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편지, 엽서에 관한 시모음 1)
겨울편지 /김혜정
불현듯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이 가슴속으로 당겨오는 날엔
끝없이 펼쳐진 하늘 안에 그려진
파란 수채화 속에 꿈을 꾸듯
그리움을 담고 한 통의 편지를 써 보자.
거친 바람 불어오는
황량한 겨울 들판에 홀로 서 있어도
결코 춥지만은 않았다고
마음 따스한 네가 내 안에 있어
외롭고 쓸쓸하지만은 않았다고
스스로 위안 삼을 한 통의 편지를 써 보자.
모진 겨울 이겨낸 한줄기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봉긋이 솟아오른
이른 봄날이 펼치는 연둣빛 꿈 소식
한편 담은 편지 받아 줄 이
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기꺼이 얼굴 가득 만개한 꽃 웃음 담고
서둘러 한 통의 편지를 써 보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내 마음 보슬비되어 하염없이
허느적 거리는 오늘 같은 날에는
아직도 못다한 긴 겨울날의 얘기 담은 편지
따스한 가슴으로 보듬어 줄 너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 보련다.
겨울 엽서 /유안진
눈이 펄펄 흩어지는 밤
너도 이처럼
잠이 오지 않았었니
한잔 술이라도 기대고 싶어
거리 거리를 헤매었을 너
사나이의 끝없는 가능성의
확인을
일개 여자에게서 찾을라던 너는
주점 구석에 쭈그려 앉아
쓴 잔을 스스로 따루었니
명예도, 사랑도, 황금도 내던지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총을 메던 너는
어느 산마루에 우뚝 서서
성난 짐승처럼 소리쳐 울었니
뜨락에는 쌓이는 하늘나라의 엽서
나는 어느 편에
안부를 전해볼꼬.
봄꽃에게 쓰는 겨울편지 /정연복
너랑 헤어지고
벌써 몇 계절이 지나
지금 세상은
차디찬 겨울 한복판.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잘 지냈는지
이 추운 계절을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아직은 이별의 시간
한참은 더 견뎌내야 하지만
새봄에 우리 환히 웃으며
꿈꾸듯 기쁘게 만나자.
겨울 편지 /안도현
댓잎 위에 눈 쌓이는 동안 나는 술만 마셨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술만
마셨다
거기 지금도 눈 오니?
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저 九耳 들판이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인다
청둥오리는 청둥오리 발자국을 찍으려고 왁자하
게 내려앉고,
족제비는 족제비 발자국을 찍으려고 논둑 밑에서
까맣게 눈을 뜨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으러 왔다가 저 저수지
를 건너갔을 것이다
담배가 떨어져 가게에 갔다 오느라
나도 길에다 할 수 없이 발자국 몇 개 찍었다
이 세상에 와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을
땅바닥에 찍고 다니느라
신발은 곤해서 툇마루 아래 잠들었구나
상기도 눈가에 물기 질금거리면서,
눈 그친 아침은, 그래서
이 세상 아닌 곳에다 대고 자꾸 묻고 싶어진다
넌 괜찮니?
넌 괜찮니?
겨울저수지에서쓰는 편지 /이정록
그대 머리맡이나 옆구리로
굽이치며 흘러드는 물줄기
싱싱한가. 寒風에 배를 밀고 가는 새떼들
물갈퀴처럼 손발 시려운가
마른 갈대숲에
차마 얼어붙지 않으려
살얼음 깨무는 달빛 차가운 밤
가슴 밑바닥 자갈 이끼,
흔들며 치솟는 샘줄기에 입 대고 있는가
새의 발목에 악수를 건네는
솔 그림자처럼, 그대에게 가리라
살얼음에 靑針을 벼리는
솔잎처럼
겨울 편지 /권숙월
눈으로도 언 가슴 녹일 수 없다
뭇 나무까지 감동하게 하는 눈으로도
꽃 피고 새 우는 가슴 하게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산이 온몸으로 눈을 받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놓치지 않고 받아
발 끝까지 이불로 덮고 행복해 하는 것은
눈이 왔다 가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오게 되어 있다는 믿음 때문만이 아니다
눈도 하늘이 주는 사랑임을 알기 때문
마른 세상 건너게 하는 힘임을 알기 때문이다
풀잎 하나도 상처받지 않게 가만가만 오는 눈
내게는 언제 저같은 눈이 오나
겨울편지 /이동식
너는 그리운 사람이다
언제든, 어디에 있든
너는 그리운 사람이다
눈이 내린 겨울날
바람이 차갑게 불어도
너에게로 가는
발자국 하나 남기고 싶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
전화로 안부를 묻는 시간,
아침엔 너를 생각하며 눈을 뜨고
저녁엔 너를 생각하며 눈을 감는다
춥다, 부디 아프지 마라
겨울편지 /장수남
겨울 이야기는
너무 아름답죠.
사랑하는 이에겐 폭풍 같은 사연
너에게
내가 너에게 보낸 편지 되돌아 왔을 땐
겨울은 너무 힘들었어.
이야기 할까
빈 가지
마른 한 잎 깨울 때
나는 알고 있었지
누구일까
기다림 보다 네가 먼저 지쳐 있었네.
깊은 겨울 갈색 하늘
흰 눈 내려
세상 너와 나 아름다운 인연
벚꽃 세상이구나.
겨울편지 이 밤 누가 전해줄 까
힘들었다고
너는 알 거야
술 취한 하얀 겨울밤은 모르는 척 너는
즐거울 거 야.
겨울 편지(세한도에 답하다) /전성호
밤새 기웃거리며 도착하는 하얀 기별을
우리의 마당에 펼쳐놓습니다
마른 가지 사이 하늘이 눈부신 까닭은
세상의 빈 곳을 다 묶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닫힌 문을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단신의 몸속에 묻히며
부푼 마음 뒤척이던 나날들
성내거나 눈물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발자국 다시 지워지고
끝내 말하지 않아도 부끄러움 보여주는 그대
때로 자신의 무게에 못 이겨
야윈 어깨 무너져내리지만
에두름 너머 나는 새 한마리 앉혀줄 자리 아직 넉넉합니다
아, 그러나 연연한 햇살 한줄기
내 속 따뜻하게 녹여줄 뿐
손안에 가만히 와 앉는 작은 불꽃은 눈물이 아니듯
날아가라고 가만히 놓아줍니다
그리움 너머 빈 들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는 것만은 아니기에
겨울에 읽는 하얀 편지 /오광수
당신을 향해 기도하고 잠이 든 시간
밤새도록 당신이 써 보낸
하얀 편지가 하늘에서 왔습니다.
잠 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걸음 소리도 내지않고
조용히 조용히 그렇게 왔습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큰지 온 세상을 덮으며
"사랑해!"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신도 내가 그립답니다.
당신도 내가 보고 싶답니다.
당신도 내가 너무 너무 기다려 진답니다.
새 날을 맞이하며 창을 여는 순간부터
한참을 일하는 분주한 낮시간에도
당신은 언제나 나를 생각한답니다.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 눈물 방울져 떨어지면
닿는 곳 점 점이 쉼표가 되어
쉬어가면서 읽고 또 읽습니다.
넘어져 하얀 편지속에 폭 안기면
당신은 나를 더욱 꼬옥 안고
"많이 사랑해!" 하는 느낌이 옵니다.
하얀 편지를 읽는 이 행복한 시간.
내 마음속에서 피어난 하얀 입김으로
"나도 당신을 많이 사랑합니다."
겨울편지 /김낙필
널 위해 써버린 시간이
아까운 것은 아니다.
어딘가엔 낭비했을 시간이니까.
한결같은 움직임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마음은 물 흐르듯 쉴새 없이 옮겨 다니는 거니까.
애끓는 일 따위가 무의미해질 때
이미 물길은 두물머리를 질러
먼바다를 향하고 있다.
버린 시간에 대하여는
그렇게 믿고 싶다.
역류할 일만 없다면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설령 웃음 같은 엷은 유혹일지라도
바람 부는 날엔 어쩔 수 없이 너를 생각한다.
흔들리는 나무니까.
이 겨을엔 한번쯤 굳게 맹세를 한다.
술 담배 끊는일 보다 무엇이 더 힘든지
시험해 봐야겠다.
얼어 터지고 뼈골이 시려도
만성질환은 아닐거라고
굳게 믿는다.
지리한 일상 때문이라 하기엔 뭣하고
특별한 쇼핑이라고 해두자.
바겐세일에서 건진
명품 손지갑 하나쯤으로 위안을 삼는다.
버리긴 아깝고 소장하기엔 별로인
묵은 악세사리처럼 그렇게.
시간은 물비누처럼 걸레를
청결하게 세탁해줘서 고맙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행가를 흥얼거려도 괜찮을듯싶다.
그렇게 믿고 싶다.
남은 날들을 채울
획기적인 플랜은 천천히 생각해도 좋겠다.
어차피 겨울은 동면할 것이고
마음도 얼어 버릴테니까.
써논 편지도
봄바람 불 때쯤 생각해보고
그때 부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