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휴당(萬休堂) 임유후(任有後)선생에 대한 연구
강동의 역사와 문화 연구를 반세기간이나 오래토록 연구하고 답사하고 발표를 하였다. 만휴당 임유후선생에 대한 연구를 마지막으로 강동문화원『좋은동네』원고를 마감하려 한다. 창간호부터 계속 발표한 졸저를 높이 평가하고 애독하여주신 독자들께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그리고 우리 고장의 역사인물을 많이 배출한 광주이씨, 함종어씨, 강릉유씨, 청송심씨, 강릉함씨, 풍천임씨의 대종회에서 감사장을 증정하고 종중 행사에 초대하여 주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를 드린다.
아직도 더 연구할 강동의 역사인물이 몇 분 남아있긴 하나 실력과 체력이 모자라서 할 수가 없다. 후학들이 계속 연구하여 발표하기를 바란다.
암사동에 살고 있는 만휴당의 후손 임상순 회장과 우리 고장 출신 야구선수 임수혁군의 아버지가 임유후선생을 강동의 역사인물로 재조명해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1.
능(陵)은 왕이나 왕후의 무덤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고장에는 왕릉도 아닌데 지명이 암사동에 신릉(新陵:새능마을)과 강일동에 능곡(陵谷:능골마을)이 있다. 능골말은 안산 동측 산 아래 마을인데 고종황제 왕릉 후보지 중 금곡릉과 함께 후보지였다는 설이 있다.
새능말은 암사동433번지 풍천임씨 묘소가 있는 마을이다. 필자가 1966년 중등학교 교사가 되면서 학교 가까운 새능말 주택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고장은 허허벌판 구릉지에 농촌 마을이 띄엄띄엄 산재해 있을 뿐 한적한 변두리였다. 도시화가 되면서 1975년에 암사동 구획정리사업으로 인하여 풍천임씨 묘소는 천안시 입장면 시장리 산2번지로 면례(緬禮)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귀가했는데 풍천임씨 묘역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렸다. 파헤쳐진 묘소에서 302년간 관속에 썩지 않은 천연색 관복 수의와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는 해골을 발견하고 기이하게 생각을 했다. 그때서야 풍천임씨 묘역이 이조판서 임국로(任國老)와 홍문관교리 임수정(任守正)과 만휴당 임유후(任有後)의 무덤인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 30년이 지나도록 관심 속에서 멀어졌는데 불광동에 살고 있는 중학교 동창생 김문수(金文洙)가 『萬休堂集』을 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다. 강동구 향토사 연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필요할 것 같아서 선물한다 하였다. 『만휴당집』의 문장과 행적, ‘廣津’ 시와 ‘목동가’ 장편가사를 읽어보고 감탄을 했다. 미루나무가 무성하고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광나루 넓은 백사장에 누워서 『만휴당집』권3 북정록(北征錄)에 사실적으로 쓴 ‘광나루(廣津)’란 시를 즐거운 마음으로 번역하여 보았다.
2.
임유후(任有後) : 1601년(선조34~1673(현종14),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효백(孝伯), 호는 만휴(萬休), 판서 국로(國老)의 손자, 홍문관교리 수정(守正)의 아들이다.
8촌 형 소암 임숙영(疎菴 任叔英)에게 글을 배워 162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가주서로 임금을 호위하여 강화도로 갔는데 조정에서 강화(講和)하자는 논의가 대두되자 분연히 일어나 절대로 강화해서는 안 된다는 소(疎)를 두 번이나 올리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반란을 음모하던 아우 지후(之後 )와 숙부가 죽음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울진의 주천대(酒泉臺)로 내려가 22년간 향인을 교육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49세에 울진에서 모친의 상사를 당하여 고향 암사리 새능 선산에 귀장(歸葬)하였다.
장례를 지내고도 솔잎과 상수리와 미음을 먹으면서 3년간 시묘(侍墓)하며 조석으로 참배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너무 어려서 복을 입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계속하여 6년 동안을 소식(素食)하면서 심상(心喪)을 마쳤다.
1653년(현종2) 담양부사가 되고 1663년 승지를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1669년 다시 담양부사로 나가 재난에 처한 백성들을 잘 구휼한 관계로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자 윤지선(尹趾善)으로부터 전에 아우가 저질렀던 역모사건을 들어 탄핵을 받았으나 본인이 저지른 죄가 아닐뿐더러 지극한 효성 뛰어난 문학 그리고 겸양의 덕을 말하면서 탁월한 관리임을 내세운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671년 72세의 나이로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다시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서 노령에도 태만함이 없이 아랫사람을 엄중히 단속하고 백성에게는 은애(恩愛)를 베풀었다.
향년 73세로 임소에서 세상을 떠나 고산(故山)인 암사리 새능으로 귀장하였다.
선생이 졸한 얼마 뒤에 울진 선비들이 주천대에 고산사(孤山祠,후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이라 개칭)란 서원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다시 몇 십년 뒤에 선생의 탁이(卓異)한 효행으로 정려(旌閭)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정희공(貞僖公)이란 시효가 내렸다.
선생은 문장이 뛰어났고 목동가(牧童歌)란 장편가사도 남겼으며 만년에는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저술로는 『만휴집(萬休集)』11권 4책이 간행된바 있다. 태동연구소 임창순(任昌淳) 종인이 권3,4,5,6을 소장해 있고 울진의 남효중(南孝重), 남효열(南孝熱) 양씨가 권7,8,9,10,11을 가장(家藏)하고 있다. 그러나 권1,2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탐문 중에 있으니 안타깝다. 우리나라 역사를 기술한 자필 원고본 『휴와잡찬(休窩雜纂)』3책이 연세대학교 고문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休窩는 선생의 아호이다. 암사동 묘소에서 출토된 임유후의 천연색 수의는 중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관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 도승지 임유후 신도비 명
도승지 임유후(任有後, 1601~1673) 신도비 명
가선대부 행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임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
〔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任公神道碑銘 幷序〕
명(銘)은 다음과 같다.
皇釐明性 하늘이 밝은 성(性)을 내리니
有猷有類 모책도 있고 선류(善類)도 있네
其猷維何 모책은 무엇인가
曰仁曰義 인과 의라네
其類維何 선류는 무엇인가
曰君曰臣 임금과 신하라네
有棄其性 그 성을 버리고
而不反身 반성하지 않아
大本旣虧 큰 근본이 이미 이지러졌는데
曷稱小行 어찌 작은 행실이라 하랴
於赫任公 아 빛나는 임공께서는
綏天之命 하늘의 명을 편안히 여기셨네
里居上書 향리에서 상서할 젠
其儀翼翼 그 위의 엄숙하였고
朝衣搢笏 조복에 홀을 꽂을 젠
如在王側 마치 왕의 곁에 계신 듯하였네
瀋人來侵 심양 놈들 침범하여
圍我廣州 우리 광주를 포위하니
哀我行人 슬프다 우리 사신이
不入薊丘 계구로 들어가지 못하는구나
公言天子 공이 말하기를 “천자께서는
仁猶父母 어질기가 부모와 같으신 분이라
京室雖危 황실이 비록 위태로워졌으나
義不忍負 의를 차마 저버리지는 못하리
我圭旣繅 우리의 신규(信圭)가 이미 비단에 싸이고
我帛旣篚 우리의 옥백이 이미 광주리에 담겼으니
庶命孤卿 부디 고경에게 명하여
覲我天子 우리 천자께 조근가라 하셨으면
泱泱漢水 넘실넘실 한수가
尙歸于海 바다로 돌아가니
舟流萬里 배가 만 리를 떠 가
可達河濟 하수와 제수에 닿으련만
孰引瀋人 누가 심양 사람들을 끌어와
取彼東江 저 동강을 취하게 하였는가
請函厥首 청컨대 괴수의 머리를 잘라
獻之大邦 중국에 바치게 해 주오.”라고 하였네
言雖弗行 말이 비록 행해지지 못했으나
其志則章 그 뜻은 드러났으니
勒石墓門 묘문 앞 돌에 새기어
銘垂無疆 무궁토록 그 명문 전하리라
4. 임유후의 목동가
녹양 방초한에 소 먹이는 아이들아 / 인간 영락을 아는다 모르는다
인생 벽년이 풀끝에 이슬이라 / 삼만 육천일을 다 살아도 초초커든
수단이 명이어니 사생을 결할소냐 / 생애는 유한하되 사일을 무궁하다
역려 건곤에 부유같이 나왔다가 / 공명도 못 이루고 초목같이 썩어지면
공산 백골이 그 아니 느껴우냐 / 시서 백가를 자자히 외워내어
공맹 안증을 일마다 법받으며 / 직설을 기필하고 요순을 비겨내어
강구연월에 태평가를 불러 두고 / 사해 팔황을 수성에 올리기는
이음양 순사시 재상의 사업이요 / 백만 군병을 지휘중에 넣어 두고
풍운을 부쳐 내어 우주를 흔들기와 / 장검을 비끼 잡아 만적을 당하기와
자수금인을 허리아래 비끼 차고 / 황룡부에 통음하고 능연각에 회상하니
위권이 혁혁하여 오정식에 누리기는 / 장수의 모략이라 그 아니 기특하냐
내 재조 편견하여 장상이 못 되어도 / 금수 간장에 만고를 넣어두고
풍운 원로를 붓 끝에 희롱하니 / 주기를 헤치는 듯 백벽이 뒤트는 듯
귀신을 울리는 듯 풍우를 놀래는 듯 / 문채로 가잘시고 단계화 한 가지를
소년에 꺾어 꽃고 향가 자맥에 / 영총이 그지없다 금문 옥당에
문한으로 누리다가 석실 금궤로 / 만세에 유전하면 소 먹이는 저 아이야
그 아니 즐거우냐 하늘이 사람낼 제 / 나라에 사람 쓸 제 귀천을 가리더냐
하늘이 삼긴몸을 닦아 내면 사군자요 / 기포를 달게 여겨 던져두면 우하로다
내 재조 가지고 한 몸만 용차하니 / 희보 미방을 세상이 뉘 알더냐
자세히 들어스라 손곱아 이르리라 / 이윤은 솥에 지고 부열은 달고 들고
영척 백리해는 소치다가 명현하니 / 가난하고 천하기야 이 사람만 하랴마는
인생 궁달이 귀천이 아랑곳가 / 불식 부지하여 세사를 모르는다
입신 양명을 헴 밖에 던져두고 / 연교 초야에 소치기만 하나슨다
목동이 대답하되 어와 그 누구신고 / 우은 말씀 듣건지고 형용이 고고하니
초대부 살려신가 잔혼이 영락하니 / 유학사 자후신가 일모 수죽에
혼자어둑 서 계셔서 내 근심 던져 두고/남의 분별 하시는고 우리는 준준하와
대도를 모르어도 인생도 저러하다 / 소치기 아나이다 송아지 어이 쫓아
녹음간에 절로 내어 이리가락 저리가락 / 누으락 일어나락 풀잔디 뒤져 먹고
시냇물 흘러 마셔 먹음먹이 박하여도 /제 뜻대로 노닐기와 귓도래 코에 꿰어
저 고삐 굳게 잡아 곧은 낚대 삶은 콩을/배가지 칠지라도 물 같은 더운 볕에
한겨리 마주 메워 코춤은 카니와 / 흘없게 그지없다 어느 소는 고되고
어느 소는 한가하뇨 일시에 빛나가야 / 희생만 할건가 헌 덕석 벗기 치고
금의 삼정 갈아 덮어 삿구레 벗기 치고 / 홍사로 얽어 내어 대로에 벽제하고
예관이 고삐 잡아 태묘를 들어 가서 / 저더러 물어 보면 어느소 되랴할고
고금에 어질기야 공부자만 할까마는 / 광인이 욕 보시고 진채에 씨이시여
목탁이 되여겨사 도로에 늙으시니 / 전 사람 이른 말이 그 아니 옳톳던가
부차의 촉루검을 오자서를 준단 말가 / 서산 저문 날에 비풍이 스슬하다
무안군 백기는 이룬 공도 하건마는 / 두우역 하라 나재 칼을 주어 죽이더고
이사는 승상으로 보수를 다한 후에 / 부귀도 극진하고 영총도 무한터니
상채 동문에 누런 개를 슬퍼하네 / 나는 새 진한 후면 양궁이 장하이고
토끼를 잡은 후에 산영개 아랑곳가 / 한신의 공적으로 삼족조차 죽어더고
문인은 예로부터 궁상이요 박명이라 / 만장 광염이 니 뒨들 욀가마는
고신 거국에 야량이 몇 천리요 / 성도 초당에 성계도 소조하다
한창려 문장으로 동정 춘풍에 / 물결이 일어나니 조주 팔천리에
고국이 어드메요 지하로 옷을 하고 / 난초도 섯거 차고 이소 구가의
문자는 좋건마는 초강 밝은 달에 / 한원이 슬피 우니 장상 문장이
그 아니 섬거우냐 산중에 사향 느니 / 깊이는 있건마는 춘풍이 헌사하여
향내를 불러 내어 산하에 날랜 살을 / 면하기 어렵거던 군미끼 혈낚시를
어히하여 따르는다 기산에 귀 씻기와 / 상류의 소 먹이기 즐겁고 즐거움을
너희는 모르리라 내 노래 한 곡조를 / 불러든 들어 보소 장안을 돌아보니
풍진이 아득하다 부귀는 부운이요 / 공명은 와각이라 이 퉁소 한 곡조에
행화촌을 찾으리라
목동문답가 해설
작가, 연대 미상의 가사. 국판문필사본. 작자는 이황(李滉)으로 추정되기도 하였으나, 임유후(任有後) 측근 인물들의 증언과 문헌의 신빙성으로 보아, 임유후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본의 명칭은 ‘목동가(牧童歌)’ ‘목우가(牧牛歌)’ 등인데, <<순오지>>에는 ‘목동가’로 되어 있다. 이본으로 잡가본(雜歌本)․ 임창순본(任昌淳本) ․서강대학본(西江大學本) ․이가원본(李家源本)․ 주종연본(朱鍾演本) 등이 있다.
이본들을 교합(校合)하여 복원한 결과, 2음보 1구로 계산하여 전체 154구이다. 음수율은 3․4조 주축에 2․3조, 4․4조가 첨가되어 있다. 내용은 제목에서 살필 수 있듯이, 문가(問歌)와 답가(答歌)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전반부인 문가와 후반부인 답가가 대조적인 주제를 부각시킴으로써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입신양명의 꿈을 실현해보고 싶은 뜻을 보였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천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취생몽사(醉生夢死)의 구가(謳歌)와 인생무상의 달관(達觀)을 합리화하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입신양명과 자연귀의라는 현실긍정과 현실부정의 이질적인 양극성의 상충심리(相衝心理)가 균형있게 조화됨으로써 인정의 기미(機微)를 구김없이 잘 표출하였다. 문답가 계열 가사의 한 유형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5. 임유후의 시
廣津
廣津春水碧如油(광진춘수벽여유)
立馬沙頭喚渡舟(입마사두환도주)
疎店柳炬迷釣渚(소점유거미조저)
古堂花雨濕芳洲(고당화우습방주)
遼天別鶴千年恨(요천별학천년한)
穢國遷人十載愁(예국천인십재수)
何處笛聲來入耳(하처적성래입이)
不堪斜日淚雙流(불감사일루쌍류)
광나루
광나루 봄물이 푸르러 기름 같은데
백사장 머리에 말 세우고 배 건너라고 한다
듬성한 주점 버들 속 횃불 낚시터 희미하게 보이고
옛당에 꽃비가 내려 향긋한 물가가 습하다
요동의 하늘에 이별한 학의 천년 한이요
예국에 귀양 온 사람 십년의 수심
어느 곳 피리소리가 와서 귀에 드는가
저문 날 눈물이 두 줄기로 흐름을 견딜 수 없다.
주) 요동의 학 : 丁令威란 사람이 仙이 되어 간지 천년 만에 학이 되어 요동의 華標橋에 날아와 이 노래를 불렀다는 전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