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장모님을 모시고 함께한 봄나들이...
1일차다
집사람이 아침부터 일찍일어나 난리법석이다. 오늘은 장모님을 모시고 3박4일 간 처가집 고향인 남면 신홍리로 해서 부여로 첫 나들이 가는 날이다. 출발 예정시간은 낮12시, 출발 시간이 늦어진 이유는 집사람이 오늘도 학교강의가 있어 끝내고 가야만 한단다. 대신 나는 집사람이 돌아 올 때까지 집안 청소 등 배낭에 준비물 등을 미리 챙겨야만 했다. 신고 갈 운동화는 밤새 마르도록 베렌다에 내놨는데 마르지 않았다며 가스불에 잘 말려달라며 신신 당부를 하며 나간다.
그런데 집사람이 출입문을 막 열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 가스불에 말린다고 살짝 댄 새운동화 뒷꿈치가 하얗게 녹아 버린 것이다. 정말 집안에 난리가 났다. 골다공증이 심한 아내는 요즘들어 구두보다는 안전을 위해 운동화를 선호 하는데 태워놨으니 그게 얼마짜리 인데 뛰며 울상이 된 모습은 마치 어릴 때 손에 쥐고 먹던 사탕 한 개를 빼앗겨 뛰는 어린아이 같았다.
강의를 마친 집사람이 집에 도착 할 시간을 알리려는지 폰이 울려댄다 출발 예정시간이2~30여 분 앞당겨질 것 같다는 음성이 폰을 타고 들려온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해 보려는 마음에 집사람과 나는 버스를 급히 타야만 했고 석계역에 가서는 전철1호선으로 환승, 부평, 원인재를 경유하여 장모님이 계신 인천 연수역 부근 요양원에 도착했다 가서 보니11인승 차량 앞에 처남과 장모님 큰처형 작은처형께서 미리 대기하고 계셨고 집사람과 나를 포함하여 총 6명이 합류를 했다.
그런데 작은동서와 작은처남댁이 못간다며 불참을 했다. 처남댁이야 이번에 처음으로 갖는 나들이기도 해서 재밌게 보낼려고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던 중에 그만 노래방에서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작은 동서는 갑자기 사전에 못가신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불참하신다는 게 무척 서운한 감마저 들었다.
아내의 고향 남면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5시30여 분, 이게 얼마만인가. 큰 처남이 일찍 세상을 떠나신 지 20여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처가집에 간 게 아닌가. 도착 이후 시간이 얼마되지 않아 금천 고모님께서는 올케와 조카들을 보시겠다고 서둘러 오셨단다. 체구는 작은 편이시지만 곧 구순이 가까운 연세임에도 고모님은 매우 건강한 편이셨다. 저녁식사는 처사촌인 여삼 처남이 준비하겠다고 사전 예약이 이미 돼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벌써 대형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밥솥이 요란스럽게 찰랑거리며 우리의 입맛을 돋구게 했다. 쌀이 너무 좋아 밥맛은 최고로 좋았다. 예전에는 여삼 처남댁이 신혼 초때부터 사람을 봐도 좀 쌀쌀 맞고 차가운 느낌이 많이 들었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변한 모습을 볼 수가 있어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과거에는 여삼 처남이 쌀 장사도 오래 했다. 실패도 많이했다. 그런 악조건 하에서 갖은 세파를 다 겪으면서 고진감래의 길을 걸은 것이다. 실제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대들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지금은 정상에 바로 우뚝 선 호연지기 기운을 받아서 인지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신축주택 외 집 주변에는 철골조와 비닐하우스를 씨워 만들어진 대형 창고가 있고, 안에는 값비싼 각종 농기구와 모내기 때 쓰일 모판재료도 몇 개가 파렛트 위에 높게 쌓여져 있었다. 또 바로 옆에는 도정공장과, 차량 여러 대가 운행하는 등 부지도 너무 넓어 큰 기업체로서의 면모를 다 갖춰 놓고 기계화 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대단하고 자랑스러워 보였다.
2일차다
아침7시 경에 기상하여 뒷산에 올라가 처가집 조부모님께 성묘를 먼저 드리고 여삼 처남의 안내하에 몸에 좋고 맛있다는 머위 나물을 다섯집에서 먹을 수 있는 양, 다섯포대 정도를 산에서 여럿이 함께 뜯었다. 아침은 큰 처남댁에서 하기로 하여 갔는데, 그 바쁘신 와중에도 얼마나 정성스럽게 준비를 잘 하셨는지 차린 게 진수성찬이었고 특히 게장과 홍어회 무침은 정말 일미였다. 아침은 6촌 오빠 분과 여삼 처남도 식사를 함께 했다.
결혼 이후 지난 시절도 생각이 났다. 애들을 데리고 방학 때면 큰처남댁 친정 동네인 서천 어느 바닷가 갯벌에 들어가 조개와 바지락을 캐어,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맛있게 끓여 먹었던 것이 이제는 좋은 추억이 되어 영원히 내 머리속에 기억될 뿐이다. 다시 여삼 처남댁으로 가 부여로 이동할 시간이 되자 고맙게도 여삼 처남이 밥맛이 좋은 쌀이니 한 번 드셔보라고 다섯집에 쌀20키로 씩을 택배로 배송 또는 일부는 차량에 실었다고 한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차량은 아침 늦게 이동을 했다. 누가 고향이 어디슈 하고 물으면 충청도 부여라고 말만 했지 실제는 아는 게 무지였는데, 오늘은 만30년 만에 부소산을 찾았다. 그 때는 우리 아들 두식이 병호가 초등학교 다닐 때다. 조카와 어머님을 모시고 고란사까지 갔던 게 바로 며칠 전처럼 선명하게 떠 오른다. 단지 지금은 고란사로 내려가는 길이 일부는 데코로드가 깔려 있었지만 그 때는 비포장 길이어서 잘못 발을 헛디디게 되면 돌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나는 당시 어머님을 모시고 집사람과 조카와 함께 셋이 찍힌 사진을 내가 직접 찍은 기억이 있어 그 장소를 열심히 찾아 헤멨지만 지금은 깨끗이 변한 채 옛모습은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것. 고란사에 내려가 약수물 한 잔을 마시면3년을 더 오래 산다 하기에 집사람은 먼저 한 잔을 시원하게 마셨고 나는 조금씩 10번을 들이켜 마셨으니 앞으로 30년은 족히 살까 싶다. 작은처형과 큰처형은 좀 힘이 드시는지 우리한텐 힘들게 뭘 거기까지 먼저 내려가냐고 말씀을 하셨지만, 두 처형께선 조금은 힘드신 게 역력해 보였다. 걷다보니 삼충사 앞에 가만히 앉아계시라고 했던 장모님과 고모님께서 어서 빨리 내려 오라고 하신단다. 서둘러 내려 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올라올 때는 덥다고 그늘진 곳에 편안히 앉아계시라고 하였지만 긴시간 동안 오래 앉아계시기엔 추우실 수도 있어 속보로 걸음을 걸어야만 했다.
저녁은 매식을 하지 않고 큰처남댁이 직접 장만에 주신 반찬을 이곳 롯데리조트까지 직접 배달해 주시어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평소 큰처남댁의 음식솜씨는 온집안 식구들이 항상 인정을 한다. 너무나 고맙다. 이번에도 보면은 모두가 식사를 하고 나더니 오히려 밖에 나가 부페를 먹는 것보다 헐씬 맛이 좋았다고 하신다.
문제는 잠 자는데 좀 시간이 걸렸다. 작은처남이야 코로나에 감염이 된 것 같아 꼼짝달싹 하지 않고 독방에 갇혀 누워 있으면 됐지만, 실제는 증세가 없다고 하면서도 키트 검사를 다시해 본 결과 전 날은 붉은 선이 흐릿했지만 다시 재 검사를 해 본 결과 더 선명해졌다고 한다. 진퇴양난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됐다.
잠자리는 소문난 잔치집엔 먹을 것 없다고 호텔치고는 겉만 깨끗했지 내실은 조금 신경을 덜 쓴 것같다. 슬리퍼도 없고 이부자리도 모자라고 장모님께서는 밤새도록 너희들 잠을 못자면 안 된다며 얼마나 말씀이 많으신지 밤새 말씀을 오히려 더 하신다. 결국은 모자라는 이부자리 때문에 세로로 잠을 주무시던 장모님 요를 가로로 깔면서 세사람이 늦게서야 깊은 잠이 들었다.
3일차다
오후2시 넘어 처이모님부터 가족단위로 함께 오시기 시작했다. 이모님댁 막내 처남 같은 경우는 시간이 없다며 잠깐왔다가 인사만 하고 바쁘게 갔다. 결집장소는 24년에 걸쳐 단지가 조성이 되었다는 롯데리조트 앞 백제문화단지. 마치 우리가족들의 피붙이가 한데 어우러져 인증샷을 할 때마다 연로하신 장모님 이하 이모님 큰외숙모님, 둘째, 셋째, 넷째 외숙모님 모두가 함께 했다. 이 중 다섯 분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셨지만 장소는 핫플레이스로 꼽힐 정도로 맑게 웃으시는 표정들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모두가 사비로 열차를 타면서 역사문화관도 탐방하며 즐거워 했고 한마음이 되었다.
저녁은 맞형이신 생현 손위 처남께서30여 명 정도가 되는 비싼 저녁 식사와 약간의 반주값을 곁들여 통크게 한턱을 쏘셨다. 귀순 처남과 용현 처남은 내가 술을 잘 마시는 애주가로 보였는 지 술잔이 계속 잔을 넘어 타켓이 되어 넘어 왔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그런데 술을 마시다 보니 분위기는 한 층 업이 되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을 수없는 상황이 되었다. 장소를 물색한 끝에 부여로 가야만 노래방이 있단다. 모두가 가자는데 안 갈 수가 없어 따라가 보니까2층 건물에 있는 싱어 노래연습장이었다. 첫테이프는 귀순 처남이 빵빠레 신호음이 울려 퍼지면서 부르는데, 노래는 명가수라 해서 다 잘 하는 것도 아니지만, 역시 귀순 처남은 잘못 풀렸나 싶다. 원로 가수 못지 않게 잘 부르는 노래 실력이었다. 분위기는 더 한층 고조 되는 가운데 대전에서 반가운 현숙 처제와 동생 현미 부부 일행이 왔다. 노래는 곧바로 현미 부부 한테로 넘어가 함께 부르며 마구 뒤흔드는데 완전 판을 뒤집어 놓는 열광속에 환호하는 분위기였는데 가수 한혜진이 너는 저리가라! 경쟁 상대가 정말 안 될 정도로 독특하게 부르는 현미 처제가 유독 돋보였다.
불러도 불러도 미련은 남겠지만 끝마무리는 또 손위 생현처남께서 하셨는데, 숙소에 들어와서는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긴밀한 회의를 끝마치고 밤 늦게서야 숙면을 취해야만 했다.
마지막4일차다
금일 체크아웃 시간이 오전11시 라고 한다. 오늘은 마지막 날, 어제보단 좀 일찍 기상을 했다. 아침 식사는 그동안 큰처남댁이 준비를 많이 하시어 식사는 맛있게들 하고 부여 백제의 별궁 연못, 궁남지로 향했다. 궁남지라 하면 잘 몰라도 해마다 연꽃 축제하는 곳이라고 하면 다 알 것같다. 마지막 코스는 장모님, 이모님, 큰외숙모님, 둘째 외숙모님 네 분이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연못 주변을 돌며 조심스럽게 움직이신다.연못은 아직 연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길섶에 핀 붉은 진달래 꽃들은 우리 일행을 보며 반갑게 반긴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사람은 누구든 출생했을 때부터 너의 운명은 어느 날 언제까지 라고 미리 정해지는가 보다. 실은 장모님께서는 두 번의 고비를 넘기시면서 처이모님 처외숙모님들을 몹시 그리워하셨단다. 이번에도 보면은 약식 만남을 두 처남들이 주선을 했는데 이렇게 큰 행사가 될 줄은 모두가 예상을 못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마지막 연못 주변을 돌면서 오늘 따라 장모님 생신을 아는지 길섶에 곱게 핀 붉은 꽃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우리 일행을 붙잡고 쉬었다 가라고 손짓을 한다. 그래서 명당 자리라고 할 수있는 곳에 터를 잡아 장모님, 이모님, 큰외숙모님, 둘째 외숙모님께 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드렸고 생신 축하송도 한 분 한 분씩 부르셨다. 여희 막내 딸도 예쁜 목소리로 불러드렸다. 특히"세월아 우리엄니 돌려줘" 라는 현미 처제의 생음악은 야외에서는 가수들도 잘 부르지 않는 어려운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기교있게 부르는 노래 솜씨는 온 집안식구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즐겁게 보내는 날은 시간도 빠르게 지나간다. 혜어지기가 아쉬워 이번 모임을 위해 수고가 많은 작은처남이 저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마무리 발언을 끝으로 식당으로 안내한다 점심식사는 꼭 하시고 혜어져야 한다며 각자 취향에 맞게 감자탕과 순두부를 즉석에서 주문했다. 준비하는 시간은 조금 길어졌지만, 탕맛은 아주 일품이었다.
이제는 곧 혜여져야 할 시간. 마지막 종착지인 주차장으로 향했다. 침울한 분위기가 맴돌자 손위 처남이 눈물을 안 보이려고 하시는 지 어서빨리 가자고 하시면서 선두로 먼저 치고 나가신다. 사위인 저도 제대로 인사를 못드리고 마지막 뒤를 이어 바로 갔지만, 늦게는 장모님과 이모님은 눈물 없인 볼 수없는 장면이 연출됐고, 내순 처남은 오늘이 이젠 이모님과는 마지막이 아닐까 싶어 이모님 휠체어에 뒤돌아 서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끝으로 나는 이번 봄나들이 모임에서 완전 뒷전에 밀려 방바닦만 닦다 온 사위로서 수고해 주신 두 처남과 셋 처남댁, 이번 모임에 불참하신 동서, 그리고 집사람에게도 수고하셨다고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모쪼록 장모님, 이모님, 첫째 외숙모님, 둘째, 셋째, 넷째 외숙모님께 오래오래 만수무강 하시기를 빕니다. 또 이번 모임에 바쁘실텐데도 불구하고 참석해 주신 여러 처남, 처남댁, 처제, 동서 분 그리고 불가피하게 참석 못하신 모든 분께 고맙다고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23. 4. 25. (화)
사위 김 지 봉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