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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목요일. - 하느님을 등지지만 않으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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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사순 제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을 등지지만 않으면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마침 그제부터 클라라 수녀님들 특강을 위해 이곳 제주에 와 있는 저는
수녀원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이런 묵상이 되었습니다.
내 앞에 무엇이 있나?
걱정이 있나? 기도가 있나?
내 앞에 무엇이 있나“
염려가 있나? 사랑이 있나?
내 앞에 누가 있나?
사람이 있나? 하느님이 있나?
내 앞에 걱정이 있어도 좋다.
기도가 그 너머에 있으면 걱정도 기도가 된다.
내 앞에 염려가 있어도 좋다.
사랑이 그 너머에 있으면 염려도 사랑이 된다.
내 앞에 사람이 있어도 좋다.
하느님이 그 너머에 계시면 사람도 하느님의 현현이다.
하느님을 등지지만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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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사순 제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3월 24일 목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을 뜻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을 뜻합니다. 아들이 아버지 하느님의 손과 팔로 불리는 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일을 아들을 통해 하시기 때문이며, 아들도 이런 식으로 성령을
통해 일하십니다. 손가락이 손과 따로가 아니라 본성에 따라 손에 속하고 손에 붙어 있듯이, 성령도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오지만 아들과 통일 본질로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모든 일을 동일 본질이신 성령을 통해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신다고 의도적인 표현을 쓰시는데, 인간의 견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분께서 ‘내가 나의 영으로 악마를 쫓아낸다’고 하셨더라면, 마음이 병들고 어리석은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지 없았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불타는 자음
문자의 거룩한 변모 체험이라 할 우리의 거룩한 독서 안에서 본문 전체가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들 중심에 서 계신 분인 그리스도와 이야기를 나누기 - 모세와 엘리야에 관해 말하고 있는(루가 9,30참조) - 시작하며. 모든 계시의 중심되는 사건, 곧 예수와 우리 자신의 파스카적 출애굽에 관해 대화하기(루가 9,31) 시작한다. 이 사건은 바로 예수와 우리의 파스카적 탈출이다. 우리가 문자의 거룩한 변모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육화의 경륜에 속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육화한 말씀의 신인적 특성에 그 겸손과 그 영광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문자의 겸손을 통해서, 예수의 인간적 조건의 겸손함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신적인 위격이신 말씀의 영광으로 접근함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100)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영적 수련 성월 3주간 감사/찬양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23-26장
✝️ 1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어린 세 친구
경건하고 부지런한 두 가족
어린 목동
그들이 제일 재미있어한 놀이는 내가 하는 것과 돌 맞추기와 단추 놀이 그리고 산에 있는 자갈을 가지고 하는 집짓기 놀이였다. 또한 아이들은 많은 노래를 알고 있었기에 아는 대로 불렀다. 히야친따는 찬미가(성가)를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거룩하신 수호자’, ‘조출하신 동정녀’ , ‘거룩하신 천사들은 우리와 함께 노래하세'’와 같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성가를 즐겨 불렀다.
어떤 때 피리나 아코디언을 갖고 있는 나이든 목동을 만나게 되면 셋은 그 악기에 맞추어 간단한 춤을 추기도 했다.
또 때에 따라서 목장을 몇 차례고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날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해가 다 저물어서 어둑어둑해지고 희미한 기름등잔 밑에 집안 식구들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모였을 때에야 겨우 집에 닿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또 한참 동안 밤 일과가 시작되는데 아이들이라도 그것을 마치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했다. 이 지방에서는 하루의 노동이 끝나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온 가족이 모여서 저녁 기도를 드리고 하루의 은총을 감사드리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평화스러운 이 마을의 복된 사람들은 갚은 밤의 침묵에 싸여 꿈나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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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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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에는 고속도로 요금소를 지날 때, 거의 모든 차가 하이패스 차선으로 지나갑니다. 하이패스 차선으로 지나가면 자동으로 정산되기에, 훨씬 빨리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의 차를 탔는데, 하이패스 카드가 없다면서 고속도로 요금 징수원이 있는 차선으로 들어가더군요. 그리고 요금과 함께 차에 있던 귤 두 개를 건네면서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이패스 구간이 없어서 무조건 요구 징수원을 만났는데, 요즘에는 하이패스 구간으로 다니다 보니 징수원을 만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나누던 정도 사라지고 세상이 삭막해졌다는 생각에, 하이패스 구간을 피해 징수원에게 조그마한 것을 건네며 옛날의 좋은 점을 느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의 것이 무조건 다 나쁜 것일까요? 새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좋은 것도 많고, 지금을 사는 커다란 힘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좋은 것은 계속 지키고, 나쁜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떠올려 봅니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지금을 사는 데 커다란 힘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마치 어리석음의 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이렇게 남들에게 주기만 해서는 어떻게 현명하게 살 수 있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을 느끼며 잘 사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의 모습에 백성들은 경탄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 행위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성행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배격했었기 때문입니다.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내쫓는다는 논리는 억지 이론입니다. 만일 반대자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이 자기들의 나라인 악의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인데 자기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겠습니까? 사탄의 적대자는 하느님입니다. 사탄은 절대로 악과 싸우지 않습니다.
또한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라고 말씀하시지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 행위를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마귀를 쫓아내니,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탄과 예수님 사이에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악과 선 사이에 중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예수님의 편에 들지 않는 사람은 사탄의 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 편에 서는 것, 즉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장 큰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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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줄이고 인생을 즐겨라. 너무 빨리 가다 보면 놓치는 것은 주위 경관뿐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게 된다(에디 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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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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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주며,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 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을 온전히 걸어라” 라고 할 때 “걸어라” 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이로세”(시편 95,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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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중간은 없다
‘두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주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4,15-16).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구애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 장군식으로 지내다가 성경말씀이 가슴깊이 다가왔는데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십시오’(시편95,1-2).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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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오늘 독서에서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예레 7,23-28) 하고 예레미야가 전해준 말은 사실 모든 예언자들이 전해주었던 예언의 골자입니다. 이 골자의 또 다른 형태는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시던 예수님의 말씀이고, 또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을 먼저 그에게 해 주라.” 시던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조건부 계약으로 맺어져 있다는 이 말씀이 독서에 나온 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야 하느님 나라가 올 수 있다.”고 가르치신 말씀을 위해 배치된 말씀입니다. 독서와 복음의 구도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선을 행하는 것과 하느님을 방해하는 악을 몰아내는 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우리가 늘 신앙으로 고백하는 정식에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모시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며, 이 창조 신앙과 구세 신앙에 따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깨닫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이 교회인데, 이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할 신앙의 신비란 믿는 이들이 서로 통공을 이루어야 하고 저지른 죄는 고백을 통해 용서를 받아야 하며 그렇게 될 때 거룩한 삶으로 우리가 부활에 참여하게 되고 이는 내세에까지 열려진 영원한 삶의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이 신앙고백의 정식이 선을 이룩하는 데 필요한 공식이라면, 악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공식도 필요합니다. 창세기의 창조설화, 특히 두 번째 설화에 이 공식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선을 창조하시는 데에는 반드시 악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악은 인간이 속아 넘어가기에 딱 좋을 만큼 위장하여 유혹한다는 것,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믿음으로 책임있게 결심하고 선택하지 않으면 죄를 저지르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느님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옥 상태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근세 들어 여러 과학자들이 중력, 전기와 자기를 발견하고, 물질의 원소를 분류하며, 수학자들이 미적분과 공간, 차원 등의 개념을 창안해 냄으로써 지금의 물질문명이 가능해 졌듯이, 이러한 과학적 발견이나 수학적 창안보다 훨씬 오래 전에 예언자들과 이름 없는 성서 기록자들은 인간의 정신문화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지혜를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은 공식에 담아 놓았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예레미야가 질책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상은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좋은 반면교사가 되어 줍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도 않았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습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전해 주는 예언자들을 무시하고 박해하였으며,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면서, 자신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기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를테면, 제천의식이나 경천사상은 고사하고 사악하고 천박하게 굴어서, 만민에게 빛을 전해야 한다는 천손의식도 없이 악한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타락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셨을 때에 그분을 마귀 두목의 하수인으로 중상모략하는 터무니 없는 모함으로 이어졌습니다. 도무지 선과 악을 식별하는 눈이 어두워진 탓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나라에로 들어오려는 소수의 백성을 위해서, 지치지 않고 가르치셨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기적을 베푸셨으며, 특히 당신의 이 일을 계승하려는 이들을 제자로 삼아 사도로 양성하셨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예수님 편에 서서 그분과 함께 하느님 백성을 모아들이는 사람들로서, 군사용어로 말하면 아군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선을 행하고 악을 몰아내는 데 힘을 합치는 이들은 소수입니다. 선을 행하는 공식, 악을 몰아내는 공식이 성경과 교회 가르침에 주옥같은 말씀으로 담겨 있어도 무시하는 이들은 다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벙어리 마귀가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람이 듣지 못하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이는 청력과 언어 구사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제멋대로 자기 양심만을 믿고 의지하며, 의로움의 말을 제 때에 하지 못하고 자기 이익에 대한 고려에서 제멋대로 말하고 처신하는 세태가 그렇습니다. 이 모두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눈이 어두워진 탓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들과 교부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신앙고백의 정식과 예언자들과 성경 기록자들이 남겨준 악을 몰아내는 지혜는 그 어떤 공식보다 더 귀한 진리입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라”(시편 95,1. 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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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이 없었습니다. 비록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비해서 군사력이 약하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들이 러시아에 대한 경제 재제를 결의하였습니다. 한국도 러시아에 대한 경제 재제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이 부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침공이 용인될 경우 강대국들에 의한 약소국에 대한 침략이 계속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비록 러시아에게 군사적으로는 열세이지만 우크라이나는 국제사회의 지원과 자국민들의 애국심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러시아도 부당한 침공을 중단하고, 협상을 통해서 새로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국제사회의 지원도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국가 지도자의 역량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구별에 잠시 머물다가는 나그네인데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기심, 이기심, 욕심, 교만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인간이 가지는 ‘아픈 상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마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더 채우려고 하는 욕심이며,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카인은 사랑하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좋아했는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동생만 없어지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아 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살인은 ‘시기와 질투’가 원인이었습니다. 사울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졌다면 다윗은 더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시기는 본인은 물론 본인의 가족들까지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자신은 한 나라의 왕이었고, 많은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 때문에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결국 아합 왕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전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권위를 알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렸던 권위를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 역시 시기와 질투가 초래한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늘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섬기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고물’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내려놓으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리하고 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자연, 신화, 이성’의 옷을 굳이 입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진리’는 언제나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했던 ‘하느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습관은 습관을 통해서만 고쳐집니다.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면, 나쁜 습관은 ‘저절로’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좋은 습관을 통해서 악의 세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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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
국내외 상황이 총체적 난국입니다. 안팎으로 너무 혼란스럽고 주변은 물론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흡사 악이 발호跋扈한 시대, 마귀들의 싸움터 같습니다. 종교들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신성하다는 종교 깊숙이 침투해 있는 마귀들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치는 공기와 같습니다. 공기를 떠나 살 수 없듯이 정치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좋은 정치가 절대적입니다. 좋은 정치 지도자는 사회의 분위기를 평온하게 합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코 강건너 불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불행이 결코 나의 행복일 수 없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되고 있습니다. 젊은 러시아 군인이 10000명이 전사했다 합니다. 혹자는 3차대전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역시 우리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기후위기 및 코로나 및 온갖 질병들과의 전쟁 등 가난한 이들은 생존에도 벅찬 내전內戰 상태를 방불케하는데 전쟁은 계속됩니다. 참으로 누구보다도 국내외 정치지도자들의 회개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정말 기도하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용기로우며, 국민을 사랑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고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정치지도자들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이래서 교회의 특별 영적 훈련시기인 사순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믿는 우리들만이라도 절제하고 극기하며 기도와 회개, 선행에 온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참 어리석은 무지한 인간의 현실은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인간성의 긍정적 진보가, 진화가 가능한지 회의감을 갖게 합니다.
우선 오늘 지금 여기의 나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제생활 초창기부터 참 많이 사용했던 강론 주제가 영적전쟁에 주님의 전사입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이 영적전쟁이며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누구와의, 무엇과의 전쟁입니까? 무지의 악과의 전쟁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무지의 탐욕, 증오, 혐오, 배제. 차별, 고집, 완고함입니다. 우리 마음은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세상에서의 전쟁이 우리 안에서 그대로 일어납니다. 바로 이런 우리 안의 악의 실체를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가 폭로합니다.
무지의 악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말씀에, 명령에 순종하는 길뿐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무지의 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게 무지의 악의 실체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보냈는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바로 이것이 인간 무지의 악의 실체입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도 있지만, 사람이라지만 인두겁을 쓴 악마들입니다. 하느님을 떠날 때 인간 모두의 가능성이 악마요 마귀입니다. 그대로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무지의 악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래서 회개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와야 비로소 무지로 부터의 해방이요 참사람입니다. 이런 무지의 악이 우리 안에 잔존해 있는 동안 국내외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무지의 악과의 영적전쟁중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며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희망이요 구원입니다. 군중 가운데 무지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곡해하고 또 하늘에서 내려 오는 표징을 요구하지만 무지에 눈먼이들은 예수님 삶 자체가 하늘의 표징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심을 통쾌하게 밝히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기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내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힘으로 무장한 예수님만이 모든 마귀들을 축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무장한 천하무적의 예수님보다 힘센 마귀들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원과 심판의 현존이십니다. 예수님편에서 함께 행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적, 마귀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편에 설 때만이 마귀들을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갖 마귀들이 횡행하는, 만연한 시대입니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들이 따로 활약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들을 통해서 활약하기 때문에 참으로 분별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탐욕, 완고함, 거짓, 사기, 중상 모략, 질투, 분노, 혐오, 차별, 증오, 미움, 복수심 끝없이 이어지는 무지에서 기인한 이 모두들이 바로 마귀의 실체입니다.
빛이 사라질 때 어둠이 스며들 듯 빛이신 주님을 떠날 때 악의 어둠이 스며듭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빛이자 생명이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때만이 무지의 마귀들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우리를 무지의 마귀들로부터 구출해 주실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뿐입니다.
마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분, 하느님의 위대한 전사 예수님과 함께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가 되어 영적전투에 임할 때 비로서 영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전쟁에 영적 승리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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