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5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마르코. 10,13-16)
Amen, I say to you, whoever does not accept
the Kingdom of God like a child will not enter it.” Then he embraced the children and blessed them, placing his hands on them.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그리하여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또한 이성과 지성,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주시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어, 그들이 올바로 살아갈 길을 마련해 주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이르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많은 이가 이 말씀을 들으면 어린이처럼 티 없고 순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어린이들을 보면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린이들 대부분은 당장의 이익에 신경을 써서 더 큰 것을 바라보지 못할 때도 많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배려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또한 장난을 좋아한 나머지 중요한 것을 그르치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어린이들은 한마디로 철부지입니다. 스스로 옳은 것을 판단할 수 없고,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는 늘 부모의 사랑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란, 비록 자기 자신이 나약하고 죄도 많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하느님 앞에서 어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란 독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분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도움 없이는, 그분의 보살핌 없이는 한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육체적 생명도, 영적인 생명도 모두 그분께 달려 있고, 그분의 품속에서 성장해야 할 어린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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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법
-황태종 신부-
생각할수록 인간은 신비롭다. 눈에 불을 켜고 육체적인 만족과 부와 명예를 갈구하면서도 결국 인간은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지 못한다. 부와 명예 그리고 육체적인 건강이 삶의 최종 목표인 양 그리고 우리를 완전한 평화의 세계로 이끌어 줄 것처럼 그것을 향해 무섭고 끈질기게 질주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더구나 그 끝에서도 인간은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낀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이상 이러한 것들이 그들에게 참된 행복을 줄 리 만무하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겸손하게 창조의 원리에 순명하지 않고는 평화를 누릴 수 없고, 사랑을 발하지 않고는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인류를 참된 구원의 길로 이끄실 것이라는 구약의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깨우치고 참된 평화의 길, 행복의 길을 제시하신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놓으면 될 것을 움켜쥐려 한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은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과 평화를 바로 곁에 두고도 보지 못하고 결국은 그 나라에서 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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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처럼 행동하기
-정순용-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축복하시는 장면이 세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그분께서 친히 행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시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정겹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마태오 복음 19장 13-15절과 비교해 보면 마태오 복음서보다 한 구절(15절)이 더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를 강조하고 싶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어린이은 율법도 잘 알지 못하고 하느님 앞에서나 율법을 지키는 일에서나 어떠한 공적을 세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공적 세우는 일에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런 어린이의 선한 모습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범죄자들 앞에서조차도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믿고 선하게만 받아들이는 어린이들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며, 선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도록 은총을 청해야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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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람들
- 김인순 수녀-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한테도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려고 데려옵니다. 자신들이 만난 따뜻한 하느님을 힘없고 약한 아이들한테도 보여주고 싶어서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가르치시느라 종일토록 수고하신 예수님께 쉬는 시간을 드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이나 제자들, 양쪽 다 좋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신 몸의 안전보다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앞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부심에서 순진하고 무력한 군중에게 권력 ( ?) 을 행사하고 싶은 교만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 오히려 예수님을 자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를 차별 없이 대하시고 자신의 시간까지도 다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더 잘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평소 시간표를 따라 진행되어야 하는 일을 우선하여 사람들의 필요에 귀를 닫고 후회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형식에 치중하여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것 같아서요. 수도자로서 예수님께 선택받았다는 은근한 자만심과 스스로의 계획에 얽매여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이들을 막아버리지는 않았는지 걱정됩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양승국신부-
<다시금 어린이로 돌아갈 순간>
요즘이야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우지만 예수님 시대 어린이들은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부계사회, 가부장제, 남성위주의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건강하고 자식 많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남자 어른을 최고로 쳤습니다.
그 외 여성들, 자기 역할 제대로 못하는 남성들, 환자들, 장애우들은 어딜 가도 제대로 대접도 못 받았습니다. 특히 의료기술이 극도로 낙후되었던 당시 당연히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는데, 어린이들은 인간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명백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을 축복해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언행은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 하느님에 대해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 경건하게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느님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어린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니, 어안이 벙벙해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들, 그간 살아오면서 세상에 기여한 바도 없는 어린이들, 하느님과 율법에 대해서 문외한인 어린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바람직한 인간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되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린이-어른-어린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순수한 어린이들, 비록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큰 근심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죄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며 이웃에 대한 기대치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투명합니다. 머릿속에 든 것이 그리 많지 않다보니 자기주장도 강하지 않고 대체로 수용적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 그리 대단하다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삶이 아닐까요?
그러나 어린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조금씩 세상을 알아갑니다. 더불어 세상의 부조리도 알아갑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물들어갑니다. 순수성을 잃어가며 죄에 물들어갑니다. 내세울만한 것도 아니지만 조금 배웠다고, 자기주장이 강해집니다. 고집도 세지고 당연히 이웃들과의 관계도 껄끄러워집니다. 지나치게 세속적, 자기중심적 삶으로 인해 피곤한 나날이 계속됩니다. 하느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지요.
다시금 어린이로 돌아갈 순간입니다. 부드럽고 수용적인 어린이의 삶, 겸손과 침묵을 배경으로 그간 무겁게 달고 다니던 고집과 편견, 죄와 위선을 하나하나 떨쳐버리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해야할 순간입니다.
어렵지만 ‘이 나이에 무슨’ 하는 체면도 멀리 던져버리고, 지난날 최고라고 여겼던 것들도 조금씩 내려놓고, 엄청나게 힘이 들어간 목도 부드럽게 만들며, 어린이처럼 작은 자가 되어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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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주셨다 함은
-김찬선신부-
“그분께서는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은 주님의 다섯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그분께서는 여섯 번째로 그들에게 지성을 나누어 주시고, 일곱 번째로 그분의 능력들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분별력과 혀와 눈을 주시고, 귀와 마음을 주시어 깨닫게 하셨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께서 온갖 것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해주셨다고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셨다고 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시는 분은 하느님임을 강조하는 차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지 다른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가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얘기고, 나의 형제나 친구도 인간에 의해 맺어진 인연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얘기고, 능력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누가 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다른 누구에게 감사하거나 원망할 것 아니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비하할 것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원망할 일이 있어도 하느님을 원망하면 됩니다. 자신은 더더욱 비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는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차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넘치도록 주시고, 조건 없이 주시고, 주시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실 정도 기꺼이 주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 주신다고 느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고, 만일 그렇게 느낀다면 하느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인지, 불감증 때문인지 은총을 주셔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문제이고, 사랑을 주셔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문제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받아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차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 선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선 나에게 존재를 주셨고 나라는 존재를 주셨습니다. 한 때는 왜 나에게 존재를 주셨는지, 왜 이런 나를 주셨는지 원망하고 투덜댔지만 이제는 이런 나라는 존재를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또한 나에게 지금의 부모, 형제, 이웃을 주셨습니다. 나의 능력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나의 언변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나의 성격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심지어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하느님께서 다 주신 겁니다.
물론 나의 탓 또는 네 탓으로 슬픔과 괴로움이 오고, 내가 잘해서 또는 네 덕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오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비록 그것들이 악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궁극적인 선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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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공에 대한 정의를 했다고 합니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서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이곳에 살아있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어떠세요? 이렇게 사는 것이 성공한 것이라는데 동의하십니까? 그런데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삶은 이러한 것이 아니지요. 돈과 명예 등 세속적인 것들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를 이끌어 줄까요?
유명한 배우였던 마릴린 먼로는 젊은 날에 자살을 택하면서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해요.
“나는 남보다 많은 인기를 얻고, 성공을 거두고,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린이는 우선 단순합니다. 그래서 쉽게 웃지요. 별 특별한 이야기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은 웃고 떠들 수가 있습니다. 둘째 어린이들은 의존적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보호를 받아야 하며, 배움이 적기 때문에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린이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존적이며, 이는 곧 겸손함을 뜻하게 됩니다. 셋째 어린이들은 순진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순진하지 않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그래도 어른들보다는 순진합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겸손하며 순진한 아이들의 특징을 간직해야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성공의 비결인데, 왜 우리들은 어른이 되면서 이 사실을 잊어버릴까요?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과거에 연연하면서 ‘그때가 좋았는데...’라는 후회의 말만을 되풀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린이와 같이 되라.’면서, 지금 이 순간의 노력으로 어린이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노력. 세속적인 것에만 성공을 찾지 않고, 바로 주님 안에서 성공을 찾는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진정한 성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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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조명준 신부-
어린이처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린이들의 특성은 다른 이들의 말을 쉽게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라는 말처럼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친척들의 말에 ‘정말 그런가?’ 하며 상심에 빠지기도 했던 어릴 적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이 그립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 속에 숨겨진 의도를 생각합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을 믿었다가 혹시나 안 좋은 결과를 얻으면 ‘사람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하며 세상은 약삭빠르게 살아야 한다고 재차 다짐하곤 합니다. 그래서 점차 어렸을 때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만은 이 순수함을 지키고 싶습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라는 독서 말씀을 믿으며, 하느님께 향한 순수한 믿음을 가진 ‘의인’으로서 또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으로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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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 이상각 신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아마도 어린이를 예수께 데리고 온 사람은 어머니들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라며 주변 사람들의 핀잔에도 어린이를 예수께 가까이 데리고 갔던 어머니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우리가 꼭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축복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무릎’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어머니의 무릎이 자녀에게는 축복이라는 뜻인 것 같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무릎에서 젖을 먹고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며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란다. 또한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평생토록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축복을 청하며 기도드린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무릎은 자녀에게 축복 그 자체이며 하느님한테서 오는 축복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축복을 받아야 하고 축복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 가장 먼저 복을 내려주셨다. 그리고 자식을 낳아 번성하고 온 땅을 지배하며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결코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딱 하나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축복이 넘치는 낙원에서 쫓겨나고 만다. 감사가 멈추고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는 곳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머물 수 없다. 늘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낙원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부모가 있는 가정은 낙원이나 다름없다.
불평과 불만 속에서 언제나 화내고 짜증내는 부모와 함께 사는 어린이는 낙원에서 추방된 것이나 마찬가지며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축복을 받지 못한 채 상처를 안고 성장하게 된다.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하고 에사우처럼 “아버지, 내가 받을 축복은 없습니까?”라고 외치며 축복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게 된다. 성모님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가 예수님의 축복을 자녀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고 평화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야말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또한 함께 기도하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은 가정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기도 가운데서도 가정의 평화와 축복을 불러오는 가장 좋은 기도는 묵주기도다. 묵주기도는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며 함께 기도하고 서로 축복을 빌어줌으로써 행복한 가정이 되게 한다.
“자녀를 위하여 더 나아가 자녀와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어린 시절부터 날마다 가정 기도 시간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은 물론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는 영적 도움이 됩니다.”(「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4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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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희망과 가능성으로 가득 찬 사랑스런 존재>
-양승국신부-
요즘에야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보물처럼 대하지만 예수님 시대 당시 아이들은 제대로 사람취급도 못 받았습니다. 어른 중심의 사회, 남성중심의 사회, 영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대 분위기 안에서 아이들의 존재 가치는 미미할 뿐이었습니다.
어른이 아이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낸다는 것, 그 자체를 이상한 일,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그런 ‘무가치한 존재’들인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오는 것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제자들은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감히’하며 어린이들에게 안수를 청하는 부모들을 꾸짖습니다.
‘지금 안 그래도 계속되는 치유활동으로 피곤에 지친 예수님이신데, 애들까지 몰려와서 왠 난리들인가?’ 하며 “자, 애들은 가세요.” 하고 외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반응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꾸짖는 제자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이 극명하게 차이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군요.
예수님 눈에는 생명이 붙어있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인지를 막론하고 다 소중합니다. 살아있는 그 누구도 당신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이든 그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합니다.
한 인간을 경제활동 가능 여부, 재산 유무, 나이, 외모, 건강, 학식...이런 외적 잣대로 쉽게 평가하고 마는 우리들의 판단기준, 참으로 심각하게 반성해볼 일입니다.
철저하게도 소외계층이었던 어린이들을 한 명 한명 끌어안으시고 일일이 축복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보니 반성거리가 생기는군요.
오늘날에도 우리 어른들은 은연중에 제자들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애들은 좀 빠져라!”
“조용히 안 해? 머리 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도대체 넌 언제 철들래?”
아이들이 뭔가 의견을 냈을 때, 한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일언지하에 그들의 견해를 철저하게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이들도 생명 그 자체로 어른들과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들의 부족해 보이는 생각, 시시해 보이는 의견에 귀기울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무시하는 아이들도 언젠가 하느님의 인도로 활짝 꽃피어날 인생을 살아갈 존재, 희망과 가능성으로만 똘똘 뭉쳐진 하느님의 아름다운 작품인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를 훨씬 능가할 존재,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우리보다 훨씬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영적이 존재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하느님 창조의 손길이 깃든 사랑스런 대상으로 설정하길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을 우리 가까이 부르고, 사랑이 담긴 손길로 그들을 축복해주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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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가 엄마를 바라보는 그 시선으로 하느님만을...
-김상균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수많은 걱정들을 합니다. 작게는 ‘점심식사로 무엇을 먹을까’와 같은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정치, 경제 등 사회적인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생각하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우리의 걱정이 재물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결국 돈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돈’에 의지하고 ‘돈’이 많기를 희망하고 ‘돈’이 없으면 실망합니다. ‘돈’벌기 위해 노력하고 ‘돈’ 때문에 웃고, ‘돈’ 때문에 웁니다.‘돈’이 많으면 자신감이 생기고 ‘돈’이 없으면 주눅이 듭니다. 우리는 실제로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살고 있고 한편으로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우리 머리 속에, 우리 인생의 한 가운데 ‘돈’이 자리잡고 있다는 이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미래를 걱정하고 앞날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돈’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현실이 조금은 씁쓸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새로운 사고를 하도록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 획기적인 비전을 제시합니다.“하느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니...그렇다면 어린이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린이와 같이 지식이 부족한 사람? 어린이와 같이 몸집이 작은 사람? 어린이와 같이 얼굴이 동안인 사람?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과 비슷한 내용을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는데요 마태오 복음 5장에 나와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부모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어린이처럼 아버지 하느님께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할 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또 ‘재물’을 손해보더라도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것을 손해보면서까지 옳은 일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손해를 감수하며 옳은 일을 할 때 결국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재물은 우리의 힘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재물 때문에 자만해지고 재물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데 소홀해 진다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 때문에 기뻐할 때 하느님 나라에 다가온 것이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맞다면 우리는 재물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우리의 두 눈을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합시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바라보는 그 시선으로 하느님만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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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이철구 신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축복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언짢아하시고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을 두고 여러 가지 오해와 판단을 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을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마음에 담고, 마음에 담은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실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양창순(양창순 신경정신과 대인관계 클리닉)-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을 꿈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만약 내게 그와 같은 복이 허락된다면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기쁜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복을 받기에는 너무 멀리 오고 말았다는 자각 또한 얼마나 뚜렷한지요. 흠없고 순수했던 어린 날을 돌아볼수록 지금의 허물과 불순종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어린아이의 무구함을 가진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어른의 가장 큰 표지가 무엇인가요? 스스로를 옭아매는 온갖 모양의 족쇄가 아니던가요.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압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면 더이상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욕망으로 인한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족쇄가 되어 스스로를 옭아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자 융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하느님께서 받아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어딘지 염치없는 일처럼 생각되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쓰시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제 임상경험을 볼 때 정말로 그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그와 같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닌가 하는. 또한 어린아이들은 작고 사소한 일에도 명랑한 웃음으로 감탄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우린 감탄하는 능력부터 잃어버립니다. 매사를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호기심과 감탄이 없는 인생은 곧 깨달음도 없는 인생이란 말과 같은 뜻이 아닐는지요. 깨달음이 없으면서 내 믿음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 역시 염치없는 일일 테고요. 그래서 조용히 소망해 봅니다. 먼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그리고 삶에서 감탄을 되찾을 수 있기를. 쉽진 않겠지만 애써볼 가치는 충분한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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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학 신부-
요즘에는 건강을 위해서 일부러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웰빙바람이 불어서 인지 늦은 저녁 바닷가에도 전에는 끼리끼리 모여 노는 모습보다는 둘 셋씩 짝지어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습니다. 저도 가끔씩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목적지까지 걷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몹시 지치고 피곤해서 걷는 것이 싫을 때가 있었습니다. 짧은 거리라 택시를 타기도 뭐해서 그냥 참고 걸었는데, 문뜩 어릴적 아버지와 함께 걷던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저를 데리고 다니셨는데 저는 다리만 아프면 곧장 투정을 부리며 아버지 등에 업히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피곤하고 다리 아플 때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분명 피곤하니까 좀 같이 걸으면 안돼겠니 하는 표현도 했을 텐데... 왜 저는 그때 내가 다리가 아프니까 당연히 업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때 아버지는 전혀 피곤함을 모르는 분이라고 여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연로해서 혼자 걸으시는 모습조차도 애처로운데, 왜 그때 그랬을까 하고 후회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이 생각이 드는 것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라는 구절 때문인가 봅니다. 물론 복음의 본래 의미는 이것저것 따지고,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어른들에게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인 다는 것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나 혼자만의 삶도 때로는 지치고 힘이 드는데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도 철부지 어린이를 말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경험도 없고, 눈치도 없고, 실수 투성이며, 하고싶은 데로 하고 말해도 못알아 듣는데.. 이 어린이를 받아들이라니.. 하지만 나의 부모는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쭉 나를 받아들이고 업고, 실수나 잘못을 같이 받아 삼키며 살아오셨습니다. 덥다고 벗어던진 옷이나 이불을 다시 입혀주시고, 야단을 치면서도 늘 품에 안으시는 부모님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이방인이지만 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식탁에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핥으려는 개라도 되겠다고 매달리는 어머니의 간절한 모습에 예수님은 그를 칭찬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삶을 통해 자신이 얻어 누리는 ‘회개의 삶’이 아닐까요? 이제는 내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고통을 짊어지고 언젠가 그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알게 해 줄 참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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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 -이수철신부-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위 복음 말씀에서 단박 들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긴밀한 관계입니다.
누구나 동심(童心)의 순수(純粹)를 그리워하는 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어렸을 때 사진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청순(淸純)해 보일 때가 있었나?’하며 신기하게 생각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린이 같음이 상징하는바 갈리지 않은 마음, 단순한 마음, 순수한 마음, 개방적인 마음, 신뢰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일 것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이런 천진(天眞)한 마음 지녔다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추억이 있습니다. 예전에 전북 장수 산골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자매들을 방문했을 때와 얼마 전 높은 산 같은 아파트들로 에워싸여 있는 서울 한복판
분도수녀원을 피정지도 차 방문했을 때 저절로 흘러나온 말입니다.
“어, 여기서 볼 것은 하늘뿐이군요. 하늘만을, 하느님만을 찾으며, 하늘만으로, 하느님만으로
행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에, 아파트들에 저절로 눈길은 하늘로 향할 수뿐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만으로,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부자들이
진정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산상수훈에서 주님의 약속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마음 가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들보다, 마음 깨끗하여 하느님을 뵙게 된 자들보다
큰 부자도, 큰 행복한 자도 없을 것입니다.
저절로 무욕(無慾)의 초연(超然)한 삶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어린이 같은 순수한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야고보의 권고대로, 고통을 겪을 때는 기도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찬양하고, 앓을 때는 믿음이 좋은 교회 원로들을 청해 기도를 받을 것이고, 또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남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새삼 기도와 순수한 마음은 함께 감을 깨닫습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요, 기도를 통해 더욱 어린이 같이 순수해지는 마음입니다.
매일의 거룩한 성체성사시간, 어린이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성체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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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일 잘생긴 신부님일까요?
- 이찬홍 신부-
서문 성당에 계시다가 제가 있었던 광양 성당으로 가신 방영훈 도미니코 사비오 신부님께서 어린이 미사 때 이렇게 물었답니다.
“어린이 여러분! 제주에서 제일 잘생긴 신부님은 누구일까요? 객관식 입니다. ① 홍석윤 베드로 신부님 ②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③ 방영훈 도미니코 사비오 신부님”
이 물음에, 유치부 어린이가 손을 들고는 “② 번요” 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자 방 신부님께서는 유치부 어린이가 뭘 모르는 것 같아, ‘②번이 누군데,’ 라고 다시 묻자, 아이는 큰 소리로 답합니다.
“광양 성당에 있었던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요!”
참 기특하고, 똑똑한 아이 같지 않습니까?^^
사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저도 얼굴에 어렸을 적에 말에 물린 상처만 없었다면, 한 인물 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새벽부터... 잠이 덜 깬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②번요’ 라고 대답한 것은 저와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생각한 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처럼 눈치를 보거나, 이런저런 계산을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천진난만하게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신부님께서 속이 상하실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대답해야지’ 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리고 질문을 듣자마자 바로, “방영훈 신부님요!” 라고 대답한 중고등부 학생들과는 달리 그저 솔직하게 대답한 것입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라는 천진난만함과 솔직함이 나와는 다른, 우리에게는 없는 특성이 아닐까 합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아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두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 같은 사람들의 것인 이유는 많겠지만, 앞에서 말씀드렸던 어린이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솔직함과 천진난만함 때문에 그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짓과 위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잔머리를 쓰는 나라가 아니라, 진실하고 참된 나라입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며 커나갑니다.
곧, 아이들에게는 솔직함과 천진난만함이 있습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신체의 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동되는 것만이 아니라, 솔직함과 천진난만함의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솔직함과 천진난만함이 사라져 버린다면, 더 이상 자신의 마음 안에 하느님 나라를 담아 둘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고 그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말하고 생각하며, 우리가 사는 나라를 살아갈 뿐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천진난만함과 고백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아니 저의 모습을 보면, 천진난만함을 찾아보기란 힘이 듭니다. 다시금 간직하기에는 이미 글러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백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때문에, 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올바른 참회와 고백을 통해 잃어버린 천진난만함을 되찾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솔직함과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간절히 청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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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을 축복하시다.(10, 13 -16)
-유 광수신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슴하셨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우리의 관심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의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루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려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세계 챔피온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그것만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과연 나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가지 달려왔고 또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가? 목표없는 인생은 불행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먼저 목표를 분명히 세워 놓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따라서 성공하는 인생을 살려면 먼저 목표를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반드시 실천하고자 하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계획을 세우는데 실패한다는 것은 실패하기를 계획하는 것이다."라고 어떤 학자는 말했다.산다는 것은 먼저 계획하는 것이요, 계획한다는 것은 목표와 방향을 세우는 것이요, 그 목표와 방향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명확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계획없는 생활은 실패를 가져온다. 한문에 始終如一(시종여일)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과 끝, 시작과 마지막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무슨 일이나 한결같아야 한다. 한결같다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한결같다는 것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 것이다. 꾸준하고 끈기가 있고 일관성이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결같다는 것은 작심삼일하지 않는 것이다. 쉬지 않고 꾸준히 전진하는 사람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쉬임 없이 흘러가는 강물만이 망망대해에 도달한다.
과연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나는 한번뿐인 내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무엇를 위해서 죽어야 하는가? 내 인생 목표를 잘못 세우면 일회성인 내 인생이 실패로 끝날 수 있다. 인생은 반복이 없고 연습이 아닌 실전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은 진지한 것이고 엄숙한 것이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목적지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듯이 내 인생 목표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한다. 옳은 길을 찾아가는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 한다. 바른 길을 찾고자 하는 이를 구도자(求道者)라고 한다.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것을 도통(道通)한다고 한다. 산다는 것은 옳은 길을 찾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이의 과정이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공자는 갈파했다. 이 말은 공자가 얼마나 인생의 옳은 길을 갈구하였는가를 잘 나타낸 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보여 주신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선포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목표가 무엇이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즉 인간의 삶의 목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회개하기가 어렵고 복음을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이다. 사람 숫자를 계산 할 때에도 넣지 않을 만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어린이를 막은 것은 이런 하찮은 사람을 자기 스승님께 데려 온다는 것이 기분이 상한 것이다. 데려올 가치도 없는 어린이를 왜 데리고 오느냐 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다. 즉 그들의 무지함 또는 그들의 경거망동한 행동, 예의 없는 행동에 대한 질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 어린이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행동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당시 당연시해온 사회적인 분위기였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화를 내셨을까? 예수님의 화는 제자들에 대한 화였다. 즉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오셨고 누구나 다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잘못된 가치관 사회적인 관습을 깨트리려 오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교육시켜 오셨다. 그런데 아직까지 제자들의 인식과 사고는 조금도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함에 대한 화이다. 안타까움이다. 보고 보아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화이셨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이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밥을 먹고 싶어도 엄마가 해주지 않으면 먹지 못하고 어디를 가고 싶어도 데려다 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어린이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의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그 공로에 의한 어떤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로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마치 자기가 받은 물건이 자기의 힘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 하느님의 선물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다. 따라서 복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이와 같이 순순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이들! 그들이 땅을 차지하리니.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이들! 그들이 하느님을 뵈오리니."(마태 5,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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