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맥 제3권 제 21 장 일초(一招)의 승부(勝負)
①
화르르륵......!
그것은 고목혈황이 가지고 있던 마기(魔氣)가 구천마신상들의 진
원마기에 못이겨 자멸하는 현상이었다.
"크으윽... 으아아악......!"
고목혈황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꽈아앙......!
고목혈황의 전신이 굉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새파란 불꽃이 허공 사방으로 비산되었고 고목혈황은 영원
히 지상에서 그 형체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중원과 양심을 배반했던 한 노마웅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장내를 지켜보던 무심빙존 능천백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의 어조로
중얼거렸다.
"악마... 악마의 무학......!"
무심빙존 능천백의 안색이 경악과 격동으로 파동쳤다.
장내는 혼이 달아날 정도의 엄청난 광경 앞에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멍청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공을 가득 메웠던 구천마신상들은 그제서야 영호제검의 미간을
통해 소리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쓰으......!
구천마신상들이 사라지자 영호제검의 전신을 휘감쌌던 흑암마류가
서서히 걷히며 진면목이 나타났다.
영호제검은 전에 비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해맑았고 전신에서는 후광과도 같은 정기(正
氣)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능천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가 없군...! 절대마인(絶代魔人)이 아니면 그런 엄청난
마류는 발출할 수가 없거늘......!"
영호제검은 그의 독백을 들었는지 씨익 해맑은 미소를 떠올렸다.
"향소야는 결코 마인이 아닙니다. 능아저씨!"
"......!"
무심빙존 능천백은 말없이 곤혹의 눈빛만을 떠올렸다.
사실 영호제검의 일신에 깃든 그 엄청난 비밀은 그가 도저히 상상
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무심빙존 능천백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모를 일.... 그 친구가 이런 아들을 낳았다니......!'
무심빙존 능천백은 영호제검에게 무언가 물을 듯 입을 열었으나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입을 도로 다물었다.
사실 무심빙존 능천백이 중원에서 찾던 그 친구는 영호제검과 엄
청난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능천백의 가장 친
한 친구이자 영호제검의 부친인 현소대무군 소수옥랑 영호단운이
었던 것이다.
'영호단운...! 그대와 내가 숙명적 관계를 가졌듯이 이제는 그대
의 아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네......!'
무심빙존 능천백은 내심 독백하며 한 가닥 따스한 미소를 떠올렸
다.
과거에 그와 소수옥랑 영호단운이 가졌던 관계라는 것은 최고의
호적수로서 또한 절대적 우정으로 맺어진 숙명적 관계였던 것이
다.
영호제검과 능천백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역시 다른 인물과
같이 멍청히 넋을 잃고 있던 혈인도후 모용풍은 정신을 차리고 만
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렸다.
"이 노옴......!"
그는 이성을 잃은 듯 부르짖으며 영호제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소로운 자! 그대의 상대는 본좌가 해주지."
영호제검의 곁에 있던 무심빙존 능천백이 냉혹한 일성과 함께 그
의 앞을 막아섰다.
"네놈은 누구냐?"
혈인도후 모용풍이 날카롭게 외쳤다.
무심빙존 능천백은 쓰윽 허리의 검자루를 어루만지며 냉담한 어조
로 말했다.
"본인의 이름은 파풍혈륜대주 능천백! 과거 중원에서 무심빙존이
라 불리기도 했지."
"무엇... 무심빙존......!"
무심빙존이라는 이름을 들은 혈인도후 모용풍은 안색이 홱 변했
다. 그는 이십 년 전 전 중원을 떨어 울리게 했던 그 찬란한 무명
(武名)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
다.
"죽어라--!"
혈인도후 모용풍은 그대로 허공을 날아 무심빙존 능천백에게 덮쳐
들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운 것이었고 지금 그의 행동은 최후의 발악
이라고 해야 옳았다.
격멸의 눈으로 자신을 향해 덮쳐드는 혈인도후 모용풍을 보고있던
무심빙존 능천백의 입술 위에 극히 미미한 한 줄기 냉소가 스쳤
다.
"가라......!"
츠으......!
무심빙존 능천백은 일갈과 함께 한 가닥 눈부신 일섬 광채를 허리
로부터 뻗어냈다.
쨍...! 째앵......!
"으아아악......!"
귀청을 찢는 금속성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능천백의 허리에서 한 가닥 섬광이 뻗어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거
기에 마주친 혈인도후 모용풍의 혈도가 마치 무토막처럼 잘려져
나갔고 이내 주위에 피보라가 자욱이 튀는 그 광경은 정말이지 인
상깊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비명을 끝으로 사방에 남은 것은 적막한 고요뿐이
었다.
혈인도후 모용풍은 피보라를 일으키며 십여 장 밖의 눈밭 속에 나
뒹굴고 있었다.
진정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공포스런 쾌검이었다.
아무도 능천백이 언제 어떻게 발검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그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태양마루의 소루주 영호제검이었다.
'과연......!'
영호제검은 내심 감탄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빙존 능천백은 어느새 본래의 자리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 있었다.
그가 돌아오자 영호제검은 나머지 태양마루의 인물들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런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착잡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
마상의 인물들은 모두 긴장으로 안색이 굳어져 있었다.
그들은 영호제검의 공포스런 위력을 너무나도 분명히 보았던 것이
다.
영호제검은 그들을 둘러보며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이후로 태양마루의 충성스런
정예가 되고자 하는 자는 즉시 본천으로 되돌아가라."
영호제검은 단지 그 한 마디를 남기고는 이내 빙글 등을 돌렸다.
"......!"
너무도 쉽게 내려진 용서의 결정에 마상의 인물들은 아연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일제히 감격의 눈빛을 보이며 태양마루 쪽으
로 말머리를 돌렸다.
두두두두둑......!
장내의 인마는 썰물 빠지듯 중원의 태양마루를 향하여 사라져 갔
다.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뒤로는 자욱한 눈보라가 휘날리
고 있었다.
관심을 가지고 영호제검의 행동을 지켜보던 무심빙존 능천백은 고
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그는 이 순간 영호제검에게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제황의 기상
을 보았던 것이다.
영호제검은 담담한 눈빛으로 무심빙존 능천백을 향했다.
"이제 계획대로 저는 낙양으로 가서 그들의 이목을 돌리겠으니 아
저씨는 만승대상가로 가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무운을 빌겠네."
무심빙존 능천백은 힘찬 어조로 답하며 전차를 뒤로 물렸다.
그 순간 마차에서 내려 옆에 서 있던 호경요가 영호제검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여자 많으면 나쁜 놈.... 쏘야!"
영호제검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래 알았다... 열두 명만 채우고 말 거야."
"나쁜 놈... 아주......!"
호경요는 화가 난다는 듯 눈을 부릅떠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미소띤 얼굴로 손을 흔들며 무심빙존 능천백
의 전차 위에 올라탔다.
쿠르르르릉.......!
호경요가 전차에 올라타자 일백 기의 기갑전차단은 앞으로 맞이할
본격적인 전투를 위하여 이내 지축을 흔들며 눈보라 속으로 사라
져갔다.
이제 장내에 남은 자는 영호제검과 초류향 그리고 설여상 뿐이었
다.
"가시지요. 소루주님!"
"그래야지......."
영호제검은 마차로 향했다.
설여상은 그의 옆에 바싹 붙어서 종종거리며 따라왔다. 이제 그녀
는 영호제검을 완전히 신과도 같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에게 신과 같이 비친 영호제검의 얼굴은 은연중
에 굳어 있었다.
'난운대부인의 손이 앞길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진정한 위험은
지금부터다!'
영호제검은 언뜻 담연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싸움이라면 결코 두렵지 않아......!'
영호제검 일행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②
마차는 이미 눈밭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어느새 마차 앞까지 도착한 일행의 표정이 일제히 아연해졌다.
그들은 마부석 위에 어느새 한 명의 인물이 자리잡고 일행을 기다
리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그 인물은 일신에 핏빛 혈의를 걸치고 회색
철삭을 두른 인물로서 바로 무심빙존의 그림자라고 하는 혈무잠이
었다.
'능아저씨의 배려로군.... 이럴 생각은 없는데......!'
영호제검은 자신의 일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 처리하고 싶었던 것
이다.
그는 담담히 혈무잠을 응시했다.
"......!"
마치 못이라도 박힌 듯 미동도 하지 않던 혈무잠은 영호제검과 눈
이 마주치자 그를 향해 지극히 짧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어보는 미소처럼 더없이
부자연스런 미소였다. 그런 그의 미소이기에 약간의 애교(?)마저
도 느껴졌다.
"후... 할 수 없군."
영호제검은 씨익 미소하며 마차 안으로 올랐다.
일행이 모두 타자 혈무잠은 능숙하게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두두두...! 쿠르릉......!
마차는 어느새 눈보라 속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
마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채 일각도 지나기 전에 갑자기 혈무잠의
무감정하던 두 눈에서 한 가닥의 기이한 광채가 스쳐 나왔다.
그것은 흥미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ㅋ...! 제법 힘을 쓸 만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예감이 드는
군......!"
극히 무감정하게 내뱉은 그의 독백은 바로 옆에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저미한 음성이었다.
"크ㅋ... 제아무리 귀신같은 자객수련을 거친 놈이라도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사실 혈무잠은 자객만을 척살하는 인간병기였다.
때문에 그의 전신 모든 육감과 신경조직은 오직 그 한 가지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두두두두...! 쿠르릉......!
혈무잠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마차는 쉼없이 달리고 있었으
며 혈무잠은 눈보라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면을 주시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
간간이 휘날리는 눈발 속에 한 대의 마차가 낙양성 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것은 영호제검의 마차였다.
마부석의 혈무잠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 밑에는 정말이지 끔찍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그의 발 밑에는 극히 예리한 칼날로 잘려진 듯한 물체들이 눈에
덮인 채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더 끔찍한 것은
그것이 바로 영호제검을 암습하려던 자객들의 귀라는 사실이었다.
따가닥... 따가닥......!
마차는 유유히 어둠이 내리는 낙양성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영호제검의 마차가 그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후 또 한 대
의 마차가 낙양성에 나타났다.
그 마차의 마부석에는 커다란 감산도를 허리에 비껴찬 매우 낯이
익은 인물이 타고 있었다.
그는 바로 풍위도 청파루의 주인 기용목이었다.
지금 기용목은 왠지 연신 싱글벙글하는 얼굴이었다.
"빨리 가자! 어서 놈을 보고 싶다!"
마차 안에서 몽향신투의 걸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물론입니다."
기용목은 연신 콧노래까지 부르며 마차를 몰았다.
따가닥... 따가닥......!
그런데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그 뒤를 바짝 이어 다시 또 한 대의
마차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 마차의 열려진 차창 안으로는 천오대불의 인자한 모습이 보였
고 그의 옆에는 제은봉이 앉아 있었다. 지금 그녀의 눈빛은 커다
란 기대의 빛으로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③
"허허허... 할아비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몽향신투의 대소가 호탕하게 터졌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영호제검은 연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무튼 소손은 때아닌 도둑 장가를 갈 뻔 했습니다."
"그래, 그 요녀의 몸매가 그렇게 훌륭하든......?"
몽향신투의 음성이 갑자기 은근해졌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라 자세히 보지도 못했습니다."
영호제검이 시치미를 뚝 뗐다.
"에라 요녀석아!"
"헤헤헤......!"
몽향신투는 알밤 먹일 듯 주먹을 움켜쥐었고 이에 영호제검은 장
난스럽게 웃으며 재빨리 몸을 피하고 있었다.
지금 푸짐하게 차려진 주안상 주위에는 영호제검과 몽향신투, 그
리고 천오대불이 모여앉아 있었다.
그들이 한껏 마시고 있는 주안상 주위에는 이미 빈 술호로들이 수
북했다.
두 조손은 오랜만에 마음껏 술배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영호제검은 몽향신투의 접시에 연신 안주를 골라 모아 주었다.
'허허... 녀석......!'
영호제검을 바라보는 몽향신투는 더없이 흡족해했다.
몽향신투가 영호제검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띠우고 있을 때
천오대불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죄로 녹차만 벌써 다섯 잔째 비우
고 있었다.
그는 지금 되도록 빨리 두 사람의 수다가 끝나길 부처님께 기원하
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과연 부처님의 자비(?)로 영호제검과 몽향신투가 돌연 조
용해졌다.
"......?"
천오대불은 흠칫 시선을 두 사람에게 던졌다.
그런데 가만보니 몽향신투가 천오대불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영
호제검에게 전음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
영호제검은 억지로 웃음을 참는 표정이 역력했다.
"음......!"
천오대불은 자신의 머리가 농담의 소재임을 알고 나직이 신음했
다.
"끄... 흐흐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영호제검의 입에서 괴상한 음향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아마도 터지려는 폭소를 겨우 참는 모습인 듯했
다.
천오대불은 참지 못하고 슬쩍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재미나게 하십니까? 몽향 노시주......!"
몽향신투는 얼른 정색을 하며 말했다.
"험...! 아무것도 아니오. 험험......!"
몽향신투는 어색한 기침을 터뜨렸다.
영호제검 역시 재빨리 시치미를 떼는 태도였다.
'으음......!'
천오대불은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곁눈으로 슬쩍 그의 표정을 읽은 영호제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기......!"
영호제검은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한쪽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높다랗게 동경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동경에는 목하
천오대불의 이마 위의 머리 부분만 비춰지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더 우스운 것은 그의 삭발한 머리가 황촉불과 거울에
반사되어 마치 동그란 만월같은 광채를 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
다.
그제서야 그 모습을 본 천오대불은 자신이 보기에도 웃겼는지 웃
음을 참지 못했다.
"허허허... 빈승의 머리가 이렇게 밝으니 밤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소. 아마타불......!"
"하하하......!"
"허허... 과연 그렇겠소. 아예 별호를 명두대불(明頭大佛)로 함이
어떻겠소......?"
다른 인물은 감히 할 수 없는 농담이 몽향신투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허허허......!"
천오대불 또한 스스럼없이 대소를 터뜨렸고 이에 삼 인은 실내가
떠나갈 듯 크게 웃어댔다.
한참을 웃던 그들은 몽향신투의 말에 의해 웃음을 멈추었다.
"이제 좀더 마음껏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할 일을 끝내야 되겠
지."
몽향신투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주안상을 한쪽으로 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오대불은 내심 반색을 했다.
삼 인은 곧 머리를 맞대고 다가 앉았고 어느새 주위는 완벽한 차
음강막으로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영호제검이 먼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두 분께 제가 알아낸 적에 관한 정보를 말씀드리겠습니
다."
"음......!"
몽향신투와 천오대불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영호제검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백검룡이 준 책자 속의 정보를
서찰에 적지 않고 단지 그들로 하여금 직접 낙양으로 달려오게 했
던 것이다.
"먼저 녹림의 재건에 가장 큰 적대세력은 벽해(碧海)의 해검문(海
劍門)을 비롯한 해상세가(海商勢家)들임이 밝혀졌습니다."
벽해 해검문은 과거 수중에서 영호제검을 기습했던 사혼인막의 수
중자객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영호제검이 조사한 바에 따르
면 과연 그들은 오대금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내륙의 모든 수로상권(水路商權)까지 장악하려는 음
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 녹림총단이 있던 동정호 군산
(君山)까지 해검문이 장악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황하수로를 제외
한 거의 모든 수로에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으음......!"
영호제검의 말을 듣고 있던 몽향신투의 안면근육이 소리없이 부르
르 떨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노안에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광망이 줄기줄
기 뻗쳐나오고 있었다.
영호제검은 이어 오대금악의 수족이 되어 있는 중원의 문파들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오오... 그럴 수가......?"
"아미타불......!"
영호제검의 설명이 진행될수록 이 인은 경악과 격동을 금치 못했
다.
그야말로 당금 무림에서 정파의 횃불과도 같은 세력들을 포함한
중원의 유수한 문파의 이름이 배신자라는 이름으로 영호제검의 입
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악은 만승대상가에 얽힌 비사와 각 파에 심어진
첩자에 대한 설명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절정에 달했다.
영호제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천오대불의 인자하던 안면은
어느새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아미타불......!"
천오대불은 심중의 격동을 누르기 위해 백팔염주를 돌리며 불호를
외웠다.
그는 전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자신의 소림에도 가히 믿을 수 없는
이름의 첩자 명단이 적잖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충격
을 받았던 것이다.
몽향신투와 천오대불의 안면이 여러 번 변하고 나서야 영호제검은
모든 설명을 마쳤다.
설명을 마친 영호제검은 자신이 따로 적어 놓은 적대세력과 첩자
의 명단이 적힌 두 개의 두루마리를 두 사람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는 눈빛을 깊숙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각 파의 첩자들은 최대한 빠르게 동시에 제거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비밀이 누설될 테니까요."
천오대불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파의 장문인들과 상의하여 극비리에 그들을 처리하겠네."
"그럼 지금부터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몽향신투와 천오대불의 안면이 재차 긴장의 빛으로 물들며 귀를
기울였다.
영호제검의 눈빛이 더없이 심유하고 예리하게 반짝였다.
"거사는 십 일 후 여명에 일제히 시작됩니다......!"
그들의 밀담은 긴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영호제검은 쉼없이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으며 이에 몽향신투와
천오대불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계획의 설명을 마친 영호제검은 마지막 말을 맺었다.
"어쨌든 우리는 오대금악에서 미처 어쩔 사이도 없이 짧은 시간에
중원을 완벽히 정리해야 됩니다."
"......!"
"그후 오대금악과의 정면충돌에 대비하는 것이지요."
영호제검의 말에 천오대불은 크게 감탄의 빛을 보이며 불호를 외
웠다.
"아미타불... 정말 훌륭하오. 참으로 계획은 완벽하외다."
영호제검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진군의 북소리만 울리면 될 것입니다."
"좋아! 이제 녹림은 다시 중원 하늘에 우뚝 선다!"
몽향신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노안 가득히 투지의 광채를 빛냈
다.
이로써 마침내 풍운의 장이 힘차게 열린 것이다.
④
은밀한 정실.
그곳에는 일남일녀가 대좌하고 있었다.
그들은 더없이 화려하고 폭발적인 미태와 요기를 자아내는 중년여
인과 한 손에 백우섭선을 들고 어느 고관대작의 귀공자와 같은 백
의미청년이었다.
바로 난운대부인과 환우대군 그들이었다.
이 순간 난운대부인은 항상 입가에 감돌던 화사한 미소를 씻은 듯
지우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격앙된 얼굴로 말했다.
"바보같으니... 계집 하나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단 말인가?"
"......!"
환우대군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감도는 습관적인 미
소는 여전했다.
그는 자신을 다그치는 난운대부인을 향해 대수롭지 않은 듯 담담
하게 말했다.
"찾아서 죽인다면 일은 간단하오. 무공을 알지 못하니 멀리 도망
치지는 못했을 것이오."
"그러나 만에 하나... 그 계집이 누구에겐가 입을 나불거린다면
우리에게 미칠 그 막대한 영향을 누가 막을 수가 있지?"
난운대부인은 이마를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반문했다.
환우대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을 누가 믿어줄 수가 있겠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
오."
난운대부인은 길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아무튼 그 계집에 관해선 그대가 확실히 처리하도록 해."
"......!"
환우대군은 말없이 싸늘한 미소만 피워 물었다.
그것은 살기도 무엇도 아닌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을 물씬
풍기는 미소였다.
난운대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영호제검이란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되겠어."
"......?"
"애당초 녀석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 지금은 아주 골치아픈 존
재로 커버렸단 말이야."
난운대부인은 이제야 비로소 오판에 대한 실수를 통감하는 듯했
다.
그러나 그런 심각한 그녀에 비해 환우대군은 예의 더없이 온화로
운 미소를 떠올리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어린아이 하나가 그렇게 대단하오? 설령 그렇다 해도 처치하면
간단한 것이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난운대부인은 그를 향해 싸늘한 조소를 던졌
다.
"그래서 세 번의 암습조차 실패하고 마환대공자 선우휘세와 백리
승하까지 감쪽같이 살해되었던가......?"
"그 정도의 손실은 말할 가치도 없는 미미한 것일 뿐이오."
환우대군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지금 그의 표정에는 마환대공자 선우휘세와 백리승하의 죽음은 정
말이지 말할 가치조차 없는 대수롭지 않은 손실이라고 적혀 있는
듯했다.
난운대부인은 또다시 차갑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소림의 천오 땡중이 지금 녀석을 만나고 있어.... 무슨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이 확실해......!"
"결론은......?"
"무슨 짓을 벌이는가 알아내고 없애 버려. 아니 기회가 있으면 언
제라도 가차없이 처치해."
난운대부인은 잔인표독한 어조로 자르듯 말했다.
"후후......!"
이에 환우대군은 마치 짙은 어둠과 같은 죽음의 미소를 희미하게
흘렸다.
다음 날 아침.
두 대의 마차가 낙양 성문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문루 위에서는 영호제검이 조용히 마차를 배웅하고 있었고 마차는
이내 두 갈래 길로 갈라지며 시야 속에서 사라졌다.
영호제검은 두 대의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몸
을 돌렸다.
"거사 전까지 내가 할 일은 두 가지가 남았군......!"
영호제검은 무슨 뜻인지 모를 조용한 독백을 흘리고는 이내 낙양
성 내를 향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한 인영이 영호제검이 서
있던 자리로 나타났다.
그 인영은 바로 환우대군이었다.
"......!"
그는 입가에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멀어지는 영호제검의 뒷모
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은 예전과는 달리 어딘가 싸늘히 굳어져 있
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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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