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이라는 것
엄원태
화살나무 가지는 촘촘하다
곤줄박이가 날렵하게 파고들어 꼬리를 까닥인다
가지가 순간, 흔들렸던가
수수꽃다리 가지는 성글다
쇠박새가 무심한 몸짓으로 앉았다가 훌쩍 날아간다
가지는 미동조차 없다
곤줄박이 앉았던 자리보다
쇠박새 앉았던 자리가
더
말갛다
조금 더 비어 있다
비어 있던 가지였는데
새가 앉았다가 떠난 뒤에야
더 말갛게,
헹궈 낸 듯 비워 낸 게 보인다
새는 그렇게
저들의 자취를 허공에 남긴다
생애(生涯)라는 건
원래부터 비어 있는 단애(斷崖)를
비로소 마주하고
온몸으로 통과해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새는 노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울지 않고, 다만 여문 부리를 깨물다 떠난 것으로
허공을 한 번 더 헹궈 낸 것이다
세상 노래를
다 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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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
허공이라는 것 / 엄원태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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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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