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보덕심(普德心)
보덕심은 보덕각시로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이시다. 불교 영험설에는 고통이 많은 마을 중생을 구제하고자 미모의 처녀로 화현하시여 험한 청년들을 제도하시는 모습을 방편으로 보이시는 것으로 미모 처녀에게 장가를 가고자 동네 청년들이 야단법석이라 차례로 금강경, 법화경등을 암송하게 하여 한 청년하고 결혼을 하여 첫 날밤에 갑자기 처녀가 생을 달리함으로 슬프하다가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오시여 무덤으로 인도하여 무덤속에서 관세음보살상이 나타나므로 마랑 부인이 아니고 관세음보살님이 중생을 제도하고자 보덕각시로 화현한 것을 확인시켜서 마씨 아들인 마랑을 발심시킨 것으로 자기 집을 절로 만들어 평생 수행함으로 동네에 악한이 없이 부처님 신행으로 발심을 한 동네 청년들이었다.
302, 불정심(佛頂心)
법화경 말씀에 보면 “부처님께서 이마로 광명을 놓아 광명이 3갈래로 나누어 삼천대천 세계에 비치니, 한 갈래는 천상세계이고, 한 갈래는 인간세계이고, 한 갈래는 지옥세계로 광명이 비추어 부처님 회상에서 대중들이 두렵고 환희심이 서로 교차 하드라”. 하셨다. 불정심(佛頂心)은 광명으로 밝고, 맑게, 생명에 빛으로 살라는 것이다.
303, 월인심(月印心)
304, 해인심(海印心), 305, 법인심(法印心)
월인심․해인심․법인심은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이다. 달이 천만강에 인(印) 비치는 것이니, 마음에 법으로 인(印) 인정하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함이니, 물이 삼라만상에 순응하므로 생명력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인(印)은 도장으로 서류에 도장을 찧어서 전하고 인정함으로 실권이 넣어 가는 것으로 인(印)은 인도의 문화라 할 것이고 불타(佛陀)의 깨달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306, 수행심(修行心): 중생의 원력심(願力心)이 수행심이다. 불보살님 마다 원력이 있으시고 중생도 원력심이 있지만 눈앞에 물질의 욕망으로 즐거움을 찾아서 집착하여 목숨을 걸고 몸덩이 사랑에 눈이 멀어서 목숨을 걸어서 참으로 목숨을 받쳐서 찾아야 할 마음의 주인공은 잊어버리고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윤회하는 것이다. 수행심은 마음에 주인공을 목숨 받쳐 찾는 마음이다.
307, 평등심(平等心)
빛은 평등하지만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장애로 그림자가 나타나므로 어두운 것처럼, 마음도 본성은 빛나고 평등하지만 경계의 모양과 이름에 집착한 마음 작용으로 번뇌의 그림자로 어두운 고통을 받는 것이다. 평등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본래면목이고 수행심이다.
308, 일미행(一味行)
법계(法界)의 일미는 각해(覺海)의 마음이다. 깨달음 바다 한 맛은 중생을 다 제도하고도 남고, 미래가 다함이 없고, 중생의 원력심이 다함이 없고, 불보살님의 원력이 다 함이 없으므로 각해의 일미행은 다함이 없는 마음이다.
309, 무심행(無心行)
무심을 무아심(無我心)으로 바꾸고 싶고 무아심은 공심(空心)이므로 유(有) 있다는 모양과 이름이 아니고, 무(無) 모양과 이름이 아닌 진리의 에너지도 아닌 것이 유무에 자재한 것으로 인연의 연결 고리인 것으로 무아심이라 마음으로 관하지 않으면 나타나지를 않는 마음이다. 무아심을 얻으면 무쟁삼매(無諍三昧)라 하여 아라한(阿羅漢)의 성인이라 한다.
310, 공덕해(功德海)
공덕의 바다를 마음이라 한 것이다. 마음의 본성은 본래부터 지혜와 복덕이 원만 구족한 자리라, 부처님의 마음이나 중생의 본성이 동일한 것이지만 중생은 번뇌의 욕망으로 보배로 삼았고, 부처님은 진리로 보배로 삼는 것이라, 삼라만상이 청정하면 공덕해(功德海)라 할 것이다.
311, 성취자(成就子)
성취를 인도 말로는 “사바하”이다. 부처님을 원만 성취자라 한다. 지구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 중에 석가 부처님은 가장 수승한 32상 80종호를 갖추시고 지혜도 6신통를 하셨다. 인간의 잠재력을 증명하신 것으로 인간의 무한한 마음의 힘을 보이신 것이다. 사람뿐만이 아니고 모든 생명존엄을 강조하시면서 평등을 강조하신 것이다. 남을 자신으로 관찰하므로 스스로가 존엄함을 깨달아서 실천하므로 서로서로 인연 관계로 더불어 사는 우리의 인연 고리인 것이다. 스스로가 미워하면 미운 세상이 나타나고 즐거워하면 즐거운 세상이 나타나는 것은 스스로의 힘이라 할 것이다.
312, 대각심(大覺心)
큰 깨침을 석가 부처님의 깨침이고, 깨침은 바름을 실천하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바름을 알지만 실천하기가 힘든 것이다. 재물이 없고 권력이 없어도 바름을 실천 할 수 있고 바름을 실천하는 것을 크게 보지 마라. 조그마한 일이라도 양심에 가책이 있으면 바름으로 거듭 생각하여야 한다. 조그마한 일이라고 하여 눈감으면 한 번 두 번 습성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므로 잘못을 깨닫지를 못하고 나아가 권력과 재물이 합세하여 큰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도리 킬 수 있는 자를 깨침이라 할 것이다.
313, 선지자(善知子)
선지자는 선지식을 말한다. 화엄경에 선재동자가 구법 길에 53선지식을 찾는 만행 길에는 보살․스님․음여․고기장수․도살쟁이, 세상살이하는 모든 사람을 선지식으로 친견하면서 각각 스스로의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돌은 견고한 것을 가르쳐 주고 대나무는 곧은 것을 가르쳐 주고 물은 부드러운 것을 가르쳐 주고 두두물물이 다 스승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식을 배우고 하지만 자연의 습리를 보고 듣고 깨치는 것이니 모든 것이 선지식인 것이다.
314, 찰해주(刹海主)
나라의 왕이니, 현재 말로는 대통령이라 할 것이다. 사바교주 석가모니불․극락세계 아미타불․도솔천주․도리천주인 제석천왕․사천왕천 천주, 부처님께서는 욕계․색계․무색계의 28천주가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찰해주가 많다. 조그마한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라도 스스로의 주인으로 찰해 주인공인 것이다. 찰해의 다스리는 방법은 청정불성(淸淨佛性)을 찾는 것이다.
315, 향운심(香雲心)
향기가 구름처럼 자욱한 봄철은 겨울 엄동 설한에 흙 속에 움추린 생명들이 따스한 기운으로 흙 속에서 숨바꼭질하는 모습은 누가 힘으로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자연의 습리로 모든 생명에 대자유일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귀로 소리에 얽어 매이고 눈으로 모양에 얽어 매이는 것이니 귀와 눈의 집착을 놓아 버리고 마음으로 보고 듣고 하라. 마음으로 보고 듣고 하면 소리와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자재 하느니라.
316, 자비행(慈悲行)
생명의 소리가 자비행이다. 사냥꾼이라도 토끼가 상처를 입고 자신에게로 찾아오는 토끼를 총으로 죽이지는 않는 것이다. 가정집에 산 노루가 대문 안으로 들어온 것을 죽이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으로 자비심이라 할 것이다. 죽일 수도 있지만 대개가 죽이지를 않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뒷 동산에서 개미굴을 파 해치고 개미를 못 살게 하는 어린 아이들을 볼 수 있지, 이 아이는 자라면 난폭한 행동에 물들기가 쉬운 것이다. 세수 물그릇에 하루살이가 빠져 허우적 거리면 물에서 건져 풀잎에 놓아주면 다시 날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로서는 아무런 힘든 일이 아닐 지라도 하루살이에게는 생사 문제인 것이다. 자비심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317, 무주심(無住心)
머무는 마음이 없는 마음으로 6조 혜능스님은 금강경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已生其心) 응당히 머무는 봐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은 집착심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6조 스님은 이 말씀에서 부처님 법에 인연이 된 것이니, 글자도 모르는 나무꾼으로 속가 말로 출세를 한 것이고 부처님 법을 계승한 6조 스님으로 돈오(頓悟)사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318, 미타심(彌陀心)
서방 정토 아미타불의 가르침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미타불 전생에 법장스님으로 48대 원력을 성취하신 분으로 극락세계를 건립하시고 주인공이신 분이다. 아미타불 원력에 십념 왕생원(十念 往生願)이 있어 지극한 마음으로 열 번만 아미타불 하면 극락에 간다는 아주 쉬운 아미타 부처님의 말씀이 누구든지 극락 발원을 하게 한다. 극악 무도한 사람도 십념왕생원을 하면 극락을 가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 것인가? 거짓말이라면 아미타불이 되시지 못했을 것이다. 아미타 부처님은 악한 사람도 이러한 방편으로 구제하시는 것이다.
319, 정례심(頂禮心)
이마로 절하는 마음은 마음과 몸으로 몸숨 바쳐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 제자들의 마음으로 진리를 성취하게 다는 일심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 몸숨을 바치는 마음으로 성자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몸을 위하는 편이고 심지어는 국가 대사라 할지라도 몸을 의하는 것이다. 수행자의 마음이면 몸보다 마음편으로 마음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정례심은 바름 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의 맹세인 것이다.
320, 광명화(光明華)
깨침의 광명은 마음의 광명으로 지혜라 하고 자연의 광명은 태양의 빛으로 생명에 에너지인 것이다. 마음의 광명인 지혜가 없으면 가치관이 없으므로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고통스러워하고 고통에서 벗어 날 줄을 모르고 항상 원망만 하는 것이다. 지혜가 있으면 번뇌를 관찰하므로 번뇌가 바로 진리 당체임을 아는 것이 마침 어두운 방에 불빛이 들어오면 순간적으로 방이 밝은 것처럼 마음에 지혜가 생기면 번뇌의 그림자는 사라지는 것이다.
321, 금강자(金剛子)
견고한 것을 금강이라 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금강자는 삿된 것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므로 불법을 옹호하는 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지장보살님께 주신 육환장은 지옥문을 열 수 있는 금강자 라 할 것이고 스님의 법상에 법장도 금강자 라 할 것이다. 금강자는 번뇌를 조복 받고 마군을 조복 받고 바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322, 향수해(香水海)
도리천주인 제석천왕이 계시는 수미천으로 중심하여 사방으로 향수해 라 한다. 하늘의 이슬을 감로수 라 하여 관세음보살님이 중생을 병을 치료하시는 약수로 알고 있는 것이 우리의 관음 신앙이다. 지구에 향수는 청정수 라 물이 청정하면 병도 치료하고 죽을 생명도 살아나고 만물이 청정수를 먹으면 생명이 살아나는 힘이 있다.
323, 천화대(千華臺)
많은 꽃으로 장엄한 부처님의 도량인 사찰을 말하고 법회 의식으로 6법 공양으로 등, 꽃․향․차․과일․쌀등 자연의 열매를 공양함으로 자연의 은혜와 감사를 체험하는 것으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다. 천화대는 부처님의 장엄 도량을 말한다.
324, 대덕심(大德心)
부처님 말씀에 장로 수보리 야 하신 장로를 대덕이라 할 것이다. 산중 대덕스님 하면 산중 어른으로 산중의 어른 말씀이 법이고 질서이고 대중을 이끌어 가는 길이다. 수행도량은 문서의 법보다도 유동성이 있는 자유자재한 마음의 법으로 자비희사가 수시로 적용되는 것으로 일정한 규칙보다도 시기에 따라서 살활 자재하는 법이 장로법인 것이니 대덕심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다.
325, 금색심(金色心)
부처님 몸을 금색신이라 하고 금색심은 부처님 마음을 말한다. 보배 중에 금이 천만년을 지나도 금빛은 변하지를 않고 처음처럼 항상 빛을 발하고 또 삿 된 기운이 범하지 못하는 것이 부처님의 바른 말씀에는 삿 된 것이 범하지를 못하는 것이므로 금색심이라 한다.
326, 은색심(銀色心)
은색은 수행의 색깔이다. 스님들의 옷은 희색으로 은색을 상징하는 것이 희색은 불괴색이라 하여 허물어지지를 않는 것이 모든 색은 희색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항상 수행심으로 호화로운 색깔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므로 빨강색은 정열적이고 공격적이고 위험이고 주의하여야 하고 죽음의 색이고 푸란색은 생명색으로 생명에 기운을 일으키고 움직이는 힘을 주고 피로하지 않고 기분이 상쾌하고 편안함을 주는 것이 서로 서로가 좋아하는 것이다. 희색은 사색하는 색으로 은색심은 수행자의 마음이다.
327, 법기행(法起行)
전법하는 자을 법기행자 라 할 것이다. 신행학교를 하면 2백명, 3백명이 입학을 하는데 부처님 법을 모르고 몸에 위한 욕심으로 살아가다가 목숨이 다하면 울고 야단 법석이지, 권력과 재물, 자식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니, 세속적으로 생각하여도 쓸쓸한 것이다. 마음의 공부를 하면 죽어도 앉아 죽을 수 있고 서서 죽을 수 있고 웃으면서 죽을 수 있고 죽음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이 죽음이란 것이 다시 거듭 나는 시작이므로 얼마나 기쁜 일 인가? 마음은 생사가 없고 시비선악에 관계하지 않고 항상 자재한 것이니 우리가 마음을 찾아보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므로 생사에 두려움이 없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328, 대희심(大喜心)
하늘보고 박장대소를 하는 웃음을 대희심이라 할 것이다. 분별심이 없는 도인의 마음이라 하고 함이 없는 마음이라 할 것이고 모양과 이름에 집착심이 없는 마음이다. 하루에 웃을 일이 많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고 누구나 바라는 마음이지만 몸의 행위가 실천이 안 되는 것은 수행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관하는 일을 반복하면 몸의 악습이 자연히 사라지고 무의식으로 반복한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 자신의 새로운 행위인 것이다. 이것을 대희심이라 할 것이다.
329, 대해심(大海心)
태평양 바다가 대해 라 하지만 대해는 우리 마음이다. 마음에 태평양을 비교하면 태평 가운데 한 조각배가 태평양이란 것이니,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가? 마음은 모양과 이름 할 수 없으므로 크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모양과 이름이 있으면 상대적인 큰 것이기 때문에 마음은 상대가 없이 큰 것이므로 마하심(摩訶心)이라 한다. 이러한 마음이 각자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으니, 지구는 하나만 있어도 크다고 야단인데 두두물물이 비교 할 수 없는 큼을 간직하고 있으니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법이다.
330, 서정주(西淨主)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으로 서방 정토 주인공을 나는 서정주 라 한다. 서정주의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니, 몸으로 서정주의 행을 실천하고, 입으로 서정주의 말씀을 하고, 마음으로 서정주의 마음씀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서정주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는 것이 결국은 스스로가 실천하여야 되는 것이다. 다만 남이 시켜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강제적인 힘에 의하여 억지로 실천하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실천하는 것이니, 세상에는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치적으로 스스로의 행위인 결론이다.
331, 대원심(大願心)
대원심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마음은 크다 하면 크고 작다 하면 작은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크고 작다는 말은 맞지가 안고 자신이 크다 작다고 인식 할 뿐이다. 마음은 우주법계보다도 크고 작기는 개자씨 보다도 작은 것으로 비교 할 수 없는 것이므로 모양과 이름 할 수 없다. 이러한 마음이 대원심으로 주인공이 바로 자신인 것이니, 비교 할 수 없는 존재 라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생명존엄성이다.
332, 위덕자(威德子)
부처님을 위덕왕이라 한다. 위의의 덕을 갖추신 분으로 중생들이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명호을 들으면 무슨 인연이라도 환희심이 나는 분이시다. 부처님을 살해하려는 생각을 일으켜도 부처님을 보면 따르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많은 생으로 선한 공덕을 수행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위덕인 것이다. 이러한 위덕은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도 자신의 몸을 다른 생명을 위하여 보시하는 공덕을 많은 생으로 수행한 공덕인 것이다.
333, 견명심(見明心)
밝음을 보는 것은 맑음을 보는 것이므로 빛이 밝고 물이 맑고 흙이 청정하여 기름진 것이다. 생명이 살아가는 것은 밝음과 어둠이 고르므로 잘 사는 것이고 기후가 냉온이 고르므로 생명이 잘 사는 것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고르면 명당이라 하고 생명이 모여드는 곳이라 생명이 잘 사는 것이라 이것이 견명심인 것이다.
334, 안심궁(安心宮)
생명이 편안한 곳이 안심궁으로 정토(淨土)라 할 것이다. 정토는 서로서로 더불어 사는 생명 세계를 말하므로 환경운동을 말하고 환경 경제는 물질의 욕심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보호하므로 자연이 사람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무가 자라서 공기를 청정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한 씨앗이 자라면서 무수한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 정토인 것이다. 정토의 근본은 청정이므로 청정은 무수한 생명을 잘 살게 하는 것이고, 오염은 생명을 더불어 죽이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335, 무상심(無相心): 상이 없는 마음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무아심(無我心)을 말한다. 내가 없는 마음은 아상(我相)이 없는 마음으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불보살님의 마음이라 신구의(身口意) 삼업에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우리가 몸으로 바른 일을 실천하고, 입으로 바른 말을 실천하고, 마음으로 바른 뜻을 스스로 실천하면 싫어함이 없는 것이라, 무아심은 바름을 실천함으로 성취되는 마음가짐이다.
336, 무위심(無爲心): 함이 없는 마음은 도인의 마음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마음이 선악에서 무수히 헐덕이는 마음을 다스리고 희비애락에 본심을 잊어버리고 경계의 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킴으로 본래 청정한 마음을 망각하고 욕심내고 진심 내고 어리석음으로 즐거움을 삼아 살아가는 것이니, 무위심으로 살아가면 희비애락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편안한 마음이 되고 가치관이 확연하여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337, 본심월(本心月): 본래 원만 구족한 마음으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의 자연모습 그대로가 부처인 것이다. 빛이 부처이고 생명이라 빛이 있는 곳은 생명체가 있고, 물이 있는 곳은 생명체가 있고, 흙이 있는 곳은 생명체가 있고, 기후의 냉온이 고르면 모든 생명들이 더불어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몸의 형상과 이름에 집착하여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 물, 공기, 흙, 기온의 에너지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의 감사와 은혜를 망각하고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고 오히려 배반하고 오염시키면서 도리어 욕망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이익을 추구하니 생명을 죽이면서 자신이 잘 살기을 바라는 것이니, 인간의 어리석음이라 할 것이다. 이 본심월을 알면 본래 모습을 찾는 것이다.
338, 정심행(正心行)
바른 마음은 직심이다. 직심은 과거심도 아니고 미래심도 아닌 것이다. 참회하는 마음은 과거심으로 과거의 행위를 반성하고 돌이켜 보는 것으로 현재의 바른 마음이고, 희망은 미래심으로 계획하고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결정심을 현재에 하고 있는 것이 직심이다. 바른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고, 우리의 본심이고, 두두물물의 본성자리인 평등심이다.
339, 정언심(正言心)
바른 말은 진실한 말로 본심에서 참된 말을 하라는 것이다. 경계의 대상을 보고 듣고 분별하면 바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상의 모양과 이름으로 나타난 현상을 보고 듣고 하기 때문에 본성의 진실을 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언을 하려면 모든 보고 듣고 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마음으로 관찰하라, 모든 형상과 이름의 연결 고리가 나타나는 것이니, 모두가 하나인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에서 멸하는 것이다.
340, 금강심(金剛心)
세상에서 견고한 것을 금강이라 한다. 모든 물질은 금강이 될 수가 없다.
물질은 변화하는 것이지, 견고한 것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제일 견고한 것이라, 모양이 없으므로 견고한 것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 말씀인 금강경은 공심(空心)으로 금강을 삼은 것이다. 공심은 유무에 자재한 것이다. 있다고 하면 없고, 없다고 하면 있는 도리가 공심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하여 텅빈충만이라 할 것이다. 무소유로 주인공인 것이다.
341, 묘법심(妙法心)
묘법은 모양과 이름이 변하는 것을 관찰하면 천태만상으로 나열되는 시간과 공간을 축소 할 수 있고 늘릴 수 있는 자라면 묘법을 볼 수가 있다. 물이 평범하게 강물로만 보이지만 물이 나무에 순응하면 나무가 되어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것이 물과 빛과 흙의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지 나무 홀로 자라는 것이 아닌 것이니, 이 도리를 알면 묘법이라 하고 부처님 가르침인 깨달음을 묘법이라 한다.
342, 기타림(祇陀林)
기타림(Jetavana) 승림(勝林)이라 번역, 중인도 사위성(舍衛城) 남쪽에 있던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 수달장자가 이 땅을 태자에게 사어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치니 이것이 바로 기원정사(祇園精舍)인 불교의 최초 사원이고 금강경을 설하셨다.
343, 삼정심(三淨心)
삼정심은 바른 뜻․바른 일․바른 말로 부처님의 십계명이고, 미래 용화세계의 미륵불의 십선(十善) 사상으로, 우리의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인 몸으로 살생보다 생명 문제을 실천하고, 도적질보다 경제 문제을 실천하고, 음행보다 성 문제를 실천하여 바른 일을 수행하고, 입으로는 망어․기어․양설․악구등은 진실한 말인 언어 문제를 바른 말을 수행하고, 마음으로는 욕망․성냄․어리석음을 지혜로 바른 뜻을 수행하면 십선(十善)이라 하여 극락도 가고 성인도 되고, 저지르면 지옥․아귀․축생, 악도에 윤회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악이 분명한 것이니, 우리의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가 진리이고 법인 것이다.
344, 여여심(如如心)
여여심을 진여심(眞如心)이라 하고 여여(如如)는 여거여래(如去如來) 거래가 없어 여여한 자리라 가고 옴이 없는 것이라, 불성이 허공에 충만하니 거래가 없이 여실한 것이다. 빛이 부처이니 빛이 충만한 것이니, 왕래가 없는 것이다.
345, 선재심(善財心)
선재 선재(善哉)라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수보리 야 너의 말이 맞다 하시고 선재 선재라 착하고 착하다하신 것은 수보리에게 수기한 것이므로 나의 말과 같다는 것이니, 수보리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란 것이다. 또 화엄경에는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제방으로 친견하시고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친견하여 발심하는 것이니, 불보살님들의 마음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에 싫어함이 없어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같이 수행행자가 되어야 한다.
346, 응공자(應供子): 응공을 부처님이라 하고, 보살님이라 하고, 스님이라 한다. 응공자는 바른 법을 실천하는 자를 말한다. 세상에는 마음이 스승이고 바름이 법이라, 한 스님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스승님이 누구입니까? 묻자, 삼성하반월(三星下半月)이지, 마음심(心)자를 파자로 말한 것이 이성계가 국사 스님을 모실려고 유생들을 전국에 순방하게 하여 오대산 바위 위에 검푸른 얼굴에 스님에게 세상에 제일 가는 스승을 찾자 삼성하반월이라 하자 절을 3번하고 모신 스님이 바로 조선 태조의 왕사인 무학스님이시다. 마음이 스승이라 바른 마음이 응공자인 것이다.
347, 불자행(佛子行)
부처님의 제자는 부처님의 상호를 보고 거역하지 않고 생각하면 불자인 것이고,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칭명하면 불자인 것이고, 나아가 삼귀의 계와 5계를 받아 불명(佛名)을 받아 수지하면 불자인 것이다. 불자는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마음은 생사가 없고 시비선악에 관계하지 않으므로 자유자재한 것이지만, 우리는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시비하고 있는 것이다. 불자는 마음의 주인공을 찾아야 불자행이다.
348, 무생심(無生心)
태어남이 없는 것은 번뇌가 없어 생사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태어난 것이고 마음이 사라지면 죽은 것이라, 허공에 뜬 구름이 일어나면 태어난 것이고 사라지면 죽은 것이라 호흡을 들어 쉬면 산 것이고 날 쉼은 죽은 것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보고 듣고 헤아릴 수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생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무생심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착이 없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已生其心)의 도리이다.
349, 법도행(法度行)
법도는 통도(通度)를 말한다. 부처님 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통도사는 자장스님께서 부처님의 정골 사리를 모시어 말세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꿈에서 받으시고 우리나라에 5대 보궁을 개설하여 지금도 청정법신인 사리 친견으로 불자들의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하시는 인연의 원인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니, 공덕이 헤아릴 수가 없다.
350, 무량행(無量行)
무량행은 다함이 없는 마음이고,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고, 끝없는 마음이고, 싫어 한이 없는 마음이고,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사람의 생각으로 미치지을 못하는 것이다. 모양과 이름으로는 변화하는 과정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라, 변화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이 지속 할 뿐이라, 영원이라 한다.
351, 복혜심(福慧心)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신 분이 부처님이라 하여 양족존(兩足尊)이라 하신다. 양족은 부처님의 두발이 아니고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신 분을 말한다.
중생들도 양족이라 본 성품 자리는 본래부터 양족한 것이니, 다른 말로 구족이라 한다. 중생 스스로가 보고 듣고 욕망으로 마음의 보배를 삼아 스스로가 윤회하는 것이다. 물질 욕망의 보배가 보배가 아니고 고뇌의 원인인 것을 깨달으면 마음의 본성을 찾아 스스로가 항상 빛을 발하여 뭇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 양족(兩足)인 것이다.
352, 여실행(如實行)
여여심은 진실심이고 참된 마음이라 스스로가 진실한 마음을 발심하여야 한다. 접촉의 감각으로 즐거움으로 살아가다가 슬펴하고 시비의 안팎에서 살다가 마음의 진실을 알고 부터는 스스로가 진실의 주인공으로 진실을 실천하니, 스스로가 편안하고 인연 법으로 진실이 고리 고리 연결되는 미묘 법을 아는 것이다.
353, 보살행(菩薩行)
보살의 정신 지위는 자리이타(自利利他)자타를 다 구제하는 힘이 있다. 대승의 보살정신은 남을 구제하므로 자신을 구제하는 힘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일터라고 하는 것이다. 지장보살님은 지옥 중생을 다 구제하고 부처님이 되신다는 것이 지장보살님의 마은이고, 관음보살님은 자비심으로 중생을 다 구제하신다는 원력 보살님들이시다. 보살의 원력은 물이 모든 생명에 순응하므로 싫어함이 없이 생명을 구제하는 보살님이시다.
354, 무착심(無着心)
무착심하면 마음을 비우는 마음이다. 진심이 일어나는 것은 보고 듣고 모양과 이름에 집착심이 일어난 것이다. 보고 듣고 하여도 집착심이 없으면 잘못이라 하여 성질 부릴 것이 아니고 잘못을 관찰하여 잘 되게 하는 것이고, 잘 된 것은 남의 가르침으로 배우고 훈습하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보고 듣고 집착하여 소리대로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355, 응심자(應心子)
응심이란 그윽한 마음으로 듯듯한 마음이고 항상심이라 평상심이라 할 것이다. 허덕이는 마음이 아니라 고요한 마음으로 항상 맑고 청명하여 명경지수처럼 고요한 바다 수면은 천태만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마음이 고요하면 삼라만상이 나타나는 모습에 집착함이 없이 순응함이라 그리치는 법이 없는 것이므로 불 보살님 마음이라 하여 물, 공기, 흙이 생명에 순응하므로 생명에 기운이라 생명력이라 한다.
356, 지혜장(智慧藏)
마음의 본성을 지혜장이라 하여 공덕과 지혜의 창고인 것이다. 이 보배 창고는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더 증장되는 것이므로 미묘한 법이라 묘법장이라 한다. 지혜장은 부처님도 탄생시키고 보살님도 탄생시키고 지옥도 구제하고 축생도 구제하고 아귀도 구제하는 것이니 삼라만상을 만드는 보배 창고인 것이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얼마나 행복한 자신인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확인하지 못하고 믿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대하고 살생하고 잘못으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니, 발심하여 지혜장을 발견하고 이 보배를 사용하여도 누가 조건을 달지 않는 것이니, 서로서로 확인하여 부처님도 되고 보살님도 되는 것이 불제자들의 길이다.
357, 복덕장(福德藏)
복덕장은 마음이라 마음에는 무궁 무진한 보배가 충만하여 사용하면 할수록 복덕장에는 복덕이 증장되는 것이라, 마음에 모양과 이름을 비우면 모든 모양과 이름에 순응하지만 마음에 모양과 이름이 가득하면 다른 모양과 이름에 순응할 수 없는 것이다. 물이 청정하면 생명마다 힘의 생명력이 되지만 물이 오염되면 오염물을 접하는 생명마다 죽는 것이다. 복덕장은 생명력이다.
358, 오성자(悟性子)
성품을 깨친자가 오성자이다. 나라법의 법이 평등한 것은 판결된 법은 전 국민에 혜택을 주는 것이 법이고 진리도 조그마한 법이 한 개인에게 나타나면 모든 생명에 평등하므로 혜택을 받는 것이지, 빛을 생명이 보면 잘 자라는 것이고 꽃피고 열매 맺으면 벌, 나비, 새,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니, 대승사상에서는 도리어 사람들이 자연에서 구제를 받는 것이다.
359, 도명심(道明心)
도명심은 성품을 본 마음이다. 두두물물이 다 성품이 있고 성불의 원인이 되지,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불상보다도 자연적인 바위의 생김새가 부처님을 닮았다면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10여년전 경남 양산 어느 암자 바위에는 하늘의 뇌성이 3번이나 쳐서 바위가 부처님 모습이 나타나서 전국에서 친견하는 야단법석이 일어나고, 통도사 월하스님은 천광(天光)약사여래불이라 하셨다. 바위에 하늘의 벼락이 3번이나 한 곳에 쳐서 바위 모습이 누구나 보면 부처님이라 하니, 이름도 천광 약사 여래불이라 칭명하고 불제자들은 누구든지 절을 하고 원력을 세워므로 바위가 성품이란 것이다. 바위이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잠재한 부처님의 성품을 확인시키는 것이니, 도명심이라 할 것이다.
360, 법미심(法味心)
일미(一味)는 바닷물이 짠맛으로 일미인 것이다. 고추가 작지만 매운맛으로 세상에서 제일이라 이것이 일미이고 법미인 것이다. 한 티끌 속에 우주가 함축되어 있고 한 티끌로 지구가 형성되는 것이고 한 씨앗으로 산천이 푸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이 마음이라 하시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셨다. 삼라만상의 주인공은 마음이란 것이니, 내 마음으로 꽃밭에 꽃 씨앗을 뿌리고 물주고 가꾸면 꽃피고 벌 나비 오고 열매 맺어 새들이 오면 노래하는 꽃 정원이 되는 것이 내 마음에서 성취되는 것이니, 지옥 극락도 마음이 주인공인 것이다.
361, 정토궁(淨土宮): 정토는 서방 극락정토인 아미타불 세계가 있고, 사바세계 정토는 더불어 사는 생명정토인 것이다. 환경 정토는 물, 공기, 흙, 에너지의 자연 환경을 청정하게 하면 생명 고리가 더불어 잘 사는 것이다. 나는 미생물이 살 수 있는 물은 청정수라 한다. 미생물이 살아 갈 수 있다면 먹이 사설이 형성되면서 환경 정토가 형성되는 것이다. 샛강마다 반딧불이가 지천이고 잠자리가 춤을 추면서 매미소리가 숲 속에서 노래 할 적에 정토인 것이다.
362, 칠보궁(七寶宮)
금은 칠보가 보배가 안이고 몇 백년 된 고서가 보물인 것을 보고, 지금까지 생각한 보배의 가치관이 바꾸어진 것이다. 보배는 물질이 아닌 정신 가치관으로 인간들이 물질에만 보배라 하여 인식되어서 정신의 가치관을 쓰레기처럼 방치하고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지역마다 조상 얼이 무궁 무진한 것이지만 정신 가치관을 발굴하려들지 않고 잊어버리고 산다. 자신의 마음가짐이 얼이고 보배인 것을 모르고 평상시 아무 생각이 없이 말을 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모든 것이 스스로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법으로 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세계를 만들고,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세상을 만드는 것이므로, 바른 마음가짐은 모든 문제에 원인이 되는 것이다.
363, 법공(法空):
부처님 법도 경전으로 문자 법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고, 특히 문자 속에 뜻을 선(禪)의 마음이라 하시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부처님 마음이 전하여지고 있는 것이 바로 선(禪)인 것이다. 법공(法空)은 문자보다 마음으로 전하는 선(禪)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문자 속에 문자을 여인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364, 무위(無爲)
내가 몸이 있는데 몸이 없는 역할을 하려면 일반적으로는 바보 천치라 하고 고상하게 말하면 도인 마음이라 하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하지, 무아(無我)사상은 내가 없다는 마음가짐을 말하므로 장애가 없는 것이다. 모든 고통은 내가 있어 내 라는 모양과 이름이 나타나므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내가 없으면 일어나지 안는 것이다. 자연인으로 사라는 것은 공기처럼 만물에 순응하면서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365, 정덕(淨德)
청정이 복덕인 것은 물이 청정하면 생명이 잘 자라고 병은 없어지고 치료되고 생명력이 증장 되면서 열매가 더욱 증식되는 것은 청정의 생명력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청정하면 지혜의 가치관이 확연하여 사리가 분명하고 판단력이 빠르고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66, 덕산(德山)
공덕림은 사찰을 말하고 사찰을 총림이라 하여 숲의 나무처럼 많은 스님들이 수행하시는 도량인 것이다. 총림(叢林)에는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 행정원등 대중이 300명 이상 운집하여 수행하는 곳이 총림이라 하여 항상 대중의 뜻을 존중하면서 숲의 나무처럼 서로 탁마 의지하면서 수행하신다. 덕산은 마음의 덕을 숲처럼 자라게 하여 남을 구제하라는 것이다.
367, 시명(是名)
진리는 모양과 이름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게 표현하여 마음(心)이라 하고, 진리라 하고, 법성(法性)이라 하고,, 법장(法藏)이라 하여, 마음을 다른 이름으로 인연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이름도 본래는 없는 것을 내가 태어나니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시명(是名)은 그림자를 말한 것으로 이름과 모양이전의 이치를 보고 듣고 하라는 말이다.
368, 적멸(寂滅): 부처님의 사리탑을 적멸궁이라 한다. 부처님은 돌아가시지를 않고 적멸하셨다 하고 사리의 법신으로 항상 청정으로 자비 설법을 하시지만 중생들이 모양과 이름으로 보고 듣고 하므로 진리를 보고 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자연이 청정을 가르치고 내 마음에 원만 구족한 청정을 깨달으면 이것이 본래 원만 구족한 청정 법신인 것이고 내 밖에 법을 찾지 마라 수고로울 뿐이다.
369, 명심화(明心華)
마음을 밝은 구슬이라 하여 명주(明珠)라 한다. 명주는 여의주(如意珠)라 하여 관세음보살님이 용두 관음으로 구름 속에서 용을 타시고 용의 여의주를 가지고 계시므로 관자재보살이라 하고, 우리가 마음을 관하면 자재 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밝은 마음의 명주를 찾는 것이다.
370, 정법행(正法行)
바른 법은 바른 마음이고 바른 행이고 바른 일이다. 부처님 언행을 배우고 수행하면 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 중생은 모양과 이름으로 집착하여 살아가므로 항상 즐겁다 하다가 슬펴 울고 희비애락이 죽 끊듯 한다. 바른 것이 부처님의 법이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마음의 바름을 깨달아야 바름을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다.
371, 선법화(禪法華)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고 중생들의 본심이므로 두두물물에 생명존엄성이 있는 것으로 자비심의 생명력을 말한다. 개미도 움직이는 불성이 있는 것이 생명력으로 자비심인 것이 우리의 본심가 같고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 마음을 아시고 개미를 자비심으로 잘 살게 하시고, 우리는 이 마음을 인식하지만 개미를 미물이라 하여 없이 여기면서 죽이는 짖을 밥먹듯 하는 것이고, 개미는 움직이면서 움직이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차별인 것이다. 개미의 미물에도 선심(善心)은 있지만 모를 뿐이다.
372, 일해성(日海性): 태양이 마음 성품이란 것이다. 태양은 항상 빛을 발하지만 생명의 근기에 따라 살아가므로 장단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빛을 항상 발하지만 본성을 망각하고 경계의 모양과 이름으로 보고 듣고 인식하여 분별하므로 번뇌에서 윤회하는 것이다. 경계의 반연을 놓아 버리고 텅텅 빈 마음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흰 것이 오면 희고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으로 자재한 것이 마음인 것이다.
373, 자성화(自性華)
자성 청정으로 사라는 것이다. 본성이 청정하여 모양과 이름으로 표현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 누가 간섭 할 수 없고 혼자 분명하여 따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본성은 각자 스스로가 주인공이라 다른이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374, 혜명심(慧明心)
혜명은 나타난 지혜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부처님 마음이 계승하여 온다는 것이 혜명이다. 혜명의 적자 설도 있고 본래 혜명의 청정심을 스스로가 찾는 것으로 경계를 방하착하면 마음속에 본래 원만 구족한 자리를 발견하면 바로 청정으로 이 청정이 자연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어 각자 스스로가 찾는 것이다. 마침 글자를 만들어 가르치고 배워서 스스로가 자신을 알아서 실천하므로 구제가 되는 것이니, 지금까지는 구제라 하면 남의 의해서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구제하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쳐서 스스로를 구제하면 천하를 구제하는 것이다.
375, 불외자(不畏子): 두려움이 없는 자는 생사의 두려움이 없는 자를 말한다. 생사의 두려움이 없는 마음은 몸의 모양과 이름으로 보고 듣고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생사가 둘이 아닌 것은 마음으로 보면 생사가 둘이 아닌 것이다. 마음은 생사시비선악에 관계하지를 안는 것은 마음이 청정하면 성취되는 것이다. 청정하다는 것은 마음이 텅빈 마음으로도 말 할 수 있다. 내라는 모양이 없으므로 남에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불외자라 한다.
376, 정행자(正行子)
부처님을 정행자 라 할 것이다. 바른 일, 바른 말, 바른 뜻을 실천하신 자는 부처님이시다. 부처님 제자는 이러한 마음을 배우고 수행하므로 본성 청정을 실천하여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질의 욕락이나 애욕의 쾌락은 일시적인 즐거움이라 돌아서면 괴로운 것으로 즐거움이 영원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377, 무염자(無厭子)
싫어함이 없는 자는 불 보살님의 마음으로 불제자들의 길이다. 화엄경 보현품에는 보살심의 실천 원력을 세우신 보현행자는 불 보살님들의 마음은 신․구․의․업(身․口․意業)에 싫어함이 없다 하셨다. 우리가 살아가는 행위가 바로 몸, 말, 마음으로 행위를 하는 것이니, 이 행위에 순응하므로 자재하고 싫어함이 없다는 것이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에 순응하므로 구제하는 것이니, 중생이 불만이 없는 것이다. 물이 모든 생명에 순응하므로 생명력이라 하는 것이다.
378, 무주심(無住心)
머무는 마음이 없는 마음이 집착 없는 마음으로 내란 모양과 이름이 없는 마음으로 내가 없는 무아상(無我相)이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는 것이니, 항상 광명을 발하는 태양 자체인 것이다. 태양은 항상 빛을 발하지만 인연에 따라 빛을 보는 것도 있고 못 보는 것도 있는 것이다. 태양은 공간과 시간에 구애 없는 것인데 만상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는 것이 다른 것이다.
379, 여실행(如實行)
부처님 같이 하라는 것이 여실행이다. 실다움은 본래 없는 것이지만 이름하여 실다움이라 한 것이지, 영리한 준마는 주인의 마음을 알아서 목적지에 가고 영리하지 못한 말은 가다가 풀도 뜨어 먹고 이산 저산 구경도 하고 가다가 주인에게 혼이 나기도 하고 깔끔하지 못하고 분잡한 것이니, 주인이 싫어하는 것이다. 여실행은 준마처럼 진실하고 여여하여 그대로 진리이고 법이고 실천인 것이다.
380. 무각심(無覺心)
부처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시지만 무각심은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중생의 본심이 본래 성불이라 깨칠 것이 없다는 대승 법문인 것이다. 두두물물이 본래 성불인데 석가 황면 노자가 잠잠한 마음 바다에 파도를 일으키게 한 것이니, 방망이를 맞아도 한참을 맞을 것이니, 걱정이로다.
불명 이해 원고가 삭제된 것을 다시 켐퓨터 작업을 한 것이다.
(03년 8월 30일. 오전 7시. 통도사부산포교원. 법사 실에서.)
381, 봉정심(鳳頂心)
봉정암에는 금강산에서 아름다운 바위 대회를 하자 전국 바위들이 금강산을 가다가 시간이 늦어서 설악산에 쉬어 지금의 바위들이 잘 생긴 바위들이라는 전설이다. 봉정은 아름다운 바위들로 부처님 같기도 하고, 봉황새 머리 같기도 하고, 스님 같기도 하고, 신선 같기도 하여 보는 자들에 마음이 신비롭고 물, 바람, 구름, 바위들의 조화로 극락세계의 하늘 나라에 온 기분으로 세상의 어지러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청정하게 하여 산다고 잊어버린 본심을 찾게 하는 곳이라 여가가 있어 자주 가면 마음에 힘을 얻는다.
382, 감로자(甘露子)
감로수는 부처님전에 청수를 올리고 기도하기를 감로수로 변하여 중생의 약수가 되게 하여 달라는 중생들의 지극심을 볼 수 있고, 어릴 적에 스님께서 사찰에 간장독에 아금청정수 변위감로장 봉헌삼보전 원수애납수(我今淸淨水 變爲甘露漿 奉獻三寶前 願受哀納水) 장독에 글귀를 볼 수 있었다.
감로미는 몇 일을 먹지 않고 배가 고프면 한 방울의 물이라도 감로미로 달고 맛이 있고, 배가 부려면 아무리 성찬이라도 맛이 없는 것이라 감로미는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383, 예경심(禮敬心)
부처님전에 예경하는 수행은 부처님 닮게다는 마음이고,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수행으로 자신을 하심하고 대상을 존경하는 수행으로 인사하는 마음이고, 부처님전에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는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받쳐 절합니다 는 마음의 맹세인 것이다.
384, 명주심(明珠心)
밝은 구슬이 마음이라, 밝음 구슬 속에 대상의 마음 그림자도 나타나는 것이라 삼라만상이 나타나므로 명주심이라 한다. 여의주(如意珠) 뜻대로 성취되는 구슬이라 밝은 마음을 말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만물이 나타나는 것이 청정수가 모든 생명에 순응하는 것과 같다. 불 보살님은 상이 없이 순응하므로 성취를 시키시는 것이다.
385, 법공심(法空心)
진리를 법이라 하지만 법은 문서로 나타나지만 진리는 문자나 언어로 나타나면 진리라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진리라 한 것은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방법론 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지만 문자에 집착하면 동쪽을 가려고 하지만 서쪽으로 가는 것이다.
386, 무불심(無佛心)
부처님은 마음의 주인공이라 하지만 주인공이라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라 이름 할 것이 없는 것이니, 부처가 있으면 부처의 종 놀이를 하여야 하고 있다 없다 시비를 하지만 주인공이 없으니 시비가 없는 세상이다. 무불심은 시비 없는 세상으로 모양과 이름이 끊어진 것이고 언어 도단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다.
387, 무색심(無色心)
물질을 여인 마음을 말하고, 공심(空心)의 정신세계를 말한다. 색공불이(色空不二)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닌 세계는 물질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마음이고, 마음이 일어나므로 물질이 생기는 것이라. 물질의 근본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라, 물질의 원소는 물질이 아닌 에너지 구성원이다.
388, 법왕심(法王心)
법왕을 부처님이라 하지만, 심왕(心王)을 말한다. 심왕은 마음이 삼라만상을 만들고 형성하는 것이라, 마음의 청정본심에서 원만 구족한 지혜와 복덕을 실천한다면 경계의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처음 발심하기가 힘든 것은 인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욕망의 애욕을 즐거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생명존엄이 결여된 생각에 치우쳐서 일시적이고 순간적으로 즐거움에 만족하는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참아서 견디어 성취하는 일들을 잊어버리고 생각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니, 지혜가 없는 지식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심왕(心王)은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389, 삼매자(三昧子)
삼매심은 하나되는 것으로 바위와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에서 관계가 없는 것이다. 바위를 보고 저 바위를 쪼개어서 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 실천하는 것이니, 바위가 내 마음이란 것이다. 억겁을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고 널리고 하는 심통 자재한 것이니, 지금 생각이 만년 전을 생각 할 수가 있고, 만년 미래를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니, 신통이 아니고 심통인 것이라 할 것이고 신통은 만년전 자신을 생각하면서 현재 형성하면 생각과 행동, 말을 하므로 형성이 되는 것이니 신통인 것이다.
390, 묘법장(妙法藏)
마음의 도리는 깊고 깊은 미묘한 법이라 있다고 하면 없고 없다고 하면 있는 것이 마음이라 마음은 있다 없다에 자재한 것이다. 물이 온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모양을 관찰하면 냉하면 얼음, 구름, 비, 이슬, 안개, 눈으로 형성되고 온도가 높으면 공기, 수증기로 형성되면서 생명에 순응하면 생명의 모양과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미묘한 묘법장이라 마음 작용하고 같은 것이다.
391, 일미심(一味心)
한 맛이 일미 라 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미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으로 형성되는 것이라 일미 라 할 것이다. 집이 마음이란 것은 집을 설계하고 지으면 집이 형성되는 것이므로 마음가짐이라 일미심인 것이다.
392, 대승심(大乘心)
분별심이 없는 큰마음을 대승심이라 하고 자연스러움을 대승이라 한다. 빛이 생명에 순응하고, 물이 생명에 순응하고, 공기가 생명에 순응하고, 흙이 생명에 순응하는 것이 자연이라 하고, 대승심으로 살아가는 진리인 것이다.
393, 공유심(空有心)
공(空)은 정신을 말하고, 유(有)는 물질을 말하는 것으로 정신과 물질을 겸비한 것으로 육신과 정신이 산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산 사람의 정신은 공유정신으로 청정 법신은 생사가 없는 정신으로 항상 청정으로 살면 공유 정신이라 할 것이다.
394, 원융심(圓融心)
원융 무애심을 말한다. 둥근 원을 그리면 시작 점이 마지막 점의 만남으로 둥근 원이 형성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회향심(廻向心)으로 회향은 마지막이 아닌 것으로 다시 시작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등학교를 입학하고 거듭 거듭 하는 것으로 생(生)과 사(死)가 반복이 되는 것이 윤회라 윤회를 고통으로 보지만 본 마음을 찾으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원융 무애 라 할 것이다.
395, 본각심(本覺心)
근본심을 깨닫는 것으로 원래 원만 구족한 지혜와 복덕의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의 본심을 확인하면 견성(見性)으로 성품을 본 것으로 번뇌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중생의 본심이 부처님의 마음과 동일하지만 중생 스스로가 마음 밖에서 마음을 찾아 수고로움만 더 할 뿐이라 바로 마음속에서 마음을 찾아야 본각심(本覺心)이라 할 것이다.
396, 타파심(打破心)
마음으로 화두를 타파하면 깨달음이라 한다. 화두를 타파하는 것은 마음을 비우므로 성취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한 문제를 관찰하면 형상과 이름 이전의 형성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 인연 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 할 수 있는 마음의 가치관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치관이 나타나면 이름과 형상의 집착심이 타파되고 마음의 가치관이 확립되는 것이다.
397, 해탈자(解脫子)
육신의 생사는 인연 법으로 거듭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형성되고 마음은 선악업(善惡業)으로 거듭하지만 선악에서 해탈하여야 본성을 본다고 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마음에 무아(無我)정신은 몸은 지수화풍으로 형성되고 소멸되는 인연 법이라 몸이 자연으로 오고 가고 하는 인연 법을 관찰하면 몸의 이름과 모양이 변화하는 과정을 깨달아서 집착심이 없으므로 고뇌가 없으므로 무아 라 하고 해탈자 라 할 것이다.
398, 불국화(佛國華)
불국토는 극락세계이고 불국 정토를 말한다. 사철을 불국 정토라 할 것이다. 사찰은 부처님의 집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가 되는 것은 마음 청정을 말하고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여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불성 청정이 본래 있어서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깨닫게 하여 고통이 없는 정토로 더불어 사는 것이다. 요즈음 환경운동이 생명존엄 운동으로 깨달음 운동이므로 불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실천하게다는 원력이 발심(發心)인 것이다.
399, 불퇴심(不退心)
바름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바름의 양심을 저버리고 욕망으로 자신의 몸에 집착하여 양심을 팔고 나라를 팔고 의리를 팔고 생명존엄을 저버리고 이익을 취득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바름에서 항상 정진하면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흐르면 지혜가 생기고 복덕이 생기고 거짓은 시간이 가면 재앙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중생의 복덕과 지혜는 바름에서 불퇴심인 것이다.
400, 수선행(修禪行)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고 수행자의 본심으로 청정심을 말한다. 항상 청정심으로 사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청정심은 바른 마음이므로 바름의 얼을 잊어버리면 선심(禪心)이 아닌 것이다. 수선행은 바른 마음의 지속심인 것으로 실천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