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 귀농 희망자의 살 곳 찾기 (안병서/귀농통문)

[여진]

세 귀농 희망자의 살 곳 찾기 / 안병서

1997년 1월 9일 오전 9시 30분, 임기문 씨, 김홍진 씨,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충청도와 전북 지역을 4∼5일 예정으로 돌아보기 위해 강남고속버스 터미널 앞에서 만났다.

첫 행선지는 홍성군 홍동면 주형로 씨 댁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농사지을 땅을 보러 다니는 것이다. 임기문 씨는 그 동안 꽤 여러 곳을 다녀 본 모양이다. 이번엔 확실히 결정을 짓겠단다. 김홍진 씨는 바로 며칠 전에 홍성과 창녕을 갔다 왔는데 그 때 부인인 박남정 씨가 살집과 농사지을 땅을 확실히 봐 놓지 않으면 집에 오지 말라고 했단다. 내 일은 아니지만 왠지 기분 좋게 들렸다. 나는 충남 연기의 김두섭 씨 농장 겸 요양원에 들어가기로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기 때문에 땅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귀농하기 전에 바람이나 쐬겠다는 생각이었다. 고속도로는 비교적 잘 뚫렸다.

내가 지도책 가지고 오는 것을 깜빡 잊었기 때문에 홍성에 도착해서 먼저 지도책을 샀다. 그리고 서천의 이필형 씨에게 전화를 해서 하루 묵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쾌히 승낙을 받았다. 경비를 최대한 아끼기 위해 될 수 있으면 잠 잘 곳은 아는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먹는 것도 상황에 따라 직접 해 먹을 수 있도록 버너와 코펠을 준비했고 쌀도 가져갔다.

홍동면으로 가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운동장을 둘러보고 주형로 씨 댁을 찾아갔으나 주형로 씨는 없었다. 이기영 씨도 없었다. 우리가 제분소로 갔을 때 마침 주형로 씨가 다른 곳에 갔다가 트럭을 몰고 왔다. 사실 전화도 미리 하지 않고 불쑥 찾아왔는데 아주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셨다. 악수를 했을 때 굳은살의 촉감이 아주 좋았다. 방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고 바깥으로 나와 주형로 씨의 안내로 직접 땅을 둘러보았다. 빌려 지을 수 있는 땅도 보여 주었다. 이곳에 정착하겠다는 결심만 확고하다면 농사지을 땅과 집터 마련을 도와주시겠단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한과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무에 관심이 많은 임기문 씨가 이 곳에 나무 기르는 사람도 있는지 물어 보았다. 있다고 했다. 자꾸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아, 나와 김홍진 씨가 더 늦으면 서천에 어두워서야 도착할 것 같다면서 일어나자고 했다.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아 미안했다. 따뜻한 환대에 고마워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서천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고 이필형 씨가 일러 준 지름길로 갔다. 몇 번 헤맨 끝에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에 도착했을 땐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길에는 눈이 덮여 있었다. 인가도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전화할 곳도 없어 막막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에게 혹시 안경 끼고 머리를 뒤로 묶은 이필형 씨를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 새로 이사온 그 젊은 양반!" 하면서 길모퉁이를 돌아 한 번 더 물어 보라고 했다. 길모퉁이를 도니까 바로 마을이었고 멀지 않은 곳에 불빛이 띄엄띄엄 보였다.

길모퉁이 첫 번째 집에서 이필형 씨 집을 물어 보니 건너편에 보이는 불빛 중 하나란다. 그 쪽으로 가니까 랜턴 불빛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직감적으로 이필형 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알고 나오는 것일까?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자 저쪽에서 "안병서 씨?"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농희망자 송년회 이후 한 달여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집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연기가 자욱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임기문 씨는 연기 냄새를 맡으며 구수한 냄새라고 했다. 부인이 외출 중이라 서천 읍내로 나가 이필형 씨가 사 준 저녁을 먹고 왔다. 이제 뜨뜻한 구들방에서 궁둥이 지지면서 막걸리 마시며 이야기하는 일만 남았다.

이 집은 빈집이었는데 작년에 허물어진 벽을 벽돌로 쌓고 안으로 합판을 댔단다. 그리고 신문지와 잡지로 초벌 도배만 했다. 그래도 거꾸로 붙인 종이는 하나도 안 보였다. 거꾸로 붙여도 아무 상관없는데. 갑자기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저녁 먹고 마을회관으로 모이라는 방송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경운기 보조금 받는 것 때문에 모이라고 했는데 신청자는 많고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다. 땅값을 물어보니 싸지가 않았다. 방바닥도 따뜻한데다가 몇 잔 마시니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술만 마셨다 하면 곧 잠이 든다. 먼저 쓰러져 잤다.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꽥꽥거리는 요란한 소리도 들렸는데 칠면조였다. 바깥으로 나와 보니 어젯밤에 느꼈던 것보다는 넓은 계곡이었다. 바로 아랫집도 빈집이었다. 아침을 먹고 차를 계곡 위쪽으로 몰고 가 이장 집에 들렀다. 나온 땅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없단다. 정미소 앞을 지나며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놓은 땅이 있는지 이필형 씨가 물었는데 역시 없단다. 마을 어귀까지 나와 이필형 씨와 헤어졌다. 서울 계시는 어머님이 상당히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고서도 우리를 맞기 위해 상경을 하루 미룬 것 같았다.

부안으로 달렸다. 도중에 김제 평야를 지났는데 정말 넓었다. 이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부자겠다 하는 예전에는 떠오르지 않던 생각을 했다. 놀부가 제비다리 부러뜨리고 나서 먹는 것은 수제비요, 좋아하는 짐승은 족제비라더니 귀농하겠다는 결심하고 나니 땅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안 시내로 들어가 길 한편에 차를 세워놓고 임기문 씨가 어느 건물 안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벼룩시장 신문을 몇 부 들고 왔다. 이런 곳에도 벼룩시장 신문이 있는지 몰랐다. 셋이서 하나씩 펴 들고 부동산 광고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임실, 진안 쪽에 매물이 많이 있었다. 넓고 싼 땅이 나올 때마다 신이 나서 표시를 해 두었다. 임기문 씨가 공중전화로 가서 팔려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 보았으나 연락이 되는 곳이 별로 없었다.

오늘은 변산을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개암사로 갔다. 개암사 들어가는 길 양편으로는 전나무가 시원스레 뻗어 있었고 산꼭대기엔 우금바위가 보였다. 개암사에 들어서니 우리 외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아주 조용했지만 쓸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한번 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차 안에서 빵과 우유로 점심을 해결했다.

변산반도를 남서쪽으로 돌아 운산리로 가기로 했다. 도중에 마을이 보이면 마음 내키는 대로 들어가 보았다. 처음 들어가 본 마을에는 빈집이 굉장히 많이 보였고 도대체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길을 따라 쭉 들어가 보았으나 가축우리엔 쇠줄에 묶인 개만 날뛰며 맹렬히 짖어 댔다. 눈 덮인 밭에는 열무가 이파리가 아래로 처진 채 그대로 있었다. 그 곳을 나와 다시 길을 달리다 반계 유형원 선생 유적지 푯말을 보고 한번 구경해 보기로 하고 마을로 들어갔다. 넓은 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 끝에 이르렀다.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시기에 말을 붙여 보았다. 임기문 씨가 우리는 농사짓기로 결심하고 땅을 보러 다니는 중이라고 했더니 아주머니께서 "젊은이들이 워째 그런 이쁜 생각들을 가지고 있어" 하면서 몹시 반기시면서 "사실 살다 보니께 금방 가. 뭐 그렇게 악착같이 살 필요 없어" 하셨다. 이 마을에도 빈집이 여기저기 보였다. 이 동네 땅은 주인이 서울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몇 해 전에 멋모르고 마구 팔았단다. 빌릴 땅은 많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장 댁과 자기 아들네 집을 가르쳐 주었다. 임기문 씨는 전화번호 적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날씨도 추운데 아주머니를 붙들고 30여분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아주머니께서 오히려 바깥에다 세워 놓고 얘기를 했다며 미안해 하셨다. 임기문 씨는 이 곳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 동네 이름은 감불이었다.

다시 차를 몰아 운산리로 향했다. 낮에 부안에서 운산리 실험학교에 하룻밤 묵을 수 있겠느냐고 전화를 했는데 확답을 듣지 못했고 윤구병 선생님도 계시지 않다고 했다. 운산리에 들어가 다시 전화를 했는데 허락을 받지 못했다. 결국 마당 구경만 잠깐 하고 다시 나왔다. 작년 11월에 4박 5일간 일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쉬움이 더욱 컸다.

전주로 향했다. 임기문 씨에게 전주에 잠잘 만한 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누님이 살고 계시다고 했다. 운산리를 나올 때 날은 이미 어두웠다. 전주 시내에서 누님 댁에 전화를 했는데 전화가 안 되는 모양이다. 여관에서 자기로 했다. 여관을 잡고 나서 저녁을 먹었다. 근처 가게에서 막걸리를 사려고 했더니 없었다. 임기문 씨는 꼭 막걸리를 사야겠다며 먼저 여관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김홍진 씨와 TV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임기문 씨가 영 오지를 않았다. 참다못해 근처 가게에서 맥주 2병을 사다가 마셨다. 꼭 한 시간이 지나 막걸리를 들고 임기문 씨가 나타났다. 여행을 같이 해 보면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정말인 것 같다. 임기문 씨가 오늘 벼룩시장 신문에서 본 광고 중 평당 오천원 짜리 만오백 평 임야를 팔겠다는 사람하고 내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단다. 그 전화한 것을 빼고는 막걸리를 찾아 헤맨 것이다. 나는 혹시 여관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다음날 우리는 약속 장소로 급히 차를 타고 나갔다. 약속 장소엔 땅주인이 지프차를 몰고 나와 있었다. 그 차를 뒤쫓아 진안으로 달렸다. 모래 재를 오를 때 왜 터널을 뚫지 않았는지 궁금해 하니까 임기문 씨가 꼭대기에 올라가 보면 알 거라고 했다. 가파른 고갯길을 한참이나 오르고 정상 가까이서 아래를 내려보니 지형이 험준했다. 전라도에도 이렇게 험한 곳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 정상에 올라 진안 쪽으로 달려 보니 아까 품었던 의문이 풀렸다. 진안 쪽으로는 거의 경사가 없었다.

지프차가 멈춘 곳에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암 마이봉과 숫 마이봉이 앞산 위에 걸려 있었고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공기는 차고 보이는 것은 온통 하얀 눈이었다. 땅주인을 따라 눈길을 걸어갔다.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 내가 앞질러 갔다. 오랜만에 눈길을 걸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얼마 가지 않아 곧 방죽과 경사진 밭이 나타났다. "야, 좋은데" 하는 우리들의 탄성은 주인이 올라와 자기 땅을 가리켜 주었을 때 곧 실망의 소리로 바뀌었다. 맞은편이 아주 가파른 경사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저히 만오백 평이 되어 보이지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보았던 경사진 밭은 마을 사람이 주인인데 금을 줘도 팔지 않는다고 했단다.

방죽 위의 논 천오백 평은 주인이 네 명인데 그것은 살 수가 있다고 한다. 평당 만육천 원씩 해서 이천사백만 원인데 사백만 원은 깎을 수 있단다. 자기 땅은 평당 오천 원씩 오천만 원인데 천만 원은 깎아주겠단다. 그래서 모두 육천만 원이면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임야는 아랫부분에 천여 평 정도만 개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임기문씨는 논을 더 둘러보았다. 다시 차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잘 생각해서 혹시 살 의향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하고 아저씨는 먼저 떠났다. 우린 진안 읍내로 나와 라면과 저녁 때 먹을 것을 샀다. 다시 차를 몰아 점심해 먹을 만한 곳을 찾으며 이 계곡 저 계곡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 계곡으로 들어갔는데 아주머니께서 눈길을 걷고 계시기에 태워 드리겠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계곡 끝에 살고 계시는데 자기 걸음으로는 한 시간 걸린다면서 아주 고마워했다. 좁은 계곡이 끈덕지게 이어져 갔고 집들이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이곳으로 시집와서 여태껏 산다고 했다. 마을 이름을 물으니 어은동이란다. 거의 마을 끝에 이르러 아주머니를 내려드리고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그런데 이 궁색해 보이는 동네에 이상하게도 빈집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농사지을 땅도 얼마 보이지 않았고 집들은 양편 경사진 곳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한편 길가 경사진 곳에 밭이 있는 것이 보였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경사가 60도쯤은 되어 보였다. 어떻게 이런 곳에 밭을 일구었는지 정말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말이 절로 입에서 나왔다.

조금 더 내려오니 2.5톤 트럭이 길을 막고 있는데 눈길에 꿈쩍을 못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이 삽을 가지고 와 바퀴 밑의 눈을 치웠으나 소용이 없었다. 젊은 운전기사가 벌써 집에 들어가 쉴 시간이라며 투덜거렸다. 우리 셋이 밀어 보겠다고 했다. 셋이서 밀었더니 곧 차가 움직였다. 오늘은 좋은 일을 벌써 두 번 했다. 계곡 중간쯤에 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곳이 있었다. 김홍진 씨가 올라오면서 점심 먹을 곳으로 봐 둔 곳이다. 그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꼭 등산 온 기분이 들었다. 그 계곡을 나와 장수로 갔다. 장수에서 복덕방을 찾아 들어갔다. 농사지을 땅을 물어 보니 평당 삼만 원 이상이라고 했다. 싼 땅을 물어 보니 임야를 사서 개간을 하는 방법이 제일 좋다고 했다. 다시 전주로 차를 몰아갔다.

이틀째 차를 타고 돌아다니니 몹시 피곤했다. 운전은 김홍진 씨와 임기문 씨가 교대로 했다. 운전을 할 줄 모르는 나는 표지판 보는 역할을 했다. 전주 시내를 지나 임기문 씨 누님이 사시는 시 외곽으로 갔다. 누님과 매형이 농사를 짓고 계시단다. 마을로 들어서는데 손에 물건을 든 아주머니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태워 드렸는데 임기문 씨를 알아보았다. 임기문 씨 누님 댁에 들어서니 매형과 누님께서 맞아 주셨다. 전주 시내에 사는 손자들이 다섯이나 와 있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서 조금 있다가 고기를 배불리 구워 먹고 소주도 몇 잔 마셨다. 손자 녀석들과 묵찌빠를 하고 여러 가지 장난을 치며 재미있게 놀았다. 잠자리에서 옛날 이야기를 해주고 끝말 이어가기를 하다 잤다. 태희라는 녀석 잠버릇이 보통 고약한 것이 아니었다. 재희 배를 베개 삼고 두 다리는 벽에 걸쳐놓고 자다가 아침에 깨기 직전엔 무릎 꿇고 엎드린 자세로 잠을 자고 있었다.

1월 12일, 일요일이다. 교회를 가시려고 깨끗하게 차려 입고 준비중인 누님댁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누님댁 땅을 잠시 둘러보았다. 주로 담배 농사를 한단다. 여산 휴게소에서 연기의 김두섭 원장께 전화를 해서 오늘 저녁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살림집 연구소에 전화를 했더니 박찬교 씨가 산행을 가고 없다고 해서 내일 오전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먼저 흙살림연구소를 찾아가려 했으나 {귀농통문}을 전주에 두고 오는 바람에 연락처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에 가 보았던 제월분교를 찾아갔다. 그러나 제월분교엔 아무도 없었다.

괴산 읍내로 나와 복덕방을 찾다가 칠성 부동산이라는 곳을 들어갔다. 농사지을 땅을 물어 보니 두 군데를 이야기해 주었다. 직접 구경해 보기 위해 차를 타고 현장엘 갔다. 첫 번째 땅은 도로에서 바로 보이는 곳으로 작은 계곡 입구에 있는 땅이었다. 그러나 땅값이 만만치 않았다. 두 번째 땅은 바로 찻길에 접한 땅이었는데 지대가 도로보다 낮았다. 그 곳은 농사보다는 장사하기에 알맞은 곳으로 보였다. 다시 복덕방으로 오면서 복덕방 아저씨에게 괴산댐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작년에 흙살림연구소에 숙박교육 갔을 때 황인태 원장이 자신이 귀농할 곳을 안내했었는데 그곳이 괴산댐 뒤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 가 보려고 하는데 동네 이름이 생각나지를 않았다. 칠성면 외사리라고 했다. 그리고 괴산댐 뒤에 만평 정도 공짜로 농사지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빈집도 있다고 했다. 작년에 왔을 때 강 건너편에 넓은 밭이 아주 인상적인 곳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을 말하는 것 같았다.

칠성 부동산에 아저씨를 내려 주고 우리는 외사리로 갔다. 댐을 지나 밭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강물은 얼어 있었고 강 건너 마을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지도에 보니 그 마을 이름은 '산맥이'였다. 길 위에서 라면을 맛있게 끓여 먹었다. 서울과 경기도 번호판을 단 차들이 계곡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황인태 원장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서울에서 별장 지을 곳을 보러 그곳에 많이 온다고 한다. 물가로 내려가 보았다. 경치가 그만이었다. 다시 올라왔는데 임기문 씨가 물가로 내려가는 넓은 도로로 내려가 보고 오겠단다. 한참 있다가 올라왔는데 과수원과 창고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속리산 쪽으로 바라본 경치가 설악산 뺨친다고 했다. 이곳에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임기문 씨는 보는 곳마다 좋다고 한다. 이제 오늘 자야할 곳인 연기군 영대리 청룡안으로 가야 한다.

금강을 건너 대평리에 도착해 가게에 들러 1.8ℓ짜리 막걸리 한 병을 사고 영대리 가는 곳을 물었다. 작년 12월에 임기문 씨와 둘이서 청룡안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버스를 타고 갔다. 길눈이 어두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평리에서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곳이다. 영대리에 도착하니 오후 7시 35분이었다. 이제 청룡안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어 능선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도대체 대낮에 오르내린 길을 모르냐고 하면서 김홍진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능선길을 계속 가면 김두섭 씨 농장 바로 위의 산길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계속 갔으나 중간에 움푹 파인 곳이 있어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잘못 찾아든 곳까지 내려와서야 작년에 눈보라 맞으며 올라오는 길에 봐 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농장에 도착하니 8시 10분이었다. 걸어서 올라오는 시간보다 더 걸렸다. 방문을 여니 김두섭 원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김치 두부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김맹수 씨와 이충세 씨였다. 인사를 나누고 우리도 바로 술을 마셨다. 김두섭 원장이 나더러 "총각 아저씨 여기서 한 1년 같이 살아 보지요" 하는 말에 그럴 생각이라고 답했다. 세 사람은 서로 '야', '너' 하면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니 아주 친한 모양이다. "서울 같은 데서 어떻게 사는지 몰라. 나는 숨이 막혀서 못살 것 같아." "맹수야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지 마라. 우리 마누란 여기만 오면 머리가 빠개질 것 같단다." 김두섭 원장의 이 말에 우린 한바탕 웃었다. 사실 복잡하고 사람 많은 곳 싫어하는 나도 강원도에서 군 복무할 때, 때로는 서울의 종로 뒷골목이 한없이 그리워지곤 했다.

땅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졌을 때 김두섭 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처음부터 꼭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살다 보면 처음에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곳도 좋아지는 수가 있고 반면에 사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땅을 나중에 사서 살다 보니 싫어지는 경우도 있단다. 김맹수 씨는 장길섭 정농회 사무국장과도 잘 안다고 했다. 바로 어제 연기군 전의면 달전리에 귀농할 땅을 사기로 계약했단다. 한편 이충세 씨는 우리살림집연구소의 박찬교 씨와 함께 일을 했었단다. 김두섭 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이충세 씨도 일어났다. 나는 잠이 와서 옆에서 잤다.

김맹수 씨와 임기문 씨, 김홍진 씨는 소주를 계속 마시면서 새벽 2시까지 얘기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아침에 일어나 산너머를 둘러보았다. 강아지 두 마리가 따라나섰다. 산너머엔 호박을 심을 예정이라는데 땅은 충분해 보였다. 다시 농장으로 오니 같이 살고 계시는 아저씨가 방금 잡은 산토끼를 모가지에 줄을 매단 채 들고 왔다. 바로 아랫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저놈의 산토끼 농약을 뿌려 씨를 말려야 해" 하니까 김맹수 씨는 "같이 살아야지요" 한다. 이름과는 영 딴판이다. 아주머니는 산토끼가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문제에 대한 판단은 내가 농사를 짓고 토끼 때문에 피해를 본 다음에 하기로 했다. 김 원장이 잠깐 얘기를 하자고 해서 방에 들어갔다. 같이 살아 보자고 한 어제의 얘기를 확인하고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아침을 먹고 김 원장은 서둘러 출근을 했다.

오늘은 먼저 김맹수 씨가 산 땅을 구경하기로 했다. 김맹수 씨와 이충세 씨가 동행을 해 5명이 움직이게 되었다. 김맹수 씨가 자리잡은 곳은 국도에서 한참이나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다시 왼편의 작은 계곡으로 올라갔다. 상당히 오래 묵은 땅인 것 같았다. 여름엔 칡넝쿨 때문에 올라오지도 못할 거란다. 햇볕이 아주 잘 드는 곳이었다. 이충세 씨가 집 지을 만한 곳과 방향을 말해 주었다. 그곳을 나와 김정덕 할머니를 찾아갔으나 인터뷰 중이라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의 버섯 재배 농가를 방문하기로 했다. 어제 이야기한 재주 많고 빈틈없다는 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아 그냥 위치나 알아둘 겸 일단 가 보기로 했다. 국도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고 평지였다. 멀리서도 버섯 재배사가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가니 차가 보였다. 아마 주인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운 좋게도 마침 주인이 집에 도착한 시간에 비슷하게 맞추어 방문한 것이다.

자그마한 조립식 주택과 버섯 재배사가 앞에 여섯 동, 뒤로 네 동이 질서 있게 서 있었다. 통성명을 하고 버섯 재배사를 구경했다. 이름은 김광호라고 했다. 두 동엔 지금 느타리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나머지도 곧 종균 접종을 할 것이란다. 30평 짜리 버섯 재배사 열 동을 모두 부인과 같이 직접 지었단다. 용접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스스로 터득했단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지으니 인건비가 절감되고 높이도 자기 체형에 맞게 할 수 있었단다. 우리는 햇볕을 한껏 받고 있는 조립식 주택에 들어갔다. 곧 술상이 차려졌다. 김광호 씨는 느타리 재배만 7년을 했다고 한다. 그 동안 많은 노하우를 축적한 것 같았다. 자기처럼 오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1년에서 3년 한 사람이 제일 많다고 한다.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이 된다.

버섯 재배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종균과 버섯 키우는 재료에 있다고 한다. 접종 시기가 지난 종균을 사용할 경우 실패한단다. 그런데 종균을 파는 사람들이 시기가 지난 종균을 파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김광호 씨는 자신이 직접 종균 배양을 하겠다고 한다. 그는 낚시를 하러 왔다가, 지금 사는 곳은 아니지만 그 장소가 마음에 들어 바로 귀농을 했다고 한다. 그 동안 고생도 많이 했단다. 처음 자기 땅을 마련했을 땐 왜 빨리 해가 뜨지 않을까 하고 해 뜨기만 기다렸다고 한다. 깜깜한데 나가서 일하면 동네 사람들한테 미친놈 소리 들을까 봐 나가지는 못 하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기존 주민들과 사귀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새로 귀농한 사람이 자기보다 아는 것이 많고 돈이 많으면 싫어한다고 한다. 임기문 씨가 여기 와서 버섯 재배 기술 좀 배울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낮술이 얼큰하게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우리살림집연구소를 방문하기로 했다.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도착하니 그 곳은 바로 단재 신채호 사당과 묘소가 있는 곳이었다. 오래 전부터 와 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오게 되었다. 사당에 모셔놓은 영정이 한복 차림인 것이 이채로웠다. 그 얼굴 모습은 원래 상해 망명 중에 중국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의 모습이다. 참배를 하고 나서 담배를 좋아했던 단재를 생각하며 끊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신채호 선생은 많은 일화를 남긴 분이다. 임정 시절 김규식에게서 영어를 배웠는데 발음엔 신경 쓰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Neighbour란 단어를 태연히 '네이그흐바우어'라고 읽었단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렇게 읽으면 안 되고 '네이버'라고 읽어야 한다고 하니까 그건 영국인의 법인데 내가 그것을 꼭 지킬 필요가 무엇인가라고 했단다. 어조사 '也'자를 빼 먹었다고 신문 연재를 중단했고, 미물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고 해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소매를 다 적시며 세수를 했다고 한다. 금강산 단풍 구경보다는 차라리 고비사막의 삭풍을 맞겠다던 단재. 사당 뒤의 묘를 둘러보고 떨어진 비닐봉지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우리살림집연구소는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어제 전화로 오늘 오전에 들르겠다고 했기 때문에 오전 내내 기다렸다고 한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다. 마당에 장작불을 피우고 석쇠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물론 술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귀농 희망자 한 사람이 얼마 전에 도움을 받으러 와서 집을 하나 소개시켜 주었는데 산다고 했다가 결국은 사지 않았다고 한다. 1.8ℓ 짜리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마셨다. 안양에 사는 김맹수 씨는 자신이 아파트 열쇠를 가지고 오는 바람에 부인이 이웃집에 있다고 한다. 김홍진 씨는 집안 제삿날이라고 한다. 이충세 씨는 초상집에 가야하고. 경기도에 들어서니 제법 비가 내렸다.

**안병서 － 귀농학교 1기. 전북 진안군 동향면으로 귀농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귀농통문 2호 (1997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