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충함, 변하지 않은 동네가 던지는 상징
-조갑상의 〈은경동 86번지〉와 부산 수정동
부산역에서 내린 나는 광장을 가로질러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약 40년 전 문영호가 갔던 방식으로 은경동에 가볼 참이었다. 지금이었다면 고속철을 탔겠지만, 그때 문영호는 서울에서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을 것이다. 수사비는 쥐꼬리만 해도 시간은 형사에게도 금쪽같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부산과 2020년대의 부산 사이에는 강산이 네 차례 바뀐 만큼의 변화가 있음직하다. 은경동은 얼마나 바뀌었을지 궁금했는데, 그러나 한편으론 상전벽해의 변화가 은경동에는 없을 것이라는 짐작도 들었다.
1950년 부산은 6.25동란이 일어난 뒤 3년 동안 전쟁이 주는 암담함을 안은 도시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그곳은 일본이 제국주의의 검은 야욕을 안고 한반도를 침탈하면서 커지기 시작했다. 대륙의 침략을 위해 경부선 철도가 놓였고, 왜인들은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왔다. 그러나 동란이 터지면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어디에서 구했는지 용케도 판자때기를 모아 구봉산과 수정산, 그리고 봉래산 기슭 등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선동·영주동·초량동·수정동 같은 동네들이 만들어졌다.
은경동은 조갑상의 중편소설 〈은경동 86번지〉에 나오는 지명이다. 이 소설은 1990년 간행된 《다시 시작하는 끝》(세계일보)에 수록돼 있으며 조갑상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또한 이 소설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모셔져 있다. 〈은경동 86번지〉는 1984년 《한국문학》 10월호에 등장했으며 문장이 박진감과 속도감이 넘친다는 평을 받는다.
소설은 어린 시절을 부산 은경동에서 보냈던 문영호가 형사가 되어 살인사건의 용의자인 이원재를 체포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원재의 집은 은경동에 있었는데, 문영호도 고등학생 때 서울로 가기 전 은경동에서 살았다. 문영호는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은경동이 십 수 년이 지났는데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에 놀라며 오랜만에 찾은 가난에 찌든 동네를 차근차근 둘러본다. 범인을 찾기 위해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는 등 부산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던 중에 자신이 찾는 범인이 친구의 동생임을 알게 된다.
문영호가 찾으러 온 이원재는 평등하지 못한 사회구조에 대해 평소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청년이다. 그는 순간적인 충동이 빚은 무모함으로 죄를 짓게 되었다. 〈은경동 86번지〉에서 부산역·은경동·신평동·남포동으로 이어지는 문영호의 노정을 따라가다 보면 1980년대 부산의 공간이 펼쳐진다. 1980년대 부산에서는 산동네 집들의 철거가 일어났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주거지를 만드는 기쁨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능력이 닿지 않는 사람들의 이주로 이어지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조갑상은 이런 기쁨과 아픔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 그런 개발의 노정 속에서 거기에 끼지 못해 여전히 도시의 낙오자로 살아야 하는 모습들을 담고자 했다.
버스를 타고 문영호가 내렸던, 부산역에서 어림하여 두 정거장 째 되는 곳은 경남여중 입구이고 세 정거장 째는 YMCA앞이다. 문영호가 부산을 찾았을 때는 지하철이 건설되기 이전이었을 듯싶다.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지만 부산에도 1985년에 지하철이 건설되면서 정류장의 위치가 바뀌었을 터이다.
나는 부산역에서 두 정거장 째가 아닌 세 정거장 째인 부산 YMCA앞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 동네의 이름은 은경동이 아니라 수정동이다. 부산역에서 광장으로 나와 오른쪽 한 시 방향 산비탈이 초량동이고 초량동 옆 북쪽에 있는 산비탈은 수정동이다. 내가 버스에서 내린 지점부터 문영호가 차에서 내려 올라간 그 길로 짐작이 된다.
경남여중 입구에서 내리면 동일중앙초등학교가 있고 YMCA앞에서 내리면 수정초등학교(1935년 개교)와 수성초등학교(1955년 개교)가 있다. 동일중앙초등학교는 2008년 3월 동일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교가 통합해 동일중앙초등학교가 되었다. 동일초등학교의 전신인 고관국민학교는 1966년에 설립되었고, 중앙국민학교는 1945년에 개교했다.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국민학교)는 당시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교사가 있었으며, “일제시대 때 지은 아주 오래된 학교였다.” 금수현이 지은 수정초등학교 교가에는 수정산이 나온다. 참고로 초량동에 있는 초량초등학교는 1937년에 개교했는데, 이 학교 교가에는 구봉언덕이 나온다. 어느 학교인들 어쩌랴 싶었지만 굳이 지목하자면 문영호가 다닌 초등학교는 수정초등학교가 아닌가 한다.
이렇게 추리하는 까닭은 다분히 상식적이다. 조갑상은 어느 인터뷰에서 유년기에 부산으로 이주해 수정동에서 제법 오래 살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49년에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공무원이었던 부친을 따라 어릴 때 부산 수정동으로 이주하여 고등학교를 마친 후 중앙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1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서라벌예술대학에 다시 입학한다. 서라벌예술대학은 1972년에 중앙대학교와 통합되어, 조갑상은 중앙대 졸업생이 되었다.
김동리·안수길·이호철·유주현 같은 당대의 대가들로부터 사사했으나 등단과는 인연이 닿지 않아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6년부터 경남 의령 정곡중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했다. 드디어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1982년 부산여자전문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십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은경동 86번지〉는 아마도 조갑상이 부산으로 돌아온 뒤인 1980년대의 부산 수정동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 아닌가 싶다. 또한 주인공 문영호가 형사로 등장하지만 문영호는 작가 본인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만 문영호는 경찰이고 조갑상은 교수라는 점에만 차이가 있다.
문영호가 갔음직한 길을 따라 동네를 올라간다. 좁은 길, 그리고 여기저기 놓인 수많은 계단들이 프랑코 폰타나의 어느 작품 속 장소를 연상케 한다. 늘 대하는 풍경은 오랫동안 반복되기에 때로 지루할 수도 있지만 어느 한 단면을 떼 내어 앵글에 담아놓으면 그 공간은 기꺼이 예술이 되곤 한다. 산기슭에 지어진 각기 다른 집들, 그 비좁은 골목마다에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그런 이야기들을 편집하다보면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부산이라고 보는 화려한 동네는 해운대이거나 광안리이거나 아니면 서면이다. 물론 이곳 동구의 대로변에도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긴 했지만 그것은 대로변만 그렇고 주택가는 그렇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그 풍경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변하지 않은 시대를 읽는다.
부산에서 가장 개발이 더딘 곳이 초량동과 수정동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6.25전쟁에서 적군의 치하에 들어가지 않은 부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피난시대에 임시수도 역할까지 했다. 절대적으로 주택이 모자랐기에 피난민들은 부산의 빈 땅이 보이면 집을 지었다. 부산은 산이 매우 많은 도시이다. 부산역에 내리면 바로 보이는 초량동에서 시작해 수정동, 범일동, 좌천동 등이 북망산을 끼고 있다. 그 흔적이 휴전한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부산 시민들에게 주거지로서 동구의 이미지는 옛날에 조성된 산동네의 이미지라고 한다.
이 일대 집들은 6.25때 얼기설기 지어진 집들로 시간이 흐르면서 블록집으로 다시 벽돌집으로 또다시 철근 콘크리트집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모두 바뀐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이곳 수정동에는 1960년대에 지었음직한 낡은 건물들이 남아있다. 특히 북항 제4부두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땅에 지은 집은 몹시 낡았지만 매우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경사진 길에 세워둔 자동차들이 혹시라도 미끄러질까봐 불안불안했지만 이 동네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 같았다. 나무토막이나 돌멩이가 아무렇지 않게 바퀴를 가로 막았어도 아슬아슬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외, 1980년대 이후에 지어진 집들 가운데 지붕이 도로에 면해있는 집들은 지붕을 주차장으로 쓴다. 퍽이나 이색적이다. 지붕에 자동차를 이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다. 이건 내 집 위에 다른 집을 이고 사는 아파트에 살면서도 들지 않았던 생각이다. 여하튼 지형과 좁은 도로가 만들어낸 기형적인 풍경 같지만 그보다는 마치 지중해의 섬에 온 느낌마저 든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많이 뒤쳐졌다. 부산을 찾는 외지인들에게 소개되는 동네가 수정동인데 관광객들이야 스치고 지나가면서 눈요기를 하겠으나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물론 돈을 벌어 해운대 등으로 이사를 가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그건 철없는 아무 말 대잔치이고 누군들 좋은 여건의 집에서 살고 싶지 않을까?
“구획정리 후 공터로 남아 있던 기억 속의 땅에 3,4층까지 건물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다. 공사 중인 건물들도 눈에 띄었다. 정류소 근방은 통행인도 드물고 어딘가 새로 개발된 변두리처럼 엉성하고 황량해 보였다. 본래 철도 담벽을 따라 판자촌이 들어섰던 곳이었는데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땐가 엄청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철도 접경지역과 언덕바지의 불량주택이 집중적인 재개발 대상이었는데, 그가 살던 동네도 계획선이 어디로 그어지느냐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렸다. 결국 작은 길 하나를 두고 위쪽이 철거되었는데 그것은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말해오던 ‘우리 동네’의 뜻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문영호는 “변하지 않은 동네의 모습에서 오는, 내가 살았던 동네가 이토록 빈민가에 가까운 곳이었을까 하는 충격”이라고 말할 만큼 십 수 년 만에 찾은 동네가 발전이 없이 옛 모습 그대로인 것에 대해 적잖이 실망했다. 십여 년의 타지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부산의 동네 모습이 예전과 바뀐 게 없는 데서 오는 실망감이 그를 지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이 소설이 등장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수정동 초입에서 55년째 어묵과 만두 등을 조리해 파는 ‘사거리만두’의 주인 할머니는 수정동에 재개발은 없다고 완곡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사진 곳에 대규모 아파트를 지으려면 수익성을 확신하기도 어렵고 공사비도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환경단체는 산을 가린다고 들고 일어설 것이다. 그렇게 재개발을 한다 해도 지금 이곳에서 세를 사는 이들은 정든 곳에서 쫓겨나 부산 바깥으로 내몰리게 될지도 모른다.
문영호가 살던 곳은 은경3동 86번지였다. 작가는 수정동을 은경동이라고 고쳤다. 수정동은 원래 1동부터 5동까지 있었는데 2008년 수정2동에 수정3동을 통합했다. 그러니 은경동 86번지는 없다. 작가가 왜 이 동네에 은경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이 글을 쓰면서 작가에게 묻는 것도 겸연쩍다. 수정동이라는 행정명칭은 이곳 뒷산이 수정산이라 불린 것에 비롯됐지만, 이 동네에 남아있는 옛 지명들인 감골·고관마을·소막골·수정골·오바골·외솔배기·화장막 등에서도 은경동이라는 이름은 없다.
문영호가 찾은 삼거리는 부산동구청을 끼고 좁은 골목길과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산북도로쯤으로 짐작된다. 이곳까지 가는 길은 실로 여러 갈래이다. 길 이름은 수정북로인데 삼거리처럼 보여도 막상 가까이 가보면 오거리가 나타난다. 그 길을 오르는 문영호의 마음은 매우 착잡하다.
“계단에 이르러 이른바 우리 동네라고 부르는 데서부터 집들은 한층 더 우중충하고 볼품없었다. 어젯밤과는 달리 모든 게 투명한 햇살 아래 제 모습을 내놓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동네를 다시 찾게 되었다는 게 계단을 오르면서도 실감되지가 않았다.” “꼭 집어낼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 같은 게 계단을 오르는 데서 오는 거친 숨결과 같이 그의 가슴에 차올랐다. 쌀쌀한 바람이 묻어나는 엷은 햇살 아래 드러난 우중충한 동네의 모습은 자신이 옛날에 살았던 곳이 이토록 게딱지같이 더러운 동네였을까 하는 수치스런 당혹감을 몰고 오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 문영호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쫓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용의자는 중학교 동창인 이원태의 동생이다. “이원재가 원태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그의 마음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어지러웠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도난사건이라도 일어나면 모두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곳이 은경동 86번지 골목길, 자신이 살았던 바로 그곳이다.
문영호의 중학교 동창들도 하나같이 서민적이었다. 동네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동근, 맞춤집 하는 찬기, 택시 모는 홍식, 배 타는 호야, 그리고 공장에 다니는 원태 등 누구 하나 특출난 것도 없이 고만고만했다. 게다가 문식은 방위 복무 중에 총을 들고 다방에서 인질극을 벌인 바람에 감옥에 있다고 했다. 문영호는 동근 덕분에 이것저것을 알 수 있었다. 원태와 원재의 아버지인 이형달은 연합병원에 입원해 있고, 원태는 원태 어머니가 다니던 길표고무에서 일하고, 사고를 친 문식과 가까운데 산다는 김갑경의 동생 김갑령은 장림동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다.
“본래 가진 게 없는 데다, 손에 잡을 작대기라도 있어야 일어나기가 수월한데 도통 밑이 있어야지. 그렇다고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맨날 그 바닥에서 맴맴이지. 준구라고 안 있나. 우리 위에 말구 형 말이야. 그때 서울대학 갔다고 동네가 벌컥 했잖아?” 서울대학을 졸업한 준구는 어느 회사의 전무가 되었고 준구 동생이자 문영호와 동창인 말구는 은행을 다닌다 했다. 그리고 이들은 벌써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준구와 말구의 부친이 초등학교 교사였으니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아버지가 시청인가에서 공무원을 했던 승원이네는 동네 애들하고도 어울리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그러니 나름 출세를 했으면서도 동네 친구들을 찾은 것은 문영호가 유일하지 싶다. 사실 문영호도 이원재를 잡아야 했기에 순전히 그 목적으로 지금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난한 자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시험을 잘 봐서 서울에 있는 대학이나 부산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행정고시에 붙으면 고위공무원이 되어 가세가 좀 폈고, 사법시험에 붙으면 온 집안이 권력까지도 얻게 되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7,80년대 한국경제가 도약기에 접어들었을 때 버젓한 대학을 졸업하고 그때 막 등장하던 대기업에 들어가면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조선시대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과거에 급제해 권력을 얻으면 사회적 성공의 기반이었다. 그 흔적은 20세기 한국사회에도 이어졌고 거기에 더해 사업을 일으키거나 기업이나 은행에 취직하면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7,80년대 한국에서 여전히 대물림의 곤궁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1970년대에 단행된 고교입시 평준화가 1980년대에 외국어고등학교와 과학고등학교에 의해 무력화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대학에 가는 데 온갖 ‘스펙’이 필요한 시대로 도래했다. 이로써 가재·붕어·게에게는 명문대학의 문이 오히려 좁아졌고 이런 수상동물의 아버지 역시 가재·붕어·게일 수밖에 없으니 표창장 한 장 위조하려 해도 뭘 제대로 알지 못해 위조가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용이 개천으로 떨어지는 정도의 사건이 아니고는 더욱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하긴 세상의 결정을 그들이 하는 것이니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강남 살 필요는 없다”거나 “가붕게로 살아도 행복하면 된다”는 사탕발림밖에는 없다.
이것은 이 당시 문영호의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원태와 이원재 형제의 아버지는 술병에 걸려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원태 아버지가 했던 일이 부산항 부두에서의 노동이었고 그 노동들이 쌓인 덕분에 한국의 경제가 성장했지만 그 노동자들은 나이 들어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따지고 보면 술을 마셔서 그런 것이고 그것까지 국가가 관리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술 없이 곤궁한 삶을 버틴다는 것도 웬만큼 수양이 되지 않은 이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아버지가 병을 얻어 앞으로 살날이 별로 남지 않았는데 큰아들은 중졸의 학력으로 고무공장에 다니고 둘째 아들은 공고 졸업의 학력으로 공장에 다니다가 해고가 되었으니 아버지 병원비를 마련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이원재는 살인을 저질렀다.
작품에서 수정동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상징물은 우물이다. 우물은 문영호의 기억에도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 우물 옆에는 동백나무가 있다.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은 우물 사용법을 몰라 창피를 당했고, 누구 집에 세든 여편네 못 쓰겠더라는 입방아도 우물에서 전파되었다. 사람들은 그 우물물을 마시고 그 입으로 말을 내뱉었다. 이제는 수도가 많이 공급돼 우물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래서 우물은 사라져버렸고 우물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 마을이 지닌 공동체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와해시켰다는 뜻이 된다.
우물은 사라졌어도 수도가 공급되지 않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서인지 수정동에는 유독 목욕탕이 많다. 그것도 대도시에 있는 사우나와 찜질방이 아니라 그냥 목욕탕이다. 목욕탕 전성시대에 사람들은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만나 같은 탕에 몸을 담그며 일체감을 형성했다. 아직도 목욕탕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으나 집집마다 수도는 모두 공급됐을 지금에도 목욕탕의 보일러는 돌아간다. 수도는 모두 공급됐다고 해도 집들은 모두 7,80년대에 지어졌기에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몸을 담그는 것이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런 동네에서 목욕탕은 아직 필요해 보인다.
이원재는 문영호와 이원태의 중학 동창인 문식의 동생 자숙에게 기대 사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래서 문영호는 자숙의 주거지를 수소문했다. 자숙은 남포동에 있는 술집에 나간다고 했다. 수정동에서 남포동으로 가는 길은 크게 세 가지 방법이다. 하나는 부산진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자갈치역에서 내리는 것이다. 자갈치역 전前 역이 남포동인데 이곳에서 내리면 좀 걸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남포동, 그러니까 씨앗호떡이 있고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남포동, 다시 말해 자숙이 일하는 남포동으로 가려면 지하철 남포동역보다는 자갈치역에서 내려야 한다. 부산을 상징하는 거라면 자갈치역이 남포동역이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지하철역 이름 하나를 두고도 갈등이 일어나니 남포동역이라 하지 않고 자갈치역이라고 한 것 같다. 임진왜란 때 그런 식으로 열심히 왜놈들과 싸웠지만 결국은 부산진 북성이 함락되고 이어서 동래성까지 함락되면서 왜군은 서울로 쉽게 진격할 수 있었다. 싸움은 정신도 중요하지만 무기도 중요하다. 물론 지하철역 이름 정하는 것으로 싸웠을 때는 무기가 필요 없었겠지만. 둘째는 부산진역에서 버스를 타고 자갈치시장까지 가는 방법이다. 셋째는 산복도로에서 버스를 타고 자갈치역까지 가면 된다.
산복도로는 산허리에 난 길로 수정초등학교 위쪽으로 있다. 시발점과 종착점은 산기슭이겠는데, 산중턱까지 집들이 들어서다보니 산 중턱의 허리에 길을 내고 이 길로 대중교통이 지나가도록 만든 것이다. 부산에는 여러 곳에 산복도로가 있다. 수정동을 지나는 산복도로는 범내골역에서 시작해 성북고개 → 수정삼거리 → 수정아파트 → 부산컴퓨터과학고교 → 영주삼거리 → 부산디지털고 → 중구청·메리놀병원 → 국제시장 → 부산데파트 → 남포동 → 충무동해안시장 → 자갈치시장까지 이어진다.
문영호는 수성초등학교 앞에서 문식이 동생인 자숙이가 일한다는 남포동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이 소설을 접하면서 86번지의 비밀이 어디에 숨어 있을까를 내내 궁리했는데 나름 86번지의 비밀을 풀 수 있었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순전히 나의 상상력일 수 있는데, 숫자 86은 산복도로를 거쳐 남포동으로 빠지는 버스의 번호였다. 산중턱을 따라 가다가 중구청에서 갑작스럽게 지상으로 툭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버스는 그 뒤로 국제시장과 남포동을 거쳐 자갈치시장으로 이어진다. 86번 버스는 산동네에서 번화가이자 별천지인, 당시로서는 아니 6.25동란 이후 부산에서 돈이 가장 많이 돌고 또 가장 활기가 넘쳤던 동네로 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예자숙이 은경동을 떠나 남포동의 ‘바이킹’이라는 술집으로 간 것은 그 나름대로는 은경동에서의 탈출을 모색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포동은 부산에서 근대화된 시가지가 처음 형성된 곳이었고 지금도 커다란 상권을 유지하고 있다. 부영극장, 부산극장, 대영극장이 남포동에 있었다. 이 인연으로 부산국제영화제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아직 이곳에 부산국제영화제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영화진흥위원회와 영상물등급위원회가 해운대에 들어서면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중심은 해운대로 넘어갔다. 지금은 이 삼두마차가운데 부산극장은 메가박스에서, 대영극장은 롯데시네마에서 인수하여 각각 메가박스 부산극장점과 롯데시네마 부산대영점으로 팔자를 바꾸었으며, 부영극장은 폐업했다.
영화관 뿐 아니라 남포동에는 구두방들이 많았는데 문영호가 예자숙이 일하는 ‘바이킹’을 찾기 위해 길을 묻는 데가 구두수선방이다. 지금은 구두방들이 모두 사라졌고 그저 술집들만 뒷골목에 그 흔적들을 남겨두었다.
그러나 예자숙이 은경동에서 탈출한다 해도 딱히 갈 데가 없었나 보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곳이 남포동 술집인 셈이다. 오히려 돈을 빨리 모으기는 술집이 안성맞춤이다. 다만 버는 대로 족족 나가는 게 문제일 따름이다. 그 돈에 혹에서 자숙은 아마도 원재에게 편의를 보아준 게 아닌가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정동에서 86번 버스를 타고 산복도로를 달리면 아주 쉽게 남포동에 닿을 수 있으니 휘황찬란함과 우중충함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붙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버스에 올라 부산항 쪽을 바라본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지중해 산토리니의 전경이 교차한다. 발밑에는 개발되지 않은 동네와 집들이 즐비하나 산복도로 86번 버스에서 바라보는 그 동네와 저 멀리 보이는 부산항은 한 편의 그림이다.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부산이 준비하는 ‘2030부산엑스포’를 떠올렸다.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한 광고에도 초량동과 수정동의 산동네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새의 눈으로 찍힌 그 정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지중해 산토리니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를 오를 때 주민센터에 붙어있던 부산엑스포 유치 홍보현수막이 떠올랐다. “북항시대 꿈은 2030부산월드엑스포에서 현실이 됩니다!”라는 문장이었다. 북항은 수정동과는 전혀 다른 동네인데 북항시대가 수정동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지 의문이었다. 만약 있다면 원태 아버지 같은 이들이 북항에서 부두노동자를 하는 것 정도일 텐데, 물론 공부를 좀 한 젊은이들은 사무직도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그다지 실효성이 없어 보인다. 북항이 아무리 개발되고 좋아진다고 해도 수정동이 천지개벽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동네 사람들에게 월드엑스포는 그저 가서 구경 한 번 잘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았다. 부산엑스포가 열린다고 해서 이 동네 사람들이 ‘나도 부산시민이다’라는 자부심을 가질 리도 만무하지 않을까. 수정동에 젖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원태의 아버지가 입원한 연합병원은 원래 철도병원 자리였다. 부산직할시 동구 고관로 5이다. 지하철 초량역 바로 옆에 있다. 1923년에 지어진 부산철도병원은 1944년에 부산교통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뒤 언제인가 철거되어 지금은 부산보훈복지회관과 베스트인시티호텔이 들어서 있다. 아마도 부산교통병원이 되었다가 언제인가 연합병원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원태 아버지 이형달은 간경화에 위암이 겹쳤다. 1980년대에는 간경화나 위암에 걸리면 생명연장이 어려웠음직하다. 문영호가 찾은 담당의사는 “가족의 청대로 입원을 시켰습니다만 가망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문영호가 확인한 원태 아버지의 입원비는 세 번 지불되었고 미납금이 30만원이었다. 1980년대 초에 30만원이면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이다. 지금 돈으로 치자면 400만원을 웃돌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은 이틀 전에 납입한 돈이 60만원이었다. 그 돈은 이원재가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사장을 살해하고 훔친 돈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영호의 가슴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가슴을 짓누른 것은 원재가 살인을 했을 가능성을 확인한 데서 그치지 않았다.
은경동은 발전이 없어보였다. 자신이 고향을 떠난 지 15년이나 지났는데도 고향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다. 친구들도 달라진 게 없었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아득함과 동네의 모습이 또 그렇게 어지럽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것은 한없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일 터인데, 그것이 모두 마음 편치 않은 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원재는 범인이 맞았다. 남포동 바이킹에서 일하는, 이원재의 물건들을 맡아 주었던, 그리고 이원재를 숨겨주었을 예자숙이 문영호와 나누면서 한 말, 그 말은 냉정한 현실이면서도 은경동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런 동네에서 형사도 나왔군요.”
“그 동네가 왜?”
“술쟁이 아니면 싸움쟁이들만 사는 지독스럽게도 못난 동네잖아요. 나도 결국 떠난 사람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