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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인의 박카스
이원우
첫머리에/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가 말했다. 자서전 출판기념회장에서였다던가?
"'그녀'는 일본말 '카노조' 찌꺼기예요. 특히 작가분들이 '그녀'를 선호하는데, '그녀'를 '그'로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그가 저세상으로 간 지 수년이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존재한다. 말석에 앉은 작가로서 불행으로 생각한다. 본 졸작의 주인공은 여자다. 해서 인칭대명사 '그녀' 의 함정이 군데군데세 도사리고 있어서 고심을 거듭했다. 물론 필자는 당연히 '그녀'를 버렸다.
<성경>에는 '그녀'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안 나오는 것이다. '그녀'를 없애는 방법이 없을까?
참고로 덧붙인다. 김대중은 가톨릭, 이희호는 개신교 신자였다.
전 정부에서이긴 하지만, 일본식 표현을 줄이겠다고 공언을 했다.
첫째 <'----적>은 분명히 일본 냄새가 난다. 줄이도록 교과서부터 손대겠다.
둘째 <---으로 인하여>도 마찬가지. <--으로 말미암아>로 하겠다.
셋째 <---에 대하여>도 이하 동문.
초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면밀히 검토해 보지 않았으니 모르겠다만, 문재인 정부의 현주소가 사뭇 궁금하다. 가톨릭 신자로서 고민이 있다. <성령으로 인하여-->는 고쳐야 할 기도문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 마리아께 잉태하여 나시고>
나는 몇 가지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도 불편함을 못 느끼니 다행이다. 성당에는 '말미암아'로 조용히 기도한다.
박카스는 웬만한 사람은 아는 그대로, ‘주신(酒神)’즉 술의 신이다. 도로에 나가서 다중(多衆)에게 물어 본다 치자. 박카스를 마신 경험이 있는 사람? 성년(成年)이라면, 거의 백퍼센트가 고개를 끄덕이리라. 술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국민이 상당수에 이르다 보니, 그에 비례하여 박카스도 그만큼 방방곡곡에서 팔려나간다.
편의점에서도 박카스가 상당한 매상을 올린다는 얘기가 있다. 오죽하면 말이다. 하루 만 원 어치도 팔리지 않는, 스무남은 가구가 사는 시골 마을의 이름뿐인 구멍가게도 예외가 아니란다. 박카스가 떡하니(?) 진열대에 얹혀 있으니…. 이럴진대 박카스 공화국! 우리는 거기에 살고 있다는 푸념이 어찌 아니 나오랴.
여기 얼추 수십 년간이나 박카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아니 떨어져 본 적이 살아 온 길순 씨가 있다. 길순 씨는 기나긴 동안 ‘박카스 타령’과 더불어 지냈었다. 여기서 ‘타령’이라 함은, 그거 아니면 못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에 그 박카스가 길순 씨로 하여금 교육계에서 정년까지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기가 막힌다. 게다가 교육의 꽃이라는 교장 승진을 앞두고 거의 타의에 의해 사표를 던졌던 터, 속속들이 그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연민의 정을 길순 씨에게 던지고말고. 개중에서 몇몇이서 쯧쯧, 혀를 찰 것임은 불문가지 아니겠는가?
길순 씨는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서너 병의 박카스를 마셨다. 어찌 박카스뿐이랴. ‘원비 D’나 ‘영진구론산바몬드’ 따위 등 비슷한 성분을 함유한 것은 마다하지 않았다. 길순 씨는 우리말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지나치게 따지기 예사였으니 박카스를 손에 한 병 쥐고서,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면서.
“뭐야, 피로 회복제? ‘피로 해소’나 ‘피로 퇴치’ 해야지, 피로가 회복되다니, 피로가 도로 가중(加重)된다는 뜻인데….내가 이걸 죽자 사자 마셔대다니 정말 괴이한 일이네. 나라꼴도 말이 아니야. 국어학자는 도대체 무얼 하고 지내는지….침대는 가구가 아니라며 기세를 떨치는 세상이라, 그들이 몸부림쳐도 역부족일 터. 피로 퇴치제 혹은 피로 해소제로 고치는 게 어렵긴 하겠지.”
어쨌든 그러면서도 길순 씨는 절망의 선언을 했었다.
“아, 죽을 때까지 이걸 끊기 힘들리라!”
길순 씨와 박카스(다른 피로 해소 음료 포함)와의 끈질긴 악연(惡緣), 그건 짧은 듯하면서도 길다.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사뭇 복잡하다. 몇 번을 곱씹어도 예사롭지 않아,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세상에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킬 정도? 글쎄다.
길순 씬 가끔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중독(中毒)?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바르게 사물을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사전에 풀이해 두었네. 아 참, ‘생체가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덧붙여 놓았고. 한데 왜 하필이면 가운데 ‘중(中)’일까? 차라리 ‘무거울 중’을 써서 ‘중독(重毒)’이라 했다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줄 수 있었을 것을, 쯧쯧. 그러니 말인데 일찍 그랬었다 치면, 난 박카스 중독까지 가지 않았을 거 아냐? ‘가운데 중’ , ‘마음 중’, '치우치지 아니할' 중! 세종대왕도 내 말에 동의할지 모르지.”
길순 씨의 이 허황된 말에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게 뻔하다. 다만 몇몇은 동의할지도 모르니, 길순 씨더러 중(中)과 (重)을 바꿔치기 하자는 주장을 송두리째 접으라는 건 일종의 강권(强勸)이다. 예까지라면 길순 씨가 박카스 중독자의 삶을 살았었다는 지레짐작을 어지간한 사람은 하고도 남으리라. 다만 그 귀추 혹은 결말은 누구나 주목할 만하다고 하자.
그런데 세상은 요지경이다.
길순 씨는 새로 시내 변두리로 이사한 지 서너 달이다. 얼마 전까지 남에게 전세를 주었던 서른대여섯 평짜리 아파트다. 큰 병원 하나가 이웃해 있어서 약국이 성업 중인데, 그 중 하나를 길순은 단골로 삼아 자주 드나든다. 중소 규모인 이 약국의 대표 약사가 동향 출신이라서 인연을 맺은 거다. 박카스라니 몸서리쳐지는 과거사가 있으면서도, 재미 삼아 한 병씩 마시기도 한다.
그런데 길순 씨는 거기서 충격보다 더 큰 충격인 어떤 사실을 접한 것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공포 시대쯤 우습게 여기는 한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다. 할아버지는 개근하다시피 약국에 거기 들르는데, 그때마다 박카스 한 병씩을 사 마신다는 거다. 그분에게 실례일지 모른다는 전제를 하곤 약사가 하는 말.
“절대 밖에서는 마스크를 하지 않아요, 할아버지는. 약국에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하지만, 밖에 나가기 무섭게 그걸 벗어 호주머니에 집어넣지 뭐예요. 교감 선생님께만 말씀드리지만, 할아버지는 약간 인지 장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스크를 외면하면, 코로나 감염될까봐 염려스럽지 않아요?”
“그게 수수께끼입니다. 그런 차림으로도 일 년 내내 감기 한 번 안 걸리는걸요. 그리고 굉장히 자존심이 강합니다. 옷이 초라하다고 얕보았다가는 큰코다칩니다. 한 번은 바로 옆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할아버지에게 바리스타가 경로사상을 실천한다고 그냥 가랬더니 불같이 화를 내라는 겁니다.”
그런데 더욱 놀랄 할아버지와 관련된 믿기지 않은 일화(?)를 소개한다. 방송국의 ‘세상에 일런 일이’에 버금갈 거라며.
“여기 약국이 여덟 개입니다. 서로 교유(交遊)하며 지내지요. 세미나 비슷한 것도 열어요. 할아버지가 화두가 된 적이 있어요. 할아버지는 약국마다 순례를 한다는 거예요. 하루 여덟 병의 박카스를 마신다는 결론입니다.”
길순 씨는 거기서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나이는 둘이 비슷한데, 자기는 박카스 한 병을 쥐고 잠시 동안은 머뭇거리는 데 비해, 그 할아버지는 하루에 거의 그걸 한 상자씩을 마신다? 그러고도 호기롭게 거리를 누비고 다니고, 코로나를 향해 코웃음을 친다니 미스터리가 아니고 뭔가 말이다.
길순 씨는 약국에서 돌아 나와 옆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시켰다. 그리고 회억에 잠겼다.
길순 씨의 교감 재임 시절. 동료들은 이구동성으로 토로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르기 힘든 벼슬(?) 자리가 교감이야. 일단 교감이 되고 나면 교장(승진)은 떼어 놓은 당상인데.”
정말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교감이 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 교장이 서울로 6개월 코스 연수를 가게 되었다. 그게 불행을 가져다 둔 하나의 빌미가 될 줄이야. 어쩌면 그건 자초한 측면이 있었으니 학교장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길순 씨로선 직무대리로서 공을 세워 근무 평정을 잘 받아 보겠다는 의욕이 앞섰다고나 하자.
학교장이 사전에 길순 씨에게 물었었다. 자기의 서울 연수에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건 아니냐고. 아무 염려 말라고 길순 씨는 대답했다. 그 자의반타의반의 결정이 없었더라면 지금 길순 씨는 전직 교장이라는 대접을 받고, 백 만 원 쯤 증액된 연금을 수령하고 있으리라. 돌이켜보면 아쉽고 안타깝다.
교장 직무대리로서의 길순 씨는 처음에 무척이나 행복했다. 교감으로서 교장들의 회의에 참석하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고 목에 힘이 들어가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시내 전체 교장들이 모이는 겨우는 한 번뿐이었지만. 지역 교육청 관내 교장 회의도 한 번이었다.
지구별(地區別) 회의가 항상 길순 씨에게는 기다려졌다. 일고여덟 명의 교장들이 모이는데, 그리 급하거니 매우 중요한 안건이 있는 경우는 드물어서 가벼운 기분으로 참석했다가 오면 됐다. 물론 직무대리는 길순 씨 혼자였다. 게다가 길순 씨는 홍일점이었으니 농담의 표적이 되기도 예사였을 수밖에. 해서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말고.
회의는 대개 열 시에 열려 50분 남짓이면 끝났다. 거의 단골이랄 수 있는 대중음식점에서였다. 귀교하기에도 어정쩡하여 점심을 시킨다. 오리탕과 수육, 소주 뭐 이런 등속이다. 음식이 나오기 전 여덟 명의 교장들이 반반 나누어 따로 앉는다. 그 앞에는 국방색 담요가 펼쳐지고, 화투 한 모씩이 놓인다. 바야흐로 교장 회의의 백미(?인 고스톱 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 명은 자동으로 광(光)을 팔게 된다. 환상의 조합이 따로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교장들인데, 점당 백 원으로야 치겠는가? 속칭 3 ‧5 ‧7 ‧ 9는 불문율(不文律)이고말고. 한 시간 남짓이면 만 원짜리 두서너 장 잃는 것도 예사다. 다음은 점심,
식사를 마치면 후딱 일어선다? 천만의(?) 말씀이다. 오후 일과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또 틈이 있으니 고스톱은 진행형이 된다. 길순 씨는 거기까지였다.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학교가 있으니, 마침맞은 때에 일어서는 거다.
길순 씨에게는 그 두어 시간이 정말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고스톱을 친다? 신(神)은 십중팔구 후자(後者)의 손을 들어 준다. 길순 씨라고 해서 어찌 예외이겠는가. 해서 길순 씨가 손을 털 무렵에는 배춧잎(만원)이 아니라, 신사임당 초상화(5만원)가 한두 장 들려져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평을 달라고 하겠는가, 남자가 여자에게 말이다. 그건 고스란히 길순 씨 수입이 되었고말고. 그걸 흔들고 돌아설 때의 미소! 그 애교가 당시의 길순 씨 인기를 치솟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교장 수업(授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여러 덕목을 그 자리에서 주워듣는 것도 길순 씨에게는 수확이었다.
‘설사’를 한 걸 누가 주워 먹으면, 교장들도 예사롭게 이런 말을 하더라. 집 나간 며느리 아이 배어 왔네! 그러면 박수와 폭소가 터진다. 목사나 신부 등 성직자도 그런다는 데에야 말문이 막힐밖에. 스님? 예외일 수 없으리라.
교장이 교육장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비결(?)도 각자 나름이었다. 취사선택의 여지는 당사자의 몫이지만 공통분모가 뭐란 것도 길순 씨는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특히 모든 일, 하다못해 훈화 제목이라도 <학교 일지>에 그 기록을 철저히 남겨야 한다는 걸 예를 들며 어느 누가 강조했던 점은 길순 씨의 뇌리에 철저하게 각인되었다. 학구 내 모든 걸 꿰뚫어야 한다는 말 뒤에, 정보과 형사와의 인간관계 유지를 잘해야 한다는 유의 사항도 귀에 솔깃했다.
그런데 사고가 터진 것이다.
직무대행 3개월 남짓 지난 12월 중순이었다. 목요일 오후부터 날씨가 궂더니, 저녁에 계절에 맞지 않게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거다. 어린이들은 좋아서 운동장에 나와 뛰고 야단났지만, 길순 씨는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저녁 일곱 시쯤엔 거의 폭설로 변하고 말았다. 밤중에 일어나 학교에 들러 보는 건 당연했다. 너무나 낡아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철책 위 가파른 곳에 열한 평 아파트 한 동이 있는데, 보수 공사를 한답시고 각종 구조물을 엮어 둔 것이 마음에 걸려서. 행정실장도 불렀다.
위태위태하다는 느낌이었지만, 밤중이라 어쩔 도리도 없었다. 눈은 조금씩 그치고 있었다. 학교장에게 전화로 보고를 했다. 구청(행정구청)에 연락하라는 지시였으나, 길순 씨가 그걸 애써 무시했던 게 탈이었다.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는 전화를 걸어 두었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다행히 날씨가 개어 있었다. 아침밥을 챙겨 먹는 둥 마는 둥하고서는 길순 씨는 출근하였다. 울타리 근처에 가 보았는데, 위 아파트의 구조물이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급히 두 개 반 어린이들을 대피시키기로 결심하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나, 우지끈하는 굉음이 터지더니 구조물이 어린이들을 덮친 것이다. 교실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유리창을 뚫고, 두 어린이에게 중상을 입혔다. 철근 두 개에 강타 당해 각기 팔이 부러지고, 머리에 열 바늘을 기워야 할 정도로--. 두 어린이를 급히 종합 병원으로 처치를 받게 한 것은 물론이다.
실로 눈앞이 캄캄하였다. 이틀 뒤에 내려온 학교장도 망연자실했다. 그러면서도 학교장은 불가항력이었다고 위로하고, 교감을 달래 주었다. 그러나 수습은 그걸로 되는 게 아니었으니…. 징계 위원회가 열리고 길순 씨는 견책 처분을 받을 뻔했다.
그러나 워낙 인격이며 능력, 교육 철학이 돋보이는 학교장이 발 벗고 팔을 걷고 수습에 나서 주었다. 덕분에 징계권자가 주의 촉구로 경감시켜 주는 바람에, 인사기록카드에 등재되는 불행은 면했다. 그날 밤 둘이서 학교로 나와 밤늦게까지 두루 살피고 최대한의 초치를 취한 걸 기록에 남겨둔 것도 주효했다고 하자. 교장 회의에서 기록이야말로 최고의 무기라는 풍월을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행정실장은 견책 처분.
그러나 다른 인사 조치를 피할 도리가 없었으니 신학기에 좌천이 된 것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신설 학교로….출퇴근 자체만으로도 정말 심신이 피로했다.
게다가 Y교장은 직전의 학교장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신설 학교니 교가도 새로 만들어야 했고, 다른 상징인 교화니 교목 등도 선정하는 게 힘들었다. 3/4빅자 혹은 3/6박자로 만들어서 교가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자는 의견을 냈다가 면박을 주기에 포기해 버렸다. 길순 씨는 무척이나 마음이 상했다.
녹차 나무를 어렵게 구해다가, 우리 조상들의 얼을 이어받게 하자고 했더니 또 교장은 코웃음을 쳤다. 교화(校花) 하나면 됐지 교목(校木)이 뭐냐며. 어렵게 구해다 심은 그 귀하디귀한 김해 장근차(將軍茶) 묘목도 그렇게 죽여 버렸다. 사사건건 그렇게 어긋나다 보니 출근 자체가 두려울밖에.
그러다가 둘의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지게 만든 사고가 하나 생긴 것이다.
어느 날 Y교장은 느닷없이 수십 그루의 나무를 몇 대의 트럭에 싣고 와 심는 게 아닌가? 수종(樹種)도 길순 씨의 마음에 안 들었다. 철저하게 자기 임의대로 그러는 걸 보고 보고 길순 씨는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조금 의논했으면 금상첨화가 되었을 거라는….
Y교장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교감 노릇이나 잘 하시오. 경리나 재정에 관계되는 일엔 교감이 끼어들면 안 되오. 서류에 교감의 날인이나 사인이 들어가는 난이 있는지 보란 말이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일했는데 감사 표시는 모를지언정 이의를 걸어?”
전 학교장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걸 깨달은 길순 씨는 그로부터 지옥 같은 교감 생활을 하게 된다. 길순 씨도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교감을 교장실로 조용히 불러 타이를 생각은 않고 종회 시간에 공개를 하며 꾸짖는 것이다. 그럴 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지어는 단체 회식을 마치고, 행여 2차로 노래방에 갈 때 다른 직원은 몰라도 교감의 불참은 용납하지 않았다. 교감이라면 그 정도 다리 역할은 해야 한다나?
길순 씨는 점점 수렁에 빠지게 된다. 때로 코피를 쏟기도 했다. 새벽에 출근하여 다른 직원이 다 퇴근하고 난 뒤 자기 책상을 정리하는 길순 씨.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편들어 주는 직원도 별로 없었다. 설사 편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한들 그걸 행동으로 옮길 용사(?)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위안을 주는 제자 겸 열서너 촌(寸) 되는 질녀 손 선생이 가끔은 위로의 말을 전하곤 했으니, 약간은 의지가되었다. 어느 날 손 선생이 내용물이 있는 검은 비닐 봉투를 하나 길순 씨의 책상 밑에 슬그머니 놓더니 하는 말이다.
“교감 선생님, 많이 힘드시지요? 저, 그걸 알고 있습니다. 피곤하시거나 머리가 무거울 때, 이 걸 한 병씩 드세요, 박카스D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손 선생은 한 병을 들더니 뚜껑을 열어 길순 씨에게 건네었다. 길순 씨는 그걸 몇 번 나누어 들이켰다. 한데 아닌 게 아니라 정신이 훨씬 맑아지는 게 아닌가! 길순 씨는 혼자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큰 불행의 단초가 될 줄이야!
그렇게 가끔씩 사다 주는 손 선생의 박카스는, 파김치가 되어 지내는 길순 씨의 학교생활에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하루 한 병이라는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니, 그가 마시는 박카스가 자칫하면 증량(增量)의 지름길로 이어지기 쉽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자, 길순 씨는 카스를 두 병을 들이켜야 컨디션이 유지되게 되었으니, 바야흐로 중독(中毒)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마침내 빈 박카스 병이 세 개에 이르는가 싶더니, 거기다가 한 개를 더 보태야 하루를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그걸 안 동료들도 쉬쉬하였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손이 떨릴 정도가 되고 말았다. 길순 씨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손 선생은 후회막급이었다. 은사요 항렬이 높은(아저씨) 집안 종친인 교감이 곤욕을 치르는 걸 속절없이 보게 되었으니…. 손 선생은, 힘내라고 대접하기 시작한 박카스가 되레 그분의 건강을 해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려야만 했고.
그래 손 선생이 박카스는 카페인이 상당량 들어 많이 마시면 심장이 떨리고 맥박수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길순 씨에게 귀띔할 수밖에. 하지만 손 선생의 말을 길순 씨는 듣지 않았다. 아니 들을 수가 없었다. 중독? 그 무서운 마수가 길순 씨를 송두리째 꽉 움켜쥐고 놓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손 선생과 길순 씨의 난마처럼 얽힌 인연을 소개하는 게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다. 길순이 중학교 3학년인 시절, 밀양 단장면 국전리 경주 이 씨 집성촌에 살았었다. 바로 이웃의 열두 촌(寸) 되는 언니가 가을철 결혼을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재학 중인 열아홉 살밖에 안 되는 총각이 신랑이라는 게 아닌가? 길순은 호기심에 잔칫집으로 달려가 일을 거든다는 핑계를 대고 음식만 축내고 있었다.
당시 풍습대로 신랑은 엄청난 시달림을 겪었다. 거꾸로 매달린 채 발바닥 맞기, 노래 부르기, 자기 집안 내력 털어 놓기, 술이며 음식을 재주껏 조달하기 등등은 어린 신랑으로 하여금 과부하에 걸리게 하기에 딱 좋았다. 신랑은 다른 건 몰라도 술과 음식을 조달하는 건 힘들었다. 주전자가 비워지기 전, 또 누구인지도 모르는 처가 친척들이 다투어 닦달을 한다. 신랑은 지칠 대로 또 화가 날 대로 났다. 마침내 마루 끝에 서서 하던 말
“씨팔 놈들 술만 먹으려 하네.”
물론 대갈일성이 아니라 들릴락 말락 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지만, 길순은 그걸 죄다 귀에 담았던 거다. 코미디와 다름없었다, 그 신랑이 손 선생의 아버지인 거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 부부의 장녀인 손 선생이 교사로 임용되어 첫 발령을 받아 근무하는 그 학교에 길순 씨가 부임했으니, 둘이서 한 울타리에서 일과를 보내게 된 첫 번째다. 설사가상(?) 둘은 같은 학년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럴 때 운명은 잔인하다고 해야 하나?.
길순 씨가 어느 날 수업을 하고 있는데 손 선생 반의 회장(반장이라고 안 불렀다)이 노크를 하고 들어오더니, 하는 말이다.
“저희 선생님이 회초리 좀 빌려 달라고 하십니다.”
그래 이하는 생략하는 게 맞겠다. 다만 청출어람(靑出於藍)을 몸소 체험하게 된 건 그런 손 선생 덕분임을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거듭 말하지만 일생일대의 난관에 봉착해 있는 길순 씨를 가장 살뜰하게 보살펴 주는 직원이 손 선생 외에 없었다는 게 맞다. 그러니 박카스! 손 선생과 경미 씨의 경우에 대입하면 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된다. 손 선생에게는 불경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물론 길순 씨는 정신과에도 드나들었다. 의사가 하는 말은 이것이었다.
“약물 치료를 조금 하세요. 무엇보다 박카스를 끊으시는 게, 아니 줄이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그게 예사롭게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아티반인가 뭐가 하는 약을 복용은 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Y교장의 횡포이기 때문인데, ‘약물 운운은 오히려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 무렵 직원들은 길순 씨더러 폐인(廢人) 운운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렁이 밟히면 꿈틀거린다고 했다. 마침내 길순 씨가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어금니를 깨물고 하는 말이다.
“좋다, 교장 까짓 거 안 하면 될 것 아니야. 내 탄원서를 내리라! 그의 비리를 약간은 알고 있어도 그걸 거론하지는 않겠다. 교장의 행패(횡포)를 더 이상 보고 있는 것만 능사는 아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듯이 배후에서 똬리를 틀고 조종하는 그의 부인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도 내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의 부인은 이미 교장으로 승진하여 시내에서 잘 나가고 있는 여걸(?)이었다. 정미와는 교대 동기동창이었다. 둘은 서로 비교가 되는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었다. 정미는 생활기록부에 적혀 있듯이 ‘온순 착실’로 대변되는 데에 비해, 그의 부인은 반대였다. ‘약간 과격한 게 흠이다.’뭐 이 정도라 할까?
옛날 길순 씨가 학교 소풍을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야산이긴 하지만 조금은 험한 길을 걸어야 하는 목적지에서 점심을 먹였다. 보통 두 시 쯤 현장에서 학교로 출발하는데, 길순 씨는 그날 몸이 좀 아파서 약간 이르게 출발하였다. 20분쯤?
그런데 하산하는 도중 한 어린이가 땅벌 집을 건드린 거다. 수십 마리의 벌떼가 공중에 뜨고, 어린이들은 빠른 걸음으로 뛰어 내려갔다. 대신 정미는 그러지를 못하고, 화를 피한다고 몸부림쳤지만, 새로 파마를 한 머리카락 밑으로 그 지독한 벌들이 상당수가 파고들어 쏘았다. 내려오는 길로 즉시 병원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고 왔다. 다행히 어린이들은 모두가 무사했다.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자초지종을 발설한 장본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Y교장 부인 ‘그 여자’였던 것이다. 발설 정도가 문제가 아니다.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도록 동기들한테 전화를 해댄 게 '카더라 통신'에 잡힌 거다. 이러니 생활기록부의 기록’은 허언이 아닌 셈이라고 할까? 당시의 교장 교감도 모르는 일을 ‘그 여자’가 까발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이가 갈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 모든 걸 탄원서에 적으려 했다. 한데 왜 ‘그 여자’가 그 막돼먹은 짓을 지질렀을까? 아는 사람은 안다. 길순 씨의 여성다운 용모에 비해 ‘그 여자’는 남자 성상(性相)에 가깝다. 신장이며 체중도 정반대. 하지만 교대 선두 주자라는 소릴 듣는 건 비슷했으니, ‘그 여자’는 길순 씨가 잘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길순 씨는 그래도 ‘그 여자’처럼 상대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남편이 길순 씨의 교장이니 그 전말의 해답은 불물가지라 하자.
하여튼 일요일 길순 씨는 학교에 출근하였다. 당직 교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길순 씨는 오늘 바쁜 일이 있어서 출근했으니, 양해를 바란다는 인사를 건네곤 4백자 원고지와 볼펜 등을 꺼내어 책상 위에 펼쳤다. 항상 그래왔듯이 길순 씨는 그 원고지를 받침으로 하여, 편지 등을 쓰는 게 버릇이다. 띄어쓰기가 정확하게 되는 등 길순 씨에게는 무기와 다름없어서 좋았다.
길순 씨가 박카스를 꺼내어 둘이 한 병씩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두어 시간 작업을 했다.
열두 시가 조금 안 되어서, 경미 씨는 중국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당직 교사에게는 물어보는 시늉만 내고, 자장면과 탕수육을 배달시킨 거다. 물론 돈은 경미 씨가 냈다. 일요일이나 방학 때 당직이 되면 교감 교장에게 대접해야 하는 그 점심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음을 길순 씨는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윽고 다시 탄원서 쓰기 작업을 재개하였다. 그런데 슬쩍 내려다보았는데, 박카스가 한 병뿐이다. 길순 씨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오늘 같이 큰일(?)을 할 때엔 저거 서너 병은 마셔야 하는데 어쩌지? 그러면서 길순 씨는 당직 교사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박카스 마개를 땄다.
두어 모금 들이킨 길순 씨, 다시 힘이 솟는 것 같아 부지런히 원고지를 메워 나갔다, 다시 두어 시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약간 떨리는 기분이다. 볼펜을 놓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안정이 안 된다. 일요일이라서 약국 문을 안 여니 낭패다. 그렇다면 곱다랗게 이 곤욕을 치러야 하는 게 아닌가! 그때 길순 씨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있었다.
길순 씨는 다음 순간 무슨 결심이나 한 듯이 열쇠꾸러미를 들고 복도로 나왔다. 그 무렵만 해도 담임교사에게 학부모가 박카스 등을 사서 그 상자 병 사이에 소위 ‘촌지’를 끼워 주는 일이 더러 있었다. 길순 씨는 기대를 했다. 설마하니 23개 반 교실마다 다니면, ‘이삭줍기’로 박카스 한 병 못 구할까….
그런데 그날따라 박카스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고소를 날리면서 길순 씨는 다음 교실로, 다음 교실로 차례로 찾아들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거의 마지막이라 여기고 포기할까 하면서 어느 1학년교사의 책상 근처로 다가갔다. 캐비닛 문에 약간 틈이 있는데, 아, 그 안에 박카스 상자가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는다. 길순 씨는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서 약간 힘을 가했다. 삐거덕! 소음이 났지만, 박카스를 상자 째 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어쨌든 길순 씨는 그 중 두 병을 마시고 나머지는 도로 제 자리에 우겨넣었다. 그런데 못 볼 걸 본 것이다. 상자에 든 하얀 봉투!
어쨌든 덕분인지 원고지 37장 분량의 탄원서를 다 작성하고 귀가하였다. 길순 씨는 모처럼 혼가분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박카스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튿날 출근하여 보니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길순 씨는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군데군데서 교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쉬쉬하는 눈치였으니….손 선생을 불러다 물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지만, 그 꼴이었다. 길순 씨는 먼저 어제 일을 손 선생에게 소상하게 털어 놓았던 거다. 그러자 손 선생은 자기의 원죄(?)도 있는지라, 거의 울먹이는 소리로 교사들의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었다. Y교장은 마침 출장 중이었다.
“선생님, 모두 제 잘못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의 교실을 어제 누가 다녀간 흔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 순간의 창피함이란 형언키 어려웠다.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길순 씨는 종일을 그렇게 절망에 빠져 보냈다. 그리고 종회 시간. 길순 씨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의 불찰이 부끄럽습니다. 제가 교육자답지 못하게 박카스 중독에 걸려 선생님들의 인격에 손상을 입히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곧 병가를 내고 치료받도록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교무실은 물을 끼얹은 듯한 고요 속으로 빠져 들었다. 다들 말문을 닫았지만, 오히려 당황한 기색들을 보였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른 뒤 손 선생이 일어나 울먹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교감 선생님은 제 상사(上司)이기 이전에, 집안 아저씨 되는 분입니다. 외갓집이 가끔 들르면, 교감 선생님 말씀을 주위에서 하세요. 마을이 생기고 나서 처음으로 여자 교장 선생님이 태어난다면서 말입니다. 교감 선생님이 격무에 시달리다가 제 권유로 박카스를 드시게 된 건 여러 선생님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린 저를 보아서라도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손 선생은 이내 엎디어 대성통곡을 쏟았다. 종회는 그런대로 조용히 그리고 무사히 끝났다. 길순 씨가지체하지 않고 정신의학과에 가서 상담을 하고 한 달 병가를 내었음은 물어보나마나. 사태가 그렇게 수습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Y 교장은 의외로 짐짓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닌가? 병가원(病暇願)을 써서 갔더니 별 말도 없이, 평소와는 달리 노한 표정을 짓거나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다. 그러곤 기안문에다 결재권자 란에 사인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순간 정미는 섬뜩하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사건이 하나 일어날 것 같은….
아니나다르랴, 병가 이틀 뒤 지방 신문의 가십난에 누구든지 해괴망측한 일로밖에 치부하지 않을 기사가 실렸으니, 길순 씨의 그날 행적이었다. 뭐 교감이 일요일에 출근하여 각 교실에 몰래 들어감으로써 교사들로 하여금 분노를 터뜨리게 했으며, 그 일로 말미암아 교사들이 웅성웅성하며 야단이라는 거다.
길순 씨는 실신할 뻔했다. 이건 아니다. 누군가 모함을 하지 않으면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침소봉대해도 유분수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병원에 가서 응급 처치를 받고 귀가하는 길 정미는 부르짖었다.
“아, 끝났구나! 좋다, 교장 승진은 포기한다. 대신 평교사로 남아 어린이들을 가르치겠다. 언감생심 벼슬이라니 분에 넘치는 과욕이었다.”
길순 씨가 딸에게 저녁에 의논하였더니, 녀석이 제법 의젓하게 위로하는 거였다.
“엄마, 차라리 잘 됐어요. 교감, 교장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던데요, 보람을 느끼면서 62세 정년까지 기다리다 퇴임하여 노후 편안하게 보내세요. 엄마, 사랑해요.”
그러는 녀석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모녀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럴 때 아버지가 계신다면, 방패가 되시고도 남을 텐데요, 흑흑.”
이제야 밝히지만, 정미의 남편은 공무원이었으나, 정미가 교감이 되기 전 유명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정미가 관리직(교감 교장을 그렇게 부른다)에 목을 맸었던 까닭은 자명한 셈이다.
한 달 뒤 병가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Y교장은 더 변해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기는커녕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기 일쑤였고. 그럴 때 길순 씨는 소름이 끼쳤다. 교장은 예사롭게 입 꼬리를 귀에 걸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길순 씨를 무시하고 교무 주임과 귀엣말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말 견디기 힘든 수모(受侮)를 길순 씨에게 쏟아 부었다. 길순 씨에게도 피해망상증 비슷한 후유증이 있어 착각한 것인지 모르지만….
딸과 다시 의논을 마친 길순 씨는 다음 날 바로 사표를 써 들고 교장실로 들어갔다. 편안한 표정으로 말없이 교장에게 그걸 내밀자, 교장도 그제야 적이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길순 씨는 말했다.
“친구에게 안부나 전해 주세요.”
그런 다음 퇴임식도 없이 길순 씨는 30년 넘게 몸 담았었던 교문을 등지고 총총히 집으로 돌아왔다. 길순 씨는 여자지만, 남자들에게 이런 농담이 있는 줄 안다.
“예비군들은 옛날 자기 부대 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않는다.”
길순 씨는 여기에 많은 함의(含意)를 싣는다. 정당한 사유 없이 군에도 안 갔다 온 사람이 Y 교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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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Y교장은 더 변해 있었다
두 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원찮은 글을 읽어 주셔서--..동료들이 자전 혹온 논픽션 냄새가 난다 해서, 그걸 떨치느라 애썼지만 역시 '거기가 거기'. 허구를 만들어내기가ㅣ 그렇게 어렵다는 걸 절감합니다.
객지에 와서 견디기어려울 만큼의 외로룸과 설움을 겪었었습니다. 두 분 같은 분이 계시고, 이 아름다운 공간이 있어이제 견딜 만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입니다.
정다겸 사무국장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부문에서 열정과 역량을 쏟으시는 사무국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