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足1) 개인적으로 저는 고흐와 고갱을 싫어 합니다.
이유는 그들의 험난한 인생을 보면 마음이 안좋고 워낙 유명하다 보니 스타들에 대한 안티적 성향의 비굴함 때문 입니다.
하지만 이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팬이 되었습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蛇足2) 이번글에는 고흐의 말년의 작품을 주로 담았습니다.
이유는 그가 가장 활발히 작업하고 걸작들을 많이 만들어내던 시기가 그가 자살하기전 2년여전 부터 사망하기 직전까지
이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후 많은 영향을 미친 여러가지 미술사조들과 비교할수 있기 때문 입니다.
蛇足3) 후기 인상주의란 용어는 상당히 애매한 단어라는 생각을 평소에 해왔습니다.
그것은 마치 르네상스와 매너리즘간의 미묘함 처럼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수 있기 때문에 이글에서는 후기인상주의 라는
용어 대신에 고흐 한 작가로서 글을 마무리 합니다. 후기 인상주의가 인상주의 또는 신인상주의의 계승 또는 발전된 형태는
절대 아니라는 것만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Franz Marc(1880-1916)
Willem de Kooning, (1904-1997)
Utagawa Toyokuni (1769 - 1825)
Henri Matisse (1869~1954).
에곤 쉴레 [1890.6.12~1918.10.31]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7.14~1918.2.6]
Vincent van Gogh, [1853.3.30~1890.7.29]
" 때때로 너무나도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네.....마치 말을 할때나 편지를 쓸때
거침없이 단어들이 줄줄 튀어나오듯이 붓놀림이 이루어지네"
(고흐의 편지글 중에서)
우리가 난해해 하는 구체적 형태가 없는 그림들.
추상이니 표현주의적 계열이라고 불리우는 그림들.
점과 선과 색채만으로 표현되는 그림들이 나타나는 시기가 곧 도래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경한 그림들이 나타나는 배경에는 물론 세쟌느의 영향이 지대하지만
세쟌느에 대해서는 다음편에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할것이고(정모 이후가 되어야 할것 같네요)
세쟌느 만큼이나 20세기 초의 작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화가가 바로 고흐 였습니다.
고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화가들은 야수파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주로 전개 되었던 표현주의 [表現主義, Expressionismus작가 들이었습니다.
표현주의의 특성은 작가 개인의 내부생명,
즉 자아(自我) ·혼(魂)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우선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예술을 거쳐 문학 ·연극 ·영화 ·음악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반인상주의의 입장에 섰던 뭉크, 호들러, 앵소르, 고흐, 고갱의
1885년부터 1900년에 걸친 화업(畵業)이 그들의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이들 화가들의 주관적 표현은 드라마틱하고 또한 집념에 가까운 테마를 소수의 강렬한 색채와 대비시키고
왜형(歪形)된 포름(형식), 단순 ·긴밀한 구도, 선의 그래픽한 예리함과 역동성(力動性)으로 드러나곤 하였습니다.
Franz Marc, Fighting Forms, 1914.
프란츠 마르크는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입니다(1880-1916)
불과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전사한 그는 1907년 파리 여행중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비록 짧지만
평생 그의 작업의 기본 테마를 신인상주의와 포비즘 그리고 큐비즘의 영향을 위와 같은 다이내믹한 색채감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전까지의 회화가 구체적인 형태를 기본으로
-인상주의자 들이나 후기 인상주의자들도 이러한 형태성의 영역을 과감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색채나 빛의 대비 또는 그림의 스토리로 감정을 나타내고 감동을 주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화가들은 형태를 떠나 순수한 색채만으로도 감정을 표현해 낼수 있다는것을 알게되고
이러한 그들의 이론을 캔버스위에 펼쳐 나가게 됩니다.
칸딘스키가 가 그것을 실천했고 위에서 언급한 여러명의 표현주의 작가들이 그 방법을 채택하였습니다.
바로 추상의 길목에 들어서는 시기가 열린것입니다.
이길목의 초입에 서서 안내자 역할을 했던 이가 바로 세쟌느, 고갱 그리고 고흐였습니다.
아래있는 고흐의 그림을 보기로 하죠.
The Fourteenth of July Celebration in Paris Vincent van Gogh
1886
고흐의 1886년 작품입니다.
기념일을 그린 풍경화에서 그는 붉은색과 흰색 푸른색의 거친 물감덩어리로 그의 감정을 표출해 내고 있습니다.
그림의 아래 부분을 제외한 상단의 2/3지점은 모든 형태가 무너지고 오직 물감에 의한 고흐의 감정의 잔해들만
남아있는듯 합니다.
감정의 표출이 색과 흥분된 과격한 붓의 자국 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이 그림에서 훌륭하게 보여주고 잇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림들은 독일의 젊은 화가들을 자극하였고 그로인해 야수파와 표현주의 화가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그림들이 나오게 되는데는 고흐나 세쟌, 고갱 같은 선배작가들의 영향 뿐만 아니라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시대 상황도 크게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Willem de Kooning, Woman V (1952-53),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무려 93세라는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한 뷜렘 드 쿠닝은 1904-1997
고흐와 같이 네덜란드 출신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액션 페인팅’이라고 하는 일종의 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자입니다.
뉴욕 파의 중심인물로 평가되고 잇습니다.
추상표현주의 [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란
1940년대 말∼1960년대 초에 미국에서 전개된 미술의 한 동향입니다.
가장 위에서 언급했던 독일 표현주의가 자기표현을 내세우는 예술성이 강했던것에 비해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예감한 예술을,
그 어떤 형태로 포괄하려고 하는 자연발생적인 요구에 호응하며 만들어 진 것이라 할수 잇습니다.
한편, H.로젠버그가 명명한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도 이 동향에 포함되는데, 특히 폴록 등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가지는 데쿠닝이나 클라인 등의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추상표현주의는 프랑켄살러, J.존스 등의 네오다다, 팝 아트 등의 미니멀 아트를 거쳐
19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Pollard Willow with Setting Sun
1888
위의 드 쿠닝의 추상 표현주의 작품과 고흐의 그림을 비교해 보시면
두 사람이 비슷한 감정의 출발점에서 작업에 임하고 있음을 느끼실수 있을 겁니다.
물론 색채의 표현법이나 거칠고 신경질적인 붓의 사용으로도 두 작가의 감정상태가 감상자에게 전이 됨을 알수 있습니다.
쿠닝의 여인에대한 표현 즉 작가가 여자에게 느끼는 혐오 또는 연민에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역시 고흐의 그림에서는 작렬하는 태양에대한 고흐의 혼돈과 잘려나간 나무들과 수풀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기복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이제 회화는 더이상 고귀하거나 아름답기만 한것들을 표현해내는 도구가 아니라
작가들의 심장 깊이 숨어 요동치기기만 하던 감정을 표현해 낼수 있는 시기가 열린것이며
이러한 과감한 시도를 했던 선구적인 작가중 한명이 바로 고흐였던 겁니다.
인상주의 이전 이미 낭만주의 회화시기때부터
일본의 미술은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도 일본의 우키요에풍의 장식이
그의 화면을 장식하기도 하였고 인상주의시기의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러한 일본풍 장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 합니다.
특히 고흐의 그림에 있어서 이러한 요소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처럼 우키요에(부세화)를 그대로 카피한 고흐의 그림(우측)에서 보면 알수 있듯이
동양회화적 특성인 평면성과 한없이 깊은 공간성 그리고 외형을 따내듯이 구분짓는 외곽선의 사용등은
고흐를 비롯한 대부분 인산파 화가들이 차용하게 되는 주요 특성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고흐는 화상인 동생 테오와 함께 수백장에 이르는 일본 판화를 수입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일본판화에 대한 그의 흥미는 더욱 커질수 밖에 없었을거라는 생각 도 해봅니다.
19세기 말의 이러한 일본풍에 대한 열광과 취미를 자포니즘 [Japonism] 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아래 박스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키요에 [浮世繪(부세회), Ukiyo-e]
일반적으로는 목판화(木版畵)를 뜻하며 그림내용은 대부분 풍속화이다. 그러나 우키요에라는 말은 일본의 역사적인 고유명사로, 보통명사로서의 풍속화와는 구별된다. 전국시대를 지나 평화가 정착되면서 신흥세력인 무사, 벼락부자, 상인, 일반 대중 등을 배경으로 한 왕성한 사회풍속·인간묘사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18세기 중엽부터 말기에 성행하여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가쓰가와 슌쇼[勝川春章]·도리이 기요나가[鳥井淸長]·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우타가와 도요하루[歌川豊春] 등 많은 천재화가를 배출시켰다.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에 들어서면서 사진·제판·기계인쇄 등의 유입으로 쇠퇴하였으나, 당시 유럽인들에게 애호되어 프랑스 화단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자포니즘 [Japonism]
서구인들이 일본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860년대부터이다. 일본이 1854년 구미(歐美)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유럽에는 일본 미술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의 도자기와 차(茶), 부채, 우키요에 판화 등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문화 및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그들은 일본 미술품의 장식적인 요소를 차용하는 수준에서 점차 그 양식과 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표현하는 양태로까지 나아갔다. 19세기 말 유럽의 화가들 가운데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모네는 작품 소재로 일본의 전통의상이나 일본풍의 기물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 벽을 일본 판화로 장식하였으며, 만년을 보낸 파리 교외 지베르니에는 일본풍의 정원을 만들어 수련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4백여 장에 이르는 일본 판화를 수집하였으며, 마네는 일본 미술에서 평면적인 색채 효과를 배웠고, 보나르는 '자포나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일본 미술에 심취하였다. 그밖에 드가, 고갱, 쇠라, 로트레크 등이 선명한 색채와 강한 명암 대비, 뚜렷한 윤곽선 등으로 일본 미술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예술지상주의 미학을 표방한 휘슬러 역시 일본회화의 열렬한 찬미자였다.
이러한 서구 미술 속에 나타난 일본 미술의 영향을 프랑스의 미술비평가인 필립 뷔르티(Philippe Burty)는 1872년 '자포니즘 Japonisme'이라는 용어로 정의하였다. 일본 미술, 특히 서민적 풍속화인 유키요에의 영향으로 19세기 말의 유럽 회화는 주제를 중심이 아닌 화면 가장자리로 옮기고, 위에서 조감하는 구도를 사용하였으며, 중경을 없애고 원경과 근경만으로 공간을 처리하거나 평평한 색면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등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였다.
일본 미술이 서구에 이렇듯 강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럽의 과도기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자포니즘은 서구의 미학이 큰 변화를 요구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모더니즘 화가들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또한 예술이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를 차지하는 일본 예술의 특성이 당시 서구인들의 이상에 맞았기 때문에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의 미술과 일본적 취향은 서양 예술 전반에서 그 영향이 확산될 수 있었다
Almond Blossom February 1890 Van Gogh Museum, Amsterdam
당시의 유럽인들에겐 고흐의 이그림들이 이국적이고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 올지 모르겠지만
동양인인 우리가 볼때는 오히혀 친숙하고 정겨운 이미지로 다가오는것은 고흐가 이그림을 그릴때 일본 목판화(우키요에)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 그렸기 때문일겁니다.
고흐가 권총으로 자살하기 5개월전에 그린 이 그림은당시의 고흐 답지 않은 상당히 안정되고
치밀한 작업이 눈에 뜁니다.
1889~1890년부터 그의 정신적인 발작은 눈에띄게 자주 일어 났었고
그의 정신적 상태에 따라서 그의 그림들은 극과 극의 기복을 나타내곤 합니다.
Orchard with Peach Trees in Blossom 1888
점묘법을 사용한 그의 그림은 1888년 이후로는 좀처럼 찿아 보기 힘듭니다.
물론 점묘법을 사용한듯 보이는 그림들이 이후에도 보이기는 하지만 이전의 그림에서처럼 소극적인 점묘법이라기 보다는
색점들이 더욱 과감하지고 커지면서 고흐 특유의 휘몰아치는 듯한 소용돌이식의 븟터치로 과감하게 변화함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La Crau with Peach Trees in Bloom 1889
위의 그림을 그린 1년후의 그의 작업을 보면 그의 소극적인 색점들은 사라지면서 굵직하며 과감한 터치를 볼수 있습니다.
그의 터치는 과감해지면서 마티에르를 풍부하게 나타내게 되고 과감한 구도법의 사용으로 화면 전체의 다이내믹한 힘이
넘쳐남을 볼수 잇습니다. 이 그림 우측 하단의 황토길을 표현한 고흐의 감각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Self Portrait with a Grey Felt Hat 1887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
4살 터울의 테오도로스(테오)라는 동생이 있는 그는 15세때 가난으로 인해 다니던 기숙학교를 그만 두게 됩니다.
16세때 부터 헤이그에 있는 숙부의 화랑에서 판화를 복제하며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게되는 그는
당시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20세에 빈센트는 화랑의 런던지점으로 발령 받았고 22세때에는 파리 지점에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그는 런던에서 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져들며 생업을 소홀히 하고 결국 화랑에서 해고 당하게 됩니다.
Self Portrait as a Painter 1888
결국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던 고흐는 영국으로 건너가 신학대학을 지망 하지만 낙방하고
전도사로서의 길을 가려하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때문에 이 또한 좌절되고야 맙니다.
27세가 되던해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만이 자신을 구원할수있다는 믿음 하나로
미술수업을 위해 파리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5살 연하인 미술학도에게 기초적인 드로잉 수업을 받았고
외사촌인 유명한 화가로부터 본격적인 유화수업을 받을수가 있었습니다.
이시기부터 그는 자신이 열광했던 종교에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고 목사인 아버지와도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는 과격한 성격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과 충고를 거부하며 결국에는 그의 그림 선생인 사촌과도 절교하기에 이릅니다.
Self Portrait with Pallette 1889
그는 크리스틴이라는 알콜중독에 매독 환자인 매춘부와 동거를 하며 지냈습니다.
가족들의 반대 그중에서도 동생 테오의 강요에 의해 그는 엄청난 갈등과 괴로움 속에 결국 그녀와 어린 자식을 저버리게 됩니다.
고흐는 이후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게 되지만 생활비와 그림을 그리는데 전념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하였습니다.
1885년 그의 나이 32살에 그린 그의 초기작 <감자먹는 사람들>은 그당시에 그렸던 작품으로서
초기에 그는 주로 노동자나 하층민들의 삶을 그리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1886년 그는 화상 점원으로 일하는 동생 테오를 찿아서 파리로 오게 되고
그곳에서 베르나르와 로트렉을 만나게 됩니다.
Portrait of Doctor Gachet 1890
그는 파리에서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35세가 되던 1888년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습니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고 할수 잇습니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습니다.
한때 장 폴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고
그해 12월 빈센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 후 빈센트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습니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의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습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2개월후 끝내 37세의 나이로 권총자살을 하였습니다.
Marguerite Gachet at the Piano 1890
어떤 평론가의 말대로라면 지금은 그의 그림 몇점으로 프랑스도 살수 있다고 하지만
그의 이러한 정열적인 작품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인정 받기 시작 한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고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에게 최초의 커다란 지표가 되기 시작 했습니다.
Henri Matisse, Open Window, Collioure, 1905,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위의 그림은 마티스의 작품 입니다, 야수파의 대표 작가중 한명 입니다.
야수파 [野獸派, fauvisme] 는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으로서
사실주의적 색체체계의 파괴, 명암 양감등도 무시하는 격렬한 정신의 표현과 강렬한 색채를 구사하면서
지금까지와의 가치 체계와는 전혀다른 색상과 형태를 추구하는 새로운 조형세계를 구축하려 시도한 화파입니다.
명확한 이론이나 목표를 갖지 못한채 1905년 부터 7년까지 짧은 운동기간을 가진 이들은 1908년 부터는 각자의 고유한
독자적인 노선의 미술 활동을 펼쳐 나가기 시작 합니다.
한마디로 야수파들의 목표는 순수한 색채의 고양과 화폭을 통한 자아의 해방.
개성적인 자아 표출 이었다고 할수 있으며 이러한 야수파 운동은 20세기 최초의 예술적 혁명이라고 불리워 집니다.
(자세한 것은 이후 야수파 섹션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The Grounds of the Asylum 1889
불타오르는듯한 그의 붓터치는 보는이들을 흥분 시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이글거리는듯한 붓의 놀림은 상당히 의도적인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물의 외곽을 타고 스믈거리듯 이어지는 붓의 놀림은 일정한 방향성과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그러한 붓터치들이 각각의 형태들을 보호해 주며 배경과 형태를 상호 보완시키는 관계를 유지하게 만들어 줍니다.
자칫 불안정 해보이고 산만해질수 있는 고흐의 그림이 뚜렷하고 명쾌하며 강하게 느껴질수 있는 이유중 하나는
그의 부셰화에서 차용한 사물의 검은 윤곽선 외에 이러한 계산된 배경의 조합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수 있습니다.
Cypresses 1889
지금까지의 화가들은 -그들이 비록 인상주의 화가라고 해도- 하늘은 파랑색으로 산은 초록색 계열이라는 시각에
보이는 고유색 또는 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그대로의 색이라는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했던것이 사실 입니다.
하지만 위의 고흐 그림에서의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쉬멜로우 같은 노랑과 핑크 그리고 옥색깔이 어우러진
하늘의 표현을 보면 고흐는 고유색이라는 관점을 포기한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고흐 다음 세대의 자유로운 회화세계를 추구하던 젊은 작가들은
분명 고흐의 선구자적 표현력에 매료되었던것이 분명 합니다.
Tree Trunks in the Grass 1890
뒷면의 나무들을 보면 분명 고흐 특유의 화풍이지만 전면의 커다란 나무의 표현법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그의 표현과는 분명 다른면이 보입니다.
에곤 쉴레가 떠오르시지는 않으신가요? 에곤 쉴레 [1890.6.12~1918.10.31]
아니면 클림트는 어떠십니까?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7.14~1918.2.6]
이그림이 그려질때 쉴레는 갓난아기였고 클림트도 28살이었으니 그들이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것이 타당할것입니다.
Irises May 1890 Van Gogh Museum, Amsterdam
고흐가 자살하기 두달전에 그린 아이리스 그림 입니다.
아마도 닥터 가셰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시기의 그림일거라는 추측을 해보기도 하지만(믿지는 마세요^^:)
유난히 안정된 붓의 터치와 형태 감각 그리고 구도를 보면 제나름의 추측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긴 고흐는 초상화 외에도 많은 수의 정물 그중에서도 아이리스와 해바라기 정물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해바라기를 그릴때는 격정적인 부분이 많이 도출되곤 하지만 아이리스를 그릴때는 많이 차분한 인상을 남기곤 합니다.
그림자 없는 원색의 단면적인 물체와 단순한 배경처리는 야수파 작가들에겐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Twelve Sunflowers in a Vase September 1888 Neue Pinakothek, Munich
고흐의 여러점의 해바라기 정물화는 너무나 유명하여 아직도 위작논란이 간간이 들려오곤 합니다.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한 해바라기는 물감두께가 주는 거친 마티에르의 효과와 단순한 배경과의 깊은 대조 덕분에
감상자들에게 더욱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해바라기가 담겨 있는 화병은 더이상 본연의 물성이나 형태성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그림에서 해바라기를 없애 버린다면 화병은 단지 물감들의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보신적이 있으신지요.
Wheatfield with Crows July 1890 Van Gogh Muslum, Amsterdam
권총으로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던 7월의 어느날에 그린 그의 그림 "밀밭의 까마귀"
그는 이미 이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힘들고 고통 스러웠던 삶의 자락을 놓으려는 생각을 햇을지도 모릅니다.
세갈래의 길은 혹시 그가 청년시절 꿈꾸웠던 신의 사도로서의 길과 험난 했던 화가로의 길을 그린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하나의 다른 길은 그가 지금까지 밟아 보지 못했던 또다른 미지의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푸른 밤하늘의 빛나는 별도 그리지 못할정도로 그는 외롭고 힘들었었나 봅니다.
다만 저승길을 같이 해줄 친구들로서 그는 외롭지 않게 많은 까마귀들을 별대신 많이 그려 넣었는지도 모를 일이죠.
그는 이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길지는 않았지만 고단했던 인생을 되돌아 보며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심정이었을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달리 격정적이고 난폭한 그의 붓놀림과 다듬어지지 못한 색채의 사용이
이그림을 그릴때 고흐의 감정상태를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 입니다.
37년의 짧은 세월동안 그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본격적인 수련기를 포함해서도 10년 정도에 불과 합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10년 동안의 작업 기간동안 그가 남긴 작업과
그 성과들 그리고 무엇보다 미술사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볼때 그는 노력파이기도 하지만 천재였습니다.
다음편은 고갱입니다.
첫댓글 제가 좋아하는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화" 가 빠졌지만 ' 아몬드나무' 그림은 있네요..한 달 전까지 울집 거실에 걸려있던건데..^^ 덕분에 후기인상파에 대해서 화악~실 히 정리했네요. 소모임게시판에 고흐와 아저씨 룰랭의 이야기 동화 올려놓을게요. ^^
해박한 지식과 정성이 담긴 보스코님 게시글에 감동 받았습니다. 글도 그림도 Don McLean의 "Vincent"도 모두 좋네요. 고맙습니다.
참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보스코님 자료를 읽으면서 공부할것 같네요^^
고흐의 그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저도 이글을 읽으면서 찬찬히 그림을 다시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고흐의 팬이 되었네요.^^* 유럽인들이 일본미술에 열광했던걸보면 인간은, 자신이 갖지 않은 다른 것을 동경하는 본능이 확실히 있나봅니다. 좋은거죠. 그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융화되어 또다른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