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공장 황사장과 계악된 공장 시찰을 가면서 좀더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만큼 친숙해졌다. 황사장은 젊을적 일본 김치 회사에 기술 고문으로
스카웃 되어 근무 하기도 했지만 회사안에 조총련이 여럿있어서 사상적인 대화가 오가기라도 하면 매우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그 스트레스
누적으로 몇년 후 귀국하고 단위농협 소속인 농협 C식품에 스카웃 되었다가 김치사업이 사업성이 보이자 중앙회로 편입되었고 중앙회 파벌의 텃새로 일 보다도
스트레스가 많아 독립을 결심했다는 이력을 말해주었다. 거래처는 기존의 쌓여진 인맥들로 이미 걱정이 없었고 제조는 그가 전문가적 입장이므로 또한
문제 없어 보였다. 황사장, 회계에 사모, 제조관리에 처남, 생산기술에 김부장, 영업관리 및 배송에 나, 주부사원 네명 이렇게 개업 되었다. 명색이 창립
멤버라는것에 자부심이 있었고 무엇 보다 통닭을 구우며 얼굴이 그을려 기미 같은것이 생겼었는데 점점 깨끗해져 기뻤다. 초기 나의 임무는 배송이었고
판매 보다 생산량이 늘어나면 영업을 늘릴것 인데 항상 물량이 부족해 영업의 폭은 적었다. 김치라는것이 부딛혀 보니 도매쪽 매출은 마진이 박했으며
원가를 맞추려니 원재료 저가 공급이 쉽지 않았다. 사장은 아마도 농협이라는 거대 기업의 입지에서 원재료를 공급 받았기에 매입의 고난을 간과하지
못한 듯 보인다. 장마나 태풍이 오면 공급이 매우 어려웠고 기상 문제에 대비하여 미리 생산량을 비축해 두는것이 옳은 일인데 회사에는 자본이 부족했다.
또한 저장 공간도 협소하여 증설이 필요했지만 시작 단계라 배보다 배꼽이 클수는 없었다. 내딴에는 소규모 부터 추가의 거래처를 늘리기도 했지만 물랑이
부족해 납품하지 못하여 난감 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자니 생산 기술과 거래처는 좋았는데 자금력이 받쳐주지 못했고 그것은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게 7~8개월 고전하던 중 황사장에게 유혹이 찾아왔다. 이름 들으면 다아는 대기업 D식품에서 대거 김치사업을 준비 중이었고 기술 고문으로 황사장에게
스카웃 제안을 한것이다. 아마도 쉼없이 자금난에 고전하던 중이라 그 유혹을 떨칠수 없었나 보다 나는 스믈다섯으로 나이가 어렸지만 거꾸로 사장을 설득했다.
죽이되던 밥이되던 이렇게 시작했으면 온힘을 합쳐 현재 공장을 경영하고 키워 나가는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고 반대로 사장은 날 설득했다. '내가 D기업에
들어가 괜찮은 조건하에 경영 자금도 추가로 확보 할수있고 이후에는 영업 밴더(하청) 개념도 기대 할 수있다.' 하며 반론했다. 또다른 문제는 처남인
생산부장이 나에게는 잘 대해 주었지만 마인드 자체가 권위주의적이고 성격이 급하여 거래처 발주자의 품질 컴프레인 이나 공급이 부족할 때 물량 배정에
직접 관여하여 잦은 마찰이 있으므로 나와 황사장이 어느 정도 중재하는 입장이었는데 사장이 자리를 비우게되면 그런일이 원만 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장의 얼굴을 봐서 오더해주는 업체들이다. 유통업체들은 농협 김치사업 초창기에 영향력이 있는 황사장의 지원과 조율로 발전해 나온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것들이 지워진다면 거래처 들은 등을 돌릴것 같았다. 그런것에 대한 부장의 생각은 '지네들 아니면 팔때가 없을까봐.! 관두라 그래' 하는
식이있다. 생산부장은 도매에 불만이 많았지만 여러모로 짚어 보아도 도매가 바탕이 된 후 그것을 발판으로 소규모 높은 마진축을 늘려 나가며 도매를
줄이거나 물량으로 원재료 매입 경쟁력을 높이는것이 공장을 키워 나갈수 있는 방법이라 판단했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사장은 D식품에 기술고문으로 취업했다.
거래처는 점점 줄었고 품질은 전보다 좋아질 수 없었다. 원재료 매입은 규모가 적더라도 비교 경쟁하여 잇점을 살려야 하는데 생산부장과 술을 자주 마시는
업체가 공급하기 때문에 가격은 어느 정도 맞추지만 품질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버텨 나갈 쯤 또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경영은 둘째 치고라도 김치의
사업성은 좋았기에 황사장의 매형되는 사람이 인접지역 도시에 토지와 재력이 제법 있으므로 공장 부지와 공장을 신설하고 공동 대표가 된다는 제안이었다.
역시나 황사장에게는 기회였지만 멀리 볼때 회사는 매형되는 사람의 것이고 황사장은 D식품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직함만 가진 사장이 될것이 눈에 훤했다.
결과적으로 관리자만 더 늘어나는 모양새이다. 가장 내 마음을 흔들었던 이유는 주부사원 네명이 기초 급여에 한참 못 미치는 월급을 받고 일을 시작했는데
일년 후에는 다들 좋은 대우를 약속 받고 열심히 일하였다.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 주부사원들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으니 거기에도 일할 사람은
많다고 답하였다. 나도 언제든 버림 받을 수 있을거라는 기분이 들었고 안좋은 감정은 없이 퇴사를 결심하고 의사를 밝혔다. 사람들은 무척 좋았지만
좋은 사람과 미래는 비례하지 않는다. 이미 생산기술 김부장은 그런 것들을 감지하고 떠난 뒤였다. 그렇게 공장 사람들과 이별했고 몇번이나 바뀐 내
직업에 관심있는 가족과 친척들은 자세한 영문을 모르니 뭘 하나라도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불량 근로자로 판단하였고 잔소리도 많이 들었다. 친한 친구들은
'너는 무슨 만능 엔터테이너냐.? 만날때 마다 다른 직업이여.!' 하고 놀렸다. 우선 내선에서 구축했던 거래처인 중국집, 김밥집, 구내식당, 식품 도매업체 등은
물량도 많지 않고 갑자기 납품을 끊을수는 없었으므로 지역에 막 시작한 다른 공장을 찾아 매입을 약속 받고 일어난 상황을 그대로 공장이 타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어 딱 보름 동안만 납품 해줄 수 있으니 다른 공급처를 구하라고 요청 하였다. 당연히 유종의 미를 주기 위함이라 마진은 붙일 수 없었다.
그 보름 정도가 가까워지자 이상한 일들이 발생했다. 김밥집에 배달갔더니 맞은편 칼국수 집에도 납품해 달라 하기에 '이러이러 해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다.
말씀 드렸는데 어떻게 납품을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잠시 기다려 보라며 칼국수집 여사장이 도착했다. 그녀들의 말은 이랬다. '평소 일하는걸 지켜 보니
뭘 해도 잘할것 같은데 우리가 도와 줄테니 이참에 사업을 시작해 봐.! 다른 좋은게 있다면 할수 없지만 하던쪽을 시작하면 훨씬더 유리하고 마진이 안나오면
우리가 조금씩 대금을 올려주면 되는거고 제대로 하려면 조금씩 만들어 팔면 되잖아.?" 생각지 못한 조언 이고 괜찰은 조언 이었지만 김치 제조에는
마땅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김밥 여사장은 다시 말했다. "일단 공장에서 받아오는 금액에 조금 마진을 붙혀서 납품해 봐 몇군데 더 소개 할께 다 그렇게
위기 뒤에 시작하는거야.!" 생각해서 주는 조언이고 상당히 인품있는 설명이라 그 자리에서 거절 할수는 없었고 일주일 정도 납품을 더 해보기로 했다.
마침 그때 쯤 일자리를 잃은 기존의 공장 주부사원 한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나는 집에서 갑자기 쉬다 보니 좀 쑤시고 그러네
밥 한끼 먹자.! 따로 송별회식도 없었잖아.!" 서로 사이 좋게 인사하고 가족처럼 지냈던 주부사원 중 한명이기에 거절 할 일도 없었고 다음날 만났다.
그 아주머니 혼자 오는가 했는데 같이 일하던 네명이 모두 싹차려 단장하고 활짝 웃으며 도착했다. 모두들 반가웠고 근황 이야기를 교환 하더니 대표격
아주머니가 말했다. "공장 돌어갈때 김치 쪼깨씩 청주에도 싣고 나가는것 같더니 그짝에도 다 끝난겨.?" 물었다. 그러기에 자초지종을 말 해주니 아줌마가
활짝 미소 짓고는 "우리가 김치 담아줄께 사장은 팔어.! 다른 공장에서 떼 오는거 보다 아무래믄 더 싸게 맥힐 텐데 안그려.?" 듣고 보니 김밥집 여사의
조언과 교차 되었고 나는 주저하는 성격도 이닌데다가 안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럼 몇달 해보고 문닫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해 볼까유.?",
"좋아, 좋아, 꼭 잘될껴.!" 다들 기대하는 표정이 역려했다. "가게도 알아 봐야하니 5일 후에 연락 드릴께요" 가게는 살고있던 원룸을 빼서 방 딸린 상가를
구하면 그만이고 보증금을 쪼개서 일부는 월세로 전환하고 김치는 대부분 수작업이니 집기들은 조금의 돈이면 구입이 될 일이었다. 다행히 보증금 1천에
월 25만으로 방이 하나 딸려있는 딱 좋고 깨끗한 상가를 시내에 구하였다. 살던 원룸은 대형매장 바로 앞이었기에 세 놓자 마자 임자가있어 손쉽게 처리되었다.
당초 공장에서 배송 가기전과 다녀온 후에 앞치마를 메고 제조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어느새 어깨 너머로 고추가루가 몇 킬로그람 인지 대파가 얼만큼 인지
제조법은 자연스럽게 암기되어 있었다. 1톤 기준의 재료를 축소하여 300 킬로그램 기준 배합 비율대로 나누고 물량이 늘면 그때 그때 배합을 추가하면
장비의 취약함을 극복 할 수 있기에 효율적이었다. 화기애애 하게 김치는 담가졌고 비교적 소량으로 제조 하다 보니 그맛이 더 좋고 신선했던가 보다.
거래처 상가의 인맥들을 통해 소개와 주문은 늘어나고 또 늘어났다. 도매쪽이 아닌 직접 소비쪽이다 보니 당연히 마진도 더 좋았고 공장에서는 제조 중에
씻겨 나가는 배추 조각이 많았는데 유심히 살피다가 그것들을 모아서 남겨진 양념과 대략 버무리니 훌룽한 만두용 김치가 생겨났고 만두집 네 다섯 군데를
찾아가 썰어서 납품하겠다 하니 그 중 두곳에서 마침 잘 되었다며 허락했다. 당시 평균 이천원 하던 김밥과 만두가 김밥천국의 대거 체인 사업이 시작되어
개인 업체들은 문 닫거나 가격을 그것과 같이 천원으로 내렸고 그 중에 많은 업소는 원가를 맞추기 위해 나에게 거래 요청을 해왔다. 제조의 매력은
얼마를 들여 얼마에 파는가도 중요 하지만 300KG 기준 얼만큼 재료와 공정에 더 신경을 쓰느냐에 따라 300 KG + 몇 KG 을 더 만들어 낼 수있으며
그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추가로 만들어지는것은 모두 수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주일 3톤 기준 일때는 매우 표시나는 금액이었고 그것을
판매한 만큼은 마을금고에 일일 저축 하였다. 주부 사원은 두명 더 추가 되었고 아주머니들의 급여도 얼마씩 올려 주니 매우 고마워 했고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다들 적당한 수익을 벌게 됨으로 대성공이었다. 당시 내 또래들은 급여를 잘 받아야 100만원 대 였는데 몇 백은 족히 남았고 무엇보다 스믈 여섯에
오너로 활동하는 점은 판매에 커다란 기특함으로 작용했다. 내 생각이 적중한 것인지 멀리서 들려온 황사장의 김치공장 소식은 매형사장의 계속적인
간섭으로 문 닫았다고 했다. 김치 일이 자리가 잡혀 갈때 나의 하루 일과는 무척 현란했다. 앞서 통닭에 근무했던 대형 매장의 도매 코너에는 새벽 세시가
넘으면 판매되지 못한 야체는 골치거리였고 내가 그것을 재료로 소화했는데 당연히 할인 매입이 가능했고 이미 통닭으로 쌓여진 좋은 이미지로 많이 많이
도움을 주었다. 그 장을 보고 이른 아침을 먹으면 육거리와 농수산물 새벽 시장에서 다른 재료들을 구입했고 잠시 생기는 텀에 조기축구도 부지런히
뛰고 골도 많이 넣었다. 오전에 주부 사원들과 양념을 준비한 후 점심을 먹은후 첫 김치가 나오면 시내 상가에 배달 스케즐을 미리 맞추어 완료 했고 저녁까지
만들어진 제법의 수량은 수도권 분당의 거래처에 납품 되었다. 분당에서 되돌아 오면 열한시 전후가 되고 골아 떨어져 세시 전까지 잠들면 되었다.
첫댓글 김치사업도 지금은 어마어마 하죠? 계속하셨으면 지금은 재벌? 먼저 앞서나가서 죄송합니다. 계속 보고 있겠습니다.
사업성이 좋네요..
김치사장님이 되었군요 ^^
앞으로의 행보도 매우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