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리라
시편 91:1~16
그 동안 여러분의 정성어린 기도로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전도여행을 무사히 끝마치고 오늘 새벽에 무사히 귀국하여 사랑하는 여러분의 얼굴을 다시 뵙게 되니 너무 감사합니다.
캐나다의 벤쿠버와 미국의 시애틀은 자연환경이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나무가 우거진 산과 공해 없는 물로 조화를 이룬 도시로서, 제일 살기 좋은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가 거의 없고, 6개월이 봄이고 6개월이 가을인데, 가을에 비가 조용히 내리곤 해서 수목과 잔디가 얼마나 기름지게 자라는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환경은 그처럼 아름다우나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환경과 조건만큼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디서나 미움과 시기, 중상과 모략이 있는 것을 볼 때 환경이 꼭 사람을 아름답게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변화를 받고 아름답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91편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사람의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아서 잘 알 수가 없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체험이 있는 사람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을 뿐더러 절대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의 안정과 거룩한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 위대한 진리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시편 32편 7절에도 “주는 나의 은신처시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했습니다. 은신처나 은밀한 곳은 숨는 곳을 말하는데, 그것은 안전한 곳이요, 누가 해하지 못할 곳을 의미합니다.
벤쿠버나 시애틀이 미항(美港)인 까닭은 항구의 밖을 높은 산이 빙 둘러막고 있을 뿐더러 바닷가의 수심이 갑자기 깊어져서 자연적인 항구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시애틀에서 타코마까지 연결되어 있어, 아무리 큰배라도 들어올 수 있고, 항구가 길기 때문에 배가 얼마든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으며, 거센 태평양의 파도를 자연환경이 막아 주기 때문에 아주 안전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자기 보호자로 삼는 사람은 이처럼 안전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은 참된 성도의 특성입니다. 성도의 생활이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휴식처로 삼고 거기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평화와 안식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하늘은 새까만 구름으로 덮여 있고 뇌성벽력이 무섭습니다. 허리케인과 같은 폭풍이 불어닥쳐 바다의 물결은 바닷가에 있는 바위를 삼키려는 듯이 달려들어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납니다. 무서운 환경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렇게 우레 소리가 진동하고 폭풍우가 대작하는데, 바닷가에 서 있는 바위의 뚫린 구멍에 갈매기 한 쌍이 머리를 맞대고 평화스럽게 잠자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 쳐도 바위 안에 있는 갈매기를 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평안과 안식입니다.
1. 주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신 참 놀라운 구주시라
내 영혼을 안전한 바위틈에 늘 숨기어 주시나니
후렴 : 참 안전한 땅 복된 그늘 속에 내 영혼을 숨기시고
그 깊고 깊은 주의 사랑 안에 내 생명을 감싸시며
그 손으로 덮으신다
2. 주 예수는 인간을 부르시어 그 죄 짐을 벗기신다
내 영혼을 가볍게 하시오니 참 안식이 내 것이라
3. 주 예수는 인간을 사랑하사 참 평안을 내리신다
내 영혼이 주님의 품안에서 참 행복을 느끼나니
4. 주 예수는 인간을 사랑하사 큰 위로를 내리신다
내 영혼이 은혜에 감격하여 늘 찬송을 부르나니
시편 121편 5절에도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며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들을 숨기시고 그들을 방해하는 자, 그것이 폭풍이든 햇빛이든 간에 그 중간에 서서 막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히 그들의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2절에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은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라고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상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습니다.
그래서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합니다.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을 보면 모든 마귀들의 이름을 부르며 먹고서 물러가라고 음식을 뿌립니다. 길거리에 아침 일찍 나가 보면 마른명태와 음식 몇 가지가 놓여 있는 것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말하자면 그것을 먹고 물러가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점치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점을 칩니다. 그리고 돈을 내고 부적을 사옵니다. 그래서 그 부적을 집으로 들어올 때 잘 보이는 곳에 붙입니다. 마귀가 집에 들어오다가 그 부적을 보고 도망가라고, 그래서 평안히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에 부적을 지니고 다닙니다. 그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바람은 악귀가 물러가서 평안히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도 평화를 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서 문을 닫고 있는데, 주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세상의 신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아니하시는 피난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이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23편을 생각할 때도 말씀드린 대로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될 때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한 목자가 아니라 나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그리고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셔야 안전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8편 2절을 한번 보십시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들만이 안전합니다. 그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는 말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요새가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랄 수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에게 의뢰하는 것입니다. 내 삶 전체를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짧은 역사 속에서 비교적 많은 성도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한국을 다녀가서 하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데는 열심이 있으나, 하나님께 의뢰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의뢰합니까? 정말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마음에 걱정과 근심과 염려를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에게는 걱정, 근심,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애가 혼자 캄캄한 밤에 밖에 나가려면 두려워서 웁니다. 그런데 똑같은 캄캄한 밤이라도 하더라도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밖에 나가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담대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감상하며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걱정을 합니까? 왜 두려워합니까?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준 편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 의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도 “이 복음을 위하여 내가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변덕스럽지 않으십니다. 거짓되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실망할 위험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는 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압니다.
이 시편을 쓴 성도는 자기만 이런 은혜스러운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은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크게 고무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위로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3절은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라는 이 말은 보이지 않게 놓여져서 부주의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잡는 것을 말합니다. ‘극한 염병’은 불의의 사람에게 엄습하는데, 거기에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육체의 생명을 위험에서 구출해 주시고, 우리는 영혼의 생명을 새 사냥꾼의 올무와 같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그 영혼을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더구나 4절에는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악인이 제아무리 그 독한 혀를 가지고 성도를 해하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덮듯이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깃으로 덮으신다는 말은 포근함과 애정으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음 같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28:37) 암탉은 자연적인 본능으로 그 병아리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위험한 것을 보았을 때 자기의 보호 아래로 그들을 부릅니다. 그들을 안전히 보호할 뿐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따뜻하게 대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이렇게 지키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비유하시면서 28-29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보장입니까! 우리는 이런 보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가 그 품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장중에 있어야 합니다. 그 품 밖에 있을 때는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가장 크신 능력과 효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날개와 깃털은 가장 부드러운 것으로 펼쳐지기는 하지만 약하고 뚫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의 진실하심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우리를 암탉이 병아리를 지키는 것같이 지키시기를 원하실 뿐더러, 갑옷 입은 군인이 지키시는 것처럼 강하게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할 뿐 아니라 악에 대한 공포에서 지키십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밤낮으로 지켜 주십니다. 다윗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하나님의 인도만을 따르는 양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 때’가 있습니다. 두려운 골짜기입니다. 캄캄한 골짜기입니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떨어져서 저 깊은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풍파를 만납니다. 어두운 밤이 있고, 낮에 우리를 겨누는 살이 있고, 흑암 중에 염병이 있고,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셔서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갈릴리 바다는 갑자기 바람이 잘 불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대부분은 갈릴리 출신이기 때문에 풍랑이 일 때 배를 젓는 기술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의 바람은 보통 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너무 심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물결이 배 안에까지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실력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두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은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이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후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타신 배도 풍랑을 만납니다.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러다가는 파손되지 않겠나 할 정도로 어려운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들으십시오. 예수님이 타신 배를 뒤엎어 놓을 풍랑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7-9)
이 말은 하나님을 피난처와 방패로 삼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한다고 해도 우겨 싸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며, 답답한 일 당하지 않는 법 없고, 핍박을 받게 되며, 거꾸러뜨림도 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7-13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를 말씀했습니다.
“천 인이 내 곁에서 만 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여러분,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그를 잡아먹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 불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머리털 하나도 타지 않았습니다. 옷이 그을린 냄새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잡아매었던 밧줄만 타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환난의 도가니를 지나면 세상의 것들이 다 타버리고, 오히려 그 심령은 더 깊은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되고 그 심령이 더욱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 하나하나를 이렇게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여기에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합니다. 그러므로 승리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보십시다.
시편 91편 14-16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하신 여섯 가지 약속이 무엇입니까?
첫째 약속 :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생과 사에서 구원하시고 고난 중에서 건지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둘째 약속 :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양이 목자를 알아야 따를 수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따르는 것은 지식입니다. 무디 선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희생한다.(Faith the sacrifice of the understanding to God.)”
셋째 약속 : “저가 내게 간구 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하나님께서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십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네 소원대로 되라.”고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약속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넷째 약속 :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주님은 그냥 내버려두시지 아니합니다. 우리와 꼭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이길 힘을 더해 주십니다.
그리고 환난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폭풍우가 없는 곳으로, 파도 위에 솟아 있는 바위로 높이십니다.
이사야서 33장 16절에는 “그는 높은 곳에 거하라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이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다섯째 약속 :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진 목적을 다 이룰 때까지 이 세상에서 삶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긴 것입니다. 젊어서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은 날들의 충만 속에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언제 죽어도 만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섯째 약속 :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이 약속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건져 주시고, 높이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환난 때 함께 해 주시고, 만족하게 하시고, 구원을 보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체험의 비밀
(시 91:1-16)
찬송 488장
시편 91편은 누가 기록했는지 저자와 저작연대 미상으로 근본적으로는 찬양시이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들의 안전에 관해 교훈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혜시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시편의 저자는 자신의 숱한 삶의 역경 가운데서 체험한 신앙에 바탕 해서 어떤 절망과 위기 가운데서도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면 전능하신 그 보호와 손길이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특히 14-15절의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7절에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리라는 그의 담대한 고백에서 그가 얼마나 진리에 굳게 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다 절망할지라도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