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소나무와 고현정 소나무,.. 김영애를 추모하며
4월 9일은 우리에게 친숙했던 국민배우(?) 김영애(1951.4.21.~ 2017.4.9.) 1주기입니다. 작년 이맘 때 별세해서 많은 분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배우였습니다. 낙화가 어렸을 때는 도회적, 서구적 이미지로 인해 TV에도 잘 안보였다고 생각한 분이었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김자옥, 한혜숙과 함께 1970년대 안방극장 트로이카로 활약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낙화가 TV드라마에 문외한이지만 너무 후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낙화 기억으로는 80년대를 넘어 90년대 이후 각광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80년대 TV에서는 서구적 이미지를 소화할만한 드라마 배역이 적었겠죠. 경제규모가 커지고 전통적인 가족에 관한 내용보다 재벌 등 기업에 관한 내용이 드라마에 나올 때 대기업 회장 사모님 혹은 능력있는 CEO 등의 역할을 하면서 연기영역이 넓어진 것으로 압니다.
낙화가 김영애의 팬이 된 것은 SBS 개국프로그램으로 1995년 1월 9일부터 1995년 2월 16일까지 방영되었던 24부작 드라마, 연출 김종학, 극본 송지나, 최민수·고현정·박상원·이정재 등이 출연한 ‘모래시계’에서 빨치산의 아내이자 유복자인 태수의 어머니로 나온 김영애의 연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모래시계’는 ‘귀가시계’로 불릴만큼 역대 시청률 3위를 자랑할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품인데 당시로서는 방송에서 다루기 힘든 정경유착, 카지노, 조폭, 그리고 무엇보다 광주항쟁을 처음으로 다룬 점에서 파격이었고, 편성도 일주일에 두 번이 아닌 월화수목 주4회 편성, 빠른 전개로 단숨에 안방극장을 사로잡은 드라마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024A4A5ACD864E0B)
90년대 최고화제작 중의 하나인 '모래시계' 단 1회 출연만으로 존재감을 떨친 배우 김영애 (SBS 화면캡춰)
그런데 이 드마라가 빵터진 것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극 초반 한국전쟁 시기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의 아내이자 유복자인 태수를 키우는 김영애, 요리집이자 기생집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아들을 잘 키우고 그래서 태수는 육사에 합격했는데, 연좌제에 걸려 육사 합격이 취소됩니다. 아들에게 짐이 될 것 같아 어머니 김영애는 빨치산 남편을 묻은 지리산 자락에 올라 술을 뿌리고 철도가 달리는 철로길을 걷다가 떨어진 스카프를 잡을려다 역내로 들어오는 기차를 마주 대합니다. 김영애의 출연은 딱 1회, 첫 회 밖에 출연하지 않았는데 지리산과 남도의 수려한 경관, 그리고 무엇보다 금기시 됐던 빨치산과 6.25전쟁의 상흔을 알리면서 드라마의 초반 눈길을 잡아 끄는데 성공했고 장안의 화제를 모으게 됩니다. 단 1회 출연만으로 존재감을 떨친 김영애의 연기가 없었다면 ‘모래시계’가 그렇게 성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선택한 김영애가 걸어간 철로길, 촬영이 이뤄진 곳은 곡성군 압록역입니다. 압록역은 섬진강과 17번 국도가 나란히 달리는 전라선 기차역입니다. 74년 동안 승객과 화물이 드나들었던 압록역은 지난 2008년 12월 1일부터 열차가 서지 않습니다. 전라선 직선화 개량공사로 역기능을 상실했으니 문을 닫은 것이지요. 김영애가 철도가 달려오는 철로길을 걸으면서 눈길을 준, 스카프가 하늘 위로 나풀거리면서 날아가는 것을 지켜본 소나무가 바로 ‘김영애 소나무’입니다. 지금은 간이역도 아닌, 그냥 통과역이 돼서 역구내로 들어가 볼 수 없는 소나무가 바로 ‘김영애 소나무’인 셈이죠.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CF4455ACD84021E)
눌산의 뜬금없는 여행 블로그 : http://www.nulsan.net/ 압록역 소나무사진 인용
‘모래시계’에는 또 다른 소나무가 나옵니다. 카지노 재벌의 딸이면서도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고현정(혜린 역)은 학생운동 중 수배를 받아 동해안 바닷가로 도망갑니다. 바로 그곳이 철도역이 바다에 가장 가깝다는 정동진역. 정동진역에서 고현정은 동지들의 소식을 기다리다 형사들에게 잡혀 서울로 갑니다. 기차는 기적소리와 함께 들어오고 휘날리는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기다리는 혜린, 경찰과 형사가 다가오자 잡혀가는 혜린... ‘모래시계’ 명장면 중의 하나이고 사람들은 철도역과 바다가 맞닿은 곳을 주목, 높은 시청률과 함께 이곳은 해돋이 명소가 됩니다. 혜린이 소나무 밑에서 바다를 보며 태수를 그리워한 바로 그 소나무는 이른바 ‘고현정 소나무’가 됐는데 ‘모래시계’의 인기와 함께 신세계그룹 정용진하고 결혼, 신데렐라가 됐지만, 극중 성격만큼 당차고 활달한 고현정은 재벌가의 며느리역은 잘하지 못해 결혼 8년만에 이혼했습니다. 한동안 정동진역내의 소나무가 ‘고현정 소나무’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모래시계 소나무’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아마 신세계측에서 ‘고현정’으로 불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EB3E4C5ACD843028)
정동진의 '고현정 소나무'. 모래시계 소나무 보다 고현정 소나무가 더 의미있지 않을까요?
(2017. 2. 4. 잘걷자님 진행 강릉 심곡부채길 걷기에서, 낙화 자료사진)
개인적으로 ‘모래시계’에 태수 어머니로 나온 이후 김영애는 한국적 ‘어머니상’을 획득했다고 생각합니다. TV드라마엔 문외한이지만, 그전까지 드라마에 나오는 어머니상은 대부분 자애롭고 인자하며, 남편을 잘 모시고(?) 자식의 성공을 위해 묵묵히 희생하는 연기가 대부분인데 김영애는 당차고 자신이 주도하는 능동적인 역할로 나옵니다. 90년대, 가족관계의 해체, 여성의 역할확대와 더불어 김영애의 연기 폭은 더 넓어지고, ‘모래시계’ 태수 어머니 역할은 2013년 양우석 감독 송강호 주연의 ‘변호인’에서 운동권 아들을 둔, 돼지국밥집 주인역으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김영애는 그후 순탄한 연기생활 못지않게 사업가로 변신, 주위를 놀라게 합니다. 2002년에 (주)참토원의 부회장을 역임하며 황토팩 사업으로 1700억원 상당의 매출을 내기도 했지만 2007년에 (주)참토원에서 판매한 황토팩에서 산화철(중금속)이 검출되었다는 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이 나간 이후 사업 실패로 인해 심한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은 김영애는 결국 2012년에 췌장암 판정을 받습니다. 잠시 나아지는가 했지만 2017년 4월 9일 나빠질대로 나빠진 췌장암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은 3-4회 남기고 종영이었는데 끝내 마지막 출연은 못하고 유작으로 남겨두어야 했습니다. "쓰러질 때까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연기자의 자세"라고 한 김영애는 쓰러질 때 까지 연기를 한 연기인이었습니다.
지난 2017년 4월 1일 걷기모임 오케스트라에서 잘걷자님 진행으로 보성강 매화, 섬진강 벚꽃트래킹을 갔습니다. 너무 일찍 가는 바람에 매화도 벚꽃도 제대로 못보았지만 보성강과 섬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압록역 근처 산위에서 압록역을 바라본 추억이 있습니다. 이번 4월 7일 하동 쌍계사벚꽃십리길 갈 때 버스에서 한참 자고 가다가 눈을 떠보니 구례를 지나서 반가운 마음에 창문 밖을 먼저 보는데 버스는 속절없이 하동으로 방향을 꺽더군요. 그 순간 눈이 다시 감겨 하동까지 잠자면서 갔지만, 기회가 되면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압록역에 가서 ‘김영애 소나무’에 소주라도 한잔 올리고 오고 싶네요. 길을 떠나면 그 길에 얽힌 사연이라도 듣고 보고 오는 것, 여행의 또다른 묘미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4월 1일 보성강 섬진강길, 2018년 4월 7일 하동길, 아쉽게 타계한 배우 김영애를 만나고 느끼는 길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한 연기만 하실 김영애님을 추억하며...
낙화는 유수처럼
![](https://t1.daumcdn.net/cfile/blog/9910724C5ACD847716)
2017년 4월 1일 보성강 섬진강을 찾았을 때 '남도오백리역사숲길' 압록역 표지 (낙화 자료사진)
![](https://t1.daumcdn.net/cfile/blog/998314495ACD84B73A)
2017. 4. 1. 보성강(왼쪽)과 섬진강(오른쪽)이 합수하는 지역. 사진 가운데 높은 건물 뒤로 압록역. 사진 오른쪽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17번 국도와
섬진강 너머 오른쪽 국도는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가는 19번국도로 유홍준 교수가 봄에 걸으면 아름답다고 절찬한 곳. (낙화 자료사진)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77A435ACD85C834)
고현정 소나무가 모래시계 소나무로? (낙화 자료사진)
첫댓글 어느 영화감독왈 탈렌트중 김영애씨가 가장 섹시한 배우라고 칭찬하던데
벌씨 1주기였네요~ 시간은 빛의 속도로 흘러가고...
낙화님!! 이제 한국영화.드라마의 조명에도 들어가신 건가요?ㅎㅎ
길과 인연있는 사람과 장소의 개연성을 이리 분석해서 남겨주시니 그저 감탄하며 잘읽고 갑니다^^
여배우의 추모로 시작된 글 속에서 참 많은것을 알게되네요~ ㅎ
황토팩 사태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일을 하던 저도 스트레스를 받아
심한 소화불량에 걸릴 만큼 건강이 문제 있었는데,
하물며 김영애님은 그당시 얼마나 힘들었을지...ㅠ 멋진 배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