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호.. 비가오는날 카메라에 전경을 담아 맑지는 않지만 그래도 경관은 아름답습니다.
전주류씨(全州柳氏) 안동시 임동면(臨東面) 수곡리(水谷里, 무실) 마을 기타-안동시 임동면(臨東面) 수곡리(水谷里, 무실) 기타
◎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水谷里),무실
◎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舟津里),배나들
◎ 안동시 예안면에 계곡리(桂谷里),계일(桂日)
◎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一善里),수류우향(水柳寓鄕)
안동시 임동면 수곡(水谷, 무실)을 필두로 한 표곡(瓢谷,박실), 대평(大坪,한들), 고천(高川,고랫골), 갈전(葛田,갈밭), 마령(馬嶺,맛재,午峴), 주진(舟津,배나들,三峴,三山) 등 마을은 전주류씨(全州柳氏)의 세향(世鄕)으로 유명한 곳이다.
류씨 성은 한자로 버들 ‘류’자를 쓰기 때문에 물이 풍부한 곳에 자리를 잡아야 잘살 수 있다 생각하여 임동면 수곡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본 수곡리
현재 전주유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즉 유혼파(柳渾派), 유습파(柳濕派), 유지파(柳池派)가 그것이다. 한 때 유혼(柳渾)을 시조로 하는 전주유씨 측에서 3파를 합쳐서 유방직(柳邦直)을 시조로 모시자고 제안한 바 있으나 습(濕)을 시조로 하는 측이 시조 습(濕)의 상계에 대한 확실한 자료 없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습(濕)을 시조로 하는 측 내부에도 전주유씨가 “문화유씨 계열이다, 문화유씨 계열이 아니고 토성전주류씨이다”라는 의견들이 있으나 정확한 자료가 없어 의견이 정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습을 시조로 하는 측은 2004년 대동보를 발간하면서 여러가지 설을 검토한 바 문적(文蹟)이 부실(不實)하여 시조(유습)의 상계를 알수 없으므로 시조 상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였다.
한편 혼(渾)을 시로로 하는 전주유씨의 유삼룡(柳三龍)은 1993년에 신라 때 각간(角干)을 한 유기휴(柳基休)를 시조로 하고, 유혼을 중시조로 하는 족보를 만든바 있다.
현재 혼(魂)과 지(池)를 시조로 하는 전주유씨에 비해 습(濕)을 시조로 하는 측이 많아 전주유씨 하면 대체로 습(濕)을 시조로 하는 전주유씨를 말한다.
전주류씨(全州柳氏)는 시조 류습(柳濕)이 고려 말에 전주에 살면서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류습을 시조로 하고 전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류습의 둘째 아들 류극서(柳克恕)는 직제학(直提學)에 오르고 류극서의 둘째 아들 류빈(柳濱)은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지냈다. 류빈의 둘째 아들 류의손(柳義孫)은 세종 때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랐다.
류의손의 증손 류윤선(柳潤善)은 1500년 생으로 한성(漢城)에 세거하였는데 영주에 살던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사위가 되어 처향(妻鄕)인 영주(榮州)로 이거하였다.
안동 지역의 전주류씨는 무실류씨로도 불리며 전주류씨의 시조 류습(柳濕)의 8세손 류성(柳城, 1533~1560)이 1550년경 안동 무실(현 임동면 수곡리)에 정착하고 후손들이 크게 문호를 넓혀 세거해 온 가문이다.
전주 류씨 무실종택 약 400여년이 넘은 고택으로서 임하댐 건설로 이전하여 복원된 것입니다
류윤선의 아들 류성이 안동 내앞(현 예안면 천전리)에 살던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어 처가의 농장이 있는 무실에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수곡에 정착한 류성은 25세에 요절하였으며 두 아들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는데 맏아들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 1555∼1617)는 곽재우(郭再祐) 의병과 함께 화왕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작은아들 류복립(柳復立)은 외숙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따라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안동 지방에 살고 있는 전주류씨는 모두 류복기의 후손들이다. 류복기는 류우잠(柳友潛), 류득잠(柳得潛), 류지잠(柳知潛), 류수잠(柳守潛), 류의잠(柳宜潛), 류희잠(柳希潛) 등 6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의 후손이 임동면 수곡리(무실)을 근거지로 임동면 박곡리·마령리·고천리, 삼산동 등지에 취락을 이루고
세거하게 되면서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인물이 이어져서 문과 출신 10여 명, 생원 진사 30여 명, 문집 출간 100여 명에 퇴계학통을 계승한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의 대가가 배출되고 행실과 문학으로 이름 있는 선비가 끊이지 않아 이 지역의 손꼽히는 명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나주목사를 지낸 류정휘(柳挺輝), 밀양부사를 지낸 괴애(乖厓) 류지(柳榰), 청백리에 오른 함벽당(涵碧堂) 류경시(柳敬時), 공조참의에 오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 형조참의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대사헌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1702∼1761) 등은 밝은 치적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백졸암(百拙庵) 류직(柳稷, 1602∼1662),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대야(大埜) 류건휴(柳健休), 노애(蘆厓) 류도원(柳道原),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 1773∼1827), 수정재(守靜齋) 류정문(柳鼎文) 등은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또 『상변통고(常變通攷)』 22권 등 많은 저서를 남긴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1724∼1796)과 50여 권의 문집을 남긴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은 영남 유학의 거봉으로 퇴계학맥의 대표적인 학자이다.이들 뿐만 아니라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수애당 입구 푯말..
가 장렬히 순국한 류시연(柳時淵), 개화기 선구자로 협동학교를 창설하고 신교육과 사회 개혁에 매진하면서 자주적 민족사관으로 저술한 새로운 역사책 『대동사(大東史)』 10권을 남긴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1865∼1928),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의거의 주역이었던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구국 활동에 생애를 바친 단주(旦洲) 류림(柳林) 등 근대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많다.
위 여러 인물들 중 용와 류승현, 백졸암 류직, 정재 류치명, 호고와 류휘문, 삼산 류정원 등 5분이 불천위에 추대되었는데, 안동댐의 건설로 마을이 이설되는 과정에서 백졸암, 삼산 2분을 제외한 세 분의 경우 일선리 및 안동시내 등으로 옮겨서 향사하고 있다.
400여 년을 이어오던 이들 마을 중 1980년대 임하댐 공사로 인하여 수곡, 박곡, 한들, 마령 등 마을이 수몰되는 처지에 이르렀는데, 종택(宗宅)과 기양서당(岐陽書堂), 정제종택(定齋宗宅) 대표적 문화재들은 댐 수위(水位)를 고려하여 원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에 이건(移建)하였지만
또다른 일부는 1987년 구미시(龜尾市) 해평면(海平面) 일선리(一善里)에 새터전을 구하여 복거하게 되면서 그곳을 ‘수류우향(水柳寓鄕)’이라 명명하여 동성의 집성촌을 조성하고 구미시에 의해 문화재마을로 지정되었다.
전주류씨 관련유적으로는 류복기를 제향하는 기양서당(岐陽書堂)과 무실 종택, 류성의 처 의성김씨 정려문, 정재 종택(定齋宗宅), 만우정(晩愚亭)은 임동면 수곡리에 있고, 예안면 주진리에 삼산 종택(三山宗宅)과 삼산정(三山亭)이 있다.
류성의 현손인 류익휘(柳益輝)가 지은 만령초당(萬嶺草堂), 류승현과 류관현 형제가 수학하던 삼가정, 용와 종택과 침간정(枕澗亭), 류장원이 강학하던 동암정(東巖亭), 류건휴가 강학하던 대야정(大埜亭), 류휘문의 고택, 류정문의 고택, 근암(近庵) 류치덕(柳致德)의 고택, 류승현의 현손 류치검의 고택 등은 해평(海平) 일선리(一善里)로 이건하였다.
무실종택 입구...
<기타 참고 자료>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전주류씨 동성마을
마을 뒤쪽에 있는 아기산(峨岐山)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싸는 형상으로 흐른다 하여 수곡리(水谷里)라고 하였다.
입향조 류성(柳城)의 아버지 류윤선(柳潤善)이 영주에 세거하고 있는 반남박씨 박승장(朴承張)의 사위가 되어 영주시 문수면으로 옮겨 온 뒤, 류성이 임하면 천전리에 세거하던 김진(金璡)의 맏사위가 되어 경제적 후원을 받아 수곡리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류장원(柳長源)과 류치명(柳致明) 등의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였다.
수몰되기 전 마을 뒤쪽으로 아기산이 솟아 있고, 마을과 산 사이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었다. 동쪽에는 여름철에도 서늘한 하름골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곤 하였다. 마을 앞에는 일명 무실쑤라고 하는 수십 그루의 노송(老松) 숲이 우거져 있었다.
수곡리에는 한들·원두들·늘치미·독골·밤나무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수몰 지구가 되면서 주민들 대부분이 수곡리 가까이에 새로운 거주 단지를 조성하여 이주하였고, 일부 주민들은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정착하였다. 현재 수곡리에는 총 60가구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7호로 류복기(柳復起)가 후학을 양성하던 기양서당(岐陽書堂),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7호인 전주류씨 무실 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8호로 절부(節婦) 의성김씨를 기리는 무실 정려각이 있다. 류치명은 불천위로 추대되어 있다.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전주류씨 동성마을
낙동강의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여 배나드리 또는 배나들이라 하였다. 주진(舟津)은 배나드리의 한자 표기이다.
임동면 수곡리에 살던 류석구(柳錫龜)가 분가하여 주진리에 자리를 잡았고, 이후 류석구의 아들 류정원(柳正源)이 이름을 떨쳐 전주류씨 집성촌으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조선 말기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대동사(大東史)』를 저술한 류인식(柳寅植)도 주진리 출신이다.
마을 뒤쪽으로 오로봉(五老峰), 앞쪽으로 봉우리가 세 개인 삼산(三山)이 있다. 삼산 뒤쪽에는 운암산이 있다.
주진리는 주진1리의 배나들, 주진2리의 삼산·오른데·노천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주진리에 거주하는 총 70가구 가운데 전주류씨는 약 10가구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류정원이 세운 안동 삼산정(三山亭)이 있다. 류정원은 불천위(不遷位)로 추대되어 있다.
수애당 앞뜰에 열려있는 감...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 전주류씨 동성마을
조선시대에 안동군 임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마곡·전시곡·장성백리를 병합하여 계곡동(리)이라 하였다.
193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곡면에 편입되었고, 1974년 안동댐 건설에 따라 월곡면이 폐지되면서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가 되었다.
댐이 건설되어 마을 일부가 수몰되었으며 앞으로는 안동호와 닿아 있다.
2008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9,785,051㎡이며, 2011년 6월 30일 현재 총 36가구에 83명(남자 46명, 여자 3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계곡리는 압시골[일명 앞시골, 전시곡(前是谷)], 걸앞시골(일명 거리앞시골), 계일(桂日), 장성백이[일명 장성배기, 장성백리(長城百里)]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압시골은 계일 건너 동쪽으로 1.5㎞쯤 떨어진 긴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계일 앞 골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는데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을 상앞시골 또는 내전실이라 하며, 거리에 있는 마을을 거리앞시골 또는 걸앞시골이라 부른다.
전주류씨(全州柳氏) 4가구를 포함하여 약 10가구 살고 있다.계일은 장성백이 남쪽 안동호 가에 있는 마을로 풍수상 계화낙지(桂花落地)의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주류씨가 많이 살았으나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아랫계일은 모두 수몰되었고, 윗계일에 전주류씨 7가구만 남아 있다.
옛날 규중처녀가 저녁에 머리를 감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간 뒤 당(堂)을 짓고 동제(洞祭)를 지냈다고 한다. 당 터는 좋은 묏자리로 사람들이 욕심을 부렸지만 묘를 쓸 경우 마을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장성백이는 계일 북쪽 500m 지점 산기슭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 하할지마을에서 동다리로 가다가 마을 부근에서 오른쪽의 작은 다리를 건너 400m쯤 들어가면 나온다. 동구에 이정(里程)을 알리는 장승이 있는데 마을에서 지대가 높은 곳에 있으므로 ‘장승이 서 있는 대백’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동댐 건설로 마을 일부가 수몰되어 농사지을 경작지가 많지 않아 주로 담배와 같은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계곡리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이야기가 펼쳐진 곳의 느티나무 옆에 성황당을 짓고 해마다 정월 보름 자정에 목욕재계한 제관이 고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수몰되고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져 잊혀진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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