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 의 中心 哲學
(중관 체계에 대한 연구)
무르띠 지음. 김성철 옮김
2560. 7. 21
제2부 : 철학 체계로서의 변증법
제11장 : 절대와 여래
4. 이슈와라(?svara)와 붓다(Buddha)
베단따에서 말하는 이슈와라의 개념을 붓다와 비교하는 것은 재미있을 것이다.
양 쪽 체계 모두 최고의 것은 절대이다.
즉 브라흐만과 공성이다 ;
이것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절대란 것이 사고와 경험적 존재 양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현상적인 영역 속에 갇혀 있는 중생들이
‘절대가 실재이다.’ 라는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절대가 스스로 실재라고 선언할 수도 없다.
따라서 앞에서 지적했듯이 절대를 드러내 주는 중개자가 필요하게 된다.
이슈와라나 여래가 이런 역할을 한다.
이들이 비록 자유(해탈)롭긴 하지만 현상 내 존재, 즉 환영이다.
이들은 절대가 자유롭게 현현한 것이다.
이슈와라, 또는 여래는 절대보다 차원이 낮은 원리이다.
절대는 최고의 지혜 속에서,
즉 철학적 의식의 맥락 속에서 체득된다.
그러나 이슈와라나 여래는 예배와 기도의 대상이며 종교적 의식의 맥락 속에서 우리에게 이해된다.
해탈이나 열반은 오직 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베단따와 불교라는 양 체계에서는 예배나 그 밖의 종교적 행위들을 지혜의 보조 수단으로 본다.
양 측 모두에서 종교는 철학보다 하위의 것이지만 양자 사이에 대립은 없다.
중관파나 베단따의 절대론은 종교적으로 범신론에 해당된다고 규정할 수 있다.
셈족 계통의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회교)에서 말하듯이 인간과 신 사이에 절대적 구분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신론은 아니다.
인간(모든 중생들)과 이슈와라 또는 여래 사이에는 본질적이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동질성이 존재한다 ;
양자 모두는 진정한 절대이다 ;
양자의 차이점은 표면적인 것이며 그런 차이는 현상적인 범위 내에서만 의미가 있다 ;
그러나 종교적인 의식(意識)을 유지시켜 주기에는 충분하다.
기도하는 자와 기도의 대상 사이의 구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종교적인 예배는 효과적인 결실을 맺을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붓다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지 아닌지 여부는 종교적 행위들이 효과를 본다는 점에 관한 한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슈와라와 여래 사이의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슈와라는 진리를 계시해 주는 역할만 맡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창조, 유지, 파괴, 그리고 다른 우주적인 역할도 역시 그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이것에 관한 한 불교에서는 업이 이슈와라를 대신한다.
아마 모든 것들을 창조하기 시작할 때이겠지만,
이슈와라는 비범한 의사 소통 기제를 통해 현상 세계의 중생들에게 절대적인 진리를 계시해 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런 목적을 위해 인간으로 화육시키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자유로운 분이시고 언제나 주님이시다.
그러나 여래는 자신의 신성한 경지에서 강림하여 인간들 사이에서 태어나,
인간들의 생활 양식에 순응하며 인간들에게서 공감을 얻고 통상적인 의사 소통 수단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 준다.
여래는 어느 모로 보나 번뇌를 파괴시킴으로써 왼성된 인간이다.
불교 내의 신격이 갖추고 있는 가장 특정적인 면모는 대비심인데
이 대비심은 그 누구를 위해서건
그 언제라도 그 어떤 희생이건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모든 중생들의 복지와 궁극적 해방을 위해서 기울이는 능동적이고 중단 없는 관심과 노력은 여래를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신격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단연코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귀한 신성의 관념들 중 하나이다.
베단따의 이슈와라가 온화하고 자애롭게 생각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자비와 일체의 해탈이라는 이상이 불교에서와 같이 강렬하고 상세하게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득자량 사경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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