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ㆍ‘파리의 연인’ㆍ‘코리아 게이트’에 이어 또다시 색다른 TV 보기 체험을 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MBC주말드라마를 본 것이다. MBC ON이 6월 14일부터 8월 1일까지 방송한 54부작 ‘반짝반짝 빛나는’이다. MBC ON으로 드라마를 본 건 처음이지 싶은데, 좀 당황스러웠음부터 먼저 밝혀야겠다. 44회와 51회를 두 번씩 방송해서다. 수십 년 이어온 드라마 보기에서 처음 겪는 ‘해괴한’ 일이다.
사실 밤과 달리 낮시간에 주 4회 방송되는 드라마를 보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재직중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퇴직하여 있는 건 시간뿐인 생활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따라서 아주 큰 맘 먹고 본방사수한 ‘반짝반짝 빛나는’이라 할 수 있다. MBC ON의 경우 드라마 전문채널 ‘엣지TV’처럼 재방송이 없어 더 큰 맘을 먹고 봐야 했다.
그러니까 월~목요일 오후 1시부터 시작하는 2회 연속방송을 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상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가령 오후 1시 넘어서 먹던 점심식사를 이전으로 앞당겨야 했지만, 그러나 1회부터 그런 건 아니다. 첫 방송임을 알고도 채널을 돌리다 나오면 띄엄띄엄 보다가 마침내 작정하고 보기 시작한 것은 19회부터다.
12년 전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을 중간에 애써 챙겨본 것은 왕년의 인기 때문만은 아니다. 궁금증과 함께 다음 회를 기다리게 하는 이야기 전개 때문이다. 스토리의 힘이라 할까. 출판사가 주요 배경인 것도 챙겨본 이유의 하나다. 그냥 슬쩍 나왔다가 이내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출판사 ‘지혜의 숲’은 스토리의 힘을 발휘하는 주요 배경이다.
‘반짝반짝 빛나는’은 2011년 2월 12일부터 8월 14일까지 방송된 MBC주말드라마다. 9.6%(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하 같음.)로 출발했으나 최종회 시청률은 22.5%를 찍었다. 최고 시청률은 25.3%다. 30%대 시청률의 주말드라마들이 즐비하니 대박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상당히 인기 끈 ‘반짝반짝 빛나는’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보도를 보면 “<반짝반짝 빛나는>은 오랫동안 KBS2 주말극에 밀려 부진했던 MBC 주말극의 부활을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천하일색 박정금>(2008년) 이후 3년 만에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 탄탄한 스토리와 출연 배우들의 호연이 어우러지면서 중반 이후 꾸준히 20%대 시청률을 유지했고, 결국 <회전목마>(2004년) 이후 7년 만에 KBS2 주말극의 시청률을 뛰어 넘었”(스포츠경향, 2011.8.15.)던 드라마다.
원래 50부작으로 출발했던 ‘반짝반짝 빛나는’이 54부작으로 연장 방송된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런 인기 드라마를 왜 그때는 소 닭 보듯 했는지 기억이 안나지만, 짐작은 해볼 수 있다. 이미 ‘자이언트’ 편에서 말했듯 2010년에 이어 2011년도 아주 뜸하게 드라마를 보던 개점 휴업상태 바로 그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이 방송되던 때 내가 본, 그러니까 나의 평론집 ‘TV 꼼짝 마’(신아출판사.2017)에 실린 드라마는 ‘광개토태왕’(KBS 1TV)ㆍ‘스파이 명월’(SBS)ㆍ‘공주의 남자’(KBS 2TV)ㆍ‘계백’(MBC) 등이다. 아,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종영 3개월쯤 후 방송을 시작한 MBC창사50주년 특별기획 ‘빛과 그림자’도 본방사수했던 드라마다.
‘반짝반짝 빛나는’은 산부인과에서 갓난이의 부모가 바뀐 채 성장한 한정원(김현주)과 황금란(이유리)이 원위치해가는 과정을 겪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지웅(장용)ㆍ진나희(박정수)와 황남봉(길용우)ㆍ이권양(고두심)이 정원과 금란을 각각 키워준 부모다. 그런 이야기에 송승준(김석훈)과 그의 엄마 ‘종로 백곰’(김지영)이 얽혀 있다.
앞에서 잠깐 말했듯 주요 인물이 출판사 사람들이다. 정원은 팀장이고, 승준은 편집장이다. 금란은 새내기 직원으로 들어간다. 정원을 키워주고, 금란의 생부인 지웅은 사장이다. 그의 아들, 그러니까 금란의 오빠인 한상원(김형범)은 전무다. 상원을 뺀 그들 모두의 책 만들어가는 과정이 제법 소상하게 펼쳐진다.
무엇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은 출생의 비밀이 나오는 여느 드라마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이 강점이다. 아마도 친부모 딸들로 돌아간 후 벌어지는 그 리얼한 전개 때문일 것이다. 실제 아이가 바뀌고, 성년이 되어 그 끔찍한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을 마치 작가가 경험이라도 한 듯 펼쳐보인 리얼함이다.
가령 정원에게 빼앗긴 모든 걸 되찾는다며 이런저런 악행을 일삼던 금란의 박진감 넘치는 모습이 그렇다. 나름 개연성이 있어 보일 뿐아니라 종로 백곰 대신 칼침을 맞은 후 ‘착한’ 딸로 돌아오는 금란이 정원보다 더 눈길을 끈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물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승준과의 사랑에선 정원이 금란보다 한 수 위다. 딱히 감동적인 드라마는 아니더라도 콧등을 시큰하게 하는 어떤 울림을 준 것은 정원이다. 가령 “배고파서 화날려고 해요. 사탕 없어요?”(35회)라 말하는 장면이 그렇다. 갯벌에서 승준에게 진흙을 뿌려대며 울먹이는 정원의 모습(54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원 캐릭터가 독특하긴 하다. 정원은 시어머니(결국 승준과 결혼식을 올리며 끝나니까) 사주로 금란이 겪었던 구덩이 속에 갇히고도 오히려 그걸 통해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긍정론자다. 친부의 도박현장을 찾아가 직접 신고해 경찰에게 붙들려가게 하는 정원이기도 하다.
브래지어를 두 개 사와 병실의 금란에게 “바다 가자”며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도 정원이다. “싫어도 어머니까지 옵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시어머니 냉대에도 불구하고 지극정성을 다하는 정원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사리분별 못하는 ‘푼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령 강대범(김동호)에게 “고시 꼭 붙으라”며 애틋하게 말하는 등 마치 연인 대하듯 하니까.
그런 전개는 스토리의 힘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 불만스럽다. 일단 도도하고 까칠한 승준의 정원을 향한 질투 등 연애하기는 웃음과 함께 볼만한 재미를 주긴 한다. 그런 승준을 미치고 팔짝 뛰게 하려는 게 대범의 역할일까? 정원은 끝까지 대범으로 하여금 좋아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언행을 일삼다가 승준이 떠나간 날 기습 뽀뽀와 함께 고백을 받기까지 한다.
더 가관은 승준이 왜 화를 내는지 몰라 물어본다는 정원의 모습이다. 푼수가 아니고야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는지 좀 억지스럽다. 밀당(밀고 당기는 것)이 연애의 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질질 끌어 짜증스럽기도 하다. 사귀기로 했으니 쭉 전진만 있으면 더 좋았을텐데, 결혼식을 올리는 끝까지 밀당을 접어두지 못한 모양새라서다.
승준의 금란에 대한 태도도 비슷하다. 금란이 정원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승준을 사랑하고, 결혼하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관심과 함께 위로가 되고 있다고 느껴 그리된 것이다. 승준이 다른 것은 ‘인간적’이라며 금란에게 분명하게 선 긋는 걸 정원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내가 꼰대라 그럴까. 자고로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 아가씨의 처신이 그러면 위험하다.
보기가 불편한 것들도 더러 있다. 특히 금란이 자란 집안의 권양을 뺀 가족 묘사는 ‘저거 실화야?’ 할 정도다. 나로선 ‘서민 폄하’로 보이기까지 한다. 예컨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고기를 걸신 들린 듯 먹어대는가하면 금란이 가져온 선물에 ‘환장’하는 모습이 그렇다. 밥상을 따로 받은 남봉과 사위 박상혁(김상호)이 옆에 차려진 계란후라이를 보며 침 흘리는 것도 그렇다.
지나치게 궁상맞고 혐오스러운 서민만으로 부족했는지 천륜을 어기는 망극한 묘사도 있다. 아무리 도박 및 그 빚으로 인해 죄인처럼 살아가는 남봉이라 해도 큰딸 태란(이아현)이 보는 앞에서 아내에게 무릎 꿇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되어서다. 더 충격적인 건 태란이 아버지와 남편 중혁을 향해 “이 두 인간을 어떻게 해요”라며 거드는 장면이다.
말 안 되는 장면들도 있다. 가령 처음 본 승준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중혁이 그렇다. 한 번이 아니다. 태란이 첫사랑이라는 제갈준수(원기준)와 세 명이 만나서도 중혁은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 윗사람으로서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이다. 남봉이 처음 만난 사윗감 승준과 목욕탕을 가는 건 그럴 수 있다쳐도 대뜸 반말에 ‘임마’하는 건 좀 아니지 싶다.
그런 게 더 있다. 영락없는 주부가 된 상원이 그렇다. 부모가 작당한 ‘어른스럽지 못한 아들 길들이기’라곤 해도 부엌일ㆍ빨래ㆍ청소ㆍY셔츠 다림질에 이어 육아까지 하는 남자로 변신한 건 보기 불편하다. 좀 억지스럽게 느껴져서다. 그뿐이 아니다. 상원은 누나라 부르던 아내 이은정(전수경)이 서둘러 출근해버리자 “이제 뽀뽀도 안해주고 가냐”고 푸념을 늘어놓기까지 한다.
18세의 어린 삼촌 한서우(박유환)가 출판사에 들렀다가 한송이(유사라) 직원을 보고 한눈에 반해 코피까지 쏟는 건 다소 과장일망정 그럴 수 있다 해도 그에 대한 매듭이 되게 황당하다. 별다른 진전이 없는 일방의 짝사랑 모드였는데, 갑자기 서우가 정원과 승준 결혼식에서 만난 송이의 손을 살며시 잡고 있어서다.
승준이 공부하는 대범에게 아들을 넘겨받아 봐주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해도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까지 시키는 것 역시 좀 아니지 싶다. 사채업자 엄마의 모든 악행에 대한 죗값을 스스로 짊어지려는 승준의 정원 포함 모든 걸 버리고 떠나기도 당혹스럽다. 아들로서 엄마를 감옥에 가게 했으면 사채업자 아들이란 죗값은 충분히 치른 게 아닌가?
너무 허망하거나 싱겁게 무너져버린 종로 백곰의 모습도 너무 억지스럽다. 승준의 대안학교 선생 되기는 좀 안 어울리는 반전으로 보인다. 아내가 장님되는 걸 알고 갑자기 진중한 사람으로 변하는 남봉도 보기 민망하다. 김밥을 만들어 바닷가로 가는 게 진짜 안 어울릴 뿐아니라 심지어 징그럽기까지 하다. 무슨 활력을 불어넣기보다 생뚱맞게 다가오는 갑작스런 캐릭터 변화라 할까.
이별할 때 승준이 정원에게 건넨 레코드판을 너무 오랜 기간 열어보지 않은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LP판을 빼고 A4 용지 서류를 넣은 것이라 만졌을 때 촉감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어, 뭐지’ 하며 직방 열어봐야 맞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어서다. 게다가 정원 혼자만 만진 것도 아니다. 대범이 버려진 레코드판을 주워 정원 방에 갖다 놓았는데도 그렇다.
디테일 묘사도 좀 허술하다. 우선 백곰 저택에 왜 가정부가 없는지 의아하다. 유턴 지역 아닌 데서 불법 유턴을 하는가 하면, 승준이 대안학교 교장(정규수)에게 빌린 휴대폰을 돌려주는 장면없이 화면이 바뀌기도 한다. 승준과 첫 키스한 날 정원이 운전한 빨간 색 차량은 차고에 들어가지 않은 채 화면이 바뀌고 이후 안나온다.
또 있다. 금란이 불임(不姙) 아닌 걸 알고 링겔을 뽑은 채 환자복 차림으로 택시를 탄다. 백곰 집 앞에 도착한 금란이 요금 달라는 택시기사에게 1억 원짜리 수표를 건네는데, 의아하다. 백곰이 “5천 주지 했다가 적으면 8천 주겠다”며 매수한 의사가 금란에게 돌려준 수표여서다. 대범의 검사 임용후 적어도 머리 스타일 정도는 변화를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아쉬운 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은, 순리 거스른 매듭이다. 금란과 정원 모두 지금의 성씨 그대로가 좋다고 해 친부모의 딸들 되기가 한바탕 해프닝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결구(結構)라 그렇다. 황금란은 한금란, 한정원은 황정원이 되는 게 순리다. 순리대로 하고 두 집안이 서로 교류하며 잘 지내는 미래여야 했다.
발음상 오류도 거슬린다. “반짝반짝 비슬(빛을→비츨) 내면서”(28회), “깨끄치(깨끗이→깨끄시) 단념혀”ㆍ“웬 꼬슬(꽃을→꼬츨)”(29회), “비슬(빚을→비즐) 퉁쳐주네”(31회), “더시다(덫이다→더치다). 내가 놓은 더세(덫에→더체)”(36회), “한글도 갈켜(가르켜→가르쳐) 주었고”(50회), “창꼬(창고)”(51회), “깨끄치(깨끗이→깨끄시) 잊겠다더니”(53회) 등이다.
각기 다른 배우 발음인 걸 보면 대본의 문제로 보인다. 이와는 다른 얘기지만, 한 가지 신기한 게 있어 마지막으로 특기한다. 50회를 보면 “수박값이 엄청 비싼 게”라는 내용이 있다. 12년 전 이야기인데, 2023년 여름 수박 한 통이 2만원을 훌쩍 넘겨 사먹기 부담된다는 뉴스를 대할 수 있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