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아에서 가져온 정용섭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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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요한계시록 (69)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4절 말씀은 우리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합니다. 눈물에는 기쁨의 눈물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슬픔의 눈물이겠지요. 슬픈 일을 당해도 눈물을 씻겨주는 이가 있으면 얼마든지 슬픔을 극복할 수 있겠지요. 이런 말씀이 관념적이거나 낭만적으로 들리시는지요. 이미 계 7:17절에서도 이 문제는 다뤄졌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눈물을 흘리게 하는 세부 내용이 언급됩니다. 사망, 애통, 곡, 아픈 것이 그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지나갔다고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눈물 흘릴 일이 없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요? 그런 세상이 상상됩니까? 눈물과 웃음이 분명히 구별되는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눈물 흘릴 일이 없는 세상은 실질이 아니라 관념으로 다가올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희로애락은 늘 상대적입니다. 배가 고파야 배부름을 압니다. 늘 배부른 사람에게 배부름은 의미도 없고 실감도 안 됩니다. 몸이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세상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일이 전혀 없는 세상을 관념이 아니라 실질로 인식하고 경험하려면 ‘새 하늘과 새 땅’이 가리키는 그런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비유적으로 애벌레에게 비상(飛翔)은 관념이겠으나 나비에게는 실질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반복해서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 지나갔다.’라는 말씀을 오늘 우리의 영적 실존과 연관해서 다시 생각해봅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가리켜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했습니다. 그냥 자연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겉으로면 보면 일반 사람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변화는 존재론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에게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돈도 새로워지고 사랑도 새로워지고 가족과 친구 관계도 새로워지고 국가나 인간의 모든 욕망도 새로워집니다. 다 지나갔으니까 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기본적인 도그마로 설명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판단과 평가는 지나간 것입니다.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라고 말하는 요한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았다고 말하는 바울은 같은 신앙의 지평에 서 있는 제자들입니다. 이런 설명을 제상에서 제멋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분들은 안 계시겠지요.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장엄한 문장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하나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만물은 140억 년 전 빅뱅 이후 지금까지 전개된 우주 전체를 가리킵니다. 철학과 물리학의 대상도 이 만물입니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만물의 본질을 물, 불, 공기, 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것으로 만물의 실체가 다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현대 물리학은 양자를 만물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못됩니다. 지금 나타난 만물의 물리적 현상을 정확하게 규명한다고 해도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풀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왜 존재해야만 할까요? 왜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왜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일까요? 물음은 계속됩니다. 성경은 만물이 존재하게 된 이유가 하나님에게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이도 하나님일 뿐입니다.
이런 설명이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일 뿐이지 자연과학의 관점에서는 크게 부족하다고 여길 분들이 계실 겁니다. 자연과학의 관점이 늘 옳은 것이 아니고 최종적인 답변도 아닙니다. 여러 관점 중의 하나입니다. 자연과학의 관점을 무시해도 좋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절대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의학을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몸과 병의 관계에 관한 의학의 관점은 중요하기는 하나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현대인에게 자주 나타나는 암만해도 그렇습니다. 암이 발병했다고 해서 암 절제 수술을 받는 게 옳은지 아닌지는 확률로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혈압 수치도 절대적인 건 아니라 평균치입니다. 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는 성경의 증언을 자연과학이 독점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 자연과학의 관점에서도 옳은 것이라는 사실을 신학은 꾸준하게 변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더 근본적으로 ‘새롭다.’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요한계시록은 묵시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실 미래에 관해서 보도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입니다. 모양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무늬를 새롭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어느 것도 옛것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지는 변화를 가리킵니다. 로마 제국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지는 세상입니다. 불순물이 전혀 끼어들지 않는 생명 충만한 세상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는 부활, 또는 영생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자연과학의 수치나 지표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 안으로 들어가는 신앙 경험이라고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아들 하나님의 구원 능력과 영 하나님의 생명 능력에 어느 정도로 긴밀하게 접속해 있느냐가 여기서 핵심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는 태도로 일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일상에 쫓겨서 그렇게 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요.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나는 알파와 요메가요.’라는 문장을 신약 원전 그리스어로 써보겠습니다. ἐγὼ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에고는 ‘나’라는 뜻이고 큰 꺾쇠괄호가 달린 ‘에이미’는 영어 be 동사와 같고, ‘토’는 정관사 the이고, 알파는 그리스어 알파벳 첫 글자이고 이니셜로 표기된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꺾쇠괄호가 달린 이유는 사본에 따라서 생략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이미 이 사실을 짚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문장의 본래 의미를 정확하게 읽으려면 주어를 삼인칭으로 해서 ‘그는 알파이고 오메가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자칫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서 우리가 서로 대화하듯이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분이라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또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십니다. 그걸 우리는 계시라고 말합니다. 신학자들의 견해를 잠시 빌려오겠습니다. 칼 바르트는 ‘말씀’을 계시로 보고, 브룬너는 ‘자연’을, 불트만은 ‘실존’을, 몰트만은 약속을, 그리고 판넨베르크는 ‘역사’를 계시로 봅니다. 이런 단어 하나만으로 그 신학자들의 계시론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특징으로만 말한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건넨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산신령이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는 게 좋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도 ‘나는 … 이다.’라는 문장 구조로 말씀하신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에고 에이미’ 문장이라고 합니다. 대충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생명의 빛이다(요 8:12). 나는 양의 문이다(요 10:7).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나는 포도나무다(요 15:1). 이런 진술도 예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공관복음서, 그리고 신약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입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규정한 게 아니라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경험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여러분은 자신에게 소화된 말로 설명할 수 있으신지요.
가장 간단한 답을 본문이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생명의 샘물’로 경험되었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그에게서 그 물을 값없이 마실 수 있습니다. 목마르다는 말은 영혼의 충만을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영혼의 충만을 세상은 제공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소득이 높고 건강해도, 그리고 모든 복지가 잘 된 나라에서 살아도 참된 만족은 없습니다. 설교 조로 말씀드리는 것 같은데,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더는 영혼이 목마르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영혼이 목마르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런 실존을 어느 정도 느껴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기 때문입니다.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바로 앞 대목인 3-6절에 언급된 새로운 세상을 상속받을 사람은 ‘이기는 자’입니다. 이긴다고 해서 마라톤에서 우승의 월계관을 쓴다거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축하 퍼레이드를 벌이듯이 남과의 경쟁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세상이 말하는 승리와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은 악을 악으로 갚는 방식으로라도 싸워서 이기라고 강요하고 유혹하지만, 성경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격려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이기는 자는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고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고, 로마 제국의 박해로 삶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상과 제국의 힘은 막강하면서도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같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자본주의의 압력과 유혹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살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우리가 모두 순교자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이기는 자’라는 표현이 실제로 순교자가 되거나 극심한 박해를 완벽하게 견뎌낸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최소한 믿음의 토대만이라도 갖춘 사람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형성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의 자격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믿음만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건 열광적인 믿음이라거나 관념적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된다는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결단입니다. 이런 결단이 있으면 자기에게서 해방됩니다. 자기 의로움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가리켜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은 마지막 심판을 여기서 다시 언급합니다. 온갖 불한당이라는 불한당은 다 열거되었습니다. 그들은 불 못과 유황 못에 던져집니다.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겁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개인에게도 여기서 열거된 불한당 같은 모습이 없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런 문제에서 떳떳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심한 사람이 있고 덜 심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는 그런 불한당 같은 모습이 종적도 없이 사라질 때만 우리는 안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할 수 있겠지요.
요한은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짚었습니다. 이미 계 20:14절에도 언급된 표현입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 길이 없으나 훗날 어떤 이에 의해서 추가된 내용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중요한 대목이라서 일부러 반복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둘째 사망은 완전한 끝장을 의미합니다. 첫 창조의 세계는 사망과 지옥을 비롯한 각종 불한당이 기승을 부렸으나 이제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이 세상을 혼탁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자기 개인의 욕망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워지듯이 말입니다.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묵시 사상의 표현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극단적인 상징과 은유와 비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신 분들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의 손잡이에 몇 가지 색깔을 맞추는 장치가 달려 있습니다. 무슨 색깔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현실이 펼쳐지기도 하고 또는 과거가 연출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상력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오늘의 삶과 시간과 역사의 신비를 직관한다는 점에서는 아주 뛰어난 작품입니다. 요한계시록도 그렇습니다. 종말 이후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나 근본에서는 당시 로마 제국의 박해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말하는 겁니다. 둘째 사망으로 종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