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明沙十里 - 蔡奎燁/思い出の江の島 - 霧島昇
채규엽(蔡奎燁, 1907-1949)은 일제병탄기에 거의 모든 생을 보낸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가수이다(1930년 일본 컬럼비아 레코드사 전속, 해방 후 오케 이 레코드사 전속).
1930년대의 채규엽은 백년설(1914-1980, 경북 성주)이나 남인수 (1918-1862, 경남 진주)와 같은 새내기 가수들에게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채규엽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원산에 있는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음악학교에서 정식으로 음악수업을 받았다. 일본에서 사용한 그의 첫 예명은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였다. 1930년 3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봄노래 부르자」를 출반하여 직업가수 제1호가 되었다.
1932년 일본 유행가의 분수령을 이루게 한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곡「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를 우리말로 취입 최고 인기가수가 되었다. 그 뒤 콜럼비아·포리도르·태평레코드사를 통하여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1943년 이후 연예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가 8·15광복 후 다시 연예계로 돌아와 왕년의 히트송을 열창하기도 하였다. 1947년 흥행사로 변신 연예단체를 운영하다가 사업 부진 등으로 종적을 감추었는데...
(이 당시 채규엽은 기력이 쇠하고 대머리가 되면서 무대에 서기를 꺼렸고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흥행사업을 하다 빚을 갚지 못하고 도피생활을하다 체포되어 투옥되었는데 후배들의 도움으로 보석될 수 있었다고 한다.
형무소에 있을 때 간수들이 숯불에 간식을 구워 먹는 것을 보고 대머리 탈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삭발 후 무대 공연에 머리에 숯가루를 바르고 공연했다고 한다. 공연의 열기가 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흥이 올라 땀이 나는 바람에 머리에서 검은 숯물이 줄줄 흘러내리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면서 이후 무대는 절대 사양하다가 고향으로 낙향하는데, 우리나라 훅채의 첫 적용자이기도 한 셈이다.)
1·4후퇴 당시 월남한 연예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그가 월북하여 아오지탄광에서 중노동을 하였다는 소식만 전할 뿐 생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후 북한에서 간행된 자료에서는 1949년에 병사했다고 전하고 있기도 하다.
히트곡으로는「명사십리」·「시들은 청춘」·「물새야 왜 우느냐」등이 있다.
◆ 채규엽 [蔡奎燁]1911 함남 원산 ~ 1949 함흥. 1930년 콜롬비아레코드 <유랑인의 노래>와 <봄 노래 부르자>로 데뷔. 1950년경 북한 아오지 탄광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 <明沙十里>는 가수 蔡奎燁님이 1937년 7월에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발표한 노래입니다. <故鄕 하늘; C. 40770/ 金仁淑 노래>과 같이 발매된 이 노래는, 張在星 作詩/ 竹岡信幸 作曲/ 文藝部 編曲의 작품으로, 1937년에 들어 <눈물 어린 燈臺>,<情熱의 散步>,<靑春의 香氣>,<山은 부른다>에 이어 발표되어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시대의 흐름과 새로운 가수들의 영입으로 부쩍 취입의 기회가 줄어든 무렵에 발표된 <明沙十里>,모처럼 귀한 노래 잘듣고 갑니다. <雲水衲子>
유행가(流行歌)‘명사십리(明沙十里)'
[채규엽(蔡奎燁) 노래. 장재성(張在星) 작시(作詩)⦁竹岡信幸(타케오카노부유키) 작곡. 服部良一(핫토리 료이치) 편곡. 1937.7. 콜럼비아(Columbia Record)]
https://www.youtube.com/watch?v=hb6rWvCFiOA
[가사(歌詞)]
< 1 >
봄도 짙은 明沙十里 다시 못올 옛 이야기
海棠花에 속삭이던 그 님이였건만
西山 너머 지는 해야 날아드는 갈매기야
浦口도 白沙場도 꿈이였더냐?
< 2 >
日沒蒼山 날 저문데 아득하다 저 水平線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님이였건만
한번 가서 못 온다는 부질없는 靑春이라
울어서 이 한 밤을 새워나 보리.
< 3 >
다시 생각 말자 해도 차마 어이 잊을소냐?
百年 살자 盟誓하던 그 님이였건만
恨도 많은 우리 身勢 허물어진 因緣이야
海棠花 부여잡고 한숨 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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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몰창산 : 저녁 해가 푸른 산 아래로 넘어가는 모양
[주(註)]
• 명사십리(明沙十里) = ① 함경남도(咸鏡南道) 원산시(元山市)의 동남쪽 약 4km 지점(地點)에 있는 백사장(白沙場). 모래가 곱고 부드러운 해수욕장(海水浴場)과 해당화(海棠花)로 유명함 ②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를 비유적(譬喩的. 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 명사십리(鳴沙十里) = 밟으면 맑은 쇳소리가 울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는 백사장(白沙場)이 십 리나 이어진 곳. 명사십리 해수욕장(鳴沙十里海水浴場).
• 해당화(海棠花)= 장미과(薔薇果)의 낙엽(落葉) 활엽(闊葉) 관목(灌木). 높이는 1~1.5 미터이며, 잎은 어긋나고 우상(羽狀) 복엽(複葉)인데 잔잎은 긴 타원형(橢圓形)이고 잎 뒤에 잔털이 있음. 5~8월에 붉은 자주색(紫朱色) 꽃이 가지 끝에 피고 열매는 8월에 붉게 익음. 꽃은 향수(鄕愁) 원료(原料)로 쓰고 열매는 약용(藥用) 또는 식용(食用). 관상용(觀賞用)이고 바닷가의 모래땅이나 산기슭에 나는데, 한국⦁일본⦁사할린⦁만주⦁캄차카반도(Kamchatka半島) 등지(等地)에 분포(分布)함.
• 일몰(日沒) 창산(蒼山) = 해 지는 푸른 산(山).
• 부질없는 = 대수롭지 않거나 쓸모가 없는.
• 한숨지누나 = ‘한숨짓누나’의 잘못된 말. ※ ‘-누나’는 감탄형(感歎形) 종결어미(終結語尾).
명사십리(明沙十里) 1937 채규엽(蔡奎燁)
https://www.youtube.com/watch?v=f6htTRYFu7E
명사십리 1937 채규엽, 장재성(張在星)작사, 죽강신행(竹岡信幸)작곡
[ 명사십리 - 채규엽 ] = [ 思い出の江の島 - 霧島昇 ]
봄도 짙은 명사십리 다시 못 올 옛 이야기
해당화에 속삭이던 그 님이었건만
서산 너머 지는 해야 날아드는 갈매기야
포구도 백사장도 꿈이 었더냐
일몰창산 날 저문데 아득하다 저 수평선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님이 었건만
한번가서 못 온다는 부질없는 청춘이라
울어서 이 한 밤을 세워나 보리
다시 생각 말자 해도 차마 어이 잊을소냐
백년 살자 맹세하던 그 님이 었건만
한도 많은 우리 신세 허물어진 인연이야
해당화 부여잡고 한숨 지누나
元山 鳴沙十里
슬픈 망국조의 노래가 말썽이 되자 경쾌한 리듬으로 고향을 찬미한 노래가 '명사십리 (鳴沙十里)' 다.
"명사십리(明沙十里)"는 말 그대로 깨끗한 모래가 십리나 펼쳐쳐있다는 뜻으로 보통명사로도 쓰이지만 고유명사로 함경남도 원산 갈마반도 해안을 이르는 단어로 여타 지역의 명사십리도 여기에서 온 것이다. 실제로는 6~8Km 길이에 폭도 넓은 곳은 1Km를 넘는다고 한다. 명사시오리나 명사이십리가 맞겠다.
원산 출신 채규엽과 김정구가 고향을 그리며 이 곡을 불러 취입한 것.
동해의 푸른 바다를 안으려는 듯이 명사십리는 아름다운 솔밭과 해당화로 장식되어 고래로 명승고적을 탐하는 수많은 여행객들의 꿈의 여행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런 곡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그 향수가 오죽하겠는가.
명사십리의 고운 모래밭과 송도원의 푸른 소나무로 유명한 관동(關東) 제일의 도시인 원산은 본래 원산진(元山津)이라고 불리던 작은 어촌(漁村)이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강원도의 북쪽과 함남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서울이나 평양으로 통하는 요충지다.
옛날부터 관북(關北) 지방의 기근에 대비해서 상평창(常平倉)을 두어 쌀과 갖가지 곡식을 저장해왔다. 1880년 부산에 이어서 개항되면서 무역 항구로 발전했고 1918년 경원선, 1928년 함경선(咸鏡線), 1941년 평원선(平元線), 동해북부선들이 차례로 깔리자 원산은 항구로서 뿐만 아니라 전국 제일의 레저타운으로 발돋음 했다.
해당화 곱게피는 아름다운 백사장을 배경으로 푸른 소나무 숲사이를 거니는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은 해당화꽃 보다도 더 붉고 아름다왔다.
원산중학에 다닐 때 우리는 멋진 한쌍의 로맨스신을 보고 모던보이를 "모보", 모던 걸을 "모걸"이라고 불렀다. 서울이나 동경 등지에서 여름엔 수영을, 겨울엔 스키를 지치러 오는 젊은 연인들로 해서 원산은 더 밝고 환한 것 같았다.
원산 외항(外港)에 면해있는 명사십리의 끝간데 없이 펼쳔진 곱디고운 모래밭이나 푸른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송도 원, 시가지 뒤켠에 버티고 선 장덕산(長德山)의 우람한 형세는 꼭 부산을 닮았다.
이런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보다는 원산의 멋은 아무래도 이속을 거닐고 노닐던 이들로부터 우러나온 것 같다. 적전천(赤田川)에 걸쳐있는 대홍교(大虹橋)를 중심으로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인촌(韓國人村)은 수양버들, 진달래, 개나리로 온통 꽃밭속에 파묻힌다. 레저붐을 타고 매년 여름철만 되면 동해안(東海岸)의 각 해수욕장이 붐비고 무척 요란스럽지만 40년 전의 원산 해수욕장만은 못하다.
송도원 푸른 소나무 숲 사이에 자리잡은 별장 18홀을 가진 골프장, 테니스코트에다 방갈로 식당 등 없는 시설이 없었다.
동해를 바로 앞에 바라보는 명사십리의 야트막한 소나무 숲속에 파묻혀 있는 발갛고 파란 색깔의 선교사 별장은 티없이 밝고 아름다운 한폭의 수채화였다.
특히 송도원 해수욕장의 짙은 소나무 숲속에 들어가면 시원한 바람이 뜨거운 열기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비늘없는 가자미만 먹어서 자주성이 없다고들 하지만 인심이 후하기로 원산 사람을 따를만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안변평야에서 나는 무진장한 곡식에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해산물, 욕심을 채울 줄 모르는 순박함으로 원산 사람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할 줄 몰랐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은 쉽게 통화되고 또 제 마음껏 개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한 원인인 것 같다.
아직도 두고온 고향의 하늘과 땅이 모두다 생생하며 원산은 우리의 분신(分身)이다.
어쩌다 볼일로 대전(大田)에 갈때면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원산을 그린다. 서울서 대전까지의 거리나 시간은 고향인 원산까지 달려가는 시간과 맞먹기 때문이다.
속초에는 원산 사람이 2천3백여명이나 살고 있다. 개중에는 서울등지의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살만한 여유있는 사람도 있고 속초를 떠나면 더 많은 돈벌이를 할수 있는 사람도 많지만 속초를 떠나지 않고 머무르고 있다. 그것은 고향땅이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통일되는 그날엔 맨 먼저 달려가 곺은 망향(望鄕)의 꿈 때문이다.
전 명예 원산시장 한일영의 글에서
[ 원곡 ] [ 思い出の江の島 - 霧島昇 ]
思い出の江の島 - 霧島昇
https://www.youtube.com/watch?v=zpA8dojkzZs
作詞 久保田宵(くぼた しょうじ), 作曲 服部良一(はっとり りょういち)
歌唱 霧島昇(きりしま のぼる),
1936年 12月 columbia rec.發表
Korean By HG Ryu
1.
思い出 語れば 綠の强の島
오모이데 카타레바 미도리노 에노시마
추억을 말하자면 푸르른 에노시마
波さえ ほほ笑む 君と二人
나미사에 호호에무 키미토 후타리
파도도 미소짓는 그대와 둘이서
落ち 行く夕日よ群れとぶ かもめよ
오치유쿠 유히요 무레토부 카모메요
저무는 석양이여 무리나는 갈매기여
冲(おき)も 渚(なぎさ)も 夢映(うつ)す
오키모 나ㅇ기사모 유메우츠스
난바다도 물가도 꿈을 비추나
2.
遙かに 暮れゆく 真日き 富士の峯
하루카니 쿠레유쿠 마시로키 후지노네
아득히 해 저무는 흰눈 덮인 후지고개
仰ぐも なつかし 君と二人
아ㅇ구모 나츠카시 키미토 후타리
바라봄도 그리운 그대와 둘이서
行きては 帰らぬ 恋しき 春ゆえ
유키테와 카에라누 코이시키 하루유에
한번 가면 오지않는 그리운 봄이기에
流す 淚も 輝(かがや)きて
나ㅇ가스 나미다모 카ㅇ가야키테
흐르는 눈물도 반짝이는데
3.
想えば ひととせ 綠の江の島
오모에바 히토토세 미도리노 에노시마
생각하면 어느 한해 푸르른 에노시마
行く末 期待し 君と二人
유쿠스에 키타이시 키미토 후타리
장래의 희망을 그대와 둘이서
悲しき 人の世 果敢なき 世道よ
카나시키 히토노요 카칸나키 요미치요
슬픈 인간 세상 덧없는 세도여
せめて 今宵は 案(やす)らかに
세메테 코요이와 야스라카니
적어도 오늘밤은 평안하시게
*세도[世道] 1.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 2.세상에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
*世道[shìdào] 중국어 ① 세도 ② 세상살이 ③ 세상 형편 ④ 사회 상황
*世道 : せどう, せいどう, よみ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