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 민주노총 혹은 개와 늑대의 시간 민주노총
정현철(민주노동자시흥연대의장)
결정장애 혹은 개와 늑대의 시간
지난 1월 28일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참여하면서 느꼇던 필자의 소회다.
이번 대의원대회는 민주노총 역사상 가장 많은 사회적 관심과 기대속에 치러졌다. 그것은 이번 대의원대회 주요 안건이 민주노총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산적한 노동현안을 사회적 대화를 통해 풀겠다는 기본구상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사회적대화에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민주노총을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기존의 노사정위원회를 해체하고 민주노총이 참여할 수 있도록 보완 조치를 하여 경사노위를 새롭게 설립하였다.
경사노위는 대통령 자문기구로서 “고용노동 정책 및 이와 관련된 경제·사회 정책 등을 협의하고,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사회통합을 도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경사노위 출범식에 참여하여 “자문이 아니라 의결기구 수준에서 다루겠다”고 경사노위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민주노총의 참여를 요청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열리기 3일전인 1월 25일 양대노총 위원장을 만나서 민주노총의 경사노위 참여를 설득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가지고 조합원을 설득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두 차례에 걸쳐 대의원대회를 진행했으나 결국 경사노위 참여를 결정하지 못했다. 지난해 10월에 열린 임시(정책)대의원대회는 성원 미달로 부결됐고, 이번에 열린 대의원대회에서는 수정안 모두가 부결되고, 민주노총 위원장(의장)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전제 없이 2019년 사업계획(안) 및 사업예산(안)을 수정 보완하여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산회를 선포함으로써 사실상 경사노위 참여는 무산되었다.
민주노총은 총 조합원 수가 백만명 (2018년 12월 말 현재 995,861명, 민주노총 집계)에 달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노동조합연합단체다. 이러한 민주노총의 참여가 무산됨으로써 정부의 구상은 상당부분 차질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촛불항쟁이후 민주노총의 조합원은 20만명 가까이 증가했다. 촛불항쟁으로 성장한 시민권과 민주주의 의식이 노조 조직률의 상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조합원수의 증가로 인해 이번 대의원대회의 성원(대의원)은 총 1,247명이었다. 95년 민주노총 창립 이후 최대규모다. 이중 1,040명의 대의원이 이번 대의원대회에 참석하였다.
경사노의 참여 건은 3-1호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원안은 “경사노위에 참여하여 주도한다”는 것이었고, 3가지의 수정안이 제출되었다. 첫 번째 수정안은 “경사노위 불참을 결정하고 대정부 투쟁에 나선다”는 안이었고, 재석 대원원 940명중 331명의 찬성으로 부결되었다. 두 번째 수정안은 “4대 선행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경사노위에 참여할 수 없음을 확인한다”는 것으로 935명중 362명의 찬성으로 부결되었다. 세 번째안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참여하여 논의를 주도하되 투쟁과 교섭을 병행한다”는 내용으로 912명 중 402명의 찬성으로 부결되었다. 원안은 의장이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표결처리를 하지 않았다.
이처럼 경사노위 참여와 관련된 안이 모두 부결되는 초유의 사태를 두고 일각에서는 ‘결정장애 민주노총’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노총은 왜 결정장애를 앓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번 대의원대회의 결정의 의미는 무엇인지 곰곰이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번 대의원대회에서 경사노위 참석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한 대의원은 362명이었고, 찬성의사를 밝힌 대의원은 402명이었다. 나머지 200여명은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중에는 원안에 찬성하려고 수정안 모두에 의사표시를 하지 않은 소수 대의원도 있을 것이다. 원안 표결을 붙였더라도 부결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 200여명의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던, 혹은 할 수없었던 대의원들이다. 그들은 왜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았을까.
우선, 문재인정부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경사노위 참석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 대의원들처럼 확신있게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우고 투쟁해야한다는 입장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 노동정부라고 볼 수 없는 최근의 행보, 촛불항쟁이후 반짝 했다가 급격히 후퇴하고 있는 노동정책 등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정부는 이번 결정에 대해 민주노총을 탓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촛불항쟁의 정신을 잊고 친재벌정책으로 회귀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다음으로, 민주노총 내부의 변화에 대한 고민도 반영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민주노총은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의 요구를 받고 있다. 저성장구조에 접어든 경제상황, 4차 산업혁명 등 변화의 기로에 서있는 산업구조, 주력산업들이 침체기에 들어서면서 늘어나게 될 고용불안, 복잡해지고 있는 노동형태 등 노동을 둘러싼 여러 가지 요구가 분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파업이라는 투쟁전술만으로는 현상황을 돌파하기 쉽지 않다. 무거운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사노위에 참석한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가 모두 풀릴리는 만무하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민주노총을 둘러싼 여러 가지 과제에 대한 비전과 로드맵을 제시하면서 그 중 하나의 방법으로 경사노위 전술을 채택했다면 대의원들의 선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촛불항쟁이후 새롭게 늘어난 조합원(대의원)들의 판단도 한 몫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정파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운 일군의 세력들이 형성된 것이다. 새로운 기운을 가진 이들이 정파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면서 수정안 모두를 부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론해본다.
이번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두고 “국민밉쌍”이라고 폄훼하는 언론과는 달리,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수준 높은 토론 문화를 보였다.밤 12시가 될 때까지 대부분의 대의원들이 자리를 지키면서 10시간이 넘게 치열하게 토론하고 찬반투표를 질서정연하게 진행했다. 다만 회의 막바지에 보여준 지도부의 미숙한 일처리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지도력 훼손은 자업자득이다.
해질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즉 하루에 두 번, 빛과 어둠이 서로 바뀌는 이른 새벽과 늦은 오후를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
민주노총은 어쩌면 그러한 시간을 지나고 있을지 모르겠다. 변화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만큼 질적인 변화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다시 한번 도약하느냐, 구태를 못 벗고 진짜 국민 밉쌍이 되느냐 민주노총은 선택의 순간 앞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