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성의 남침계획 ■ 김일성은 1948년 9월 북괴정권수립과 때를 같이하여 수립되었으며,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 삼자의 논의를 거쳐 한반도를 축으로한 극동지역으로의 공산주의 확산을 위한 공산기지확보를 위하여 수립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우선먼저 북한지역을 공산화하고, 남한지역은 민중선동을 통한 공산봉기 및 폭력혁명을 실시하는 단계별 공산화를 획책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스탈린이 이에대한 불신을 제기하므로서 무력남침을 통한 한반도 공산화로 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
이미 전장에서 논했드시 미국은 한반도 보다는 일본에 주안을 두고 2차대전 종전이후의 패전국 처리에 집중하고 있었으나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혼란한 틈을이용하여 공산혁명완수를 위한 세력확장에 주안을 두고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이의 선봉에 김일성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존재 하였던 것이다.
■ 소련의 전략은 매우치밀하였으며 그의 실행 또한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대표적인 것이 미군철수를 유도하기위한 소련점령군 철수였으며, 한편으로는 1950년 6월까지 북괴군을 당시 인민군 3개사단 규모에서 보병 22개사단. 전차 2개사단으로 증강육성 하였으며 실제 전쟁발발전까지 10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 3개특수연대, 5개 경비연대로 증강되었다.
김일성은 1950년 30월 30일 박헌영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스탈린을 방문하여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남침계획을 설명하고 동의와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중국과의 공동전선 형성문제를 언급하면서 중국의 동의를 구할 때 까지 남침시시를 연기하기로 합의 하고 4월 25일에 귀환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1950년 5월13일 북경으로 모택동을 방문 스탈린과의 회담결과를 설명하고 동의를 요구청하였으며, 모택동은 5월 15일 김일성 및 박헌영과 회담후 소련에 대하여 한국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며 이계획에 찬성하고 계획된작전을 위하여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언급하였으며 (공개된 구 소련 외교문서 중에서 밝혀짐) 이를 토대로 김일성이 아래와 같이 3단계의 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제 1단계 군사력을 준비하고 이를 증강함
제 2단계 평화적 통일에 관한 대남제의
제 3단계 남한측의 평화통일 제의를 거부후 전투행위 개시
따라서 김일성은 이 기본 3단계 계획에 의하여 무력남침 공격을 준비해 왔으며 이후 5월 29일 이를 최종공격계획으로 완성하고, 공격개시일을 남침공격에대한 보안유지. 장마로 예상되는 기동제한 회피, 기습달성을 위한 일요일 등을 고려하고,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등의 긴밀한 협의하 1950년 6월 25일로 선택되었으며 "소련 군사고문관들의 지도아래 선제타격계획이라는 남침공격 계획이 최초 러시아어로 작성되었다."(당시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 증언)
이와 같이 소련의 붕괴와 러시아의 외교문서 비밀해제등으로 그동안 북침이냐 남침 이냐를 놓고 논란을 벌여오던 일부세력들의 북침설에 대하여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여 민족상잔의 주체가 김일성과 그를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 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 한편 김일성과 그들의 지도부는 "일단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전역에 잠복해 있는 20만 남로당원이 봉기하여 남한 정권을 전복시킬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라고 당시 인민군작전국장 유성철은 증언하였으며, 따라서 3일안에 서울만점령하고나면 전쟁이 끝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당시 인민군 부총참모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이상조도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실제 전면남침을 개시한다음날 방송을 통하여 남한인민의 봉기를 촉구하였으나 박헌영의 주장대로 남한애서 단 한건의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중반기 한만국경으로 도망치던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전쟁패배의 모든책임을 되집어씌워서 숙청하였으니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다.
● 남침명령 하달 ■ 북괴군 총사령부는 공격부대의 전방 이동에 때를 맞추어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정찰 및 공격명령을 차례로 해당부대에 하달 하였다. 이 정찰명령 원본은 러시아어 필사체로 작성되었으며 전쟁중인 1950년 10월4일 서울에서 노획되었다. 정찰명령에 이어 부대기동이 완료될무렵 공격부대에 대한 전투명령 1호가 하달되었다. 당시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선제 타격작전계획을 소련의 군사소문단 지도아래 러시아어로 작성되었으며 이를 보면
제 1단계 : 방어선 돌파 및 주력 섬멸 서울(수원) - 원주 - 삼척을 연하는 선 까지 진출,
제 2단계 : 전과확대 및 예비대 섬멸 군산 - 대구 - 포항(경주)를 연하는 선 까지 진출
제 3단계 : 소탕작전 및 남해안으로의 전개 부산 - 여수 - 목포를 연하는 선 까지 확대하는 구체적인 계획이 도식과 서식으로 구분되어있다. 이 상황도는 북괴군의 선제타격작전계획 상황도로서 1992년 8월 29일 연합통신이 러시아 군사연구소 로부터 입수한 것으로서 원본은 모스크바와 평양에 각각 1부씩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이 계획과 동시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정보계획이 수립되었으며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정보수집계획를 단계별로 작성하였며 이 정보 계획은 북괴군 총사령부가 남침직전 북괴군 제2사단에 하달되었던 문건으로1950년 10월4일 서울에서 노획되었다.
주요내용을 보면(중략)
(공격준비단계 )사단이 공격대기진지를 점령하면 관측과 정찰을 통하여 공격개시 전날 밤까지 적 주저항선, 지뢰와 장애물지대 및 통로......등을 정확히 파악한다.
(공격개시단계)공격이 개시되면 적 예비대의 투입을 관찰하고 부대의 철수개시와 방향을 파악한다.
(공격진행단계)전방부대가 사암리 일대에 도달하면 000방향으로 정찰대를 파견 서울 - 춘천 철로와 도로상의 적 이동상황을 파악한다.(중략) 부대가 한강에 도달하면 정찰을 통하여 서울 - 수원 - 이천 도로상의 이동과 곡수(지평), 수원, 이천부근의 적 활동을 파악한다. 등으로 북괴군의 제 1단계 작전인 서울을 탈취할 때까지의 정보수집계획이 세부적으로 명시되어있다.
● 우리 국군의 방어태세 ■ 제 1장에서 소개한 대로 우리 국군은 아직 창설을 위한 준비단계에 있었으며 더욱이 소련과 달리 미국은 한국군의 편성과 전력증강에 대하여 미온적이었으며 더구나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연설(에치슨 선언)에서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았다 고 밝히므로서 김일성과 스탈린, 모택동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한편 국군은 창설의 와중에서 북괴의 교란전술에 근거한 후방지역에서의 빨치산과 전투를 위하여 분산되어야 했으며 이 기간중 북괴군은 빨치산 2400여명을 남파시키고 38도선에서 무력도발을 격화시켜 국군의 증편과 교육훈련등 전력증강에 차질을 빗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1949년 병역제도를 지원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여 모병을 강화하면서 주한 미군철수와 관련하여 대미 군원교섭을 벌이고 있었으나 미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 남북한의 군사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가고 있었다.
1949 년 12월 27일 육군본부는 이러한 국내외 정세가 그대로 반영된 정보 종합보고을 작성하여 1950년 춘계에는 적이 전면적 공세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 하였다. 적정판단(1949 .12. 27) 의 일부 내용을 보면 "최근의 적정과 제반 정세를 종합하건대 명년(1950년)춘계를 계기로 적정에 급진적 변화가 예기되며 적은 그때까지 대 남한 후방교란의 기반획득과 내부 붕괴공작을 강행하여 남한 침공의 구체적 조건을 형성함과 동시에 전 기능을 총동원하여 전쟁준비를 급속도로 촉진시킨다음 38도선 일대에 걸쳐 전면적 공세를 취하고 일거에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할 것임." 이라고 적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차원에서 북괴의 남침을 경고하는 한편 미국의 군사지원을 획득하기위한 외교노력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38도선의 축성공사를 위한 국방예산 편성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었으며 또 웃지 못할 일은 미 대사관과 군사고문단이 한반도전쟁발발시 국군의 능력으로 침략을 격퇴할 수 있을뿐아니라 너무 강력해 북침을 할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 그러나 국방부는 이 정보판단서를 기초하여 이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계획수립을 서둘러 1950년 3월 35일자로 군 방어계획을 작성, 예하부대에 하달 하였다. 이 계획에 의하면 적의 주 공격축선을 철원 - 의정부 - 서울 측선에 지향되것이라고 판단하고 이에따라서 의정부 축선에 방어중점을 두고 적의 공격을 격파하여 38도선을 확보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때부터 실질적인 방어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때 육군은 8개사단규모로서 이중 4개사단 1개연대가 38선을 연한 전선에 배치되고 서울, 대전, 대구, 광주에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결국 북괴의 전략전술에 의하여 육군의 전력 운용마저도 후방지역작전을 위해 분산운용 되므로서 결국 북괴가 남침시 전투력을 집중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 국군의 방어준비는 참으로 어려운 여건하에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다. 북괴군은 1947년 7월부터 38경비대가 임무를 인수하여 38선상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경계진지를 완료한 상태에 있었고 국군은 이보다 2년뒤인 1949년 초에 들어서 미군으로부터 38선 경계임무를 인수하여 방어진지 구축이 진행되었으나 중요지형을 선점한 북괴군 38경비대의 방해가 극심하였으며 이는 무력충돌까지 겪게 되면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축성 공사자재의 부족은 계획만 있을뿐 실질적으로 진척이 지연되고 있었으나 호국의 일념으로 발벗고 나선 지역주민, 애국학생 및 대한청년단등의 노력 봉사로 인력만은 해결될 수 있어 오직 인력에의한 진지공사가 6월까지 많은 진척을 보였다. 그러나 지뢰, 철조망의 부족은 급조진지와다를 게 없었으며 특히 대전차지뢰와 방어수단이 전무한 상태로 훗일 북괴의 전차에 의한 돌파시 취약점으로 대두 되었다.
■ 이즈음 북괴군은 총 병력이 198,000 여명, 국군이 105,000 여명으로 2 : 1의 열세였으며 남침전날인 6월24일 그간의 비상경계태세 해제와 함께 실시된 장병외출에서 1/3병력이 외출한 것을 감안하면 실제 병력비율은 이보다 훨씬 열세에서 북괴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당시 북괴는 122밀리 신형곡사포(사거리 11,710 미터)를 포함하여 총 552문의 곡사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아군은 M-3 곡사포(사거리 6,525미터) 91문이 고작이었고 북괴는 이밖에도 세계최신형 T-34전차 242대, 전투기211대를 보유하고 있어 전차나 전투기가 한대도 없는 전투력의 비교가 않되는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북괴가 보유하고 있던 T-34전차는 소련이 제작한 세계 최신형전차로서 1950년 7월24일 대전전투에서 3.5인치 대전차 로켓이 사용되기 이전까지 이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지구상에는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연유로 5월 10일 국방장관 기자회견시 육군의 김백일 참모부장은 "북괴군의 장비는 군군보다 2-3배나 우세하며 더 많은 비행기, 전차 , 포,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다. 이같은 압도적 우세에 대하여 단순히 용기만으로 일을 치를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하여 국군의 현실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이에 안주하지 않고 전력증강에 전력을 하고 있었으나 이중 교육훈련을 통한 전투력증진노력이 배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북괴의 전략전술에 의하여 공비토벌작전을 비롯한 비정규전에 동원되므로서 부대별 지휘통제훈련을 포함한 조직적인 훈련이 불가능하여 전전까지 65개 대대중 25%인 16개 대대만이 대대훈련을 마첬을 정도였다.
■ 드디어 비극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육군은 그동안 계속되온 경계태세를 6월 24일 해제하고 중지되었던 외출, 외박 휴가를 실시하였고 모든 지휘관참모들이 긴장상태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비우게되었으며 육군회관 장교구락부 준공파티가 열려, 육군의 야전지휘관을 포함한 군수죄부 전체가 밤늦도록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때 정보실무자들은 38선상의 북괴군 활동을 분석하고 북괴군의 전면 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며 다음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를 근거로 이날 15 : 00 채병덕 참모총장 주관하 긴급 회의를 열었으며 이때 육본의 정보장교들은 이에대한 대책으로 비상경계령 해제를 즉각 중지하고, 즉시 휴가 및 외출을 중지할 것을 건의 하였으나 참모총장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추가적인 첩보수집을 요구하고 육군회관으로 술먹으러 갔으니 기습남침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조차도 무시되고 말았으며 육군의 주요지휘관 및 참모전원이 술에 취해 6월 25일의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 북괴의 기습남침과 충격의 새벽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가랑비가 소리없이 내리고 짙은 안개가 산골을 메운 아름다운 산하에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새벽의 고요를 깨고 충격의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밤새 적의 공격을 예고하는 징후가 고조 되더니, 1950년 6월 25일 01:00 옹진반도의 보병제 17연대로부터 인민군의 남하 상황보고를 시작으로 북괴의 전전선에 걸친 남침상황이 쇄도하기 시작하였고 이시간 02:00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한 주요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전달되고 있었으며 06:00에 가서야 전군에 비상을 발령하고 07:00에 KBS라디오 방송으로 북괴의 전면 남침공격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 그러나 북괴군의 남침소식을 알리면서 우리의 "10만국군이 건재하니 전국민은 염려말라"라고 발표하므로서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이후 국방부 정훈국이 중심이 되어 서울시내를 누비며 가두방송을 시작하였고 국민들은 충격속에서 새벽을 맞이 하게 되었다. 이무렵 북괴는 남침의 기습달성이 확실해지자 11:00경 평양방송을 통해 "북한 인민군은 자위조치로써 반격을 가하여 정의의 전쟁을 시작하였다."라고 간접적인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13:35에 김일성은 "남한이 북한의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하였으며 이는 북한의 반격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남침을 은폐하기위한 정치선전을 강화하고 있었다.
■ 이렇듯 북괴는 치밀한 계획하에 남침을 도발 민족사에 비극을 초래케하고서 이를 날조하여 조국해방전쟁이니 북침이니 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삼고 있으나 이를 알지 못하는 (아니 않은)일부의 좌경분자들이 이에 동조하여 북침을 주장하는 현실을 보면서 참으로 암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한편 이날 오전 10:00시 소련제 야크전투기 4대가 서울 상공에 출격하여 용산역을 포함한 시내중심부에 대한 기총사격과 폭격을 실시하여 서울시민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으나 국방부에서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옹진반도에서 복귀한 연햡통신의 기자가 국방부에 들러 "내가 옹진반도를 떠나올 때 제 17연대의 사기는 해주를 공격하고도 남을만 했다"라고 전하자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방부는 "옹진의 제 17연대가 해주로 돌입했다"라고 발표하므로서 국민들에게는 일순간의 안도감을 주었으나 이를 놓칠리 없는 북괴는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계기로 북침을 주장하고 있고 일부 좌경분자들 또한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북침논란을 빛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어찌됐든 북괴는 전전선에 걸쳐 소련제 최신형 전차를 앞세우고 공군 및 포병의 지원하에 파죽지세로 몰려오고 있었고 전선의 국군은 취약한 전투력을 가지고 육탄돌격으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용전분투 하고 있었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려내려 오고 있었다.
● 수도권지역 작전 ■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김일성은 수도서울의 장악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역사적교훈과 한반도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 서울의 조기 점령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북괴군 제 1군단은 연천.운천 - 의정부 -서울에 이르는 주공축선으로 전투력을 집중하고, 2군단은 춘천 - 가평 - 서울 및 춘천 - 홍천 - 수원 방향에 투입하여 수도서울을 양익으로 포위하고 조기에 점령 국군의 주요 전투력을 한강 이북지역에서 격멸하고 2단계작전을 수행하도록 전투력을 수도권에 집중투입 하였다.
■ 이에 북괴군의 주공이 지향된 의정부 북방의 국군 제 7사단은 1연대가 동두천 북방에서, 9연대가 포천 정면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으며, 3연대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전환되어 이동하고 온양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던 25연대가 예속되어 이동하도록 되어있었으나 아직 출발도 하지 못한상태에서 북괴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악전고투하면서 후퇴의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국방부는 왜 정보부서에서 북괴군의 남침이 임박했다고하는 정보판단을 수차례 제시 하였음에도 부대구조를 변경하여 가득이나 열세인 전투력을 절름발이로 만들어 초기에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선이 조기에 붕괴되도록 하였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차후 다시 논의 되겠지만 우리군은 유능한 정보인력을 양성하고 이를 기초로 전략을 수립하고 대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이에대하여 대단히 미흡할뿐아니라 어려운환경속에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판단한 정보를 무시하여 화를 자초하는등 우를 범하고 있어 안타까울뿐이다. 정보란 전장의 눈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을텐데 ....
■ 그러나 북괴군은 제 3, 4사단, 109, 107 전차연대를 집중투입하여 국군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전격전을 수행하여 가뜩이나 열세인 전투력중 일부에 대하여 유병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고 주요축선별로는 조기에 돌파되어 전 전선이 비 선형으로 붕괴되고 있었고 특히 적의 전차를 파괴할 무기가 없어 수류탄을 들고 육탄돌격으로 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조기에 전투력을 상실하고 포천 남방 퇴계원과 축석령일대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있었으며 이때 뒤늦게 수도경비사령부 예속으로 전환된 3연대를 원대 복귀시켜 포천방향의 9연대를 증원하도록 하였으나 3연대가 송우리 일대에 도착시 이미 적은 포천을 확보한 상태였으므로 송우리지역에서 저지진지를 편성 적의 공격을 저지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북괴가 남침한 당일 국군 7사단은 동두천과 포천, 송우리 일대까지 피탈되어 후퇴하므로서 의정부 방어마져도 위태로운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한편 개성 - 문산 축선에서는
국군 제 1사단이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북괴가 남침하기전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사단이 담당한 방어정면이 94km에 달하고 있어 이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임진강 남안으로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파주 남쪽 봉일천 일대에는 예비진지를 구축하여 대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괴군은 203전차 연대로 중강되 북괴군 1. 6사단을 투입,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이에 국군 1사단은 개성의 12연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임진강 남쪽진지로 철수하였으며, 13연대와 11연대가 신속히 전개하여 방어진지를 점령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북괴군은 임진강을 도하하기 위하여 임진강상의 경의선 철교가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므로 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속히 진출하였고 국군 1사단도 이를 간파하고 임진강철교 남안인 마정리 일대에 대전차포 중대등 전투력을 집중운용하면서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여 북괴군 전차를 저지하고져 준비하면서, 개성에서 철수중인 12연대의 철수을 엄호하기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12연대가 임진강 철교를 건너 철수하고 있을 때 이를 바짝 추격해오는 북괴군의 전차에 의하여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때 임진강철교의 폭파를 책임진 사단공병대대 3중대장이 행방불명되므로서 공병 대대장은 작전장교 에게 대신이를 폭파하도록 하였으나 철교에 설치된 폭약이 불발되므로서 임진강철교 폭파를 실패하고 말았다. 북괴군은 이틈을이용 임진강 철교를 이용하여 전차를 진출시키므로서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이사건은 이후 한강교를 폭파하는데 있어서 교량폭파 실패시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만을 지나치게 고려하므로서 혼란의 극치를 이루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 서해안의 옹진반도에서는
국군 제 17보병연대는 연대장 백인엽 장군 (당시 대령)이 남침 전날 북괴군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연대가 진지를 점령,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는 북괴의 전면 남침보다는 옹진반도에 대한 국부적인 공격을 예상하여 취해진 조치였으며 연대는 적이 옹진반도를 공격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저지 불가시 지연전으로 개성을 경유 철수하도록 계획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괴군 6사단 예하 14연대와 제 3경비 여단으로 기습공격을 실시하였으며 전차를 앞세워 연대의 중앙을 집중돌파하여 17:00경에는 연대가 동서로 양분되어 더 이상 진지를 유지할 수 없게되자 일부는 공세행동으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해군함정 및 민간선박을 이용 인천으로 철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훗날 백인엽장군이 이끄는 국군 17연대는 낙동강전선에서 보존된 전투력을 이용 위급시마다 이를 해결하는 소방수역할을 수행하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하는등 눈부신 활약으로 한국군의 우수성을 과시하게 된다.
■ 한편 육군본부에서는
재경부대들을 가장 위급한 의정부 지구에 투입하기로 하고 우선 수도경비사의 3연대를 7사단에 배속하여 포천지구로 투입하고, 이어 18연대(-)도 7사단을 증원토록하였으며, 8연대는 제 6사단에 배속하여 가평지구로 투입하였으며 서울 특별연대를 1사단에 배속하고, 육사생도대대는 포천동남방 내촌에 투입하였으며 포병학교 교도대대는 의정부 일대로 투입하였다. 또한 의정부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후방지역에서 이동하는 부대들을 의정부 지구에 투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대들은 서울에 도착하는대로 의정부지구에 축차적으로 투입하므로서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악어의 입으로 줄을 서서 들어가는 먹이꼴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적을 저지할 수 있는 후방의 예비전력마저도 조기에 소진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과정에서 국군 7사단장(유재흥 준장), 2사단장(이형근 준장)등은 현전선에 대한 반격작전이 불가함을 설명하고 한강이남으로 이동, 부대 및 전투력을 재편성한 후 방어에 임할 것을 역설하였으나 총참모장(채병덕 소장)에 의하여 묵살되었다. 뿐만아니라 신성모 국방장관은 KBS 라디오 방송에 출현하여 "침입한 적은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군은 차제에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민족의 염원인 국토의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일이 또다시 벌어지고 있었고, 이 방송으로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서울에 잔류하고 있던 수많은 학생, 시민등이 적의 수중에서 죽임을 당하고 납북되고 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전쟁터로 끌려나갔으니 이는 분명 단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 이렇듯 혼란을 거듭하고 있을시간 의정부 북방 축석령에서는 전선의 제 7사단이 이미 붕괴되어 철수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2사단 5연대(-)가 축석령에 반격작전을 위하여 도착해보니 7사단의 낙오병들만 우왕좌왕할뿐 그 어떤 부대도 없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동연대는 고개 정상을 좌우로 연하여 진지을 편성하고 급편방어에 들어갔으나 전차를 앞세운 북괴군의 공격에 단 10분도 안되어 의정부의 관문인 축석령이 무너지고말았으며 후속하던 부대들은 축석령에 올라오지도 못하고 지리멸렬 퇴계원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또한 16연대조차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의정부전선이 붕괴되었으며, 이과정에서 의정부 남방 금오리에 포진을 점령하고 있던 포병학교 제2교도 대대장 김풍익소령과 2포대장 장세풍 대위등이 105밀리 곡사포를 이용, 적전차를 사격하여 무한궤도를 파괴하고 제2탄을 장진하는 순간 적의 후속전차가 발사한 주포에 맞아 장렬이 산화하고 말았다. 이제 북괴군의 전차는 무적이었고 이 전차무리가 의정부를 완전점령하고 서울로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위기의 순간이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 이시각 국방부에서는 현역 및 원로급 군사경력자들을 모아서 작전지도방안을 논의 하였다. 이 자리에서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군은 의정부 북방에서 북괴군을 반격하고 있으며 전황은 유리하게 조성되고 있다"라고 보고 하였으니 과연 이돈키호테들을 어찌하여야 좋을지.........
또한 대부대작전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장군인 참모학교장 김홍일소장은 "작전지도 방침의 조기 확정, 의정부정면에서의 공세이전의 위험성경고, 한강이남에서의 결전"등을 주장하고 이에 김석원, 이범석등 군원로 들도 이에 동조 하였으나 이또한 돈키호테에 의하여 묵살되었으니 마지막 기회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 그러나 문산지역에서는
백선엽장군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은 비록 임진강 철교폭파에 실패하여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임진강남안의 천연단애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적을 저지하고 있었으며, 전방에 출현한 적전차를 저지하기 위하여 81밀리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급조폭탄을 제조하여 특공대를 편성 적전차에 뛰어들었으며, 비록 전차를 파괴하지는 못하였으나 겁을 먹은 전차가 진출을 포기하고 퇴각하는 전과를 거두어 사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접 7사단이 조기에 붕괴되어 동측방이 노출되고 북괴의 전차를 앞세운 공격에 의하여 전선이 붕괴되자 문산 남쪽 위전리 - 도내리선의 1번 도로축선에서 저지 진지를 점령하고 금촌, 봉일천일대에서 축차적으로 적을 저지하면서 가용한 전투력으로 봉일천일대에 역습을 실시하는등 적의 주력을 방어하고 있었으나 의정부축선, 김포축선이 조기에 붕괴되어 퇴로가 차단될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그래도 희망은 있다. 춘천 - 홍천 지역에는
중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제 6사단은 춘천에 7연대, 홍천북동쪽에 2연대를 배치하고 19연대를 예비로 원주에 배치하여 전방을 방어하고 있었다. 북괴의 남침이 있기전 6월19일 생포한 포로진술과 화천, 양구일대에서 수집된 정보를 분석한 사단장은 적의 전면적 또는 국지적 도발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사단 자체로 경계조치를 취해 두고 있었다.
북괴군은 제 2군단으로서 중, 동부지역을 공격하여 당일에 춘천을 점령하고 서울의 동측방을 포위하기 위하여 이천 - 수원방향으로 공격하도록 계획하고 2사단을 화천 - 춘천전방에, 독립전차연대로 증강된 12사단을 인제 - 홍천 축선에 투입 강력한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공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북한강 도하를 위하여 신포리축선으로 진출하면서 SU-76자주포를 앞세워 모진교(현재의 오월교부근)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국군 6사단은 춘천의 관문인 이 모진교 폭파계획을 세우지 않아 폭 4M에 불과한 이작은 교량 때문에 47km에 달하는 제 7연대의 방어선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더구나 고탄리 의 38선으로부터 춘천시 외곽까지 병력이 배치되어있지 않아 적은 손쉽게 춘천 외곽인 역골, 지내리 일대까지 일거에 진출하고 말았다.
비록 38선에서 조기에 방어선이 붕괴되기는 하였으나 신속하고 질서정연하게 후방의 계획된 주저항선인 소양강 방어선을 점령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 하는 한편 소련제 SU-76자주포를 전차로 오인한 장병들이 긴장하고 있는시기 대전차포 중대 2소대장 심일 소위(그림은 춘천 102보충대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심일소위 흉상이며 이 도로는 심일로로 명명되었다.)는 옥산포일대 도로변에 대전차 특공조를 편성하여 대전차포와 육탄공격으로 자주포 2대를 파괴하자 무명 164고지일대에서 이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병들은 일제히 함성을 울렸으며, 이후 6사단 장병들은 적의 전차도 파괴할 수 있다는 신념과 공포심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적의 전차를 맨손으로 가장많이 사냥한 부대가 되었다. 북괴군은 초기전투에서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춘천일대에 준비된 진지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에 임하고 있는 국군 제 6사단을 가볍게 보고 경망스럽게 부대를 운용하여 그들 스스로가 자멸의 길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38선을 쉽게 돌파 하였을 뿐 아니라 춘천 외곽까지도 쉽게 진출하게 되자 국군을 과소평가하고 춘천을 단숨에 탈취할 목적으로 포병화력을 집중하면서 옥산포와 신동일대(현 신매대교 부근)의 개활지를 밀집대형으로 접근해오고 있었고 이를 사단의 16포병대대와 대전차포 중대의 화력지원하 집중공격을 퍼부었고,소양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옥산포 및 신동, 우두동일대(현 소양 2교 일대)의 개활지와 강변에 북괴군의 시체로 메워젔으며 강물을 붉게 물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북괴군은 공격당일 춘천까지 점령하라는 군단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무모하게 공격을 해 왔으며 용감한 6사단의 장병과 경찰, 학생, 시민이 혼연 일체가 되어 이들을 소양강변과 옥산포일대 개활지에서 완전히 격멸하는 전과를 달성하였다.
한편 사단 동측을 담당하고 있는 홍천지역의 국군 6사단 2연대는 6월24일까지 8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였으므로 장병들이 작전지역의 지형에 대하여 잘모르는 상태하 북괴군의 전면 남침 공격을 받게 되었다. 2연대의 정면에는 북괴군 제 12사단으로서 양구 - 신남 - 홍천 축선을 전차로 증강된 주공을 , 인제 - 현리 축선에 조공을 투입하여 기습적인 공격을 가 하였다. 다행히 전날 비가많이 내려 소양강의 마노진 나루터 가 도섭이 불가하여 아군에게 유리한 장애물로 활용되었다. 마노진 나루터일대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경계부대는 적의 공격을 2차례나 격멸하고 진지를 사수 하였으나 3차 공격에서 적의 집중적인 포병사격으로 피해가 속출하고 실탄마저 고갈되어 철수하므로서 방어진지가 돌파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연대의 장병들이 작전지역의 지형에 어두어 북괴군의 남침직후 진지점령을 지시하였으나 산간소로에서 길을 잃고 헤메이는등 진지점령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연대는 진지를 정비하고 혼란을 수습하였다. 연대장은 대전차 특공조를 편성하기에 이르렀고 5중대 1소대장(강승호 소위)이 20명의 특공대를 편성하여 어론리 북쪽 다무리 고개부근 고개에서 적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를 집어넣고 2.36인치 대전포로 공격하여 선두 전차 2대를 파괴 하였으며, 후속하던 전차 8대는 후방으로 도주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고무된 연대장은 역습으로 북괴군을 격퇴하고 진지를 회복하기위하여 포병의 지원이 없는 상황하에서 역습을 실시하였으나, 북괴군의 강력한 반격에 의하여 많은 피해를 입고 철정리 일대로 철수하여 말고개일대에 저지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연대장은 말고개의 지형이 주는 잇점을 활용 적의 전차를 격멸하기로 하고 종심깊은 대전차 격멸지대를 운용하도록 방어준비를 하였다.
이때 전선에 큰 변화가 있었다. 북괴군은 최초 공격시 공격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이천 - 수원 방향으로 진출하여 수도서울의 동측방을 포위하여 주공의 작전에 기여하고 조기에 서울을 점령하도록 계획하였으나 춘천 점령은커녕 춘천에 투입된 북괴군 2사단이 괴멸되어 더 이상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게되자 홍천방면으로 투입된 북괴군 제12사단의 2개연대와 전차중대를 춘천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춘천방면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나 홍천방면은 소강상태가 되었고 이에 2연대장은 적의 공격준비를 방해하기위하여 파쇄공격을 가하였고 이작전에서 기습의 달성으로 적 200여명을 사살하고 차량 5대 분량의 보급품을 파괴후 복귀하므로서 장병들의 사기가 매우높아젔다. 북괴군 12사단(-2)는 새벽 안개가 걷히자 전차와 자주포 10대를 앞세우고 병력을 가득실은 수십대의 차량으로 기계화 부대를 편성하여 단숨에 2연대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고저 연대의 방어진지정면으로 공격을 해왔다. 연대는 이때를 기다려 준비된 살상지대내에서 적에게 집중적인 사격을 실시 전차와 보병을 분리시키고 57밀리 대전차포를 이용하여 적전차를 공격하였으나 전차는 끄떡도 않고 전차의 주포사격에 대전차포 포수이하 전원이 전사하자 대전차 특공대가 전차에 뛰어 오르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 또다른 57밀리 대전차포 김학두 일등중사가 적 자주포의 측면에 명중시키고 2탄 3탄을 계속 명중하여 멈춰서자 뒤따르던 전차와 충돌하면서 정지하게 되었고 이를 본 19연대(사단예비로 춘천 동측방방호를 위하여 새로이 투입됨) 대전차 특공조원 조달진 일병이수류탄을 들고 1번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투척하고 뛰어내렸다. 잠시후 굉장한 폭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이호기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전차에 뛰어올라 10대의 전차 및 자주포에 공격을 가하여 이를 파괴하고 도주하는 전차병을 전원사살함으로서 개전후 최대의 전차 격멸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방어진지에서 이를 보던 19연대장이하 전장병이 서로부등켜안고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특공대장 조달진 중에서) 이 전투는 보병이 급조한 무기로서 전차를 파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으며 이후 전투에서 전장병들이 적 전차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고 자신감을 갖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시 춘천으로 가보겠습니다. 전날 북괴군 12사단의 2개연대를 춘천지역에 추가로 투입하여 소양강 남안의 봉의산에 대한 공격과 소양교( 현 소양1교)를 확보하기 위하여 포병화력을 집중하여 공격을 해왔다. 그러나 국군 6사단장은 홍천에 투입되었던 북괴군 12사단의 2개 연대가 추가로 투입된 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만약 홍천방향이 돌파될 경우 사단의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예비인 19연대를 말고개 일대로 전환배치하였다. 이때 통신이 두절되었던 육군본부와의 통신이 이루어졌으며 서부전선이 완전히 붕괴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육군 본부가 시흥으로 철수하니 사단장의 판단에 따라 중앙선을 중심으로 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기 바란다"라는 전문을 접수 하였다. 이때서야 전선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한 사단장은 북괴군이 이천 - 수원방향으로 포위를 시도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판단되어 19연대를 홍천으로 전환시키고 7연대로서 춘천방어를 당담토록 하였다. 사단장은 아무리 전선상황이 급박하여도 춘천시민과 행정기관이 피난을 위하여 24시간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춘천 시민, 경찰, 애국청년및학생등의 지원을 받아가며 결사항전을 실시 진지를 사수하다가 적전차가 소양교를 도하하여 7연대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이날 17:30분경 원창고개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점령하였다. 최초 24시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48시간 이상을 지연하고 북괴군 2사단을 격멸하여 12사단이 추가투입되도록 하므로서 북괴군의 최초 공격계획이 좌절되도록하는 전사상 빛나는 전공을 세웠으며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후 3일동안이나 추가적인 공세행동을 하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로 되었고 이에 분개한 김일성은 북괴군 12사단을 해체하므로서 현재까지 북괴군에는 12사단이 없다.
■ 동해안의 강릉지역에서는
국군제 8사단이 2개연대로서 38선에 10연대를 배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21연대를 예비로 삼척에 배치하여 38선 경계 및 북괴가 남침시 강릉을 고수한다는 방어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6월중순부터 침투한 북괴군의 유격대를 토벌하기위하여 연대별 1개대대씩을 차출하여 오대산, 계방산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어 북괴가 남침하였을 때에는 사단이 가용한 부대는 2개연대(각각 2개대대)뿐이었다. 이는 북괴가 전면 남침을 하기전 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사전 침투하는 전술에 입각한 것으로, 결국 북괴군의 의도대로 전투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한편 북괴는 제 5사단을 양양 - 강릉의 해안도로 축선에 투입하고 제 766부대 (부대장 전 인민군총참모장 오진우)와 549육전대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으로 상륙시켜 국군 21연대의 전방 증원을 차단하고 이미 침투하여 백두 대간일대에서 활동중인 유격대와 연결하여 북괴군 2군단의 작전을 지원하도록 운용하였다. 북괴군 5사단은 공격준비사격과 더불어 38선을 넘어 주문진으로 진격을 개시하였으며, 국군은 북괴군의 대량포병화력에 경계진지가 순식간에 붕괴되어 저항한번 못해보고 저지진지로 후퇴하고 말았다.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리에서는 이날 04:00경 수많은 북괴군이 나타나 마을 주민들을 강제동원하여 마을 옆 해안의 수송선에서 탄약과 보급품을 뒷산으로 운반기키고 마을 뒷산에서는 호를파고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괴군은 최초 선발대가 경비중이던 경찰 1명을 사살하고 기습상륙을 하였으며 이상황은 이 마을의 대한 청년단원에 의하여 안인진지서에 신고하므로서 군/경부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상륙한 부대는 1개부대는 강릉방향으로 북상하고 1개부대는 옥계방향으로 남하하였으며 이후 07:00경 임원진에 상륙한 766부대는 1개부대는 태백산맥의 산악으로, 1개부대는 삼척으로 각각 투입되었다. 강릉비행장에 사령부를 둔 국군8사단장은 전방의 경계부대가 순식간에 붕괴되고 강릉후방에는 북괴군의 유격대가 대규모 상륙하였다는 보고를 접수하고 우선 10연대가 전방의 적을 최대한 저지시키고 21연대가 강릉을 방어하도록 하며 사단 예비대를 공병대대로 임시편성하는 한편 육본으로 1개연대의 추가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육본에서는 서울방어가 더 위급하다. 사단장재량권에 따라 최선을 다 하라'라는 전문을 접수후 통신이 두절되었다. 이에 사단장은 북괴군의 단순한 국지전이 아닌 전면남침으로서 장기전이될 것으로 판단하고 이날 오전 10:00에 작전지역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군수품을 대관령넘어 진부리로 소산시키며 군/경 가족과 공공기관을 후방으로 피난 및 소개시키도록 준비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지역 주민들은 군을 믿고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 강릉학도호국단 산하 1400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탄약 및 보급품을 운반하고 환자를 구호하며 연락임무까지 수행하여 군, 관, 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북괴의 만행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사단의 적절한 조치는 지역주민들에게 신뢰를 주고 군은 지역주민들의 도움을 받으므로서 국민의 군대로서 전사에 남게 되는 계기를 마련 하였다. 한편 사단은 2개연대로 편성된 감편부대로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하여 사단 공병대대를 신예비대로 편성하였다고 전술한 바 있는데 이 공병대대가 연곡천 주저항선의 진지를 점령하므로서 공병이 보병전투를 수행하는 최초의 기록을 전사에 남기기도 하였다.
북괴군의 유격대가 해안에 상륙하였다는 보고를 접수한 10연대장은 57밀리 대전차포 중대와 11개 보병중대를 강릉 남쪽 안목 - 안인진일대로 급파하여 마침 상륙을 시도하던 북괴군 유격대의 선단을 발견하고 화력을 집중하여 격퇴하였으며 대포동일대에 진지를 점령하고 북상하던 북괴군 유격대 1개중대 규모를 격멸하므로서 위급한 상황은 벗어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있던 21연대가 강릉방향으로 이동을 하려고 준비중에 연대의 수색대와 경찰, 대한청년단이 북평 북방에서 수색중 북괴군 유격대 1개 중대규모와 조우, 기습으로 이를 괴멸시키고, 정보를 수집결과 밤재 일대에 1개 대대규모의 북괴군 유격대가 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연대는 삽당령방향으로 우회하여 다음날 10:30분 경에야 군선강 방어진지를 인수 할 수 있었다. 사단장은 예하부대가 점차 안정을 되찾고 일부 유격대를 격멸하는등 전과를 올리자 이에 힘입어 38선 회복을 위한 역습을 계획하게 되었으며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자원한 사천면 대한 청년단원 40명을 정보수집에 운용하고, 부인회와 청년단에서는 야전 취사장을 설치하여 군/경들에게 주먹밥을 곧급하므로서 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북괴군은 다음날인 6월 27일 새벽 4시 국군 8사단이 공격을 개시하기 1시간 전에 먼저 대규모의 포병사격과 함께 사단의 전 정면에 공격을 개시하여 국군 8사단의 공격계획은 무산되었으며 기습을 당한 일부부대가 조기에 진지를 상실하여 측방이 노출되므로서 이를 알지 못하는 인접부대는 북괴군이 진출하는 것을 아군이 공격을 위하여 이동하는 것으로 오인 하여 돌파를 허용하므로서 조기에 방어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사천선에 증원되어 투입된 21연대3대대는 분산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고속으로 진출하는 적을 저지하므로서 일단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이과정에서 18포병대대는 적이 주저항선까지 쇄도한 후에도 필사적인 화력지원을 실시하므로서 주저항선에서 철수한 병력이 사천선에서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으나 이후 밀려오는 적의 공격대열이 포병진지에 까지 이르르자 영거리사격(포병의 직접조준 사격방법)으로 대응하는 한편 전요원이 소총, 야전삽, 곡괭이등을 들고 적 보병들과 백병전을 별여 이를 물리첬으니 참으로 전사에 길이 빛날 이이었다. 그러나 상급부대와 통신두절로 지원은 물론 상황조차도 파악할 수 없게된 사단은 현전선에서 무모한 전투는 전투력의 낭비만을 초래한다고 판단하고 일단 대관령일대로 전투력을 복원하여 반격을 실시하기로 결심하고 이날 14:00에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후 북괴군은 21:50분경 강릉을 점령하였으며 이때 이미 강릉의 주요 관공서와 주민들이 완전히 소개된상태였으므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 국군 8사단은 철수후 전투력을 재편성한 결과 사단의 전투력이 건재하고 장병들의 전의기 높음을 알고 강릉을 탈환할 목표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으며 다음날일 6월 28일 아침에 공격을 개시하여 강릉 교외까지 진출하였으나 마침 원주로 철수한 6사단과 극적으로 통신이 이루어져"원주로 철수하라는 " 육본의 명령를 수령하여 대관령으로 철 수 하였다.
● 수도 서울의 실함과 한강교의 비극 ■ 북괴군의 최초 남침시 수도서울을 조기에 점령하기위하여 문선축선, 의정부축선, 그리고 춘천에서 동측방을 차단하는 3개방면으로의 진격으로 크게 나누어있었으나 춘천에서 국군 6사단과 춘천시민들의 용전에의하여 북괴군 2사단이 괴멸되고 12사단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3일간이나 춘천을 점령하지 못하므로서 좌절되었고, 국군의 수도서울 방어작전은 의정부 축선의 작전과 문산축선의 작전으로 압축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문산축선에서는 국군 1사단이 초기 임진강철교를 포파하지 못하여 고전하였으나 이후 월롱(위전리-도내리), 봉일천, 벽제 - 고양리 등 축차적으로 적의 공격을 지연하면서 임시편성되어 증원되는 부대들을 이용 공세행동으로 적절한 지연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정부 축선에서는 국군 7사단이 조기에 붕괴되고 국군 2사단의 조기축차투입 및 군수뇌부의 돈키호테식 시황관으로 점점 암울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수도 서울고수라는 전략을 수행하기 위하여 나머지 모든 예비전력마저도 서울에 도착하는대로 서울 북방으로 축차적으로 투입, 계속적인 전투력의 낭비만을 초래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육군 총참모장은 국군 7사단장(유재흥 준장)에게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부여하고 국군 2사단, 포병학교 교도대대, 육사 생도대등 이방면에 투입되어 분산된 잔여 전투력을 통합 지휘하도록 하고 "창동 - 우이동"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후 후방에서 이동중에 있는 3, 5사단을 투입 반격작전으로 실지를 회복한다는 작전계획을 하달 하였다. 그러나 문산방면의 국군 1사단이 봉일천후방으로 철수하고 김포반도로 북괴군이 도하를 시도하자 수도 서울의 고수라는 작전지도 지침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날 심야에 군 수뇌연석회의 에서는 육군은 철수를 계속할 경우 마지막에는 게릴라작전으로 최후까지 항전하고 해/공군은 이를 협동 지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망명정부 요인의 수송을 담당한다는 전쟁지도지침을 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듯 위급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왜 전투력을 재편성하여 가장 방어력 발휘가 양호한 한강선에서의 결전"이라는 선택은 하지 않았는지 의문시되며 이후 발생한 비극에 대하여 당시 군 수뇌부의 무능함을 다시한번 탓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북괴의 김일성이 수립한 전쟁의도에 너무나 합치하도록 그래서 김일성이 추구하는 한강선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소멸하겠다는 계획에 맞추어 부대를 운용해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심야에 국무회의를 열어 육군총참모장의 수도서울 고수 호언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이때에도 시민의 소개나 한강교의 폭파등은 대책이 없었다. 이후 국회에서는 정부가 수원으로 옮기더라도 국회는 서울시민과 더부어 수도를 사수 한다고 결의 하였다. 그러나 한강교가 폭파되기 이전까지 시민과 함께한 정치인은 한사람도 없었다. 국방부에서는 6월 27일 새벽 5시경 작전회의가 열려 신성모 국방장관이 수도서울 포기를 발표하자 국방부 제 2국장 이선근 대령은 100만 학도를 동원하더라도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고 책상을 치며 역설하였고 결론적으로 정부가 이동하더라도 군은 서울을 고수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시간 경무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길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06:00에 가서야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한다고 발표 하므로서 서울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저 들어갔고 증원부대를 포함한 작전차량의 이동및 대이동이 마비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0:00경 창동선 마저 힘없이 무너지고, 미아리선에서 재차 저지선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시각 육/해/공군 본부가 수원 및 시흥으로 이동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시각부터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한강의 교량파괴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당시 한강에는 한강대교, 철교3개소, 광진교가 파괴대상이었으며 이때또한 시민의 소개/피난 , 전방부대들의 철수등 대비 계획은 전현수립되지 못하고 다만 공병 보트 18척을 이용 후퇴병력을 수송한다고만 언급하였으니 비극을 예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육군본부는 극비리에 시흥으로 철수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시각 미국의 지원을 예고 하는 소식이 미 군사고문단 장 대리 라이트(W.H.S.Wright)대령으로부터 답지하자 육군본부의 이동을 중단하고 다시 용산으로 복귀하게 이르렀다. 이시각 창동지구에서는 국군 2사단 25연대가 대전차 특공조를 운용 적 전차 3대를 파괴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여 북괴군 3사단의 진격을 일시 저지할 수 있었으나 새벽부터 재개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북괴군은 전차 및 자주포 40여대를 앞세우고 도봉산과 수락산 어간의 넓은 회랑을 유린하고 있었으며, 국군 2, 3, 7사단 및 포병학교 교도대, 육사 생도대등이 용전 분투하였으나 이또한 힘없이 붕괴되고 미아리 - 회기동 선에서 재차 저지진지를 점령하였다. 이때 국군 5사단이 전방으로 증원되어 미아리 - 회기동선에서 방어준비중 창동선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 하여 수도서울 방어를 위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북괴군은 창동선에서 심대한 피해를 입었음인지 공격을 중단 하여 잠시 소강상태가 이루어 졌으며 이틈을 이용 국군은 방어준비를 강화하고 있었다.
6월 27일 밤 폭우가 집중되는 가운데 북괴군 전차 10여대가 기마정찰대를 앞세우고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적의 선두전차를 파괴하므로서 겨우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24:00경 전차를 앞세운 적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혼전이 발생하였으며 국군은 이를 막아내기위하여 육탄으로 최후까지 저항하였으나 적의 전차2대가 길음고개일대로 진출하므로서 서울의 최후저지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 한편 봉일천방면의 국군 1사단은 북괴군 1, 6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15연대 3대대는 1번도로(현 통일로)상에 종심깊은 대전차 격멸지대를 설치하고 특공대를 조직 대대장과 중대장이 직접 특공대를 인솔하고 북괴군의 전차에 뛰어올라 전차 6대를 파괴하니 비록 적전차에 의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되었고 북괴군의 공격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날밤 폭우속에서 전차를 앞세워 대규모 공격을 실시하였고 국군은 봉일천방향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육본에서 파견된 김홍일 소장(작전지도 반장)은 1사단장 에게 창동방향의 전황을 설명하고 우발사태에 대비 한강도하 철수 준비를 권유하였으나 사단장은 총참모장에게 건의 해줄 것을 부탁하고 현전선에서의 서울 고수를 위한 작전에 최선을 다할 것임을 표하였고 이후 28일 아침 연락기로부터 "현방어선을 사수하라"는 총참모장의 명령을 연락통으로 수령하였다. 따라서 1사단장은 이미수립해 놓은 반격명령을 하달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11연대는 북괴군 6사단을 격퇴하고 위전리 - 도내리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으나 인접 13연대는 북괴군 1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치루면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고 사단에서는 양개연대의 간격을 증원된 서울 특별연대 및 20연대 3대대로 하여 확보하므로서 사단 전술지휘소에서는 주 저항선의 회복이 실현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한가닦 희망을 갖기 시작하였다.
■ 한강교의 비극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미아리 축선에서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전차가 서울로 진입하게 되자 국군은 더 이상 조직적인 방어력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보고를 접수한 총참모장 채병덕은 공병감에게 한강교를 폭파 하라고 명령하였다. 명령내용은 6월 28일 01:45분경 "지금 적전차가 시내에 들어와 싸우고 있다.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 그리고 자신(총참모장)은 전투지휘를 일선지휘관과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맡겨둔채 용산을 떠나 시흥으로 이동(본인은 도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을 해 버렸다. 공병감은 임진강철교 폭파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공병학교장(엄 홍섭 중령)에게 준비토록하였으며 공병학교장은 남한강파출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황원회 중위, 이창복 중위에게 폭파임무를 부여 27일 15:30까지 5개의 한강교량에 폭파준비를 완료하였다. 공병감은 총참모장으로부터 적의 서울시내 진입 2시간전에 교량을 폭파하도록 지시를 받아 27일 16:00경 폭파가 가능하도록 준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육군본부가 시흥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용산으로 이동하므로서 열차 및 차량의 원활한 통과를 위하여 제거하였으나 전방상황의 악화로 27일 23:30경 재차 폭파 준비명령을 받게되자 재차 폭약을 장전하였다. 한편 육군본부에 도착한 전방부대 지휘관들은 '전방의 병력이 철수명령이 없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병력이 철수한 후 폭파할 것을 요구"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이 이를 전달하기 위하여 한강폭파지휘소인 남한강파출소로 향하고 있었으나 피난민으로 인하여 한강 이북은 완전 마비가 되어있었고 작전국장은 혼란의 와중속을 이동중에 굉음을 듣고 한강교가 이미 폭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공병감은 28일 02:20분경 공병학교장에게 폭파를 명령하였고 공병학교장은 황원회 중위에게 장약 점화를 명령하였으며 이때 현병과 경찰이 피난민의 교량진입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통제가 불능하였다. 이때 부통령 이시영의 차량이 통과하면서 10여대의 차량이 꼬리를 물고 통과하므로서 혼란이 가중되는 속에서 점화신호와 함께 한강 인도교에 이어 3개의 철교에서 굉음과 함께 불꽃이 치솟아 인도교에 있던 차량과 피난민등 500 -800 여명이굉음과 함께 한강으로 희생되었으니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철교는 완전히 폭파되지 않아 훗일 북괴가 이를 이용 전차를 도하 시킴으로서 지연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고 광진교는 이보다 1사간 30분 뒤에 폭파되므로서 또다른 비극을 낳고 있었다.
여기서 본인은 채 총참모장에 대하여 무능이전에 배신감마저 느끼게 되고 훗일 문제가 야기되자 공병감을 비롯한 실무장교들을 문책하므로서 자신은 책임을 회피하였으니 천인공노할 일이다. 서울시민과 전방에서 철수하는 부대들의 피난로와 퇴로를 차단하여 시민과 전방에서 철수중인 국군의 차량, 보급품, 기관총이상의 모든 화기 및 탄약등을 고스란히 북괴군에게 넘기거나 파괴하여 사용할 수 없도록 하므로서 김일성에게 가장큰 공을 세운 채 총장은 훗일 총참모장에서 해임된후 전사 하였으나 그의 무소신과 무능은 역사적으로 지탄받아야 할것이다.
■ 한강교는 폭파되었어도
국군은 수도서울을 최후까지 사수하기 위하여 서울 시내에서 적전차를 맨몸으로 막아내며 용전분투하고 있었으니 참 군인의 호국정신을 어찌 잊으리.......
남산에서는 참모학교 소속 이용문 대령이 철수하는 병력을 모아 백호부대라는 별칭을 부여하고 최후까지 항전하다 산화하였으며 일부 생존자는 뒷날 유격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서울대학 병원에서는 경비소대가 마지막까지 적을 저지하다 전원이 장열히 산화하였으며 청량리, 용산 , 중앙청등 에서는 대전차 특공조를 편성하여 적전차에 뛰어들어 장열히 산화하는 장병이 속출하였고 이결과 북괴군은 서울방어선을 돌파하고도 10시간이 경과한 후에 겨우 한강선에 도달하였으니 ...........
이렇듯 치열한 육탄전이 진행되고 있을즈음 전방에서 철수하는 장병들은 훗일를 기약하며 눈물을 뿌리면서 광나루, 마포, 행주나루, 이산포 등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적은 뒤쫓아 오고 교량을 파괴되고 도하장비도 없는데 군의 수뇌부는 벌써 한강을 건너 도망가 버리고 한강에 도착하여 드넓은 한강의 푸른 물결을 보는 장병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삶의 기로에서서도 오직 반격으로 서울을 되찿겠다고 굴하지 않고 사용가능한 모든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헤엄으로 한강을 건너고 또 건너고 있었다.
이때의 암담한 심정을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저서 "군과 나"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월 28일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되고 육군 본부가 수원으로 이동했으며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한 사실을 알길이 없는 나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흘동안 주야의 격투에 진친 아군은 봉일천선을 지탱하고 있었고 ...(중략) 부상자를 후송하러간 앰블런스가 그냥되돌아오고 탄약보급을 받으러갔던 군수참모 가 빈트럭인채 돌아와 암담한 소식을 전했다. 녹번리까지 들어가보니 적이 벌써 .....(중략) 사단의 반격작전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중략) 나는 반격을 중지하도록 명령하고 황급히 수백미터를 후퇴해서 곡릉천다리곁 제방으로 사령부 요원들과 함께 이동했다. 때마침 서쪽하늘에는 미공군 폭격기가 날아와 사단 좌익부대에 폭격을 하고 있었다. 분명오폭이었다. 나는 내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중략) 연대장 참모장 및 참모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나흘동안 잘 싸워주었다. 그러나 오늘아침 서울이 함락됐다.......(중략) 사단은 전력을 다해 온전한 상태로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자 목표는 우선 시흥 보병학교다, 거기서 재집결하자, 만약그곳이 여의치 않으면 지리산으로 가자 지리산에서 농성하며 게릴라가되어....."
이렇듯 전방의 지휘관들은 최후까지 용전분투하면서 백척두에선 조국을 구하고저 일념에 불타 어떻게 하든 전투력을 보존하고 한강을 도하하여 한강이주는 방어의 호조건을 이용 북괴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져 의지를 부태우고 있었으니 그들이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에서 또 거룩하게 희생되어 산화한 호국령령들을 역사와 민족의 가슴에 깊이 새겨두기 위하여 본인은 이글을 적고 있다.
● 결론적으로 전쟁의 발발과 초전 3일간의 전투를 분석해보면 ■ 첫째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창군과정의 혼란기에서 국가안보에대한 준비 보다는 국민적 정서가 동포라는 개념하에서 피상적인 대비에 그치므로서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북괴의 남침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였었다. 창군의 혼란과 북괴의 대남전략전술에 의하여 전쟁이전 이미 전 국토가 전장화 되었는데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제주, 여수, 순천, 대구등에서 발생한 빨치산의 무장폭동 및 군 내부 공산분자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후 군내에 침투한 공산분자를 색출하기위한 숙군 노력은 전면전 발생시 내부반란이나 이에 준하는 일체의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므로서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 둘째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과 군의 수뇌부는 위에서 제시된사항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보신과 안일로서 국민들의 고통만을 가중시켰다. 군대의 눈이 정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군인이 정보를 경시한다면 이는 눈에 뵈는 것없이 날뛰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전면전이 발생하기 훨신이전부터 군의 정보책임자들은 북괴의 남침음모를 인지하고 수차례에 걸처 이를 보고하고 대책수립을 건의 하였으나 번번이 무시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야전부대 지휘관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비하므로서 없는살림을 가지고 최후까지 용전분투하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 셋째 우리는 전쟁발발전 발생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왜 이러한 일련으 조치가 남침시기와 때를 맞추어 취해졌는가 의문스럽다.
(1) 먼저 남침일자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육군회관 장교구락부 준공 및 밤샘 술파티이다.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야전지휘관을 포함한 군 수뇌부와 참모학교장교까지 한데 어울려 북괴가 전면 남침을 위하여 부대를 전방으로 이동시키고 있을 때 밤샘술파티를 열고 있었다니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너무도 의구심을 가중시킨다. 왜일까 ?
(2) 북괴가 남침을 위한 최종작전회의를 하고 있을시간 국군은 새로이 취임한 채총참모장에의하여 전방 8개사단장 및 육본의 주요참모에 대한 인사를 단행하므로서 야전지휘관들은 예하부대와 작전지역의 지형조차 숙지하지 못한 상태하에서 북괴의 남침을 받게된다. 특히 그동안 군의 작전적차원의 대비태세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강문봉 작전국장을 경질하여 대기발령을 낸 것또한 우연의 일치라기보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초치이다.
(3) 정보부서에서는 정확하게 북괴의 공격기도를 파악하고 육본의 북괴남침대비 시한부 계획을 추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곳이 바로 의정부 정면을 방어하고 있는 7사단의 전력보강 및 방어력 증강분야였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6월 13일 7사단의 예비인 3연대를 수도경비사로 예속변경하고 충주 온양에서 후방작전을 수행중인 2사단 25연대를 7사단에 예속하므로서 25연대는 부대이동도 시키지 못하고 7사단은 예비가없는 상태에서 북괴군의 주공이 집중된 의정부전선에서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한번 못하고 붕괴되고 만다. 또한 수도경비사 예하의 2연대는 홍천북방의 6사단 8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수도경비사로 이동중에 있었으며 후발대가 출발하기도전에 남침을 맞이 하였다. 이또한 우연의 일치인가 ?
(4) 북괴는 최신형 소련제 기동장비로 무장되어있고 국군은 미군의 2차대전당시 사용중이던 노후된 기동장비로 무장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3월부터 이 기동장비마저 입고정비를 위하여 전체 기동장비의 35%를 회수하고 이어서 나머지 1000여대의 차량에 대한 일제검사에 착수 북괴가 남침했을무렵 전후방 각부대의 기동력은 거의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5) 이것에 부가하여 소총을 제외한 공용화기 일체를 정비한다는 명목하에 전군의 공용화기 30%를 회수하여 부평의 병기창으로 후송하였다.
(6) 또한 중대 - 대대급에서 보관 및 사용중이던 축적 1: 5만의 군사지도를 뚜렸한 이유도 없이 100%회수하여 북괴가 남침시 최초작전간 지도 한 장 없이 전투를 치루어야 했다.
(7) 뿐만아니라 북괴의 5, 6월 남침 및 위기설이 정설화되고 모든 정보관계자들이 이를 경고 하였으며 대통령도 이를 경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6월 23일 24:00부로 그간 45일간의 경계태세를 해제 하고 예하 장병들에게 그동안 밀렸던 외출, 외박 및 휴가를 실시토록 하므로서 전방부대의 병력 약 1/3이 출타하여 휴일을 즐기고 있을시간 북괴는 전면남침을 가하였다.
(8) 육본에서는 50년도 예산에 전방사단의 축성 및 방어력보강을 예산편성을 국회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되었으며 5월 위기를 인식하고 재차 긴급예산편성을 건의 하였으나 이또한 5월30일 선거를 위하여 국회가 열리지 못하여 상정되지도 못하고 묵살되었다.
이와같이 정부와 정치권, 육군의 수뇌부에서는 우연의 일치라기 보기에는 너무도 조직적으로 상반된 제반조치를 취하므로서 국가의 운명을 혼란과 위기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왜일까 ???
■ 넷째 왜 국방부 장관과 총참모장은 수도서울에 대한 사수능력도 없으면서 그많은 군원로들의 한강선 방어의 잇점을 이용한 전선조정 및 재편성으로 차후반격을 요구하였는데도 이를 묵살하고 큰소리만치다가 국군의 주요전투력을 한수이북으로 몰아넣은뒤 한강교를 폭파하고 강남으로 도망을 간 것일까 ? 만약 전방부대의 정상적인 한강도하만 이루어졌어도 이후 지연전양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 또 서울시민들을 강릉의 8사단처럼 조기에 소개시켰더라면 시민들로부터의 불신보다는 협조를 얻어 교통통제, 피난민통제등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오늘날과같은 이산의 아픔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민족이 5천년의 역사를 어찌 이어왔는가 ? 북괴의 남침이 있기전부터 애국청년단 및 학도호국단등은 맨주먹으로 삽을 들고 전방으로 노력봉사를 나와서 그나마 무개호/무자재의 진지를 핵심지역위주로 구축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북괴가 남침을 하자 국군의 작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므로서 다시한번 민.관.군이 한덩어리로 뭉쳐 민족의 저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특히 춘천, 강릉일대에서는 민, 관, 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북괴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고 공세행동으로 적에게 많은 피해를 가하므로서 북괴의 최초 공격계획에 차질을 갖도록 하였으며 이후 지연작전간 잘보존된 전투력을 이용 용전분투하며 위기때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출하였으며 훗일 북진작전의 선봉역할을 하였다. 뿐만아니라 처음본 괴물 소련제 최신형전차(T-34 전차 : 그당시 최신형전차로서 아직 이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음)를 보고 처음 공포에 질렸으나 이후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육탄돌격하여 전차를 파괴하므로서 북괴군전차운용에 제한을 주었으며 1992년 러시아에서 공개된 군사고문단 보고문서에도 이를 기록하고 북괴군의 전차운용을 비판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채 국가의 기반이 다져지기 전에 공산주의라고하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공산주의자들의 한반도 공산혁명기지화라는 엄청난 음모앞에서 맨주먹으로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조국의 소중함을 느끼고 이를 지켜나가기 위하여 강물로 표현할만큼의 피로서 대가를 지불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가안보는의 민족의 존망과 직결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의미에서 오늘날 병역비리등을 보면서 암담함을 느끼고 이를 일깨우기위하여 본인은 이글을 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