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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으로 나앉은 청동미륵반가사유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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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대호 |
| 도시를 떠나 3년. 산에 살면 사람도 산의 표정을 닮아 가는가 싶습니다.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칭찬은 '웃음이 순하다'라는 말입니다. 사실 몸은 게으름뱅이(?)가 다됐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마음이란 놈이 요동을 치고 부지런을 떠는지라 내 마음이 아직 산이 되지 못했기에 그 말이 더욱 반가운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찰은 모두 나름의 표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사찰이 어머니의 자궁처럼 사람을 껴안는 형상인데 반해 요즘 들어 구례군의 사성암이나 서암 혹은 문수사 3층목탑처럼 남성다운 호방함을 가진 사찰들을 자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돌출(화려함)이 눈에 거슬리기는커녕 탄성을 자아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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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유형문화재 135호인 5층석탑과 제134호인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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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대호 |
| 이것은 누구 짓(?)일까? 목수야 수소문해서 만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누구일까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김현송씨. 덥수룩한 수염도 없었고 날카로운 눈빛도 없었습니다. 제 초가를 찾은 이 남자는 숫기 없는 얼굴에 말 수는 적었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에 취할 줄도 알았습니다. 내가 아껴 마시는 보이차를 통해서 미륵불의 극락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의 화려한 건축을 통해 제가 깨달은 것은 부유와 풍요로움이 악(惡)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욕심으로 함께 나눌 수 없는 때 악이 되는 것이겠지요. 나라 창고마다 쌀이 남아 썩어 들어가도 급식비를 못내 아이들은 굶고 동포에게 보내는 쌀이 아까운 것, 그것이 악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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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해진의 꿈처럼 누군가에 의해 목잘린 부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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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대호 |
| 사람을 만나다 보면 사람마다 표정도 다르고 그 사람이 꿈꾸는 극락(혹은 유토피아)도 다 다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본래 극락은 하나인데 사람에 따라 미륵불의 극락이 있고 천관보살의 극락이 따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 나쁘게 살라는 종교 없고 사람 괴롭히라는 사상 없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에 겹습니다. 처음부터 신이나 유토피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면 결국 사람의 욕심이 문제이겠지요.
전남 장흥군 관산읍에 가면 천관사라는 작은 통일신라시대 고찰이 있습니다. 다소 어색하게 쌓은 경내의 돌탑이나 꽃밭에 나앉아있는 청동미륵반가사유상이 낯설어 보이기는 했습니다만 한양 가는 길이 여러 갈래이듯 해탈의 표정을 찾는 법도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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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795호 천관사 3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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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대호 |
| 스님이 기거하시는 방 앞은 잔득 쌓인 서각과 지그시 눈을 감은 목상이 지키고 서있었는데 큰 목소리와 호방한 말투로 손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계셔서 실례가 될까 차마 연을 만들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돌탑을 쌓고, 관음을 그리고, 서각을 새기고, 나름대로 사찰의 표정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너무 짧게 머물렀던지 꿈꾸시는 표정을 발견하지는 못해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천관사는 해발 723m인 장흥 천관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원 지리산, 부안 변산, 장성 내장산, 영암 월출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으로 칩니다. 이 사찰은 9세기 통영화상이 화엄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89암자와 1,000명의 스님을 거느리고 당나라 스님들이 수행하던 큰 절이었으나 쇠퇴를 거듭해 지금은 극락보전과 칠성각, 요사채, 석탑2기, 석등 1기만 남은 작은 사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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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을 바치던 거대한 주춧돌은 이제 염소를 매는데 쓰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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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대호 |
| 천관산은 지제산(支提山)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습니다. 화엄경에 따르면 지제산은 천관보살이 항상 머물며 설법하는 곳인데 천관보살은 보살도와 보살행의 자기수행 및 중생을 교화하는데 관심이 많은 보살로 당시 신라에서는 천관보살신앙이 유일한 곳이 바로 이곳 천관사였다고 합니다. 이 천관보살신앙의 배후에는 홍진대사가 있었습니다.
정명국사(靜明國師) 천인(天因, 1205~1248)이 쓴 <천관사기>(天冠山記)에 따르면 '홍진은 밤낮으로 예를 다하여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러 신중이 감동하여 절의 남쪽 봉우리에 죽 늘어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용신(龍神)과 같은 신중은 강력한 힘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재난을 막는 신입니다.
정명국사의 기록으로 보아 홍진이 예를 다하여 불러 늘어서게 한 신중이 해상왕 장보고 세력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836년 흥덕왕 사후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김우징이 청해진에 몸을 숨긴 뒤 당시 그와 친밀했던 홍진대사가 이곳 천관사에 머물면서 장보고를 설득해 민애왕을 축출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추대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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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방문객의 발길을 막아선 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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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대호 |
| 당시 홍진대사가 백성들에게 제시했던 혁명의 사상은 '미륵신앙'이 아닌 '천관신앙'이었습니다. 따라서 홍진의 천관신앙에서 백성은 교화대상이나 동원 대상에 불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김우징은 백성을 설득하는 대신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는 약속으로 5천의 군사를 빌려 권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쌓은 모래성은 신무왕 김우징이 6개월 만에 독살당함으로써 막을 내렸고 그가 재건하려던 옛 신라의 영화도 사라집니다. 장보고 역시 충복 염장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사람이 미륵이지 못한 해상왕국의 꿈도 신라의 운명도 일장춘몽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장보고의 죽음으로 그를 따르던 이들은 10년 넘게 저항하다가 김제로 끌려가 벽골제를 만드는 강제노역에 동원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일부는 강진으로 숨어들어 도공이 돼 푸른 청해의 꿈을 청자의 비취색에 담기도 했으며 흑산도에 반월산성을 쌓는 등 다도해 곳곳으로 숨어들어 청해진 재건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그들이 새롭게 세운 능창(수달)이라는 인물도 미륵불을 자처하는 궁예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99칸 권문세가의 집도 사람이 머물지 않으면 금세 무너지고 맙니다. 초가삼간도 사람이 머물면 비바람에 끄떡없습니다. 사람이 머물지 않은 집, 백성이 미륵이지 않은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곧 미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