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세계(요 11:41-44)
우리 인생에 있어서 풀기 어려운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번째 어려운 문제는 허무의 문제입니다. 정말 인생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정말 인생의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철학은 예외 없이 헛되고 헛되고 헛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헛 되고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헛되지 않은 것이 없도다."(전 1:14)
"인생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잠깐 있다 없어질 안개니라."(약 4:14)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도다"(벧전 1:2 4) 허무한 인생이면서도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첫번째 인생의 숙제입니다.
둘째로는 모순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선을 좋아합니다. 모든 사람이 선을 좋아하는데 실제로는 악이 세상에 만연해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악의 강이 내 인생 한 복판을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끔찍한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얼마나 착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마음속이 얼마나 선의지로 꽉 차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죄를 지은 것이죠!
사도 바울이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서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세 번째로는 생(生과) 사(死 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정말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을까? 하는 문제 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인생은 간단하지요.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나 인생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큰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죽음 저편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 그것이 우리를 고뇌케 만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 세가지 문제는 정말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세 문제 가운데 마지막 문제만 해결되면 앞의 두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합니다.(삶과 죽음의 문제)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 전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가정이 베다니에 있었습니다. 그 집에 만 가면 늘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께서 그 가정을 몹시 사랑하신고로 이틀을 더 유했다고 합니다. 병들었다고 하면 얼른 뛰어가서 고쳐주어야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가정에 하실 일이 있었습니다. 빨리 가셔서 그를 병상에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83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박동근 집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가정을 생각했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던 가정 말입니다. 주께서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신 나사로만 사랑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마르다도 마리아도 사랑하셨습니다.
박동근 집사님은 주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언젠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제가 방문하여 기도해 드린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하셨고 언제나 인자한 모습이 얼굴에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인의 마음은 예수님처럼 인자하셨고 우리 정봉순권사님과 온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주의 종을 돕고 섬기면서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또한 인자한 아버지로써 사랑으로 자녀들을 기르신 훌륭한 아버지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에 나오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을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셨던 것처럼 온 가족들(유족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빠짐없이) 그렇게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유족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오늘 조문 예배를 위해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주님이 나사로만 사랑하셨을까?” “주를 믿는 자 모두를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오늘 발인하는 고인도 오늘 모든 유가족분들도 오늘 우리 모두도 사랑하십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런 믿음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게는 있지만 주님께는 없는 단어가 있습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거짓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예수님께는 실수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실 수 연속이라고 말한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실수가 없으십니다. 또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되신 주님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인생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의 중단이라는 뜻이 아니라, 분리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져야합니다. 어느 날 '끝났다'가 아닙니다. '분리되었다'가 되어야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를 성경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마르다가 마중나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이 여기 계셨으면 내 오라비 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을 내가 믿습니다." 정확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살리라." 그랬더니 마르다가 말합니다.
"예수님, 마지막 날 부활 때 내 오라비가 살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정답을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할때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에 보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F.B. 마이어라는 성경학자가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썼습니다. '만약 주께서 그냥 나오너라고 했으면 그 동산에 있는 모든 시신이 다 일어날 뻔했는데 나사로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나사로만 무덤에서 나왔다.'
우리 주님은 정확하게 나사로를 아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 땅에 믿는 사람이 수없이 많으니 주님이 나를 정확히 모를 것이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아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하늘 끝까지 날아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고 내가 저 음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께서 거기 서도 나와 함께 하셨다"(시 139:8)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고인을 아십니다. 이 땅에서 훌륭하게 자녀들을 기르시고, 이 땅에서 훌륭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고인을 아십니다.
박동근 집사님은 그 동안 살아오시면서 많은 어려움과 역경 가운데서도, 무거운 인생의 고난의 짐을 주님안에서 쉬고 가볍게 여기며,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살아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인 짐을 벗어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 영원한 안식이 있는 세계,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박동근 집사님은 앞에서 말씀드린 인생의 세가지 난제를 주안에서 살면서 다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금자 권사님은 영원한 생명의 주님안에서 모든 역경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이제 유족들께서 아버지의 신앙을 아름답게 이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더욱더 영광 올려 드리시는 귀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무덤속에 있는 나사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 마리아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사랑받는 귀한 가정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유족들이)
주님과의 만남(마 4:19-20,엡 4:15)
성도의 신앙은 여러 단계를 거칩니다. 처음 구주를 영접한 후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쳐 성숙된 성도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15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히브리서 6:1,2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오늘 고 최광모집사님의 발인예배를 드리면서 베드로의 신앙의 모습을 살펴 보고 최광모 집사님은 어떤 모습으로 신앙의 승리를 이루었는 지, 또한 오늘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주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신앙의 첫 단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신앙의 첫 단계는 주님과의 만남의 단계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떤 분은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어떤 분은 위급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를 찾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를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신명기 4:29에도 보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최광모 집사님은 이미 오래전 하나님을 만나셨습니다. 하나님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시길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찾는 자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모시고 내 마음 중심에서 만나서 믿음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맺되 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찬송가에 보면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사야 55:6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외형을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모든 유가족들이 온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간절히 하나님을 찾음으로 주님과의 만남이 꼭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우리 삶에 있어서 올바른 정신을 가져야 훌륭한 인물이 되듯이 올바른 신앙의 고백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3)
이렇게 믿음의 신앙 고백이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삶을 일으키십니다.
오늘 고 최광모 집사님은 분명한 신앙의 고백속에서 살으셨기 때문에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실 것입니다. 무덤문이 열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생 구원을 누리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 신앙고백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셋째 단계은 주님께 대한 사랑의 단계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시며 주님께 대한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 대한 신앙도 고백했지만 이제 주님께서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15~17에 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8:3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우리를 아시는 바가 된다고 했습니다. 시편 91:14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했습니다.
잠언 8:17에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가장 쉬운 일은 예수님 믿은 일입니다. 최공모 집사님이 그렇게 사셨던 것처럼 오늘 모든 유족들과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승리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넷째, 구원의 단계입니다.
베드로는 사랑의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 4:4).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주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우리 인생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이 영원한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님의 죽음을 헛되이 여기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 있다 하셨습니다. 최광모 집사님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늘에 시민권자로써 사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므로 영생복락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실 것입니다. 이제 모든 유가족과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속에서 사시길 바랍니다......
천국의 소망(빌립보서 3장20-4: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듣을 수 없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사람의 말로, 혹은 사상가의 말로 듣는다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시는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아니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부활과 생명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믿는 자를 위한 처소를 예비해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평생토록 하나님만을 섬기시며 예배의 자리를 지켜 오신 최광모 집사 집사님을 위해서도 처소 가장 좋은 저 천국을 예비해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이 귀한 주님의 말씀은 육신의 이별로 슬픔을 가지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최광모 집사님도 이 말씀으로 주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97세까지 사시면서 주의 말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손에 붙들림 받을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 하늘이라 부르는 높은 곳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하늘이 X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곳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처소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의 말씀대로 그곳은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없는 곳입니다. 계시록 22장의 말씀대로 생명수 강물이 흐르고, 온갖 좋은 것이 가득한 곳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9-27절의 말씀 처럼온갖 보화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절에 보면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런데 우리 모두가 그곳에 대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분들중에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분이 바로 최광모 집사님이십니다. 최광모 집사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확연히 천국을 바라보셨습니다. 아니 천국의 삶을 사셨습니다. 최광모 집사님 참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믿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분이셨지만 신앙의 본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그러시다가 주와 함께 더 가까이 하고 싶으셔서, 아니 주님이 집사님과 더 가까이 계시고 싶으셔서 주님이 데려 가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본 바와는 다르게 살아있는 자와 죽어 있는 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우리 시민권이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흙 먼지에서 왔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곳은 저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지만 우리의 영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영원히 사는 영주권 그것을 사도바울은 시민권으로 표현합니다.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도 바울이 시민권을 얻기까지...)
이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단지 멀고 높은 우주의 공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곳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리하여 부활과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주, 예수님은 생명의 주, 예수님은 사랑의 주, 예수님은 은혜의 주, 예수님은 위로의 주, 예수님은 능력과 권세의 주, 영생의 주가 되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안식이 있는 천국에서도 우리의 삶 가운데도 함께 하십니다.
최광모 집사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구주로 섬겼습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이제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에 그곳으로 인도함을 받은 줄 믿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그 날을 기약하며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 잘 믿고 구원의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삶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요 11:17-27)
# 우리인생에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데 죽음에 관한 문제를 풀기가 어렵습니다.
한 젊은이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죽음을 위한 준비를 5분만 하면 족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이번에는 목사님이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언제 죽을지를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니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우리 인생은 내일일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아니 5분 10분 후에 일도 알지 못하고 삽니다. 근래에 가까운 일본에서 쓰나미로 인해 수만명이 순식간에 죽었습니다. 미국에선 해마다 토네이도로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몇초후에 일을 알았다면 토네이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단 5초 후에 일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일곱 가지는 분명하다고 합니다.
1. 사람은 반드시 다 죽습니다.(100% 맞는 예언)
2. 죽음앞에서 인간은 평등합니다.(남여노소,권력자,유식자,무식자,부자,가난한자,학자,현자)
3. 사람은 죽음의 때를 모릅니다.(사람이 올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4. 사람은 각각 혼자서 죽습니다.(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죽는 순간엔 혼자 죽습니다)
5. 죽는 순간엔 그 어느것도 필요치 않습니다.(돈,권력,명예,자랑,학위)
6.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7. 죽음은 삶에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복판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삶과 죽음의 문제로 완전히 해결하신 분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그리고 요한복음 11장 43절에 보면 말씀 한 마디로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나의 말이 네가 믿으면) 말씀하시며 나사로를 살려 내셨습니다. 죽은지 나흘만에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과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고 최광모 집사님의 육신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려 보내는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고인의 육신은 흙에서 왔기에 대지에 안장하여 다시금 왔던 자리로 보내 드립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고이고이 안식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제 고인의 육체는 예수 재림의 날에 신령한 육체로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영생 구원의 은혜속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공로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영생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네가 믿느냐? 마르다에게 물으셨던 것 처럼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믿으냐?(요11:25-26절)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그 날이 옵니다. 예수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에 다시오실 그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날을 바라보며 삽시다. 구원의 날,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 다시는 사망의 세력이 나를 누르는 일이 없는 날, 하나님이 안에서 참 쉬을 누리는 그 날, 그날을 바라며 믿음으로 승리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7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빌립보서 4:6~7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예수안에 있는 고 최광모 집사님을 그리고 이곳에 계신 모든 유족분들을, 모든 고인의 자녀분들을 다 지키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은혜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의 생애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부활과 생명
요 11:17-27
# 우리인생에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데 죽음에 관한 문제를 풀기가 어렵습니다.
한 젊은이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죽음을 위한 준비를 5분만 하면 족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이번에는 목사님이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언제 죽을지를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니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우리 인생은 내일일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아니 5분 10분 후에 일도 알지 못하고 삽니다. 근래에 가까운 일본에서 쓰나미로 인해 수만명이 순식간에 죽었습니다. 미국에선 해마다 토네이도로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몇초후에 일을 알았다면 토네이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단 5초 후에 일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일곱 가지는 분명하다고 합니다.
1. 사람은 반드시 다 죽습니다.(100% 맞는 예언)
2. 죽음앞에서 인간은 평등합니다.(남여노소,권력자,유식자,무식자,부자,가난한자,학자,현자)
3. 사람은 죽음의 때를 모릅니다.(사람이 올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4. 사람은 각각 혼자서 죽습니다.(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죽는 순간엔 혼자 죽습니다)
5. 죽는 순간엔 그 어느것도 필요치 않습니다.(돈,권력,명예,자랑,학위)
6.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7. 죽음은 삶에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복판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삶과 죽음의 문제로 완전히 해결하신 분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43절에 보면 말씀 한 마디로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나사로를 살리십니다.(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며)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나의 말이 네가 믿으면) 말씀하시며 나사로를 살려 내셨습니다. 죽은지 나흘만에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과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임동한 목사님의 육신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려 보내기 위해 입관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고인의 육신은 흙에서 왔기에 대지에 안장하여 혹은 화장하여 원소로 왔던 자리로 보내 드립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고이고이 안식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제 고인의 육체는 예수 재림의 날에 신령한 육체로 변화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생 구원의 은혜속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공로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영생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네가 믿느냐? 마르다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믿으냐?(요11:25-26절)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그 날이 옵니다. 예수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에 다시오실 그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날을 바라보며 삽시다. 구원의 날,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 다시는 사망의 세력이 나를 누르는 일이 없는 날, 하나님이 안에서 참 쉬을 누리는 그 날, 그날을 바라며 믿음으로 승리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7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빌립보서 4:6~7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 이곳에 오늘 유족분들의 가정과 자녀의 모습위에 오늘 우리 모든 생위에 이러한 은혜가 넘처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와 같은 믿음으로(히 11:23∼26) 어제 별세하신 최광모 집사님께서 깨끗한 세마포 옷으로 갈아 입으셨습니다. 남달리 항상 평안한 낮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살기를 좋아 하셨던 분이셨고, 남에게 페를 끼치거나 신세를 지는 일이 없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많은 사람을 끌어 안았던 분이 셨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하셨고, 많은 사람들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낌없이 쏱으셨던 훌륭한 아버지셨습니다. 자녀들을 잘 기르셨고, 이 땅에 아버지로써 간절히 기도하며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또한 자녀를 위한 사랑은 자녀들의 효성어린 모습으로 나타나 마지막까지 평안하게 지내시다가 하늘나라에 입성하시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어진 생애를 어떤 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서 의롭고 선하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겨서, 자기의 생존 세계 뿐만 아니라 후대 사람에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고인의 삶이 본이 되어 아름답고 고귀하게 신실한 모습으로 살도록 교훈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고인께서도 시대적으로 어려운 때에 태어나셔서 훌륭한 아버지로 반듯하게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아버님의 모습을 육의 눈으로 볼 순 없지만 영안이 열려져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며 하늘의 위로를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생애를 보면 온통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모습속에서 출발해서 하늘의 뜻을 이루게 되는 발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모세의 삶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믿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 까? 성경 말씀을 나누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모세는 합당치 않은 것을 거절할 줄 아는 신앙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라고 하였습니다."(24절)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부귀 영화와 합당한 지위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왕손의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서 애굽의 왕손의 위치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노예 민족이었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최광모 집사님도 그러한 아름다운 삶을 사셨습니다. 자신의 영화를 버리고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자식들을 위해 많은 애를 써 주셨습니다.
둘째, 사랑의 공동체를 만든 신앙인이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25절) 모세는 애굽 왕실 궁전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자신의 동족인 백성들과 더불어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를 원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십자가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려면 '주님과 나, 이웃과 나'와의 관계가 잘 이루어져야 함을 상징으로써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생활 속에 참된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시 133:1∼3).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사람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여러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집사님은 하나님앞에서도 자녀들 앞에서도 이웃과의 관계속에서도 최선을 ...
셋째, 고난을 극복할 줄 아는 신앙이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25절)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고난은 유익이 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잠시 잠깐의 즐거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보이는 즐거움은 우리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 사랑, 은혜, 진리, 약속, 저 천국, 믿음, 소망, 은사, 이러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지켜가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고 소중한 것들을 위해서 눈에 보이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고인은 영원한 것, 정말로 소중한 것을 바라며 살으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유한되기에 인생살면서 저는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을 꼭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모세가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기를 기뻐한 이유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원한 거처가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눈물로 예배를 드리는 유족들께서 정말로 소중한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언젠가는 어머니가 가신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넷째,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온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26절) 우리가 모세를 생각할 때, 모세는 성격이 큽하고 굉장히 사나운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민수기 12:3 / 개역개정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쉬운성경 모세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모세는 땅 위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끝까지 상 주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온유한 모습으로 .... 그리고 영원한 의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오늘 본문처럼)
모세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귀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광모 집사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