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조, 어떻게 짜는가?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
어떤 형식의 글이든 구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글은 없다. 시에서는 그 구성이 소설이나 산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뚜렷하고 변별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가 인간의 사고를 표현하는 형식의 하나이므로 그 나름의 어떤 논리적 질서를 갖지 않을 수 없다. 편의상 시의 내용이 전개되는 질서 혹은 논리를 구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구성(構成)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몇 가지 부분이나 요소들을 모아서 일정한 전체를 짜 이룸, 또는 그 이룬 결과’ 를 뜻하며, 문학적 의미로는 ‘문학 작품에서 형상화를 위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배열하거나 서술하는 일’로 풀이된다. 흔히 작품을 구상(構想)한다고 할 때 그 구상은 ‘예술 작품을 창작할 때, 작품의 골자가 될 내용이나 표현 형식 따위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함, 또는 그 생각’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구상이 한 단계 더 나아가 문서화된 것이 구성이다. 구성은 글에다 통일된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며 글의 피 돌리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이 잘돼야 생각의 흐름이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짧은 시나 즉흥시 또는 내면의 충동을 그대로 언어로 나타내는 쉬르리얼리즘의 자동기술법 등, 거의 구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시라 해도 시구를 정리하고 조립하는 의식은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더구나 시가 감정의 발로만으로 끝나던 시대는 지나가고,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 속에서는 시의 내용도 복잡 다단 해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주관적인 충동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구성을 생각하고 자기 작품을 냉정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필요해지게 된다. 정리한다는 의미는 보통 의미에서의 적당한 또는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자기의 사상이나 내용 따위를 어떻게 작품 위에 명확히 쌓아 올릴 것인가 하는 이른바 건축적인 조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긴 시나 뚜렷한 주제를 가진 시에서는 작자의 구성력이 빈약하면 그 시는 성공할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구성은 중요하다.
문장론에서 구성은 크게 자연적 구성(전개적 구성)과 종합적 구성(논리적 구성)으로 나눈다. 전개적 구성은 다시 시간적 질서에 따르는 구성과 공간적 질서에 따르는 구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시간의 흐름을 쫓아가거나 공간의 이동을 따라가며 글을 쓰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 구성은 특별한 구상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성이 되는 경우다.
종합적 구성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단계적 구성으로 3단계, 4단계, 5단계 구성법이 있고, 포괄식 구성에서 두괄식, 미괄식, 쌍괄식 등이 있으며, 열거식 구성, 점층식 구성 등으로 나누어진다.
시조의 경우 위에서 제시한 구성 방법 중 반드시 어떤 구성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자연적 구성으로 시상이 전개될 수도 있고, 논리적 구성으로 시상이 전개될 수 있다. 시조의 경우 작품 마다 그 구성법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고, 또 그 구성법이 달라야 창작품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시의 구성은 3단 혹은 4단 구성을 하고 있다. 3단 구성은 인간의 의사 전개에 있어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형태의 논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완결된 문학 작품(비극)이란 ‘시작’과 ‘중간’과 ‘결말’의 세 토막을 지녀야 하며 이들은 상호 균형 있게 배분되어야 한다고 한 것으로부터 3단 구성이 비롯되었다.
3단 구성이 발전하면 4단 혹은 5단 구성이 성립될 수 있다. 시의 내용이 길어 복잡해지면 세 토막으로 나누어 진술하기가 어려운 때가 있게 되는데, 이 때 네 토막, 다섯 토막으로 늘리게 된다. 네 토막으로 나누어질 경우 중간 부분이 둘로 나누어지고, 여기서 다시 서론 부분을 두 토막으로 나누면 다섯 토막이 되는 것이다. 네 토막이 기승전결(起承轉結)이며, 다섯 토막의 경우 희곡이나 소설의 ‘도입 갈등, 위기 절정, 파국’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황진이의 시조를 예로 들면 이 작품은 논리적 구성법의 단계별 구성에 비춰볼 때 3단계 구성으로 볼 수 있다. 초장을 서론, 중장을 본론, 종장을 결론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굳이 구성의 이론에 끌어다 맞추려면 시간을 기준으로 한 점층법의 변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조의 경우, 한시의 전범이 되고 있는 4단 구성 즉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초장을 기(起)로 중장을 승(承)으로 종장 첫 구를 전(轉)으로 종장 둘째 구를 결(結)로 해석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구성에 딱 들어맞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이것이 시조의 구성법으로 전형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조의 구성은 형식 논리로 볼 때 3장6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다음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초장, 첫째 구 <동짓달 + 기나긴 밤을>,
둘째 구 <한 허리를 + 베어내어>,
중장, 첫째 구 <춘풍 + 이불 아래>,
둘째 구 <서리서리 + 넣었다가>
종장, 첫째 구 <어른 님 +오신 날 밤 이어든>,
둘째 구 <구비 구비 +펴리라>.
와 같이, 구는 낱말과 낱말이 만나는 것이고 이 두개 낱말의 만남에서 의미가 창출된다. 이 만남이 새로우면 새로울수록 훌륭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조는 의미 창출의 단위가 6개이므로 이 여섯 개의 의미망이 연결되어 한 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조의 구성은 즉 여섯 개의 의미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인데, 이 의미들은 서로 조화롭게 연결되기도 하고 충돌되기도 한다. 그것이 시조의 구성법을 규격화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러므로 해서 창작품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무엇을 어느 정도로 어떻게 배합하면 무엇이 된다고 하는 공산품의 생산과 시의 생산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조에서 지금까지 논의한 것은 단형시조의 경우다. 그러나 연시조로 쓸 경우는 그 구성법이 달라질 수 있다. 연시조로 쓰더라도 각 수의 작품은 따로 떼어놓아도 시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2수 1편의 시조를 쓴다고 할 때 첫수와 둘째 수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물론 반대로 몇 수를 작정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쓰다 보면 두 수 혹은 세 수가 될 수도 있는데, 어쨌든 2 수 1편의 작품을 쓸 때 내용이 첫째 수나 둘째 수에서 비슷하거나 같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앞과 뒤, 시작과 끝 등의 구성이 두 수로는 어울리는 것이다.
2수 1편의 다음 작품을 보자
목수가 밀고 있는 속살이 환한 각목
어느 고전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나
드러난 생애의 무늬 물 젖는 듯 선명하네.
어쩌자 나는 자꾸 깍고 썰며 다듬는가
톱밥, 대팻밥이 쌓아가는 적자 더미
결국은 곧은 뼈 하나 버려지듯 누웠네.
서벌- 어떤 경영- 전문
이 작품은 첫째 수는 목수가 밀고 있는 각목의 생태를 읊고 있으나, 둘째 수에서는 자기의 참담한 생활상을 담고 있다. 2수 1편으로 수가 나누어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구성을 아주 철저히 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구성과는 다른 차원에 일이지만 정완영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인 적이 있다. “시조를 이렇게 쓰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이런 이미지 위주의 시는 자칫하면 시조로서의 풍도나 내재율을 살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난삽해지기가 쉽고, 현학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시조가 자유시 쪽에 너무 눈길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어려운 일들을 잘 이겨내고 시로서의 은유나 시조로서의 리듬을 가장 잘 살려낸 작품이다.” 정완영 편저, 시조창작법, 중앙일보사, 1981. P175.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많다.
3수 1편으로 구성된 작품을 보자.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김상옥 -사향- 전문
이 작품은 3수 1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첫째 수는 눈을 감고 고향 정경을 떠올리는 것으로, 둘째 수에서는 고향의 시각, 청각, 후각을, 셋째 수는 봄나물을 통해 고향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런 작품의 경우는 수마다 시적 내용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그냥 연결되는 느낌을 준다. 첫수 첫 구에서 <눈을 가만 감으면>이라고 시작해서, 셋째 수 종장 첫 구에서 <감았던 그 눈을 다시 뜨면>에서 끝나는데, 눈을 가만 감고, 무엇 무엇을 생각하고, 감았던 눈을 다시 뜨는 과정까지로 세 수를 빚어놓은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다고 해서 작품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가만 감았다가 다시 뜨는 그 순간적인 일로 3수 1편의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는가.
4수 1편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에 잠들 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이호우 -달밤-전문
이 작품을 이우종은 다음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수에서 달빛이 출렁이는 낙동강 물결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지향 없이 배를 몰고 가고 싶다는 낭만을 토로했고, 둘째 수에서는 툭하면 놀러 온 낯익은 강물이건만 달빛 어린 강물은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어서 마치 이국땅이라도 찾아온 그러한 사람의 심경처럼 방금 사라져가는 저 풍경 쪽으로 눈길이 자꾸만 끌린다고 하면서, 셋째 수에서 밝은 달빛에 한결 아름다워 보이는 초가집들을 바라보니 문득 지난날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하시던 일들이 떠오른다는 것이고, 넷째 수에 가서는 저 고운 달빛으로 해서 순결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는 듯한 이 밤일랑은 비록 외로운 한이 있더라도 시간을 오래 끌게 해달라는 일종의 진선미에 대한 신앙심의 표백으로 끝을 맺었다.” 이우종, 한국현대시조시의 이해, 국제출판사, 1980. PP.176-177.
고 설명했다.
각 수마다 무슨 상을 담겠다는 구상을 분명히 했고 그 구상에 따라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연시조의 구성은 변화의 과정이나 성장 성숙의 과정, 시점의 이동에 따라구성할 수 있다. 연시조는 담을 내용의 크기에 따라서 구성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무색하게 하는 작품도 있다. 이론을 뛰어넘는 것이다.
내 귀가 열렸다면 몇 劫을 通하여야
들릴까 그대 목소리 기다리던 봄이다마는
저승은 따로 없어라 눈에 덮인 이 江山!
설움이 바닥나면 오히려 잃을 것 없고
이런 날 스스로이 내 가슴 울어지는
그 속에 그대 목소리 눈 내리듯 잠겼네.
하늘빛 뒤엔 아직 보이는 것 별로 없고
몸 하나 마음 하나 길을 떠난 나날을
동백꽃 짙은 그늘엔 하늘 소리 새소리.
박재삼 -그대 목소리-전문
이 작품에 대해 정완영은 “시 될만한 아무런 꺼리(소재)가 없는데도 시를 만들어내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 바로 이 박재삼 시인이다. 하기 때문에 박재삼 시인은 천출의 시인이다. /내 귀가 열렸다면 몇 겁을 통하여야/ 내 귀가 열렸다 해도 몇 겁이나 통해야 / 들릴까 그대 목소리 기다리던 봄이다마는 / 그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봄이었는데/ 저승은 따로 없어라 눈에 덮인 이 강산!/ 저승이 따로 있는가 그대 목소리 들을 수 없는 눈에 덮인 이 강산이 바로 저승이구나. 차라리 첫 수는 하나의 서술이다. 문제는/ 설움이 바닥나면 오히려 잃을 것 없고/ 라든지, 그렇게 타일러 놓고는 또,/ 이런 날 스스로이 내 마음 울어지는/이라고 하는, 마치 전후가 도착(?)되는, 종잡을 수 없는 이 시인의 시법에 우리는 매료되는 것이다. 박재삼의 시세계는 벌써 질서라는 구차한 규범이 없다. 종횡무진이요, 몰법천지(沒法天地)이다. 그러나 쓸어질듯 쓸어질듯 하면서도 쓸어지지 않는 것이 이 시인의 묘법이다. 진실로 좀 주술적인(?) 시의 마법사(?)이다.” 정완영 앞의 책, PP.130~131.
라고 했다.
이 해설에서와 같이 어떤 질서라는 것이 시에서는 그야말로 구차한 규범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1940년 <문장>지 10월호 조남령의 ‘내가 본 시조형’에서 ‘뛰어나오는 초장, 펴나가는 중장, 억제하려고 애쓰는 종장’이 우리 시조라는 견해와 정완영의 주장으로 시조에는 “흐름(流)이 있고, 굽이(曲)가 있고, 마디(節)가 있고, 풀림(解)이 있다” 고 한 것을 구성법으로 원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난초를 그림에 있어 법이 있어도 안 되고 법이 없어도 안 된다 (寫蘭有法不可 無法亦不可)”고 하셨는데 시조 구성에서도 이 말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문제는 이미 있는 구성법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구성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독단에 흘러서는 안 되고 인간 사유의 보편성을 넘어서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