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에 서다
끝없이 이어지는 황금빛 가을 평야, 김제
산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전라북도 김제.
너른 벌판에 황금빛으로 익어 가는 벼들, 그 많은 곡식 때문에 오히려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곳.
풍요와 수탈, 항쟁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김제로 찾아가 본다.
가없는 지평선, 줄지은 전봇대, 지평선 끝에 걸릴락 말락 자그마한 지붕들.
어쩌면 지평선 저 멀리 내가 꿈꾸는 세상이 있을는지 모른다.
전쟁과 테러가 없는 세상, 보복을 하지 않고 화해와 용서를 나누는 세상,
힘있는 자는 가진 것을 베풀고 약한 자는 몸을 일으켜 감사하는 세상,
돈을 벌려고 곡식에 농약을 치고 동물에게 항생제를 먹이지 않는 세상,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감사할 줄 아는 세상,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행복한 세상,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세상.
그러나 그런 세상은 여전히 저 지평선 너머에만 있는가 보다.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려고 하지 않은 채 지평선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일는지 모른다.
ㆍ드넓은 평야, 수탈과 항거의 역사를 지닌 곳
지평선을 바라보며 망연자실 허탈한 생각에 잠기다가,
꿈을 이루려고 떨쳐 일어난 사람들의 함성을 들었다.
오래 전 자신이 수고한 것을 빼앗기고 만 분노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억압하는 봉건제도에 맞선 이들의 분노.
지평선 넓은 들 위로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끝없는 지평선은 산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풍광이다.
바다와 하늘이 어울려 만든 수평선이 아름답듯이 지평선도 사람에게 묘한 매력을 준다.
김만평야,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아우르는 김제 일대는
‘징게맹개 외배미들’이라 불린다.
‘김제 만경 너른 들’이라는 말로 외배미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툭 트였다.
그만큼 넓다는 뜻이다. 하지만 풍요로운 만큼 수탈의 역사도 한스러운 곳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이 이미 지어진 보 아래에
새로운 ‘만석보’를 짓고 강제로 물세를 수탈한 역사를 기억할 것이다.
가뜩이나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던 농민들은 마침내 죽창을 들고 일어섰다.
물세를 감면해 달라고 찾아갔다가 뭇매를 맞은 아버지를 들쳐업고 돌아오던 청년, 전봉준.
죽어 가는 아버지를 업고 돌아오는 그의 분노 너머에도 지평선은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에 불을 붙여 농민들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다.
만석보는 그 뒤, 분노에 가득 찬 농민들에 의해 부숴지고 지금은 그를 기념하는 유허비만 남아 있다.
수탈의 상징이기도 한 그 자리에 서면 여전히 들리는 함성,
분노로 일어나 죽창을 잡고 썩어 가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
김제의 가없는 들판을 달리고 또 달려 농민전쟁의 유적을 찾아 나선다.
농민군 지도자들이 최초로 모여 모의를 했던 집터에 세워진
‘동학혁명 모의탑’에는 그 유명한 사발 통문이 선명하다.
주모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하려고 사발을 엎어 둥글게 이름을 돌려가며 쓴 것이다.
고부 관아가 있던 자리에는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관군과 싸워 대접전 끝에 승리를 거둔 황토재에는 황토재 전적지가 세워져 있다.
농민정쟁 당시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이곳에서 관군을 맞아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ㆍ삼한시대의 저수지 벽골제
지금은 그 원형이 거의 없어졌다고 하지만 벽골제는 여전히 역할을 하고 있다.
삼한시대에 만들어진 이 호수를 사이에 두고 호남과 호서지역을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벽골제라 부르게 된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고장의 다른 이름인 ‘볏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저수지 공사를 할 때 바닷물이 들고나는 때문에 자꾸 저수지 둑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공사감독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벽골’,
즉 푸른 뼈를 흙과 함께 섞어 쌓으면 공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푸른 말뼈를 갈아 섞어 공사를 하였더니 무사히 둑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ㆍ금산사 미륵전과 망해사에서 맞는 일몰
호남 미륵신앙의 도량인 금산사는 웅장한 미륵전이 자랑거리다.
3층으로 된 외관부터 예사롭지 않다.
우리 나라 건축에서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3층 건물인데 물론 내부는 하나로 되어 있다.
내부에 있는 미륵삼존입불이 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머리를 거의 뒤로 완전히 젖혀야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다.
김제의 또 다른 절, 망해사는 바로 서해변에 있다.
작은 절이라서 더 운치있고 정감이 느껴진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일몰을 감상하기도 그만이다.
글 / 원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