괜찮았다.
일찍 먹은 어제저녁 탓에 한 그릇을 뚝딱 해 치우고 우리는 도산서원을 향했다.
도산 서원은 몇 번인가 지나면서 들렸었는데 많이 바뀌어서인지 진입로부터 그 느낌이 생소했고 서원 안도 그 때와 지금의 내 보는 눈의 차이 때문인지 전혀 생소했다.
정사각형의 퇴계가 머물렀다는 집의 조그만 사각형 연못이 특이했고 또 마루의 구조가 재미있었다. 집의 거의 반을 마루가 차지하고 또 바깥부분은 각개 목을 듬성듬성 대서 구멍이 뚫리도록 한 마루가 특히 했다. 아마 여름날 시원하게 잠자는 용도 인 모양인데 참으로 특이한 구조였다.
그 뒤로는 장서각이 있고 또 그 옆쪽으로는 장판고가 있어서 그 옛날 나 같은 환쟁이가 땀 흘려 가며 열심히 인쇄판을 깎고 또 찍고 했을 것을 생각하니 옛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보다는 그 예인들의 땀 냄새가 더 배 나오는 듯 했다. 박물관에 진열 되어 있는 그 시절의 책들이 다 그네들의 땀의 결정체였으리란 것을 생각하니 글쟁이들의 고고함보다 각쟁이들의 삶의 무게가 더 아련했다.
집들은 절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용도에 맞게 다양한 구조를 가지고 이리저리 만들어진 모습들이 재미있었다.
이어서 강 쪽의 산책로를 돌아드니 제법 그럴 듯한 풍광을 지닌 아스라한 곳이 나오는데 퇴계선생이 묵상을 하던 그런 곳이란 팻말이 서 있는데 문득 거기 바닥에 어느 여인이 자리를 펴고 좌정을 하고 앉아 묵상을 하고 있다가 우리의 뜻하지 않은 이른 아침 출현에 묵상이 흩어지는 지 이리저리 몸을 흔드는 폼에 우리는 얼른 자리를 피해줘야만 했다.
누구나 그런 한적한 곳에 무념무상으로 흐르는 공기를 바라보고 싶은 때가 있고 또 그런 시간을 실지로 갖는 다는 것은 돈으로 주고 살 수 없는 커다란 기쁨일 것이다.
그녀가 비우려고 하는 마음의 그릇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번 기회에 말끔히 비워서 공기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길 빌어 본다.
이어서 우리는 퇴계선생 생가를 둘러 봤다.
소슬 대문은 컷고 후손들이 살고 있는지 그런대로 살아 숨 쉬는 집이었다.
생전에 살던 집의 규모와 지금의 규모가 같은 지는 잘 모르겠으나 학자가 살기에는 너무 크고 호화로운 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이육사 문학관을 지나가는데 주변에 낚았지만 기와집들이 여러 채 있는 것이 그 예전에는 아마 이 동네가 사뭇 ‘뼈대’있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쇠락할 대로 쇠락해서 그야말로 이끼만이 무성한 그런 기와집들이었다.
어느 집에 들르니 할머니 두 분이서 땅콩을 고르며 계신데 집안을 훑어보니 세월의 때가 너무도 진하게 묻어 있어서 숙연해 질 정도였다.
그 한 참에는 호령하면서 살던 집이었을 텐데 이렇게 퇴락해서 이끼 낀 기와와 그을림으로 덕지덕지한 벽면들이 그 옛날의 호화로움을 다 덮어버리고 마지막 숨을 헐떡이다 그 노인들이 생을 다하는 날 이 집도 같이 사그라질 것 같았다.
뭐든지 황혼은 다 숙연하고 슬프고 후회스럽기만 한 것인가 보다.
우리는 이어서 마을을 이리 저리 둘러보다 산 속의 커다란 기와집을 발견하여 가보니 이 지역의 댐 건설 때 수몰 될 뻔한, 사방이 7칸인 미음자 어느 양반 집이라는데 산속에 이렇게 옮겨 져와 지키는 이가 없어서 그 역시 쇠락해 가고 있었다.
규모가 일반 가옥으로는 대단히 큰 편이고 그 구조가 사뭇 재미있었다.
안채는 안마님의 거처 공간이고 사랑채가 바깥마님의 거처라는데 사랑채의 그 협소함이 그 옛날 양반가의 부부관계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고 안채로 드나들기 위한 쪽방과 쪽문의 구조가 재미있었다.
요즈음 아줌마들의 떵떵거림의 원조는 다 그 옛날 여인네들의 위상의 반영이란 생각에 씁쓰름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무슨 산꼭대기 정자인지 하는 곳을 가자고 하는 바람에 또 차를 몰아 비포장 강둑을 따라 가다 길이 공사 중이라 끊겨서 친구를 먼저 보내고 나는 차로 돌아서 물이 얕은 곳으로 차를 몰아 건네 오기로 하고 돌아오는데 마침 갤로퍼 차량이 우리가 지목 한 곳을 잘도 건너 길래 잘 됐다 싶어 나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열심히 차를 몰아 그곳으로 가서 친구를 데리고 돌아오는데 아뿔싸!
나의 방정이 결국 문제를 일으켰다.
물방울이 이는 곳을 피해서 핸들을 조금 트는 순간 깊은 곳으로 차가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기우뚱 한 속에 시동은 꺼지고 물은 차오르는데 난감 그 자체에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후딱 스쳐 지나갔지만 별도리 없이 물을 덤벙거리며 걸어 나와 긴급 출동을 부르고 차를 보니 운전대부분이 가라앉아서 물이 운전대 방석과 나란할 정도로 차오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조수 대는 들려 있어서 엔진 부분은 물 위에 있으나 머플러는 완전히 물에 잠기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꾸물거리니 ‘진퇴양난’ 바로 그 자체였다.
나의 순간적인 미련함 치고는 그 상황이 너무나 어이없었다.
이어서 렉카 차가 한참 만에 왔지만 자기도 빠질 수 있다면서 들어 갈 수가 없단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바로 그 옆에서 농부들이 포클레인을 가지고 일을 하기에 포클레인을 부르니 그때 이미 비는 질척질척 오고 있는 상황이라 강 한 복판의 기우뚱한 차를 생각할 때 참으로 아슬아슬하기만 하였다.
포클레인으로 겨우 끌어냈지만 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과연 시동을 걸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어려운 판단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시동을 안 걸고 30k 떨어진 안동 정비소까지 견인 해 가서 안전하게 점검하고 시동을 거느냐 전기계통의 합선으로 엄청난 손실이 발생할 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 시동을 땅겨 보느냐 하는 판단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버렸다.
나는 입으로 차를 몇 번 호호 불어서 그 많은 장치들에 낀 물을 불어서 날리고 시동키를 그 어떤 때보다 자신감으로 힘 있게 돌리니 다행히 시동이 걸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열심히 차에 찬 물들을 뽑아내고 짜내고 난리를 한참 부리고서 차를 몰았다.
하지만 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차는 가긴 했지만 물 건널 때 들어간 사륜 기아가 빠지질 않아서 아무리 달려도 오십 킬로를 넘지가 않았고 소리만 엄청 성질난 개처럼 으르렁 거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작년에 캐나다에서 처남한테서 뺏다 시피해서 가지고 온 시디체인저도 통 반응이 없었다.
앞으로 뭐가 어찌 잘 못 될 지 불안하기만 했다.
한참을 달려서 안동 정비소에 들려 수리를 맡기고 점심도 거른 배를 부여 앉고 앞에 식당에 가서 소고기를 시켜 구워 먹으니 값도 일인분에 오천 원이고 된장찌개와 함께 맛도 엄청 좋아서 그런대로 물에 가라앉은 기분을 ‘업’시킬 수가 있었다.
저번 주에 횡성에서 먹은 평생에 두어 번 먹을까 말까 한 일 인분에 삼만 오천 원 하던 한우 고기에 비하면 맛은 약간 덜 했지만 그 값의 칠분의 일이란 것을 생각하면 그 보다 7배는 맛있는 기분이었다.
정비소에 돌아와 수리 가격을 물으니 의자 밑에 있는 컴퓨터 침이 부품비만 삼십 만원이란다.
금방 먹은 오천 원짜리 소고기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아니 내 차 같은 ‘거시기’차에 무슨 컴퓨터 칩이 있고 그게 하필 운전석 의자 밑에 있고 또 물에는 쥐약이란 말인가?
갸우뚱하는 나에게 주인이 손바닥만한 부품을 보여 주는데 재활용의 여지도 없어 가지고 갈 수도, 어디다 그런 조그마한 것이 그렇게 비싸냐고 하소연도 못하고 나는 찍소리 없이 카드를 긁었다. 몇 개월로 끊을까라고 묻는 말에 그냥 순전히 홧김에 일시불! 하고는 짐짓 태연한 척 돌아 섰다.
물 먹인 소는 돈이나 더 받는다지만 물 먹인 차는 참으로 돈만 먹는 하마다.
‘친구 따라 강남 온’ 이번 여행은 졸지에 내 뜻과 전혀 관계없이 오십만 원짜리 동남아 여행이 되어버린 꼴이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한 노릇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지라 나는 이제까지의 친구가 하는 여행의 ‘운짱’역할을 내 팽개치고 주도권을 잡아채서 울산으로 가자고 했다.
울산에 가면 술과 여인이 있고 또 잘하면 챙길 외상값도 있다는 감언이설로 갸우뚱하는 친구를 꼬드겨서 차를 몰아 세웠다.
두 시간이면 가려니 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나를 몰아세우며 쪼르륵 거리던 빗발은 그 마각을 완연히 드러내며 본격적인 빗발을 쏟아 붓기 시작하는데 무슨 가을비가 그렇게도 억척스럽단 말인가?
캄캄해서 앞은 잘 안보이고 공사 중인 길은 왜 그리 많고 물웅덩이는 베트콩 ‘부비추랩’처럼 여기저기더니 결국 대구 쯤 해서는 사고로 인해 길이 꽉 막혀 그나마도 그 잘난 고속도로를 튕겨 나와 국도로 가니 시간은 징징하게 늘어지기만 했다.
울산에 결국 11시가 다 돼서 도착하니 이도 저도 다 틀리고 그냥 못 마시는 술만 두세 잔을 젖은 머리통위에 퍼 부으니 금방 세상이 팽 돈다.
친구 혼자 남겨 놓고 차에서 한 잠을 씩씩거리다가 우리는 또 다시 그 놈의 지겨운 비를 맞으며 찜질방을 겨우 찾아 기어 들어갔다.
울산의 찜질방은 안동의 그것에 비해 가격이나 규모나 인간의 모양새나 다 달랐지만 우리는 비 젓은 머리카락만 대충 빨고는 지겨운 날을 내 팽겨 칠 요량으로 얼른 잠 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난 그 와중에도 온통 물로 뒤범벅인 짐 속에서 귀마개를 열심히 챙겨서 잠나라로 빠져들었다.
눈을 뜨니 시간을 알 수가 없다. 왜 찜질방에는 시계가 없는지 업주한테 다음번에는 꼭 물어 봐야겠다. 그렇다고 변변한 창문이 있어 햇살로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방이 온통 막혀있고 이상한 치장들만 있는 통에 글자그대로 ‘24시 찜질방’. ‘24시 답답통’ 그 자체다. 카운터에 나가니 8시다.
오늘은 이상하게 몸도 시간을 놓친 모양이다.
발가락으로 친구 발바닥을 간질여서 깨워 나는 또 머리통을 샤워기에 틀어넣어 어제 밤에 감자마자 자서 생긴 사자머리를 적셔 펴고는 해장국 집을 찾아서 아침을 때웠다.
이런 저런 일에도 위장이란 놈은 별 지장이 없었던지 아침밥은 이상하리만큼 잘 넘어갔다.
그 놈은 끄덕하면 잘 뒤 짚어 지는 놈인 줄 알았더니 정작 뒤집어 질 만한 일이 있을 때는 말짱한 모양이다.
고속도로는 완전히 ‘이상무’였다.
우리는 참으로 ‘개갈 안 나는’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을 그렇게 해서 무사히 더 이상 큰 탈 없이 마쳤다.
첫댓글 절묘한 그 도구를 구하고 싶은데..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